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수의 독재’넘어 ‘일인 독재’
<헌법의 경계를 넘지 말라>
『첫째, 대통령은 대법원장의 헌법상 제청권을 존중하고 헌법에 근거 없는 재제청 강요를 중단하라.
둘째, 국회는 대통령의 제청 거부를 사후적으로 정당화하거나 대법원장의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축소하는 입법을 중단하라.
셋째, 대법원장은 어떠한 정치적 압력에도 흔들리지 말고 헌법이 부여한 제청권과 사법부 독립을 단호히 지켜라.
이번 대법관 제청 거부 사유가 헌법상 정당한 사유라고 볼 수 없거나 아예 거부 사유 제시가 없으면, 대법원장은 이를 국민에게 상세히 공지하고 이를 이유로 재제청 요구에 불응하여야 한다. 사법권 독립은 적당히 타협해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넷째, 여야 정치권은 대법관 인선을 정쟁과 정치적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승리한 권력이 원하는 일을 모두 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다. 선거에서 승리한 권력조차 넘을 수 없는 경계를 세워 둔 것이 헌법이며, 그것이 입헌민주주의다.
대통령도, 국회도, 대법원장도 헌법 위에 있지 않다. 국민이 권력자에게 맡긴 것은 백지수표가 아니다. 헌법을 지키라는 조건 아래 맡긴 공적인 신임이다.
한 사람의 대법관을 얻기 위하여 헌법의 경계를 허문다면 잃게 되는 것은 한 자리의 인사권이 아니다.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 권력분립, 그리고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헌정질서를 걱정하는 법조인으로서 다시 한번 요구한다.
권력은 절제되어야 한다. 헌법의 경계는 지켜져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은 어떠한 정치 권력도 침범하여서는 안 된다. 헌법의 경계를 넘지 말라.』
지난 2일 사법연수원 14기 출신 법조인 84명이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최근 청와대의 손봉기 대법관 후보자 제청 반려와 재제청 요구를 강하게 비판하며 이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통령의 대법관 재제청 요구가 헌법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재명 대통령을 향해 “헌법에 근거 없는 대법관 재제청 강요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이는 대법원장과 국회 그리고 대통령에게 대법관 인사를 분산한 것이 삼권분립의 핵심 요지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해놓고 있다. 여기서 민주는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말하고, 공화국은 공화주의를 의미한다.
정치학적으로 이를 상세히 서술하는 것은 지면이 턱없이 부족하다. 우선 간단히 표현하면 민주주의는 국가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고, 공화주의는 어떻게 나라를 통치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약 40년의 성숙기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주주의의 퇴보를 염려하는 기운이 역력하다. 사실 민주주의는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이 ‘최선이 아니라 차선의 정치제도’라고 평가했듯이 항상 시끄러운 편이다. 본래 취지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의 주장처럼 ‘국민의, 국민을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강조되지만, 실상은 매우 역설적이다.
민주주의가 중시하는 다수결 제도가 이른바 ‘다수의 지배’ 로 흐르면 여지없이 ‘다수의 폭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환원하면 ‘중우(衆愚)정치’이자 다수의 독재가 되기 때문인데, 한국 정치는 현재 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정당의 정당을 위한 정당에 의한 정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현상이 매우 우려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공화주의의 파괴다. 공화주의는 국가를 헌법과 법률로 다스리는 것이 핵심 요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회 다수 집권 여당이 입법부를 장악한 상태에서 헌법을 침해하며 법률과 국가 기관을 흔들고, 심지어 검찰의 보완수사권마저 폐지 시키는 ‘다수의 독재’를 보이는 가운데, 이제는 사법부마저 장악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이는 입헌 공화주의의 근본인 삼권분립을 침해하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헌법의 경계를 허무는 일을 넘어 헌법 파괴이자 ‘일인 독재’로 치닫는 길이다. 민주주의의 폐단인 ‘다수의 독재’를 넘어 ‘일인 독재’가 되는 것인데, 이른바 공화주의를 파괴하고 전체주의나 왕정국가로 가는 길이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이 파괴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법조인들의 ‘헌법의 경계를 넘지 말라’는 성명서는 매우 의미가 큰 셈이고, 국민은 이를 주시하며 깊이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