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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줬음 좋겠어
큰스님은 요즘 화엄경 강설을 쓰시면서 신문도 안본다고 하셨다.
“끝없이 대방광불화엄경이지. 최고야. 그전에 번역하고 교재도 만들고 했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요즘같이 그러게 좋은 줄은 못느꼈어.”
1200년전에 화엄경 소초를 쓰신 청량 스님은 그냥 넘어갔어도 “나는 한구절 한구절이 다 보석같아서” 자세히 강설을 쓰고 있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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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결석하신 젊은 스님에게 큰스님은 인터넷 다음 염화실 까페에서 진도에 맞춰서 공부하고 있느냐고 물으시면서 “반야심경 사경본 못봤겠네. 얼마나 내가 정성들여 만들었는지 몰라 좀 알아줬음 좋겠어”하고 웃으셨다.
“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하고 스님이 대답하시자
“아니 스님이 하는게 아니고 신도들 가르치라고.” 가서 사경본을 확인하고 얼마나 잘 나왔는지 점검해 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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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큰스님에게 최고로 반가운 소식을 가져오신 스님은 비구니 스님이었다.
화엄경 공부를 하다가 어디쯤 공부하고 있는지가 막혀서 공책 한 권에 화엄경의 목차만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고 하셨다. 우리가 교재로 쓰는 큰스님이 현토를 단 민족사에서 간행한 4권짜리 화엄경 중에 1권만 정리했다고 하셨는데 그 분량이 얇은 공책 1권이었다.
“이야, 공부 아주 제대로 했다는 뜻이네? 글씨를 아주 날렵하게 잘 쓰시네. 난 손에 마비가 와가지고 글씨를 이렇게 날렵하게 쓰는 사람 부러워요. 이러면 착 머리에 들어오는거지.”하고 꼼꼼히 체크하셨다.
“나 이 제목들 추려 내느라고 머리 다빠졌다.”하시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셨다.
“이렇게 해서 보여주면 내 한테는 큰 공양이야.” “3년만에 스님들 공부한 결과물이 하나 나왔다” 하고 노트를 보고 또 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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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스님이 제자리로 가시고 큰스님이 항상 재주가 제일 많다고 하신 스님이 들어오셨다.
“그 뛰어난 재주가지고 공부 좀 해.”
“스님 저는 머리가 별로 안 좋아가지고.”
“여기 스님같이 머리 좋은 사람이 어디있어.사실이야.”하고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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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스님 오랜만이야. 절 잘 돌아가고? 되게 바쁜 일이 있으면 한 번 빠지고, 그래도 공부하는 것을 중심으로 해야 돼.” 하고 큰스님께서 인사하러 오신 스님에게 말씀하셨다.
“명심하겠습니다.” 하고 삼배를 올린 ‘문수스님’께서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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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에 빈자리가 많다. 이곳에서 여러 해 자원봉사를 한 보살님들은 해마다 결제철이 되면 이렇게 빈 자리가 많다고 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四
賢首品 第十二之二
二, 普賢菩薩의 偈頌答
오늘 368쪽(민족사 刊) 중간부터 공부할 차례다.
앞에서도 몇 번 말씀드렸지만 현수품에는 불교의 인과관계나 법계연기적인 연관관계와 같이 불교의 일반적이고 평이한 내용들이 나온다. 그런데 공부할수록 그 의미가 심장하고 참 대단한 화엄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 七光 四無量心
ㄱ, 慈의 光明
又放光明名佛慧니 此光覺悟諸含識하야
令見無量無邊佛이 各各坐寶蓮華上이니라
讚佛威德及解脫하고 說佛自在無有量하야 顯示佛力及神通일새 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불혜(佛慧)라
이 빛이 모든 중생을 깨우쳐서
하여금 한량없고 끝없는 부처님께서
각각 보배연꽃 뒤에 앉아 계심을 보게 하나니라
부처님의 위덕과 해탈을 찬탄하고
부처님의 자재하심이 한량없음을 말하며
부처님의 힘과 신통을 나타내보일새
이런 고로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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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광 사무량심(七光 四無量心) : 일곱 광명이 사무량심을 나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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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불교의 전반적인 것을 다 표현해 보는 내용이다. 사무량심이란 자무량심(慈無量心) 비무량심(悲無量心) 희무량심(喜無量心) 사무량심(捨無量心)의 자비희사다. 보살이 중생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끝이 없고 한량이 없다. 우리도 신심을 냈을 때는 하늘을 올라갈 것 같이 잘 하지만 대부분 말뚝신심이라 머지않아 그것이 수그러든다. 그런 것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자리가 잡힌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어느 때 어느 장소든 한량이 없어서 그 마음이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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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慈)의 광명(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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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불혜(又放光明名佛慧)니: 또 광명을 놓았는데 그 광명 이름이 불혜다. 광명마다 이름이 있다.
절에서는 싸우고 큰 소리치고 화를 내면 ‘저 스님 방광한다’는 표현을 잘 쓴다. 그런데 방광도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는 부처 불(佛)자, 지혜 혜(慧)자,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불혜(佛慧)광명이다.
차광각오제함식(此光覺悟諸含識)하야: 이 불혜라고 하는 광명이 모든 중생들을 깨닫게 해서
영견무량무변불(令見無量無邊佛)이: 무량하고 무변한 부처님이
각각좌보연화상(各各坐寶蓮華上)이니라:각각 보연화상에 앉아있는 것을 보게 한다. 처음 불혜라고 하는 광명의 이름이 나오고 다음으로 그 광명의 작용이 나왔다.
불혜라는 광명이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해서 무량 무변한 부처님이 각각 보연화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도록 한다.
우리 마음에 부처의 지혜라고 하는 광명이 있다면 얼마든지 무량무변한 부처님이 연꽃위에 앉아계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는가.
찬불위덕급해탈(讚佛威德及解脫)하고:부처님의 위덕과 부처님의 해탈을 찬탄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우리가 부처님의 위대함과 부처님의 해탈을 찬탄해야 된다. 부처님은 일찍부터 해탈의 명수였다. 깨닫기 전부터 이미 부처님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였다. 명예로부터 해탈했고,가족으로부터도 해탈했고, 애착으로부터도 해탈하였다. 이 해탈은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그 차원이 각양각색이다.
불교의 용어 중에 해탈 같이 좋은 용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소소한 해탈이라 하더라도 우리 역시 해탈감을 누릴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설불자재무유량(說佛自在無有量)하야: 부처님은 자유자재하고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였다. 평소에 이런 일을 하면 불혜라고 하는 광명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현시불력급신통(顯示佛力及神通)일새:부처님의 힘과 신통을 현시한다.
우리가 공부하고 설명을 잘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힘과 신통이 어떤 것이 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가 있다. 이것이 광명의 원인이 되었다. 다음은 결과다.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그런 까닭에 이 광명을 이루게 되었다.
ㄴ, 悲의 光明
又放光明名無畏니 此光照觸恐怖者하야
非人所持諸毒害를 一切皆令疾除滅이니라
能於衆生施無畏하야 遇有惱害皆勸止하야
拯濟厄難孤窮者일새 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又放光明名安隱이니 此光能照疾病者하야
令除一切諸苦痛하야 悉得正定三昧樂이니라
施以良藥救衆患하며 妙寶延命香塗體하며
酥油乳蜜充飮食일새 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又放光明名見佛이니 此光覺悟將歿者하야
令隨憶念見如來하야 命終得生其淨國이니라
見有臨終勸念佛하고 又示尊像令瞻敬하야
俾於佛所深歸仰일새 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무외(無畏)라
이 빛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비쳐
사람이 아닌 것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독해를
일체 모두 빨리 제하여 멸하게 하나니라
능히 중생에게 두려움 없음을 보시하여
번뇌롭고 해로운 것이 있으면 모두 권하여 그치게 하며
액난 있고 고독하고 궁한 자를 구제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안은(安隱)이라
이 빛이 능히 질병 든 자를 비추어
하여금 일체 모든 고통을 제하여
다 바르고 안정한 삼매의 즐거움을 얻게 하나니라
좋은 약을 보시하여 중생의 병을 구제하고
묘한 보배로 명(命)을 연장하고 몸에 향을 발라
죽과 기름과 우유와 꿀로 음식을 보충할새
이것으로써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견불(見佛)이라
이 빛이 장차 죽을 자를 깨우쳐서
하여금 기억하고 생각함을 따라서 여래를 보게 해서
죽으면 그 깨끗한 국토에 태어남을 얻나니라
임종(臨終)을 보면 염불을 권하고
또 불상을 우러러 공경케 하며
하여금 부처님 계신 곳에 깊이 돌아가 앙모하게 할새
이런 고로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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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悲)의 광명(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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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나 부부, 부모, 남녀 같은 말은 습관적으로 붙여서 읽는 다. 그런데 떼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자와 비도 그렇다.
사무량심(四無量心)에는 자비희사가 있다. 자(慈)는 그야말로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자식이 아주 나쁜 놈이어서 천하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고 다 죽여야 한다고 해도 어머니 마음 하나만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사랑이 자(慈)다.
비(悲)는 연민이다. 어여삐 여기는 마음, 불쌍하게 생각하고,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아 저것은 아닌데’ 하며 측은하게 생각하는 마음이어서 아닐 비(非)자 밑에 마음 심(心)을 써서 비(悲)라고 한다.‘저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왜 저렇게 살까’하고 마음 측은해하고 불쌍하게 생각하고 연민의 정을 갖는 것이다.
자나 비는 불교에서 아주 기본적인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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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무외(又放光明名無畏)니: 또 광명이 있으니 이름이 무외(無畏)다. 두려움이 없다. 밑에 시무외라고 하는 말도 나오지만 무외시라고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보시 중에 법을 보시하는 법시(法施), 재물을 보시하는 재시(財施)와 함께 무외시가 중요하다. 재시와 법시는 뚜렷하게 무엇인지 감이 오는데, 무외시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선뜻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이 병고를 앓는다든지 큰 실패를 한다든지 상황이 아주 어렵게 되면 돈도 소용없고 아무 것도 소용이 없다. 이럴 때 이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고 지켜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니가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너의 그 한마디가 내 마음을 참 편안하게 해준다, 이제 겁날 것이 없다’고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무외시다. 살아가면서 무외시가 중요하다.
차광조촉공포자(此光照觸恐怖者)하야: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려울 때가 많은데 그 두려움을 겪었을 때, 그 두려워하는 사람을 무외라고 하는 광명이 환히 비춰주어서
비인소지제독해(非人所持諸毒害)를: 사람 아닌 사람이라든지 그들이 가진 모든 독해를. 비인(非人)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닌 입장에서 사람을 아주 두렵게 하는 것들이다. 사나운 짐승이나 귀신도 포함된다. 이들이 가진 독이라든지 해칠 수 있는 무기라든지 이런 것들을
일체개령질제멸(一切皆令疾除滅)이니라: 이 광명을 통해서 그 모든 것을 다 하여금 빨리 소멸하게 한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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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어중생시무외(能於衆生施無畏)하야: 평소에 무외시를 잘 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만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른도 두렵기는 똑같다. 중생들에게 어떤 두려움이 있을 때 편안하게 해주고 지켜주고 옆에 같이 있어주는 것을 베풀었다.
우유뇌해개권지(遇有惱害皆勸止)하야:자기가 해침을 당한다든지 무슨 문제가 생겼다든지 했을 때, 그것을 그치도록 해서
증제액난고궁자(拯濟厄難孤窮者)일새: 액난이 있고 아주 외롭고 궁한 사람을 증제해 준 원인 때문에, 증제는 구원해 주는 것, 건져주는 것을 말한다.
이시득성차광명(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 이 광명을 이루게 되었다. 비(悲)에는 두 개의 광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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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안은(又放光明名安隱)이니: 또 광명이 있으니 그 이름은 안은, 편안함이라고 하는 광명이다. 그 작용은 어떤가
차광능조질병자(此光能照疾病者)하야: 이 광명이 능히 병든 사람을 비춘다. 죽을병에 걸리고 아주 심한 병에 걸린 사람이 눈을 감으면서도 정말 편안할 수 있으면 그것이 안은이고, 편안함이다. 그러면 좋은 것이고 괜찮은 것이다.
영제일체제고통(令除一切諸苦痛)하야: 일체 모든 고통을 제하게 해서
실득정정삼매락(悉得正定三昧樂)이니라: 모두 다 바른 선정의 삼매락을 얻도록 한다. 마음이 안정이 되어서 선정에 들어 있으면 비록 죽을병이라 하더라도 마음은 편안하다. 살아 있으면서도 늘 두려움에 떤다면 살아도 살아 있다고 할 수가 없다. 이 광명의 원인은
시이양약구중환(施以良藥救衆患)하며: 양약으로써 보시를 하고 온갖 병환을 구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선 보살계를 많이 설하는데, 그 근거 경전이 범망경이다. 범망경 48경구계에 보면 아픈 사람을 보고 구원하지 않으면 경구죄를 범한다고 나와 있다.
자기인연 닿는 사람이 아픈데 그 아픈 것을 염려한다든지, 약을 구해준다든지, 지켜준다든지, 치료를 안 해준다면 그 사람은 불법에 있어서 범죄라는 것이다. 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분명히 못 박아 놓았다.
또 이 세상에 여러 가지 복전이 있는데, 간병복전이 제일 복전이라고 하였다. 병든 사람을 구호하는 복이 제일가는 복이다.
묘보연명향도체(妙寶延命香塗體)하며: 묘보로써 목숨을 이어가도록 향으로써 몸에 발라준다. 향은 코에만 좋다고 하는 향기가 아니다. 인도에서 향은 약이다. 향이라고 하는 약으로써 몸에 발라주며
수유유밀충음식(酥油乳蜜充飮食)일새: 수(酥)는 요즘 우리말로 하면 제호라고 할 수 있는데 인도에서도 아주 부자인 거부장자들이나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소락제호할 때 소락이라든지, 우유라든지, 기름이라든지, 꿀이라든지 이런 것으로써 음식에 충당할새
이시득성차광명(以是得成此光明)이니라 : 이것으로써 이러한 광명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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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경에는 아난과 부처님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나온다. 부처님이 편찮으시자 아난존자가 우유를 얻어서 부처님께 드려야겠다 싶어서 탁발을 나갔다. 마침 유마거사를 만났는데 유마거사가 때 아닌 시간에 탁발을 나온 이유를 물었다.
“부처님이 몸이 편찮아서 우유를 얻으러 이렇게 때도 아닌 때 탁발 하러 나왔습니다.” 하고 아난존자가 대답하였다. 그 러자 유마거사는 “불신(佛身)은 병드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실상을 깨달은 그 사실이 불신이다”라고 사정없이 꾸중을 하였다.
“세상에 병든 부처가 어딨노? 부처는 병이 없어. 아예 병이라는 것이 없어. 니가 함부로 그것을 가지고 불신(佛身)이라고, 부처님 몸이 병들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부처님 제자냐, 부처님 시자냐, 어째 그런 소리를 하느냐”하고 시원시원하게 불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마경은 차원이 참 다르다. 유마경의 그런 대목에 내가 아주 감동을 해서 유마경강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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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견불(又放光明名見佛)이니: 부처님을 본다 라는 뜻의 견불이라고 하는 광명이다.
차광각오장몰자(此光覺悟將歿者)하야: 이 광명은 장차 돌아가실 분,장몰자를 깨우쳐서
영수억념견여래(令隨憶念見如來)하야: 여래를 기억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을 기억한다든지, 부처님 명호를 기억하도록 해서 여래를 본다.
이런 것은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가르쳐야 할 대목이다. 집에서 기도할 때라든지, 길을 갈 때, 차에 타서 기도를 할 때, 자기가 다니는 법당의 부처님을 잘 기억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기가 다니는 절의 법당 부처님을 잘 보아서 그 형상을 다 잘 외워야 된다.
우리가 석굴암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상호가 딱 떠오른다. 그렇게 떠오르는 것이 부처님을 외우는 것이다. 법주사미륵대불이나 영산대불도 생각하면 딱 떠오른다.
그런데 신도들이 자기 절의 부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최소한도 자기가 다니는 절의 부처님은 기억하도록 해야 된다.
불모 한 사람이 조각을 하고,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서 조성한다고 해도 불상은 각각 다 다른 특징이 있다.
억념(憶念)은 기억하는 것이다. 원불로 모시고 있든지, 원불로 생각하는 부처님 모습의 낱낱 특징과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여래를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래를 보겠는가. 불상을 매개로 해서 부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명종득생기정국(命終得生其淨國)이니라: 목숨을 마칠 때 그 청정한 국토에 태어나게 된다. 염불사상이나 정토사상이 화엄경에 많이 녹아 있다. 탑이라든지 불상신앙 심지어 보리수신앙까지도 화엄경에 다 있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보리수신앙 불상신앙 탑신앙 정토신앙이 완전히 일반화되었을 때 결집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다.
스리랑카 같은 데에 가면 절에 본래 부처님 성도하신 보리수를 분양을 받아서 심었다고 하는 절이 있다. 부처님이 성도한 보리수의 몇 대 손자인 줄은 모르지만, 부처님 이상으로 보리수를 신앙한다. 그 믿는 마음이 중요하다.
‘이 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성도하셨다’라고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딱 믿고 들어가는 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는 부처를 본다고 하는 광명에 대한 설명인데 이 광명으로 정토에 태어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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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유임종권염불(見有臨終勸念佛)하고: 임종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면 염불을 권하라. 임종할 때 제일 좋은 기도는 뭐니뭐니 해도 염불이다. 임종시에 아미타불을 열 번만 외우면 바로안락찰(安樂刹)에 왕생을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을 소리내어 부르든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자기가 기억하는 부처님을 외우든지, 못 외우면 부처님 사진이라도 갖다 주어서 부처님을 보면서 눈을 감고 임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마음 편하게 임종하는 방법이다. 그래서 임종에 염불을 권하라고 한다.
우시존상영첨경(又示尊像令瞻敬)하야 : 또 존상을 보인다. 존상은 불상이다.
사진도 좋고, 조그맣게 만들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불상도 좋다. 그것을 우러러서 공경을 표하면서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목숨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준다.
이것은 중요한 이야기지만 불교 일반적인 이야기다.
수준 높은 화엄경에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은 화엄경이 워낙 넓고 넓은 그물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장대교망녹인천지어(張大敎網 漉人天之魚)다. 큰 가르침의 그물을 온 우주에 다 펴서 인천의 고기를 다 건지는 것이다. 피라미까지도, 조그만 멸치까지도 남기지 않고 다 건지는 것이 화엄경의 목적이다.
선불교 같은 데는 그렇지가 않다. 선불교는 큰 고기들만 건지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화엄경의 자비사상은 조그마한 멸치까지도 다 건진다. 어떤 수준의 사람, 어떤 근기의 중생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교화하고, 다 제도한다.
이런 광대한 자비정신이 화엄경에 녹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사람이 돌아가실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염불을 권해라, 불상을 가져다 줘서 가슴에 안고 눈을 감도록 해줘라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불교에 대한 신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 하나면 눈을 감아도 얼마나 마음이 편하겠는가. 그런데 이런 일들이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없다. 요는 믿어야 되는 것이다.
최소한도 그만한 신심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런 사람이 임종시에는 존상이라고 하는 불상을 보이고, 청정하게 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병상에 누워서도 볼 수 있도록 사진을 걸어놓는다든지, 아니면 예쁜 관음상이나 불상을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런 것을 신도들에게 많이 알려야 한다. 임종시에 존상을 보여주고 우러러보게 한다. 견불(見佛)이라고 하는 광명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비어불소심귀앙(俾於佛所深歸仰)일새: 부처님 처소에 깊이 귀의하고 첨앙하게 한다. 불소란 일반적으로 사찰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불상을 모셔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다니는 절이 저만치 남산 밑에 있는데’ 하고 직접 가지는 못 한다하더라도 그 쪽을 향해서 예배하고 우러러서 귀의할 수 있는 인도를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계시는 장소로 하여금 깊이 귀의하고 첨앙하게 한다는 말이다.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그러한 까닭에 이러한 광명, 불견(見佛)이라고 하는 광명을 이루게 되었다. 현수품에 이러한 말씀들이 참 이해하기도 쉽고, 우리가 실천하기도 또한 쉽다. 아예 신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잔잔한 신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ㄷ, 喜의 光明
又放光明名樂法이니 此光能覺一切衆하야 令於正法常欣樂하야 聽聞演說及書寫니라 法欲盡時能演說하야 令求法者意充滿하야 於法愛樂勤修行일새 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又放光明名妙音이니 此光開悟諸菩薩하야 能令三界所有聲으로 聞者皆是如來音이니라 以大音聲稱讚佛하며 及施鈴鐸諸音樂하야 普使世間聞佛音일새 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요법(樂法)이라
이 빛이 능히 일체중생을 깨우쳐서
하여금 바른 법을 항상 기뻐하고 즐겨서
듣고 연설하고 베껴 쓰게 하나니라
법이 다하고자 할 때 능히 연설하여
법 구하는 자로 하여금 뜻에 만족하여
법을 사랑하고 즐기며 부지런히 수행케 할새
이런 고로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묘음(妙音)이라
이 빛이 모든 보살을 열어 깨우쳐서
능히 삼계에 있는 소리로 하여금
듣는 자가 다 이 여래의 음성이 되게 하나니라
큰 음성으로 부처님을 칭찬하며
요령, 목탁의 모든 음악을 보시하여
널리 세간으로 하여금 부처님 음성을 듣게 할새
이런 고로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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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喜)의 광명(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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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주는 광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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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락법(又放光明名樂法)이니: 즐길 락(樂)자, 법 법(法)자 락법은 법을 보고 즐긴다는 뜻이다. 법을 좋아한다.
남이 뭐라 하든지 말든지, 욕을 하든지 말든지 상관안하고, 내가 좋으면 그냥 좋아하고, 좋다고 권하고 자랑하고 ‘화엄경 좋다 화엄경 좋다’고 하고 ‘봐라,이런 구절이 있지 않느냐’‘사람 임종할 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써 놓은 데가 경전에 없다. 화엄경이니까 있는 것이다’하고 좋아하는 것이다.
차광능각일체중(此光能覺一切衆)하야 : 이 광명이 능히 일체 중생들을 깨닫게 한다.
영어정법상흔락(令於正法常欣樂)하야 :정법으로 하여금 항상 흔락하게 한다. 우리가 정법구현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면 그만치 좀 비슷한 법이나 아예 아닌 법, 삿된 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경전에서 그런 것을 다 들여다보고 아는 것이다.
정법을 가지고 항상 기뻐하게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화엄경을 보고 기뻐하며 ‘이런 가르침은 근사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을 좋아하면 계속 와서 듣는 것이다.
청문연설급서사(聽聞演說及書寫)니라 : 와서 듣고 아는 대로 소개도 한다. 법회도 소개하고, 기회가 된다면 자기가 설명도 해주는 것이다. 한 사람도 앉혀놓고 설법할 수가 있고, 두 사람 앉혀놓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이 많고 적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인연 닿는 대로 자기가 신심에서 우러나는 마음으로 연설하고 사경한다.
지난 번에도 반야심경사경집을 잘 만들었다고 권했는데 오늘도 좀 가져가서 권하고, 스님들이 신도들에게 나눠줄 때 써 오라고 해서 점검도 하고 사인도 해주면 좋다.
사경을 다해 오면 거기에 날짜를 적고 이름 적어 주면 좋다.
그렇게 공부를 유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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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욕진시능연설(法欲盡時能演說)하야: 법이 다하고자 할 때 능히 연설하고 법을 설명해서.
우리가 법을 좋아하고, 그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 되고, 열심히 연설하고 열심히 듣고 공부하고 사경하고, 이렇게 해야 법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런 신심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법이 다하는 것이다. 그럴 때 능히 연설하야 법을 열심히 설명한다. 그래서
영구법자의충만(令求法者意充滿)하야 : 법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이 충만하게 한다. ‘좋은 불교 좀 없나’‘좀 새롭고 부처님 마음에 딱 드는 불교 좀 없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으로 하여금 뜻이 충만하게 한다. 사실 화엄경을 소개하면 최고다. 이보다 더 좋은 법은 없다. 한 페이지 넘겨서 마음에 안 들거든 막 넘겨서 마음에 드는 대목이 나올 때까지 또 넘겨 보고, 공부하다가 마음에 계합이 되는 데는 체크를 해놓고, 간지를 끼워 놓기도 하는 것이다.
어법애락근수행(於法愛樂勤修行)일새: 법에 대해서 사랑하고 애착하고 즐겨하라. 법을 사랑하고 즐겨해서 열심히 수행한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다.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이러한 까닭에 이 광명을 얻게 되었다. 공부를 하다보면 화엄경 공부가 참 재미있다.
오늘 어떤 스님이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화엄경 한 권의 과목을 노트 한 권에 총정리를 해왔다.
한 권 안에 있는 과목을 다 정리한다는 것은 전체를 쫙 꿰뚫는다는 뜻이다. 화엄경 한 권에 대한 세세한 지도를 다 그린 셈이다. 우리가 공부한 결과물이 이렇게 나온 것이다. 그런 것이 다 어법애락에 근수행이다. 달리 수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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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명묘음(又放光明名妙音)이니: 미묘할 묘(妙)자 소리 음(音)자 묘음이라고 하는 광명이다. 희광명의 두 번째 광명이다. 다른 소리도 물론 묘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설법소리가 제일 묘음이다.
차광개오제보살(此光開悟諸菩薩)하야 :이 광명이 모든 보살들을 깨닫게 한다.
능령삼계소유성(能令三界所有聲)으로 : 능히 삼계에 있는 모든 소리들로 하여금
문자개시여래음(聞者皆是如來音)이니라: 듣는 사람이 다 여래의 설법소리로 듣도록 한다.
소동파도 시냇물 소리가 곧 부처님의 광장설법이라고 해서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舌)’이라고 하였다.
듣는 사람이 삼계에 있는 모든 소리를 다 여래의 소리로 듣는 것이다. 공사하는 소리, 차가 굴러가는 소리, 시장에서 흥정하는 소리, 싸우는 소리, 뭔가 부딪치는 소리,깨지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전부 듣는 사람에게 여래의 설법소리처럼 들리도록 하는 것이 묘음이라고 하는 광명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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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음성칭찬불(以大音聲稱讚佛)하며: 큰 음성으로써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님을 잘 알아서 부처님의 좋은 점 뛰어난 점을 칭찬하면 아주 훌륭한 포교다.
요즘 우리 화엄경 강의를 촬영하는 BBS에서 활안스님이라고 하는 스님이 부처님 일생을 한 토막씩 설명을 하는데, 신심이 난다. 그런데 좀 살을 많이 붙였다 싶은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팔상성도(八相成道)중에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한 장 걸어놓고도 며칠간 이야기 하는데 ‘여기 유성출가할 때 저 말좀 봐라. 말이 그냥 저 높은 성을 뛰어 넘지 않느냐, 거기 말꼬리에 누가 달렸는지 아느냐, 차익이라고 하는 말몰이꾼이 달렸다.’이렇게 시작해서 ‘부처님이 출가할 때 그냥 간 것이 아니다. 전국민에게 그리고 아버님과 모든 국민들에게 이별장을 썼다 ’고 하면서 아주 길게 ‘내가 이러이러한 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이렇게 나라와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하게 됐으니 좀 이해해 주십시오’하고 내용을 말하는데 부처님에게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처음 들었다.
그런데 그 스님은 부처님이 떠나실 때 써논 편지라는 것을 한참 길게 읽는 것이다. 부처님이 떠나실 때 편지를 써놓고 갔다는 소리 내가 처음 듣지만, 살을 붙이면 또 그렇게 얼마든지 붙여지는 것이다.
한 국가의 태자가 국가를 버리고 부모를 버리고 출가를 했다면 그 의미가 대단하고 크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유성출가만 해도 책한 권이 되는 것이다.
대음성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 칭탄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그리고
급시영탁제음악(及施鈴鐸諸音樂)하야 :요령이라든지 목탁이라든지 죽비라든지 온갖 소리 내는 불구(佛具)들을 시주를 잘 했다. 그래서
보사세간문불음(普使世間聞佛音)일새 : 널리 세간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소리를 듣게 한다. 옛날에는 목탁이 참 귀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목탁장사라는 것이 없이 그냥 노스님들이 좋은 나무를 하나 구하면 그것을 몇날 며칠 깎아서 목탁 하나를 만들어 법당에 올려놓는 정도였다.
지금은 전문가들이 기계로 만들어서 팔고, 죽비도 만들어서 팔지만 예전에는 그러했다.
목탁을 만들어 올린다든지 하는 것은 참 아름답고 좋은 일인데 그런 일 때문에 부처님의 소리를 듣도록 하게 됐다는 말이다.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그러므로 묘음이라고 하는 이러한 광명을 얻게 되었다.
광명이야기가 아름답다. 또 우리 일상 신행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들이다. ‘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고 나도 공부하면서 많이 깨친다. 주변에 아는 스님들이나, 아는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이런 사람들은 이것이 아주 풍부하고 이것이 아주 장기인데, 그 사람들은 과거에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그렇구나’ 하고 나 혼자서 그 인과관계도 연결해서 생각해 보기도 한다.
ㄹ, 捨의 光明
又放光明施甘露니 此光開悟一切衆하야
令捨一切放逸行하고 具足修習諸功德이니라
說有爲法非安隱이라 無量苦惱悉充徧하고
恒樂稱揚寂滅樂일새 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
또 광명을 놓으니 이름이 감로(甘露)라
이 빛이 일체중생을 열어 깨우쳐서
하여금 모든 방일(放逸)한 행을 버리고
모든 공덕을 구족히 닦아 익히게 하나니라
유위법(有爲法)은 안은(安隱)이 아니라
한량없는 고뇌가 모두 충만하다 말하고
항상 즐겨 적멸락(寂滅樂)을 일컬어 드날릴새
이런 고로 이 광명을 얻어 이루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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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捨)의 광명(光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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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를 희사라고 한다. 헌 신짝을 버리듯이 보시를 하고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야 된다. 버리는 마음으로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은 자기가 보시한 것이 다 생각나기 마련이다. 소소한 것은 생각이 안 나겠지만, 값이 좀 나가는 것 같으면 꼭 생각하게 되어있다.
예전에 어떤 처사가 절에 와서 ‘이 법당을 내가 지었다’고 하였다. 그 법당이 아주 잘 지어졌는데 ‘도목수가 되는가, 아니면 대시주나 되는가’ 하여서 조심스럽게 ‘이 법당을 짓는데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하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 법당을 지을 때 자기가 도목수 밑에서 대패를 가는 사람으로 일했다는 것이다. 대패를 가는 일은 집 짓는 일 중에 가장 허드렛일이다. 도목수 밑에서 대패를 한 3, 4년은 갈아야 다른 일을 맡기는 것이다. 대패를 갈 때는 아예 다른 것은 만지지도 못하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대패만 가는 일을 한 인연으로 ‘이 법당을 내가 지었다’고 하였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다. 그것은 전혀 거짓말도 아니고 그런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다.
아무튼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다 그렇다는 것이다.
사(捨) 라는 것이 보시의 뜻인데 버리는 듯이 주는 마음이 참 어렵다. 불교는 이런 사(捨)자 하나만 가지고도 무궁무진한 법문이 있다. 법당의 희사함이라고 하는 낱말 하나만으로도 이야기 거리가 많다.
일본 법당에 가면 놀음 새(賽)자를 써놓았다. 갓머리(宀)밑에 조개 패(貝)도 있는 글자가 복잡하길래 내가 일본에 갔을 때 일본 스님보고 ‘저것은 뭐냐’고 물었더니 ‘저것은 놀음 새자’라는 것이다. 우리는 희사함이니 복전함이니 기껏해야 불전함 정도로 써놓는데 어째서 놀음 새자를 거기다 써놨느냐고 물었더니 놀음은 최소 열 배, 잘하면 백배 건지지 않느냐, 그것이 도박인데 부처님 앞에 희사하는 게 바로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100원을 희사하면 한 만원이나 10만 원쯤 건진다’는 뜻으로 그렇게 노골적으로 써 놓은 것이다.
그런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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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방광명시감로(又放光明施甘露)니: 또 광명을 놓는데 그 광명 이름은 감로법을 보시하는 것, 시감로다.
차광개오일체중(此光開悟一切衆)하야: 일체 중생들을 깨닫게 해서
영사일체방일행(令捨一切放逸行)하고 : 일체방일행을 다 버리게 한다. 부지런해야 복도 짓고, 부지런해야 공덕도 닦는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한 한마디 말이 ‘방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인도는 자연환경이 더워서 바쁘게 설칠 수도 없다. 조금만 설치면 힘이 빠지고 땀이 나니까 대개 사람들이 게으를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돌아가시면서 게으르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이다. 여기는 게으름을 갖다 버린다고 하였다.
구족수습제공덕(具足修習諸功德)이니라:온갖 공덕을 구족하게 수습한다. 이 공부도 하고 저 공부도 하는 것이다. 참선도 했다가 염불도 했다가, 경도 봤다가 봉사도 했다가, 마음 내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다. 부지런해야 공부도 되고 복도 짓고, 공덕도 닦는다.
설유위법비안은(說有爲法非安隱)이라: 유위법을 설하면 편안 하지 않다. 유위법은 세속적인 법이다.
무량고뇌실충변(無量苦惱悉充徧)하고: 한량없는 고뇌가 모두 다 가득해진다. 유위법을 설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락칭양적멸락(恒樂稱揚寂滅樂)일새: 적멸락을 늘 즐겨서 드날려야 한다. 적멸법은 불법의 낙이다.
시고득성차광명(是故得成此光明)이니라:그러므로 시감로(施甘露)라고 하는 이 광명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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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혜명화님,또 이렇게 복습하게 되네요.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혜명화 님, 더운 날씨에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令隨憶念見如來...혜명화님 고맙습니다._()()()_
혜명화님, 지난 달에는 자원봉사에 불참하였는데, 이렇게 올려 주시니 고맙고도 죄송합니다. 다음 달에는 꼭 빠지지 않을께요.. _()()()_
於法愛樂勤修行...혜명화 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바람 좀 쏘이세요..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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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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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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