「극락세계 여행기」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어떤 절도, 어떤 사당도, 어떤 보살이나 하늘사람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기품 있고 웅장하며 금빛이 반짝이던 대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극락세계에서 어림잡아 하루 밤낮(20시간 안팎) 빼어난 경치를 실제로 돌아본 것은 똑똑하게 기억이 나서 마치 눈앞에 환히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때 사방 둘레는 새까맣게 어두워 손을 펴도 다섯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나는 동굴 속 바위 위에 홀로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뒤 아늑히 먼 곳에서 새벽빛이 새들어 오면서 내 정신도 조금씩 여느 때와 같이 되돌아왔다.‘
바로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그 동굴이고, 우리를 안내한 분이 바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큰스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일생에 다시없는 행운을 누렸다는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굴에서 바로 위로 올라가는 길이 있어 따라 올라가니 구선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추무비 선지식이 수행하던 동굴이 있고 그 앞에 관정 큰스님이 세운 정자가 있었다. 정상에 오르자 큰스님이 영취암사에서 쓰는 부전지에 이렇게 쓰셨다.
“你們福氣大 沒有大霧 一天幾次霧 看不到山水”
여러분이 복이 많아 짙은 안개가 끼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 짙은 안개가 끼어 경치를 볼 수가 없다.
등원 스님이 답글을 쓴다.
“諸, 師父德是!
모든 것이 사부님 덕입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늘북이나 하늘 개 모양의 바위도 보고 멀리 우뚝 솟은 대운산도 보고, 그리고 미륵대전으로 내려왔다. 미륵대전에서는 아랫마을에 사는 정신활과 정신학이라는 젊은 사람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這里我弟不穿和尙衣 政府叫這樣(?)”
여기 내 제자들을 화상 옷을 입지 않았다.
나라에서 이런 모습을 하도록 규정했다.
두 사람은 스님이지만 승의를 걸치지 않은 까닭은 나라의 규정을 따른 것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나라가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은 아랫마을에서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고 있고, 미륵대전에는 요사채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 미륵대전은 주로 싱가포르 제자들이 불사금을 시주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미륵대전에는 미륵불을 모시고 오른쪽에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정신학 거사가 관세음보살 상이 있는 바위틈에서 나오자 석간수에 대해 설명하였다.
관음성수는 1992년 점안하고 지금까지 물방울을 그친 적이 없다. 큰비가 내려도 많아지지 않고 가뭄이 들어도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큰 가뭄이 들어 산꼭대기에 모두 물이 없었는데 관음성수만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저녁에 늘 북소리와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에 이어 ‘이곳에 대웅보전과 삼존보살을 모시는 불사를 하려하니 한국에 돌아가면 신도들에게 알려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영취암사로 돌아와 경내를 둘러보았다. 영취암사는 중국에서 관정 큰스님이 한 불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불사라고 한다. 이 불사에 대해서는 복건성 덕화현 문화국 허영창 국장이 「덕화문사」라는 책에 당시의 사실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일생동안 고독하고 청빈하게 살아온 관정 스님은 최근 몇 년 사이 중국 정부에서 실시하는 종교정책에 부응하여 외국에서 자금을 모아 역사적 의의가 있는 덕화 구선산 영취암을 중건하였다. 몇 년간 노력한 결과 미국 로스엔젤리스 반야수덕선당의 신도들이 불심을 내서 인민폐 100만 위엔을 보시하였다.
1988년 10월 24일 석관정 스님이 묘법 여거사와 함께 직접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취암에 와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절을 세우는 과정에 석관정 스님은 밤낮없이 일을 처리하고, 스스로 중건위원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몸소 현장에서 감독하여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고 기와 한 장도 낭비하지 않았다. 더욱 값진 것은 스스로의 생활은 거친 옷에 채식만 하였다는 것이다. 늘 맑은 차 한 잔에 ‘빵’ 2개와 밥과 반찬이 전부였다. 신도들이 공양을 올리면 가지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지난 2년 사이에만 ‘보도중생’한 금액이 1,000달러가 넘었다. 지금 중건하고 있는 영취암은 기본적으로 원래의 규모를 유지하고 옛 자취는 남겨두었으며, 거기에 많은 용 . 봉황 . 사자 및 갖가지 꽃과 새를 조각하여 덧붙였다. 1990년 6월 추산으로 장차 장중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참배자와 관광객들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불사를 완성한 자체가 큰일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큰스님이 보여주신 모습 하나하나가 모두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평생 이렇게 큰 절 하나만 불사를 하려고 해도 벅찰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큰 가람을 중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곳곳에 큰스님이 이 절을 중건한 주지였다는 것이 새겨져 있어 구경하는 내내 흐뭇했다. 통역이 없이 다니기 때문에 걱정을 했는데 실제로는 별 큰 문제가 없었다.
영취암사에서는 명나라 때 호랑이를 생포하여 임시로 넣어두는 돌로 만든 함정이 이었는데 안내판에 궤짝‘주’를 써서 호주라 표시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영취암사 중건불사 시 부처님 옥불 삼존불을 단에 모신 날 저녁 8시애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삼존불상에 삼배를 하였다는 표지판의 설명에 따라 실제로 그러했는지 큰스님께 등원 스님이 여쭙자 큰스님께서는 갑자기 ‘어흥!’하고 호랑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시며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시어 일행은 또 한 번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영취암사에서 점심 공양을 마치고 다시 선유현으로 향했다. 차안에서 필담으로 나누었는데 잘 알아볼 수 없는 글자도 있지만 대강의 뜻을 적어 보기로 한다.
나는 얼마간의 돈을 다루고 있다. 돈은 많지만 늘 충분하지 않다. 내가 손에 넣는 돈이 1년에 중국 돈 200만위엔이다. (한국 돈 100만원을 바꾸면 6천위엔이 되기 때문에 한국 돈으로 3억) 21개국을 돌아다니며 33개 절과 관련을 맺었는데 각 절과 관련된 사람들이 90명 안팎쯤 된다.
우리는 선유현을 경유하여 다시 북쪽으로 맥사암사를 향했는데 도중에 또 한 차례 차가 고장이 나서 한동안 길에서 망연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거의 두 시간 이상 가다렸던 것 같다. 차를 다른 차로 교체해야 한다더니 어떻게 수리하여 같은 차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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