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가 슬픔에 빠진 금학산을 위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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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나라의
수도
철원을 다니다 보면 태봉이라는 간판을 종종 보게 된다. 지금으로
부터 약 1100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철원은 후삼국 시대에
궁예가 세운 태봉이라는 나라의 수도였다.
신라 왕족이었던 궁예(?-918)는 태어날 때부터 이가
났다. 게다가
5가 두 번 겹치는 5월 5일에 태어나는 등 불길한 징조라고 해서
왕은 궁예를 죽이려고 했다.
누각에서 던져진 어린 궁예는 유모가
받아서 목숨은 건졌으나 유모의
손가락에 눈이 찔려 왼쪽 눈이 멀었다. 그리고 멀리 도망친 유모가
그를 키웠다.
신라가 쇠퇴해지면서
지방에서는 무리를 모은 세력들이 강해지고
있었다. 궁예는 죽주(안성)의 기훤 세력과 북원(원주)의 양길 세력
밑에 들어갔다가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지역 세력을 흡수하는 과정에서 개성의 해상 호족세력인
왕융을 자신의 세력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왕융이 자신의 아들인
왕건
(20세)을 추천함으로써 궁예와 왕건의 만남이 이루어졌다(896).
그 후 세력이 커지면서 궁예는 스스로 임금이라 칭하고 수도를
개성에
두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였다(901).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 유민
들의 근거지인 개성의 호족들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26세의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후백제를 세운 지(892) 9년이 지난 후였다.
이로써 한반도에는 이미 쇠약해진 기존의 신라(1약)와 새로 세운 후백제,
고려(2강)라는 1약 2강의 후삼국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후 궁예는 나라 이름을 고려에서 마진, 연호는 무태로 바꾸었고(904)
수도도 개성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몇 년이 지난 후 궁예는 다시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꾸었다(911).
철원으로 수도 이전 때 고암산이 아닌 금학산에 궁궐을
세우라
동송읍의 동송초교를 지나면 금학산(金鶴山)이 앞에 우뚝 서 있다. 마치
양쪽 봉우리를 날개 삼아 학이
내려앉는 모습을 닮았다. 마애불은 금학산
중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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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애불 전경
궁예가 개성에서 철원으로 수도를 옮길 때였다. 그는 고암산(북한 소재)과 이곳 금학산 둘 중
어느 곳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도선국사는 고암산에 지으면 단명할 것이나 금학산을 진산으로 해서 궁궐을
지으면 국운이
300년 이상 계속될 것이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궁예는 금학산이 아닌 고암산 주변에 궁궐을 세웠다. 이런
결정이 나자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한 금학산은 몇 년을 울었고 그 결과 이
산에서 난 약초는 써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전설도 전해져 온다.
전설처럼
도선국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고암산에 궁궐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궁예의 나라는 왕건에게 넘어갔다. 실제로 초기에 그 당시 민중들이
받드는
미륵불을 이용하여 자신을 미륵이라 칭하고 선정을 베풀던 궁예는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불신하고 반대세력을 처형하는 등 광기를 보였다.
결국 자신의
부하였던 왕건(42세)을 중심으로 한 신숭겸, 복지겸, 홍유 등의
세력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났다.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궁예는
명성산(울음
산)에서 사흘을 울었다고 한다.
산야를 헤매다니던 그는 결국 부양(평강)에서 백성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
다(918). 고려를 세우고
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아무도 갈 수 없는
비무장지대(DMZ) 안에 태봉의 궁궐터가 있다.
마애불 앞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철원 평야의 전망은 일품
마애불의 몸체는 큰 바위
면을 잘 다듬어 선으로 그리듯이 새겨 놓았고
머리는 별도의 바위로 만들어서 몸체 위에 올려 놓았다. 갸름한 얼굴에
큰 눈, 우뚝 솟은 코는
토속적인 한국인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인도
태생의 부처님 얼굴 같다.
그에 비해 몸체에 새겨진 조각 솜씨는 지방 석공의 수준을 못 벗어난
듯
하다. 두 손도 그렇고 입고 있는 옷의 표현에서도 형식화되고 세련되지
못했다.
전설에 의하면 고암산에 궁궐을 빼앗겨 울던 금학산을
달래기 위해 궁예가
이곳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어쨌든 전설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마애불
앞에는 마애불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절터가 있다. 그 터에
본체를 잃어버린 두 개의 연꽃 대좌와 석탑 조각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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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럭바위에서 내려다 본 5월 중순의 철원평야.
절터 끝에는 높은 절벽이 아찔한 곳에 너럭바위가 있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보는, 한국의 곡창지대인 철원평야의 전망은 가히 일품이다. 이곳 마애불이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이곳 철원평야의 풍요로움을
계속 지켜달라는 사람들의 염원이 이 마애불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후삼국 통일의 명분 속에 계속되는 전쟁으로 당시 백성의 삶은 지치고
또, 불안감은 커져만 갔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없는 평화로운 미래 세계를
기다리는 백성의 미륵불 신앙도 이 마애불에서 볼 수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