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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 - CAFE NOIR
이지현 영화평론가
씨네21에 영화평을 쓴다. 프랑스에서 영화학을 공부했고, 예술 전반에 관심이 많다.
영화 <카페 느와르>를 보는 내내 김혜나의 역할에 마음이 쓰였다. 영수에게 팔짱을 끼는 두 여자 중, 유독 그녀가 신경 쓰이는 것은 그녀의 노력을 느낄 수 있어서다. 짝사랑보단 “사랑해요!”라고 외치는 게 더 멋있다. 하지만 본인은 엄청 힘들 것이다.
어쩌면 김혜나는 평론가 정성일의 분신인지 모른다. 평론가가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공중파에 나와서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리 쿨하게 내뱉더라도 오해 받기 마련이다. 감독 정성일은 <카페 느와르>를 통해 영화에 대한 애정 고백을 하는데, 이 사랑이 만천하에 드러날 때 그의 모습은 당당하다. 그가 신하균의 팔을 붙잡는다.
상대가 좋아하건 아니건 상관없다.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건 정성일 책임이다. 늦은 밤 이어폰에서 ‘정은임의 영화 음악’을 들으며 영화를 ‘발견’했다. 영화과에 진학해서는 줄곧 후회했다. 영화를 짝사랑란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난 누구보다 잘 안다.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요즘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들어내는 글은 영화가 없으면 성립하지 못한다.
이 얼마나 낯 뜨거운 짓인가. 해서 정성일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최대한 늦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의 고백을 중계하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궁금에 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누군가 이걸 읽고 <카페 느와르>를 보러 극장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기대, 혹은 걱정이라 하더라도 <카페 느와르>는 ‘기대 이상’의 만족을 준다. 적어도 두 번은 마음이 두근거린다. 그걸로 족하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198분이다. 그리고 딱 가운데쯤 자막이 등장한다. 아핏차퐁의 <친애하는 당신>에서 뒤늦게 등장하는 자막을 봤던 터라 새롭지 않지만, 이 때문에 적어도 <카페 느와르>란 제목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선 표면이 허우 샤오시엔의 <카페 뤼미에르>와 상치된다. ‘뤼미에르(빛)’와 원작 <백야>는 겉으로 연관된 외양을 갖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느와르(어둠)’다. 때문에 정유미가 김상경을 만나는 날은 밤이 가장 길다. 그리고 이 불어는 ‘검은 커피’란 뜻도 갖는다. 굳이 수식하지 않아도 좋을 커피를 다시 ‘검다’고 지적하는 모양새가 꽤 평론가적이다. 혹은 ‘느와르란 이름의 까페’ 그 자체로 불릴 수도 있다. 정유미가 춤을 추던 종로의 밤 커피숍을 우린 ‘카페 느와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카페 느와르, 이 지적은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에 대한 언급이다.
굳이 책을 원작삼아 이야기를 한 것에서 영화는 일단 원칙적으로 반복을 뒤집어쓴다. 게다가 한번 보여줘도 족할 배경을 두 번 이상씩 보여주고, 인물들이 뛰는 모양새 역시 반복되며, 서울이 렌즈에 잡힌 방식도 반복이다. 대사, 행동패턴도 같다. 정성일은 이 영화를 ‘문학적 리얼리즘’이라 했다. 영화엔 실제 많은 문학의 문장들이 오간다. 기억에 남는 건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으세요?”, “예전에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던가요?” 같은 것들이다. 반복과 리얼리즘, 난 이 단어를 보면 들뢰즈가 떠오른다. 그런데 영화 속에는 실제로 들뢰즈를 상기시키는 소품이 등장한다. 카페에서 신하균에게 뜬금없이 말을 건네는 정지혜는 무언갈 번역 중인데,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미뉘 출판사의 것이고(안경이 없어 제목을 못 읽었다) 표지가 들뢰즈의 영화책과 동일하다(이 출판사의 책들은 비슷한 표지라 확신은 없다).
들뢰즈가 한 말 중 이런 게 있다. 영화적 사실주의는 ‘반복’이라는 유기성을 가진다. 이가 바로 ‘이차성secondéité’인데, 이건 숫자 2와 관련된다. 대립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복제에 가까운 의미에서다. 그에 따르면 영화가 사실주의의 탈을 쓸 때, 주인공들은 행태를 반복한다. 이 반복은 다른 인물과 맺는 관계를 변형하는데, 그러니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카페 느와르>는 형식상 리얼리즘의 영화가 맞다. 그런데 한국인이 내가 듣기엔 대사의 뉘앙스가 좀 많이 거슬린다. 모든 인물의 일관된 말투는 감독 정성일이 가진 유명한 직함을 떠오르게 한다. 물론 이는 정성일이 가진 ‘사실’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모든 캐릭터가 동일한 한 입을 거친다면 이는 너무 극단적이다. 사실주의 영화는 극단적인 것들은 피한다. 리얼이 극단을 포장하는 게 리얼리즘의 방식이다. 그래서 난 이를 사실주의라고는 부르고 싶지 않다.
대사에 대해 좀 더.
브레송의 영화는 어렵다. 그 다음으로 곤란한 영화가 히치콕의 <로프>다. 같은 의미에서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하지 않는 것, 그리고 할 수 없는 걸 굳이 하고자 하는 것, 이 둘을 비교하면 무엇이 더 좋을까? 단순히 감독의 취향 차이일까? 만약 내가 영국의 취미론자들처럼 취향에도 급이 있다고 말한다면, 해서 내 생각엔 후자가 더 나은 것 같다고 평가한다면, 이 말을 뱉는 순간부터 브레송의 영화는 우릴 헷갈리게 할 것이다. 내 경우 처음 본 브레송의 영화는 <불로뉴 숲의 여인들>이었다. 마리아 카사레의 연기 때문에 이 영화가 좋은 것인가? 라고 처음엔 생각했다. 영화 속 모든 구성들이 너무나 어색해서 머리에 관념화되어 들어왔고, 막 영화를 접했던 나로서는 도무지 사태 파악이 되질 않았다. 후에 글을 읽으며 브레송이 그녀의 연기를, 그녀가 연기했단 것 자체를 고약하게 싫어했단 것을 알았다. 자의식이 강한 감독들이 가진 괴벽 중 하나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난 브레송이 여전히 두렵다. <카페 느와르>를 보며 도무지 몸에 맞지 않는 인물들의 대사에서 무시무시한 브레송이 떠올랐다.
누군가 내게 최악의 실험영화를 선정하라면 그건 히치콕의 <로프>가 될 것이다. 훗날 트뤼포가 인정하듯 이 영화의 원씬원컷은 실험을 넘어 무모해 보인다.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그렇게까지 했던가? 구스 반 산트 역시 리메이크를 하려면 히치콕의 콘티를 그대로 쓰지는 말았어야 했다.
“가슴이 아파요. 숨 쉴 수도 없이 현기증이 나고.”
“애정운이 보고 싶단 말이지? 자, 손을 내밀게. 자네 안 될 사랑에 매달리는군. 이 사랑은 이미 자네 손바닥을 벗어났네. 미안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두 번째일세. 그냥 그 자리에 있게나. 자네가 오르려고 할수록,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질 걸세. 뜨거워질수록 차가워질 걸세. 그러니 눈을 뜨지 말고 그대로 있게.”
대사를 옮기며 변형이 무섭기는 처음이다(반복이 아니라 변형이 두렵다).
대체로 영화는 A(Action)애서 A’(Action‘)로 넘어오는데, 이 영화는 A-A이다.
대신 A-S(Situation)-A-S’(Situation’)로 상황은 변한다. 같은 대사를 받아들이는 상대의 태도가 다르다. 의도가 감춰진 껍질의 대사들에, 겉으로 보기엔 매치되지 않는 상대역의 반응이 엮인다. 점쟁이의 대사에 대한 신하균의 답도 같다. 그는 상대가 무엇을 말하든 간에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인 걸 믿는다. 어찌하여 위 대사에서 그녀가 다시 돌아올 거란 결과를 추출해낼 수 있었을까.
가끔 텔레비전 연속극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화면을 보지 않고 대사만 들어도 되겠다고. 영화에서 클로즈업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유는 어쩌면 이미지가 가진 힘에 대한 방증이다. 영화는 듣는 게 아니라 보고 듣는 것이다. <카페 느와르>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이 영화는 듣고는 절대 판단할 수 없단 것이었다. 그런데 보고 듣고를 동시에 하더라도 영화를 완전히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다. 위 대사가 그렇듯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 패턴이 일반적이지 않아서다. 특히 김혜나가 ‘선생님’께 보내는 마지막 편지의 부분은, 그 선생님이 신하균을 가장한 선생님이 아닌 것 같긴 한데 답이 없어 난감하다. 내용과 화면과 소리의 언매치가 이 정도면 귀찮은 수준이다. 그런데 이 귀찮은 연상을 영화는 겨냥한다.
예를 들어 2부, 정유미가 주인공인 부분의 원작을 <백야>라고 한다면 영화는 1부 역시 <백야>의 요소를 일부 포함한다. 거울까지 제작하며 공들여 촬영한 ‘저택에서의 살인 시퀀스’를 예로 들면, 만일 영수가 계획대로 미연의 남편을 살해했다면 그는 행복하게 되었을까? 예상은 부정적이다. 우린 그가 <죄와 벌> 라스꼴리니코프의 고뇌를 반복할 거란 걸 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한 고민은 결국 누가 누굴 죽이고, 누가 죽고의 문제를 벗어난 데 있다. 아무리 치열하게 생각해도 정성일은 괴테의 우울함에 당도할 수밖에 없다.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은 하루뿐이고, 낮이 가장 긴 날도 하루뿐이다. 그들은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난다.
어떤 스토리도 자신의 것으로 소화했던 히치콕이 그랬듯, 영화의 주인공은 이야기가 아니다. 만일 어떤 감독의 이야기에서 그 감독만의 것을 찾으라면 그것은 시놉시스가 아니라 말을 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방식만이 새롭다. 나는 클로즈업을 쓰지 않는 화면, 그리고 도무지 현실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이 영화의 대사들을 신선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려한다. 나에게 신하균의 죽음은 놀랍지 않다. 아니, 이 이야기에서 새로움은 애초에 없다. 그런데 이 새로운 ‘요소’들이, 정말 새로운가? 판단을 유보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대면하지 못한 정성일 감독을 조금은 알 것 같단 기분이 든다. 아니, 실은 그의 딸이 만나고 싶어졌다. 만일 존재한다면 그녀는 실제 그런 대사를 말하는 사람일까? 라는 상상.
3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전계수 감독이 한 말이다. 그는 영화를 만들기 전 일본의 어느 회사에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 입사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순전히 그 회사가 위치한 건물의 웅장함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각자 감동을 받는 코드가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는 여자의 발목에 매력을 느끼고, 어떤 이는 날카로운 피뢰침의 섬세함에 반한다. 전계수는 웅장한 느낌의 물체에 항상 반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카페 느와르>에 담긴 서울을 보며 그 말이 떠올랐다. 건물의 속을 밖으로 드러내어 꾸미는 패턴은 이미 유행이 지났지만, 커다란 공간을 꾸미는 데 이보다 유용한 대안은 여전히 없는 것 같다. 청계천의 시멘트 벽, 미연의 집 앞 회색 벽, 이 외향들은 21세기 초의 서울을 지배한다. 그리고 어느덧 서울이 가진 가장 큰 외형이 ‘육중함’임을 영화는 확신한다.
이 지형도가 딱히 맘에 들진 않는다. 평론가로서 감독의 자의식이 너무 자세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피가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로 만족스러울 뿐, 정성일이 서울의 거대함을 옹호하려 했는지 비판하려 했는지 진의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공간에 대한 시선이 ‘서울의 오늘’을 그리고자 하는 데서 벗어나 ‘한국 영화의 오늘’로 확장되는 데 있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행복>, <생활의 발견> 등 수 많은 영화들을 포함해, 버거킹에서 햄버거를 먹는 정인선을 보며 굳이 ‘먹는 것’ 자체가 아닌 ‘버거킹 살인사건이나 햄버거의 소고기 패티’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을까? 그녀가 먹는 모습이 안쓰러워 다른 무언갈 상상할 수 없다. 만일 누가 내게 “이 사람이 너무 좋은데, 싫기도 해.”라고 말한다면 난 그 말을 “좋아해.”라고 해석할 것이다. 대체로 감각은 동시다발적이지만 가장 큰 경향이 나머지의 것들을 잡아먹는다. <카페 느와르> 속 청계천을 보며 서울을 두 동강낸 기다란 인조 구조물을 자각하는 것 역시 가능은 하다. 하지만 이걸 만들고 대통령이 된 MB까지 안고가야 한다면, 그건 아마 영화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집에 가서 한번 생각하고, 영화 외적인 것에 적용시킬 문제다. 영화가 하는 기록은 부수적이다. 그러니 몇 번 반복되더라도 이 영화가 담은 한국의 정치적 지형을 언급할 필요를 못 느낀다. 다만 영화가 죽음을 미루는 방식에 난 더 눈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바꾸지 못하는 것에도.
사람의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대개 관념적 만족 때문은 아니다. 아마 시나리오를 쓰며 정성일은 고민했을 것이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덧대진 것이 그 증거다. 그럼에도 대놓고 남산타워의 피뢰침을 향하는 이 영화의 엔딩은 너무 의식적이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만일 이 영화의 자동차 트래킹을 아핏차퐁의 트래킹과 비교할 수 있다면, 뮤직비디오 <난 여전히 숨쉬고 있어>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언지 다시금 언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감각이다. 감각이 있고나서 설명을 하는 것, 설명이 존재하고 감각화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물론 둘의 외향은 비슷하다. 정성일이 이를 노렸다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런데 브레송처럼 아예 심장을 막거나 아핏차퐁처럼 아예 두근거리거나 하는 식의 하나, 선택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게 된다. <카페 느와르>의 장점이자 단점은 마음이 두근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근거리다 만다는 것 역시 장점이다. 감각이 의식을 지배하는 구성과 방식, 좀 더 고민할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