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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과 함께 하는 여정
가톨릭 신앙인들의 가정에는 십자가가 모셔져 있듯이 성모님 상
역시 모셔져 있고 묵주기도를 통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경험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성모신심은 사사로운 영역을 넘어서 교회적 차원에서 비롯 되고 있습니다. 봄이 한껏
고조되는 5월은 성모님의 달이며, 오곡이 익어가는 10월은 로사리오 성월입니다.
이러한 성월(聖月)에 교회는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비와 관련된 성모님의 일생을 묵상하고 그러한 삶의 여정을 본받도록 촉구합니다. 또한 전례력에는 성모님과 관련된 많은 축일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성모탄생축일, 천사가 예수의 잉태되심을 알리는 성모영보대축일, 성모자헌축일(自獻祝日), 성모승천대축일,
고통의 성모축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대축일 등. 이러한 성모님의 축일들이 말해주고 있는 신비 안에서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삶에서 겪는 기쁨과 애환의 구원사적 의미와 깊이를 발견하곤 합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서 성모님은 신앙인들의 크고 작은 삶의 역사에 깊이 동참해 오셨습니다. |
한국의 성모자, 심순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차지하는 성모님의 역할에 대한 무지와 오해가 적지 않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의 아름답고 유구한 신앙 전통이 신자들의 삶 안에서 제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천주교를 마리아교라고 잘못 알고 있던가, 심지어
악의적인 험담마저 들려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편견이나 오해의 이유가 어찌되었든 성모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큰 위로와 힘을 얻었는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전통 선상에서 불란서의 루르드나 포르투갈의 파티마, 벨기에의 바뇌, 남부 독일의 알트외팅, 또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젤이나 옛 유고 연방의 메주고리에 등 성모님의 발현지를 찾아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오늘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넓고 따사로운 어머니의 품
성모님에 대한 신앙인들의 신뢰와 애정은 이콘과 같은 종교예술 또는 음악이나 신학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다양하게 표현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에 대한 신앙인의 느낌과 생각은 무엇보다도 오랜
세월 믿는 이들의 입을 통해서 간절히 불리워졌던 소박한 성모 호칭기도(呼稱祈禱)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천주의 성모님이시여”,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시여”, “천상 은총의 어머니시여”, “하늘의 문이여”, “바다의 별이여”, “평화의 모후여”, 등. 각자의 삶의 처지에 따라 그 의미의 깊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이 성모 호칭기도의 밑바탕에는 “천주의 모친이시자 또한 우리들의 어머니이시다.”라는 공통된 믿음이 깔려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 어머니란 어떤 존재입니까? “어머니”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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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들의 창조에 열중하시던 하느님께서 어느 날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유독 ‘어머니’라는 인간 피조물 상에 각별한 정성을 쏟으시는 것을 한 천사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이 여인은 티끌하나 없이 깨끗해야 한단다. 그리고 식구들이 남긴 음식을 먹고서도 일할 수 있어야 하고 무릎 위에 아기를 재우다가도
곧 일어나 집안 일을 해야 하며, 입맞춤 한 번으로 아이의 상처부터 실연의 아픔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고칠 수 있어야 하지.
아마 손이 열 둘은 있어야 할 걸. 그리고 눈은 아마 세 쌍이 필요할 거야. 한 쌍의 눈은 닫힌 문을 꿰뚫어 보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얘들아 무얼 하니?”하고 물을 때 필요하고, 또 한 쌍은 머리 뒤쪽에 있어 보아서는 안 되지만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을 보는 데 쓰이고, 그리고 마지막 한 쌍의 눈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으로 아이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말 없이 “널 사랑 한단다. 난 널 믿어.”라고 알리는 데 필요할 거야.” |
일본의 성모자 |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천사는 어머니 상을 슬쩍 만져보았습니다. 그 부드러움에 놀라 천사가 멈칫거리자, 하느님께서는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드럽지? 하지만 어머니는
무엇보다 강인하단다. 아마도 너는 이 여인이 어떤 일을 하고, 견디어 낼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하지 못
할 거야.”
바로 그 때 어머니 상에서 물이 새어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천사가 물이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 눈에서 물이 나와요!”라고 외쳤습니다. “아니란다. 그건 물이 아니라, 눈물이라는 것이지. 그것은 기쁨과 슬픔, 실망과 아픔, 외로움과 자랑스러움에 쓰이는 거란다.”」
우리들에게 있어 어머니는 이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그리고 어린 시절 우리가 경험했던 어머니의 넓고
따사로운 그 품처럼 하느님은 이 지상을 살아가는 자녀들의 모든 것을 품고 돌보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 아닐까요? 어쩌면 어머니란 인간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지상 대리인과도 같다고 말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어린이에게 있어 어머니는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회복지 제도나 시설도
한 인간에게 있어 어머니의 자리를 결코 대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까닭은 어머니의 존재란 한 인간에게
있어 결코 기능적 관계가 아닌 혼과 혼의 깊이에서 맺어지는 전인적 존재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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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의 성모자 |
아이티 공화국의 성모자 |
어머니를 통해 예감하는 ‘영원한 고향’
어린 시절 우리가 어머니 품에 안겨 또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아무런 걱정도 없이 삶을 즐기면서 언뜻언뜻 느낄 수 있었던 그 평화와 행복감은,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영원한 그리움, ‘천상적
고향’을 어렴풋이 예감하게 합니다. 어머니의 따뜻한 체온에서, 어머니의 입가에 번진 미소와 눈길에서 또는 반대로 그러한 처지를 박탈당한 어린이의 텅빈 가슴 어딘가에서 서서히 형성되며 인간의
혼에 스며들어 한없고 영원한 그리움과 아픔을 태동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인간에게서 어머니라는 존재를 대체하고자 하는 모든 정치적 과학적 실험이
과연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가를 여기에서 굳이 지적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어머니가 더 이상 어머니일 수 없는 그러한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정채봉 프란치스코 시인은 다음과 같이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정을 짧은 글로 응축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꽃은 피었다/말없이 지는데/솔바람은 불었다가/간간히 끊어지는데//맨발로 살며시/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와불님의 팔을 베고/겨드랑이에 누워/푸른 하늘을 바라본다//엄마…”
말을 채 배우기도 전에 사랑하는 어머니를 여읠 수밖에 없었던 이 시인이 토로하는 가장 그리운 말 ‘엄마’란 실은 인간실존의 한 근원적 체험인 ‘영원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요, 그래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어머니를 통해서도 또는 그 밖의 어떤 무엇을 통해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그
한없는 갈망을 드러내는 상징어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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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따뜻함과 신뢰는 결코 허상이 아닌 엄연한 하나의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어머니를 통해 인간에게 예감되는 영원한 고향 역시 결코 착각이나 환상일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취하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우게 되었다.”(요한1서 3장 1절)
하느님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성모님은
온 몸으로 웅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철저히 하느님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이 성모님에게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부르셨던 마니피캇의 노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인간 혼들의 환희의 기쁨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
중국의 성모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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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어머니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따뜻함과 신뢰는 결코 허상이 아닌 엄연한 하나의 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실의 어머니를 통해 인간에게 예감되는 영원한 고향 역시 결코 착각이나 환상일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운명을 취하신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 안에서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그 큰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불리우게 되었다.”(요한1서 3장 1절)
하느님만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성모님은 온 몸으로 웅변하셨습니다. 성모님의 일생은 철저히 하느님만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말씀이 성모님에게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 부르셨던 마니피캇의 노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인간 혼들의 환희의 기쁨을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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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단 하나의 꿈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어머니의 보호와 손길을 가장 깊이 느끼는 때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 역시 그들이 신앙의 위협을 느낄 때에, 그들이 삶의 위기에 처해있을 때에 성모님의 간구를
통해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청합니다. 그리고 신자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성모님의 도움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그것을 깊게
체험한 사건들이 역사적으로 종종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굳이 비관적인 세계관에 빠질 이유는 없지만, 오늘날 인간이 처한 삶의 처지는 또 하나의 위기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덕적으로 인류는 전대미문의 위기에 봉착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진정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이 주도해왔던 지금까지의 오만한 태도를 과감히 버리고 우리들 인간이 결국 자연의 한 부분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반향하는 그 침묵의
소리, ‘영원한 그리움’에 귀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아프리카의 성모자 |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는 천주의 모친이시며 또한 우리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어머니의 꿈’이라는 시에서 용혜원 시인은 “내 어머니의 꿈은 자식뿐이었습니다.”라고 읊었습니다. 우리의 천상 어머니이신 천주의 모친 성모님께 단 하나의 꿈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지상의 자녀들의 구원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신부, 가톨릭대학교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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