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앙에 시달렸던 시절의 합천
농경사회에서 백성들은 우순풍조(雨順風調)하기를 제일로 삼고 하늘의 조화에 의지하며 농사에 전념해왔었다. 1929년 여름은 오랜 가뭄 끝에 장마기에 접어들은 6월27일부터 연3일간 합천에는 엄청난 폭우로 인한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은 재앙이 발생했다.
이번에 내린 비는 남부지방 전체에 해당 되겠지만, 특히 합천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합천군 전체가 초토화 되듯이 한 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당시 동아일보는 특파원을 파견하여 피해상황을 사회면 머리기사로 보도하리만치 사태는 심각했었다.
보도 자료에 의하면, 1929년6월28일에는 한 평에 열다섯 섬이라는 큰 비가 와서 군 전체경지면적 2만 정보 중 약 3분의2나 유실되고. 침수가옥이 1천220호 사망자가 13명 부상자가 84명이나 되고. 기타 도로나 교량의 파괴된 곳이 수백여 곳이나 되어 각 면의 교통이 두절되어 상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약 2백만 원의 피해로 추산할 수 있는데, 이 중에도 가장 피해가 많은 곳이 삼가면 소재지로 주거6백호 중 그의 전부가 침수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유실 52호, 전파68호, 반파 80호에 이르고 사망 8명, 부상83명, 행방불명3명, 이재민 2천6백여 명에 이르고 축산물 피해는 돼지700여두, 닭 1천여 마리, 소3두가 유실되는 참상인데, 긴급구제를 요하는 것이 145호에 762명으로 보통학교를 위시하여 면사무소, 금융조합. 창고 등에 수용되고. 공무원과 사회단체 회원 등이 총동원되어 구호에 임하고 있으나, 교통이 두절되어 식량운반이 어렵고 소금과 된장까지도 부족한 까닭에 간신히 진주 방면에서 운반을 하고 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데다 장맛비가 그치지를 않아 볕을 보지 못하여 가옥과 죽은 사람과 가축의 썩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어버이를 잃은 아이들, 아이를 잃은 어버이들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는 하늘에 사무치며, 오염된 물에 토사병으로 죽는 사람이 속출하여 경찰에서는 탁한 음료수에 소독약을 타고 있지마는 전염병이 발생 할까 염려되어 그 참상은 형언할 수없다, 라는 보도이다.
한편, 군 전체에 걸쳐 유실된 벼 모판이 36정보이고 이로 인해 이식이 불가한 땅이 900정보에 달하여 모를 드물게 심으며, 또는 인근 면에서 남는 모를 얻어 심는 등 대책을 강구했었다.
비 피해가 있기 10일 전부터 합천읍내에는 백일해(百日咳)병이 창궐하여 10세 내외의 어린이는 거의 대부분이 이병에 걸렸었는데, 2.3일 동안에 20여 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으며 앓고 있는 환자가 100여 명에 달하여 일반 가정에서는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쌓여있었다.
1929년2월18일 상오 합천군 대양면 오산리 마을 김모씨(33세)집 잿간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 전체 40호 중에서 24호가 소실되고 사망1명. 부상2명 소3두가 불타죽었고 이재민이 75명에 달하는 큰 재앙이었다.
큰 화재는 잇따라 1929년 4월 15일 오전, 합천군 봉산면 행정리 한모씨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마을 40여 호 중 33호가 전소되는 참화가 발생했다. 이 불로 1명이 부상당하고 소6두 돼지3두가 불타죽고 이재민이1백여 명에 달하는 대 참사이었다.
재앙은 끊이지 않아 1930년 3월30일 새벽2시경 합천공립보통학교(현 합천초등)에 화재가 발생하여 목조2층으로 지은 학교 전체가 불탔다. 이 불로인하여 학적부를 포함한 문서까지도 전부 불탔으며 4백여 학생들은 공부할 요람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을 하게 된 대 참사라 하겠다. (전 합천군수 강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