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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세론 콘스탄틴 VACHERON CONSTANTIN
가장 비싼 시계로 일컬어지고있는 바세론 콘스탄틴은 중세 이후 금세공 예술로 유명한 스위스 쥬네브에서 탄생했다. 바세론 콘스탄틴의 설립자인 쟝 마르크 바세론은 '전통적인 예술가의 솜씨는 기술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않는다'는 기본철학을 가지고 가비노체의 전통을 살려 정교하고 품격있는 시계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바세론 콘스탄틴은 유럽 각국의 왕후 귀족들로 부터 큰사랑을 받아왔으며 특히 나폴레옹1세가 가장아끼는 물건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바세론 콘스탄틴사는 1819년 사업가이자 여행가인 프랑소와 콘스탄틴을 영입하면서 커다란 전기를 맞게된다. 이어1839년 바세론 콘스탄틴 은 시계제조 분야의 천재적인 발명가 죠지 어거스트 레쇼를 기술고문으로 참여시키면서 다시 한번 전기를 맞게된다. 그는 2년에 걸친 연구끝에 시계부품의 대량생산이라는 획기적인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모든 사이즈 부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계의 등장은 가비노체의 세계의 변혁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886년 '쥬네브의 기계 임의 검정에 관한 법률'에서 공식적으로 인증을 받아 수준높은 기술을 인정받은 바세론 콘스탄틴은 1955년 개발된 1.64mm의 초박형 수동 무부먼트 ,1980년 개발된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시계 칼리스타 등을 속속 내보이며,최고 시계의 명성을 굳히고 있다. 첨단 기술이 범람하는 현대에도 여전히 수작업 만을 고집하는 바세론 콘스탄틴은 연간 생산량 1만개 이하로 소수 정예의 제품만을 제작하고 있다.
■ 페라가모 Slavatore Ferragamo
80년 전 시작된 페라가모의 구두와 기타 패션상품 속에서의 혁신적인 사고방식, 기술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투자, 우아한 연출에 대한 노력은 처음과 같은 강도로 지금까지 늘 유지되어 오고 있다.
페라가모는 라이센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두의 디자인은 누구나 모방할 수 있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는 지론 때문이다. 토탈 패션을 추구하는 페라가모지만 사업의 중추는 여성용 구두로 전체 매출의 1/3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비중은 각 시장상황에 따라 다르며, 현재 한국시장에서는 의류의 매출이 좋은 편이다. 페라가모는 가을/겨울 시즌에 내추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의 컬러를 도입, 전통적으로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몸, 선에 맞는 라인이 자연스럽고 우아한 모습을 형성하며 여성미를 강조한다. 더블 스트레치, 울, 울 크레이프, 조젯, 세이블 스트레치, 플란넬, 리버서블 셜링 등이 소재로 사용되었고, 구두와 핸드백은 기존의 전통적인 스타일에 조금 더 장식을 기묘하게 연출해 모던룩을 강조했다. 현재 페라가모의 매장은 3개가 있으며, 하반기에는 2개의 매장을 더 오픈할 예정이다.
■ 루이뷔통 LUIS VUITTON
나폴레옹 3세 유제니 황후의 짐꾸리는 도제로 시작한 루이비통은 1854 년 피리 카푸신가에 매장을 열어 이 매장에서 왕족들과 귀족들의 여행가방을 제조해 주면서 현재 명성의 기초를 닦았다. 그때까지는 원형으로 되어있어 운반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던 가방을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어 여러 개의 여행가방을 한데 포개어 운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수십개의 가방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던 귀족에게 있어서는 루이비통이 개발한 여행 가방은 그들에게 대단한 혁신을 안겨다 주었다. 이로 인해 루이비통은 여행 가방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다. 144년이 지난 현재까지 루이비통의 가방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여행 가방의 으뜸이 되었고 전통이 소중히 지켜지면서 시대상의 혁신을 반영하는 그들의 디자인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역사와 중요한 순간을 같이 해왔었다.
루이비통의 전통은 제작 과정에서 뿐만이 아닌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디자인을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만들어 오랜 시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꽃과 별 그리고 창시자 루이비통의 이니셜 LV를 조합해 만들어 진 모노그램 캠퍼스는 루이비통의 아들인 조르쥬 비통이 당시 극성이었던 모조품과 구별하 기 위해 1896년 창안 한 것이다. 이 모노그램 캔버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루이비통 가방 의 이미지로서 1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루이비통은 전통만을 고집하지않는다. 전통을 소중히 간직해 나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통 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1986년 루이비통 제품에 처음으로 검정,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색을 도입한 에피 제품, 1993년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남성들을 위한 타이 제품,1997년 의류 사업 도전으로 새로움에의 전통을 루이비통은 증명해왔다. L과 V와 꽃,별의 무늬가 조화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캔바스 시리즈는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문양으 로 탄생 100주년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세계인의 시각에 선명한 각인을 새긴 제품. 특히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96년 초에 로메오 질리 , 헬무드 랭, 아이작 미즈라히, 시빌라,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7인의 디자이너들이 모노 그램을 이용해 자신들의 개성적인 디자인 세계을 표현한 제품들로 전 세계를 도는 순회 전시를 가지기도 했다.
■ 폴로 랄프로렌 Polo Ralph Lauren
폴로 랄프 로렌 랄프 로렌은 폴로상표를 1967년에 소개해 이후 30여년 동안 남성과 여성, 아동을 위한 라이프스타일과 의상의 세계를 제안, 구축해 왔다. 그의 의상, 액세서리, 그 밖의 다른 상품들은 고전적인 미국 스타일을 가장 잘 표현했으며 가장 좋은 소재, 우수한 디자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랄프 로렌의 남성복은 보브루멜社에서 넥타이 디자인을 했던 때부터 비롯됐다. 보브루멜 넥타이 전문회사에서 폴로라인을 독립시켰고, 그 이듬해 남성의류 전문회사를 설립했다. 현재의 폴로 랄프 로렌의 여러 부문 중 첫 출범한 것이 랄프 로렌의 남성복 라인이다. 랄프 로렌이 보브루멜社에서 넥타이 디자인을 할 무렵 넥타이들은 아이비 스타일, 즉 폭이 좁고 어두우며 평범한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랄프 로렌은 그때가 새로운 룩을 도입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때까지 들어 보지 못한 최고급 소재에 4인치 폭의 디자인을 도입했다. 폴로 넥타이는 곧 신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아이템이 됐으며, 랄프 로렌은 넥타이로 산업혁명을 일으켰다고 할 만큼 유명한 남성의류 디자이너가 됐다. 그가 넥타이에 폴로라는 이름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폴로 스포츠가 운동경기이면서 명예와 신중함, 우아함 등의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랄프 로렌은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1968년 폴로를 독립적인 남성의류 회사로 설립해 남성의류 품목을 생산한 것이 그것이다. 최우수 소재사용을 우선했으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폴로 남성복은 독특하고 세련됐으며 항상 혁신적이지만 고전미를 잃지 않는 것들이었다. 셔츠류는 모두 면소재였고 풍부한 패턴과 전문성을 띠었다.
이 같은 배려는 랄프 로렌 남성의류 콜렉션이 스포츠의류, 아웃웨어, 골프의류와 액세서리 탄생의 뒷받침이 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랄프 로렌은 여성의류 콜렉션을 1971년 선보였다. 랄프 로렌 여성의류는 햅번이나 가르보 스타일로 규정짓기도 한다. 활동적이고 독립적이며 내적으로는 우아함을 소유한 여성을 이미지화시키고 있다. 이밖에 폴로 스카프, 양말, 수영복, 안경, 선글라스, 잠옷, 아동복, 슈즈, 홈패션 등 폴로 랄프 로렌 이미지의 토탈패션을 창출했다.
■ 손니아 리키엘 SONIA RYKIEL
소니아 리키엘 니트의 여왕 소니아 리키엘. 그녀는 매년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고 그에 어울리는 콜렉션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곤 한다. 소니아 리키엘의 이번 시즌 테마이다. 소니아 리키엘 추동 콜렉션은 사랑에 빠진 여인,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을 즐기는 여인, 인조 모피나 인조 보석으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 신비한 여인, 어떤 일이라도 즐길 줄 아는 애교스러운 여인, 모자를 잘 쓰는 여인, 연극 속 배우처럼 자기의 역할에 충실한 여인 등 자신만의 독특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위한 트렌드를 제시하고 있다. 작년에 이어 곡선미를 그대로 드러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살리고 여성스러움을 최대한 살려 주는 실루엣 특징이다. 레드, 브라운, 퍼플, 다크 그린, 블랙, 그레이, 옐로우 등의 컬러를 주로 사용했으며, 스트라이프, 단추 무늬, 벨트 무늬 등을 넣은 자카드 니트, 인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풀 오버, 인조 모피 코트, 벨벳 코트, 레이스 스커트, 마라부 깃털 장식이 가미되어 화려한 수트, 스모킹 팬츠, 저지 소재의 튜닉 등이 소개된다. 수트의 경우 소니아 리키엘의 토털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풍부한 질감의 소재와 커팅의 환상적인 하모니가 이번 콜렉션의 주된 특징이다.
■ 타투 TAG HEUER
1000분의 1초를 다투는 F1 그랑프리 자동차 경주. 이 대회의 공식 계측시계로 재지명된 스위스 정통 스포츠워치 태그 호이어는 1860년 애드와르드 호이어가 창업한 이래 137년을 지켜온 스포츠 시계 제1인자로의 위치를 재확인하였다. 이처럼 초 정밀성을 자랑하는 태그호이어라면 공장도 최첨단 하이테크를 구사하여 모든공정은 로봇이 대신하고 있을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공장에 가보면 너무도 많은 사람이 시계제작에 몰두 해 있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물론 제조라인의 합리화나 기계화는 충분히 이루어져 있으나 시계제조의 핵심 부분은 반드시 핵심부분은 숙련된 장인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든것을 기계나 로봇이 한다면 생산량은 확실히 증가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문에 태그호이어가 자랑하는 정밀도나 신뢰성을 잃는다면 본말이 전도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태그호이어는 성능과 디자인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시계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태그호이어를 세계에서 가장사랑 받는 시계의 하나로 만들었던 원동력이다. 소재구입에서 완성까지 수많은 부품 하나하나부터 미적테스트라 불리는 외관체크까지 베테랑 장인이 대형 루페를 들고 가혹 하리만큼 철저히 체크한다. 태그호이어를 손바닥에 놓고 자세히 살펴보라 .장인의 솜씨와 엄격한 정신이 보일 것이다. 스포츠 워치의 최정상,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에르메스 HERMES
예술로 불리우는 에르메스의 정신은 150년간 6대에 걸쳐 변함없이 전과정을 수작업으로만 하는 완벽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된다. 원래 프랑스에서 마구를 만드는 메이커로 출발, 1837년 마구상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훗날 자신의 성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메스는 말의 장식품을 제작했고 1879년에는 마구도 제작했다. 자동차가 출현하자 에르메스는 피혁제품과 여행용 가방, 그리고 일반 가방과 핸드백류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했고 뛰어난 기술의 장인들이 마구를 꿰매던 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적용, 최고의 품질을 보장받았다. 창립 후 5대를 이어오면서 12개의 계열사로 이루어진 에르메스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확장과 발전을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명쾌한 스타일과 단순성, 품질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에르메스의 모든 상품은 파리에서만 생산 일체의 라이센스가 없으며 스카프는 리옹에서 가죽제품은 뽕당에서 생산한다. 에르메스에서 장인정신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가죽제품은 특히 제품 한 개당 한사람의 장인정신에 의해 전 작업과정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모든 가방에는 이를 만든 장인에게 가방의 수리를 직접 요청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르메스의 가방을 대를 물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파리의 직업학교에서는 에르메스의 가죽 마스터가 평생의 꿈으로 학생들이 벽에 에르메스의 로고를 붙여놓고 공부할 정도로 유명하다.
에르메스의 백중 유명한 것은 역시 켈리백이다. 이 백은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가 캐롤라인 공주를 임신했을 때 배를 가리기 위해 가장 큰 사이즈의 켈리 백을 든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 폭박적인 인기를 끌었다. 켈리백은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제품을 기다려 할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늘 공급이 부족한 아이템이다.
이밖에 H자 마크로 유명한 콘스탄스 백, 세계 최초로 지퍼를 단 백인 볼리드 백 등도 인기가 높다. 가죽제품에는 핸드백, 가방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 가죽상자, 말안장 등이 포함된다. 에르메스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품목으로는 스카프가 있다. 매년 주제에 맞춰 12가지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스카프는 생생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감으로 미국 워싱턴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유명하다.
■ 지안프랑코페레 GIAN FRANCO FERRE
아르마니, 베르사체와 더불어 이탈리아 3대 패션의 거장으로 꼽히는 지안 프랑코 페레는 밀라노 공과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건축학도였다. 건축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페레가 막연히 품고있던 패션에 대한 열망이 졸업후 그를 폐션계에 뛰어들도록 자극했다. 페레는 처음에 가구 디자이너로 출발하여 액세서리 벨트등을 디자인하다가 프레타포르테의 창사자인 월터 알바니에게 인정받아 패션계에 입문했다. 그가 패션계에 입문하고 나서 첫 작품으로 내놓은 것은 대중적인 것을 주제로 한 보석과 벨트 디자인으로 이것들은 언론에 큰 호평을 받았다. 1976년에는 밀라너 컬렉션에 데뷔 1978년 여성복 [ 지안 프랑코 페레 돈나 ]로 인간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은 없다는 철학을 나타냈다. 건축도 답게 조형적인 라인을 훌륭하게 빚어내는 그는 새로운 감각과 멋을 추구하는 현대 여성을 이미지화하여 확신에 찬 힘있는 여성의 이미지를 표현했다. 특히 강한 빨강과 흰색, 검정의 배색은 극적이고 명확한 그의 개성을 나타냈다. 이어 1981 년 시작한 남성복은 확신에 차고 까다롭지만 휴머니즘과 환상을 갖춘 남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작품에서 수줍음이나 소박한 느낌을 표현하는 대신 윤곽이 뚜렷하고 개성이 강한 힘있는 여성과 남성을 그렸다. 페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으로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어울려 놀기보다 피카소의 그림이나 벤츄라의 작품에 관심을 쏟는 등 조용하고 침묵을 즐긴다고 알려져 있다. 1989년 크리스티앙 디오르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임명되면서 페레는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게된다. 그의 독특한 창작성은 각 언론사의 찬사로 이어져 그를 [ 이태리 패션계 의 푸랭크 로이드 라이트 ]라고 표현했고 파리 오뛰꾸뜨르에서 최고의 영예인 황금 골무상을 수상했다. 스스로 인도를 비롯한 동양 특유의 색채 감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페레는 이탈리아의 섹시하고 감각적인 멋과 프랑스인의 명예와 이탈리아인 자존심을 동시에 만족 시켜준 디자이너이다. 지난 F/W 페레 남성복의 경향은 좁은 칼라와 단추가 높게 달린 긴 재킷, 발틱 함대의 시켜준 디자이너이다.
■ 버버리 BURBERRYS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 영국이 낳은 것은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이다. 특히 코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토마스 버버리의 [버버리]는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탄생한 옷. 1835년 영국 남서부의 셔리주에서 태어난 버버리는 20살이라는 나이에 포목상의 주인으로서 당시 농부들이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버버리는 이 옷의 소재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세탁하기에도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다른 직물에 이용해보기로 결심하고 소재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8년 [개버딘]이라는 천을 개발했다. [개버딘]은 미리 방수처리한 면사를 촘촘히 직조한 후에 다시 한 번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방수성이 뛰어나고 비나 눈을 맞아도 한기를 느끼지 못할 만큼 보온력이 뛰어나며 더운 기후에서도 열을 차단하는 내수성과 내구성, 통기성 및 단열성이 뛰어난 천. 1세기 전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소재였던 [개버딘]은 많은 스포츠 애호가들과 탐험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아문잰과 스코트도 개버딘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남극탐험에 성공했고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했던 알콕경도 이 소재로 만든 특수 방수복과 텐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개버딘의 우수성과 뛰어난 실용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개버딘은 당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도 애용해 그는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하인들에게 말해 오늘날 영국의 상징처럼 되버린 [버버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버버리사를 대표하는 품목인 [트렌치 코트]는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참호(Trench)에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때 50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착용, 방수복으로 많은 각광을 받았으며, 영국 육군성과 해병대도 공식 방수복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 후 전쟁의 형태가 참호전으로 발전하자 버버리 방수복에 견장과 군장비를 담을 수 있도록 'D고리(앞면에는 수류탄을 뒷면에는 칼을 휴대하도록 고안)'를 부착한 새로운 스타일의 코트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트렌치 코트]이다.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는 '라글란 소매(Raglan Sleeve : 팔이 움직이기 쉽도록 되어있어 운동량이 많은 옷에 좋은 소매)'와 가슴쪽의 비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스톰 플랩(Storm Flap : 비바람을 막기위해 오른쪽 어깨 위에 덮는 천)'이 달린 나폴레옹 칼라 등으로 실용성이 뛰어난 이 코트는 디자인이나 길이로써 그때 그때의 유행을 반영해 변화를 주기도 한다.
■ 피아제 PIAGET
PIAGET 피아제 쥬라산맥에 위치한 '라 꼬뜨 오페(La Cote Aux Fees)'는 제네바와 더불어 시계의 명산지로 유명한 도시이자피아제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1874년 조르주 피아제가 다이얼에 Piagel & Co.라 새긴 시계를 조립하여 동네주민들을 상대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 100여년이 넘는 피아제 역사의 시작. 대를 이어 오고 있는 피아제 그룹은 4대 회장인 발렌틴이 1950년대에 두께가 3mm에 불과한 초박형 시계를 생산하고, 70년대에는 고급시계에 전자부속을 사용하여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최고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피아제가 세계적인 시계가문으로 그 위치가 흔들리지 않은 것은 기능성을 최고로 여기던 50년대, 진주, 산호,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의 보석을 사용하여 고급스러운 장식적 요소를 첨가하였기 때문이다. 874번의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내부구조가 완성되는 피아제는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완벽한 모습으로 탄생된다. 보통의 시계회사들이 시계줄이나 케이스는 다른 전문회사에 의뢰하는데 반해, 피아제는 자사제품의 디자인과 회사의 경영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우려, 모든 부품을 자가 제조하며 제품이 완성되기 전까지 철저한 보안관리를 유지한다.
최근 피아제는 새로운 모델을 추가하여 더욱 스타일을 다양화하고 있다. 1991년 제네바의 국제고급시계박람회에서 선보인 사각형의 '타나그라', 무대에서 선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한 '댄서콜렉션'은 피아제의 '페스트 셀러'가 되었다. 살바도르 달리 등 당대의 예술가를 제작에 참여시켜 예술의 경지를 높이고 있는 피아제는 '시간을 새기는 예술품'이라 불리며,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 장 폴 고띠에 JEAN PAUL GAULTIER
[ 여성들이 의상을 선택하고 입는 행위는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 ]
자신만의 철학을 고집하는 [ 쟝 폴 고띠에 ]는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면서도 옛스러운 스타일 과 혼합한 실루엣을 그의 의상 세계속에서 보여준다. 우울하고 답답한 80년대 파리에 깐짝 놀랄정도의 획기적인 콜렉션으로 큰 충격을 몰고온 디자이너 [ 쟝 폴 고띠에 ]. 하나의 디자인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담으려는 그는 디자인 을 단순화해 클립 대신 지퍼와 단추를 사용했으며 바쁜 현대 여성들의 편의를 위해 주머니도 여러 개를 달아 그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는 쟝르별,성별, 문화 등의 상식이라는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이종 교배와 혼합을 유머 스럽게, 때론 도발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컬렉션은 언제나 새롭고 유니크하다. 이같은 컨셉으로 쟝 폴 골띠에는 영화, 뮤지컬과 마돈나의 의상을 담당하며 스타에서 일반인 에게까지 다양한 고객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그는 옷의 일부분만 구멍을 내거나 도려내어 몸의 한 부위만 자극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스타일인 ' 컷 아웃 스타일을 제시해 인체의 아름다운 선과 부분에 대한 감각적인 미를 새럽게 보여주었다. [ 쟝 폴 고띠에 ]는 52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7세때 피에르 가르뎅에 의상 스케치를 인정 받아 1년 동안 그의 보조 디자이너로 근무하게된것이 패션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 동기이다. 그후 기성복 디자이너를 거쳐 [ 장 파뚜 ]에 입사. 오뜨 꾸뛰르와 기성복 부띠끄의 액세서리 디자인을 담당했다. 86년 처음으로 자신의 부띠끄를 오픈한 그는 전위적인 디자인을 강점으로 84년에서 86년 까지 네 시즌동안 저널드 텍스타일사의파리 프레타 뽀르떼 인기 랭킹 1위에 올랐다. [ 쟝 폴 고띠에 ]컬렉션은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했다. 먼저 " 액티브 스포츠 웨어 "스타일은 85년 이후의 조깅이나 에어로빅 붐을 유행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스타일이다.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운동복을 멋지게 만들어 새로운 패션 쟝르를 기획했다는 데서 주목하며 " 믹스 스타일 "로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두 소재를 섞어놓은 것으로 전통적인 바로크 스타일이 러플 블라우스와 현재의 블랙진과의 조화, 여성복과 남성복을 믹스하여 성에 구별된 옷의 개념을 뒤집어 패션계에 충격을 주었다.
■ 질 샌더 JIL SANDER
1945년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디자이너 질 샌더는 텍스타일 엔지니어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가 대학에 다니면서 여성지 [McCALL's ]의 패션 기자로 일했다.
곧 저널리즘에 경력을 쌓아 함부르크의 잡지 [ constanze ]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독일 패션잡지 페트라의 편집장을역임했다. 그녀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일하기 시작, 1968년 함부르크 포젤도르프에서 자신의 브랜드 를 런칭했고 1973년 첫 컬렉션을 선보였다.
1982년 린넨 사묵국으로부터 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 인정 받기 시작한 샌더의 의상은 하상 입을 수 있으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옷으로 평가 받고 있다.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는 평상 복 이면서도 결코 값싸보이지 않는 그녀의 옷은 실용적이면서도 우아함을 추구하는 독일 여성들의 구미에 맞아 떨어졌고 질 샌더의 프레타 포르테라인은 꾸준히 성장을 거듭했다.
함부르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질 샌더사는 114명의 스태프를 두고 지난 3년간 최고의 성공 적인 판매 실적을 거두었다. 하이 웨이스트의 칼라가 좁은 재킷과 슬림한 팬츠의 매치,장식 을 달지 않은 심플한 라인의 원피스나 니트 가디건에 폭 넓은 팬츠를 입어 편안해 보이는 샌더룩은 쇼를 위한 의상이 아니라 현대 여성의 생활에 필요한 현실적인 의상으로 인기를 모은다.
혁신적인 고품질의 옷감과 현대적이고 권위적인 그리고 자율적인 도시의 여성을 위한 디자인 컨셉을 가지고 순수함, 편안함, 도시풍의 현대적인 여성을 위한 옷이라는 슬로 건 아래 전개되는 그들의 라인은 현재 3개 정도이다. 타 브랜드들이 저가 라인을 많이 생상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그녀의 고집은 이미 패션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 샤넬 CHANEL
20세기 최고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코코샤넬" "그랜드 마드모아젤"이라 애칭되던 20세기 최대 디자이너의 한사람이다. 1883년 8월 프랑스의 오베르뉴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18세까지 고아를 교육시키는 엄격한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이때 입었던 검은 제복은 후에 샤넬의 의상에 종교적인 엄숙함을 반영시키는데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남성 디자이너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여성복 세계에서 유일하게 첫 번째로 승리한 여성인 샤넬은 처음에는 파리의 조그만 모자가게의 디자이너로서 출발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10년 경부터 패션계에 진출해 여성복 디자인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파리 캉봉가에 그녀의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다. 심플하고 스포티한 옷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여러 개의 혁명적인 디자인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남성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공장과 회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여성들은 당연히 편안하고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을 선호하게 됐다. 그 예로써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상의가 길고 스커트가 짧은 남성스런 옷(가르손느룩)을 창안하여 복식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스웨터를 일상복과 함께 입기도 하고 저지를 옷의 소재에 사용한다든가 스포티하고 입기 편리한 복장의 보급에 힘씀으로 그녀는 30년대 유럽과 남미, 중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9년에 폐점하고 향수의 샤넬 NO. 5를 발표해 이 분야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 샤넬은 파리로 돌아와서 소위 "샤넬룩"이라 불리는 가디건 수트, 사슬끈을 단 퀼팅의 핸드백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샤넬은 1954년부터 1971년까지는 파리 모드계의 전무후무한 여왕으로 군림했다. 장식이 달린 정장 투피스, 모슬린 원피스, 두터운 퀼팅 핸드백, 동백꽃, 모조 보석, 금색 체인, 검정과 흰색의 장난스런 조화, 반 모드의 모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샤넬룩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1971년 1월의 컬렉션 준비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샤넬은 사생활이나 연애도 매우 다채로웠으며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콕토, 디이기레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전설적인 화제가 많다. 현재는 칼 라거펠트가 디자이너로 샤넬라인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샤넬의 패션은 편안함, 활동성, 심플함에 우아함을 가미,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영원한 브랜드다.
■ 프라다 PRADA
패션계 안티룩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프라다]는 입기편하고, 세련되며 우아한 클래스가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적지않은 브랜드 중 하나다. 밀라노의 유명한 가죽제품 메이커인 프라다의 상속인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 정치학을 공부한 좌익학생 이었다.
밀라노 유명 가죽제품 사업을 상속받은 그녀는 조부의 마리오의 사업을 이어받아 오늘날 토틀 패션을 지향하는 국제적인 패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78년 전통적인 가죽 백의 전통을 이어 미우치아 프라다는 프라다백을 창조한다. 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지만 당시에는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행동파 여성들을 위한 우아하고 견고한 나일론 소재의 가방으로 당시의 모드와는 완전히 다른 가방이었다.
그후 80년대 경영학을 전공한 기업인인 남편 파트리지오 베르델리와 만나면서 프라다의 사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마구공 장식의 가죽백에서 나일론 레인코트,베이지와 갈색을 조화시킨 마스코트 컬러에 이르기까지,프라다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뚜렷하다. 튀지않은 옷 특별히 [섹스 심벌]로 불리우는 몇몇의 소수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즐겁기를 원하는 [ 보통 아줌마 ] 를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세계다. 데생이나 재봉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단순하고 클래식한 형태에서 순수하게 본능을 따라 창작 작업을 하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백에 이어 제화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1988년에는 최초의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발표했다.
부부가 창작과 제조를 맡은 프라다 에서는 제조 전 과정에 있어서는 엄격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소비자의 욕구를 잘 감지하고 재빠르게 들어준다는 점이 프라다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나일론 파커, 소매없는 짧은 원피스, 무릎까지오는 블루 마린 스커트에 가는 벨트, 검은 개버딘 밀리터리 외투에 이르는 옷들로 패션을 주도해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우아함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창조 하는 것이다. 프라다 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수 없는 특징을 가지지만 프라다 나름의 친숙함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왔다. 프라다의 옷에는 한순간반짝이는 인기가 아닌 영원히 사랑받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련됨이 있다.
■ 미소니 MISSONI
자연이 제공하는 신비한 색채의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소재와 결합시켜 입체감을 불어넣고 있는 니트웨어의 대명사 미소니. 미소니는 최근에 마젤란의 구름, 일식, 혜성, 달의 궤도, 별을 상징하는 컬러와 디자인의 니트웨어를 선보이고 있다. 마치 거대한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미소니의 컬러배합을 통해 나타난다. 솔기 자국 하나 없이 커팅된 튜닉 스웨터, 니트조직처럼 처리된 밍크, 무늬가 들어간 가죽 등은 미소니의 새로운 기법을 보여 주는 예들이다. 미소니만의 가벼운 코트, 아래 부분이 넓은 스트레이트 바지, 이에 어울리는 재킷 등은 여전히 사랑받는 아이템이며, 주로 사용된 컬러는 레드, 블루, 브라운, 블랙이다.
■ 겐조 KENZO
세상에서 가장 예쁜 옷 [인생은 결국 건강해야 한다]라는 [겐조]의 이야기는 그가 사랑하는 패션관이다. [겐조]는 의상 만이 아닌 연극, 그림, 오래된 건물, 집안을 꾸미는 재료, 모든 행위까지도 패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생활이 건전하게 지켜지고, 건강함이 유지되어야만 즐길수 있고 그런 건강하고 자유스러운 패션세계 이외에 사회활동에서도 항상 건강함을 추구한다.
[겐조]의 패션세계는 즐겁고, 밝고, 건강하고, 자유스럽다. 또, 동i서양의 즐거움, 아름다움, 미소가 어우러져 표출되는 [겐조]는 오리지날 라인의 겐조 파리, 겐조 정글, 겐조 진, 겐조 옴므외에도 액세서리, 침구류, 향수, 화장품 등이 있다. 39년생인 [겐조]는 고교시절 "선플라워"라는 잡지를 애독하는 누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잡지에 나오는 다양한 디자인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패션을 배웠다. 그는 고교졸업후, 3년간 일본가게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을 한다음, 65년 그의 꿈인 파리로 떠났다. 처음 그의 의도는 일하러 가는 것이 아니고 단지 보러 가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운 파리생활을 잘 이겨냈고 우연히 백화점에서 일을 하다 "피산트"에 의해 고용되어 여러 가지 컬러링 테크닉을 배웠다. 30세가 되서야 비로소 [겐조]는 중고가게를 하였고 오띄꾸띄르에 참여하면서 겐조스타일을 구축하게 된다. 70년 4월 첫 부탁을 오픈하면서 가진 첫 패션쇼후 겐조는 "엘르" 잡지의 표지모델이 되었고 패션계에 화려하게 등단, 그후로 그의 스타일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파리의 성벽과 하늘 모든 행인의 모습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는 그는 "프리덤, 자이어티, 인스피레이션, 해피니스, 페스티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7개의 테마아래 겐조 만의 스타일을 전개하고 있다.
[겐조]는 우선으로 신체의 자유로움 의복의 편안함, 활동의 원활함을 강조하면서 업계 최초로 기모노에 사용했던 플랫 커팅방법을 시도했고 느슨하게 신체에 맞추면서 다아트를 배제한 직선타입의 새로운 형태를 전개해 나갔다. 그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여유로운 스타일을 고집하면서도 다아트와 캔버스의 배제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딱딱함을 유연함과 넉넉함으로 표현했다.
[겐조]의 유통망은 세계 유명패션도시에 60여개의 부틱이 전개되어 있으며 이외에 유명 백화점, 전문점 등이 500여개 있다. 가격대는 수트90-100만원대, 재킷 50-80만원대, 셔츠 15-20만원대, 점퍼 60-80만원대, 바지 25만원대이다.
■ 도나카렌DKNY Donna Karan
가장 뉴욕적인 디자인 [내가 디자인하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도나카렌(Donna Karan)]의 최고 경영자 도나 카렌은 아내, 엄마, 친구이자 직장인으로서 생활해야만 하는 대도시 여성들을 대상으로 옷을 만들어 왔다. 그녀의 옷은 블랙 캐시미어, 신축성 소재, 바디수트 등을 이용해 몸을 감싸는 실루엣으로 늘 편안하며 고급스럽고 또한 감각적이다.
[나는 하루를 예측할 수 없이 바삐 움직이는 대도시의 남성과 여성을 위해 일합니다. 그것이 바로 [도나카렌]에 "뉴욕"을 삽입한 이유죠] 도나 카렌의 패션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은 뉴욕 파슨스 스쿨 2학년 때 [앤클라인]에 근무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보조 디자이너로 3년 만인 1974년 앤 클라인이 세상을 뜨자 그 후계자로 지명됐고, 다시 1년후 파슨스 시절의 친구인 루이스 델로리오와 함께 [앤클라인 컬렉션]을 맡게 됐다. 또한 1982년에는 [DKNY]의 시발점이 된 [앤클라인 II]를 발표했다. 10년 후 카렌은 남편과 앤클라인사의 대주주였던 타키요사와의 지원으로 1985년 가을 첫 [도나카렌]의 뉴욕 콜렉션을 선보이게 된다.
그 후 그녀의 사업은 날로 성장, 개점이래로 1990년까지 미국패션디자인협회(CFDA)로부터 코티상을 6회 수상하고 1985년, 1900년, 1996년에 그 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되기도 했다. [도나카렌]은 창사이래로 단지 옷뿐만이 아니라 머리에서 발끝까지, 주중에서 주말까지의 전체적인 구상을 한다.
특히 1992년 카렌의 [씨그니쳐 향수]는 그해 최고의 향수로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이에 힘입어 목욕용품과 바디 콜렉션 그리고 스킨케어 라인인 도나카렌 뉴욕포뮬라와 DK 남성향수, 화장품들이 소개됐다. 여기서 남성향수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명예를 안겨주며 그 독특한 향수병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카렌은 가능한 많은 시간을 모교인 뉴욕 파슨스 스쿨에서 강의하고 학생들과 토론하면서 보낸다. 이에 1987년에는 파슨스로부터 명예학위를 수여받았으며 현재 이사회의 일원으로 있다. 카렌은 그녀가 보는 모든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특히 가족은 그녀의 가장 소중한 부분으로서 그녀와 그녀의 옷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83년에 결혼해 지금은 네 아이의 할머니이기도 한 그녀의 이런 면들이 도나카렌의 여러 브랜드(아동복, 남성복 등)를 만들어낸 계기가 되었다.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어떤 방식으로 옷차림이 간편화되면 우리가 삶의 순간들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편안함에 고급스러움을 부가할 수 있을까? 등에 대한 생각들을 하게 합니다]. 이런 도나카렌의 생각들이 오늘날 '가장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적이면서도 가장 미국적인' 브랜드, [도나카렌(Donna Karan)]을 성공적으로 이끈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 입생로랑 YVES SAINT LAURENT
올해 61세에 접어든 입생 로랑은 프랑스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디자이너. 17세의 나이에 보그지에 스케치가 게재된 이후 그는 크리스챤 디올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패션계에 정식 입문하게 됐으며, 1958년부터는 피에르 버그(Pierre Berge)와 사업 파트너로 자신의 패션 하우스를 시작해 오늘날까지 오뜨 꾸뛰르를 비롯하여 기성복 라인인 리브 고쉬와 여성복과 남성복, 모피 라인인 Yves Saint Lasrent Fourrure, 액세서리, 화장품, gidt 등으로 사업을 확장시켜 왔으며 유럽, 캐나다, 일본, 한국과 호주에서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그는 첫번째 컬렉션에서 선보인 사다리꼴 룩을 비롯하여 몬드리안 룩, 밀리터리 룩, 사파리 룩 등 그가 수많은 룩을 히트시켰으며 남성복의 턱시도 스타일을 여성복화한 턱시도 룩은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이 되었다. 40년이 넘는 경력에 걸맞게 그의 패션 세계는 그 깊이를 더해가고 있으며 클래식을 바탕으로 절제된 심플리티 속에 그의 생각을 담아 내려고 하는 시도와 컬러 모자이크는 감탄을 자아내곤 한다. 모던함과 여성스러움으로 90년대를 받아들이면서 다음 세기를 향한 창조적인 작업을 계속하고 있는 입생로랑은 기능성과 편안함이라는 현 시대의 중요한 요구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면서 패션을 전개시키고 있다. 96/97 그의 컬렉션에서는 특유의 바지나 스커트 정장을 비롯하여 편안한 풀오버와의 매치. 저지 튜닉 그룹에서의 컬러 감각 등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벨벳과 새틴 소재를 사용하여 화려함을 연출하고 있다. 패션 외에도 입생로랑은 발레, 연극, 영화, 쇼 등을 통해서도 꾸준히 그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까뜨린느 드느브와의 활동을 들 수 있겠다.
명성에 걸맞게 그는 1983년에는 Larousse 사전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으며 같은 해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25주년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이는 살아 있는 디자이너로는 처음 있는 일로 기록되고 있다.
그 외에도 북경 회고전. 일본에서의 전시, 1992년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의 30주년 축하쇼, 1989년 퐁피두 센터에서의 사진전 등으로 역사적인 디자이너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 조르지오 아르마니 GIORGIO ARMANI
결코 모델을 위한 옷을 만들지 않는다, 일하는 사람을 위해 옷을 만든다. 군더더기 없이 쾌적함을 강조하면서 세련되고 엘레강스한 멋으로 호사가나 명사들을 위한 명품이 아니라 캐리어맨을 위한 옷. 조르지오 아르마니 ( Giorgio armani ) 이같은 컨셉으로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워런 비티, 더스틴 호프만, 잭 니콜슨 등과 같은 스타에서 일반인에게 까지 다양한 고객으로 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1934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열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피아첸자 ( Piocenza ) 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의학교에 입학해 의학도의 길을 걸었으나1957년 부터 1964년 까지 리나 센테 ( La Rinascente ) 백화점에서 바이어로 일하게 되면서 패션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기서의 경험이 그에게 정확한 재단과 소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제공했으며 이것이야말로 훗날 그가 거의 환상적인 직믈 기술을 지녔 다는 평은 듣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백화점 구매부에서 일한지 7년후 디자이너로 변신해 니노세루티 사에 합류했으며 1970년에는 세루티를 떠나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5년 동안 활약한다.
아르마니가 정식으로 패션계에 데뷔한 것은 1974년, 23세의 젊은 사업가 세르지오 갈레오티와 함께 조르지오 아르마니사를 설립하면서 부터이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남성복은 발표되자마자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여성복을 내놓은지 불과 몇 년만에 그는 세계적인 톱 디자이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가장 대표적인 멋과 품위를표현한 보르고누우보21, 기능성과 클래식한 멋이 담겨져있는 남성복 레콜레지오니, 여성복 마니, 그리고 아르마니의 젊음과 위트가 담겨 진 브랜드 엠포리오 아르마니가 있다. 아르마니 디자인은 일체의 과장이나 기교가 절제된 라인을 통해 돋보이는 넉넉함과 단아함이 최대의 매력으로 꼽힌다.
인간이 외상에 속박되는 상태를 경멸하며 인간과 외상이 하나가 되는 상태, 즉 완벽한 조화를 추구하며 일체의 거추장스러운 치장이 철저히 배제된다. 또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최고급 패션을 지향하는 30-50대 상류층을 타켓으로 하며 색상은 내츄럴 톤을 기본으로 트렌드 색상에서 베이직 색상까지 다양한 색상을 전개하고 있다.
소재는 울과 실크가 기본 소재이며 혼합된 울과 실크, 울과 비스코스 레이온 등이 대표 소재로 쓰인다. 아르마니 매장은 전 세계 150여개 점포가 대부분 단독 매장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매년 500여 가지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고객들의 패션을 리드하고 있다.
■ 크리스티앙 디오르 Christian Dior
모자 디자인의 스케치로 호평을 받아 디자이너로 데뷰한 프라스 꾸띄르에. 1905년 프랑스 그랑빌 출생으로 부유한 실업가 가정에서 태어나 부친의 희망대로 외교관을 지망하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가정의 몰락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태피스트리를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패션 디자인으로 전환, 1938년 로베르 피게사에 들어가 지도를 받았다. 그후 1941년 루시아 뤼통사에 일했고 그곳에서 피에르 발망을 알게 됐다. 1946년 매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열고 오뜨꾸띠르를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 성공을 거둔다. 전쟁과 경제 침체기를 겪은 여자들은 디오르의 풍성한 코롤 (꽃잎) 라인과 당시 황금기에 달한 텍스타일 산업의 산물인 아름다운 직물을 즐겼다.
1949년부터 디올은 5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로 '뉴 룩'이라는 새로운 라인을 발표해 이것을 계기로 패션 혁명을 가져왔다. 디올은 전 세계 여성들의 높은 어깨와 짧은 스커트를 처진 어깨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통 스커트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이로인해 크리스찬 디올이란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지고 1957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 시즌 발표하는 창작 실루엣을 튜립 라인, H라인, Y라인 등으로 이름을 붙여 패션계를 계속 리드했다. 그의 최후의 라인은 스핀들 라인 ( SPINDLE LINE ) 이었다.
스탈린과 간디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 사람들 중 한명으로 꼽혓던 디올이 죽은 후 이브생 로랑, 마르크 보앙 등이 디올사를 이끌어 갔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거장 으로 불리는 지방시의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가 쟝 프랑코 페레에 이어 주임 디자이너로 새로운 디올만의 뉴 룩을 선보이고 있다. 페레는 97년 S/S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디올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의 자사 브랜드 [페레]에만 전념하고 있다.
존 갈리아노는 영국의 디자이너로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졸업 작품은 브라운 백화점에 전시돼 많은 언론과 바이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87년 존 갈리아노는 BGC에 의해 그해의 디자이너로 뽑혔으며 바드의 의상 박물관은 그가 디자인한 옷을 그 해의 옷으로 선정했다. 이 외에도 패션에 관련된 많은 상을 수상했 으며 요즘 뛰어난 평가를 받고있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 지아니 베르사체 GIANNI VERSACE
지아니 베르사체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 창조한 네오 클래시즘의 창시자로서 독특하고 기발한 디자인 아이디어로 세계 패션계에서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인물로 통하는 디자이너이다.
시대를 디자인 하고 싶어하는 디자이너로 헐리우드의 거물급 스타들, 왕족들이 그의 디자인 이 새롭게 발표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입고 있다. 그의 디자인 라인은 오뜨꾸뛰르 라인과 꾸뛰르라인은 지아니 베르사체와 베르사체 진, 베르수스.V2 바이 베르사체, 이스 탄테 등의 서브라인이 있다.
베르사체는 1948년 이탈리아 남부 태생으로 건축을 전공했지만 디자이너였던 어머니를 도와 꾸뛰르 일을 시작했다. 밀라노에서 패션과 텍스타일 공부를 한 후에 제니 칼라칸 등과 프레타 포르테 회사의 디자이너로 일했으며 1978년 자신의 이름으로 첫 컬렉션 을 발표했다.
베르사체는 고대 의상에 심취해 있는 신고전주의자로 과거의 것에서 정교한 기술을 재발견한다고 얘기하며 그리스, 로마 시대의 산뜻한 선과 하늘하늘한 의상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고 있다. 정교한 재단과 세련된 안목으로 활력과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이 디자인은 부담없는 사치스러움을 가지고 있어 동양인의 바디라인을 자연스럽게 돋보이게 해준다.
간결한 세이프, 세련된 래핑( 감싸는 스커트나 말아올리는 식의 셔츠등 몸전체를 휘감는 듯한 아이템 ), 균형과 조화에 대한 정확한 감각이 색체에 대한 그의 영감적인 센스 와 어우러져 전체적인 토털 룩을 창조하고 있다.
그의 색체에 대한 강렬한 욕구는 그의 컬렉션을 통해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에 그의 의상은 개성적인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베르사체 남성복 역시 느슨하고 형식적이지 않은, 남성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디자인으로 런던과 파리를 포함한 세계 도시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 돌체앤가바나Dolce & Gabbana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패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패션이 우리를 쫓아온다]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돌체와 가바나]의 패션관이다. [D & G]는 모든 여성들이 갈망하는 변화와 욕구를 자신들만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지중해의 매력과 정열이 느껴진다. 그리고 40년대의 네오리얼리즘 시대에 대한 향수와 매혹적이고 섹슈얼한 이미지가 어우러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스타일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같은 컨셉으로 돌체 & 가바나는 데미무어, 이자벨 로자리니,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위노나 라이더, 마돈나 등과 같은 스타에서 일반인에게까지 다양한 고객으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그들은 끊임 없는 연구와 과감한 도전, 정열로 세계 모든 이들에게 내면의 아름다움을 제시하고 있으며 세계 패션계를 리드하는 크리에이터로 추앙받고 있다. [도미니코 돌체]는 58년에 태어나 남성복과 여성복을 만드는 아틀리에를 운영하던 아버지 밑에서 처음으로 패션을 배웠다.
62년생인 [스테파노 가바나]는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했다. 밀라노에서 만난 두 사람은 같은 회사에서 일하면서 서로를 알게 되었고 81년부터 동업을 시작했다.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하는 디자인에 대한 의견도 같았고 디자이너가 꿈이었기 때문에 공동으로 자금을 투자하여 85년 밀라노 컬렉션에서 뉴 탤런트(new talents)분야에 그들의 컬렉션을 선보였고 그들의 성공이 시작되었다.
85년 오리지널 드레스 시리즈로 패션 저널 리스트와 바이어들의 큰 호응을 얻었던 이들은 언더웨어, 넥타이, 스카프, 신부복은 물론 패션의 전 장르로 확장했고, 일본의 카시야마 그룹과 판매 계약협정을 맺었다.
90년에는 매혹적인 지중해 나성 무드를 살린 그리페(griffe)를 전세계에 선보였으며 92년과 94년에는 [에센자 델 에선자]라는 이름으로 여성용과 남성용 향수를 판매했다. 이 향수들은 94년 밀라노 "향수 아카데니"에 의해 최고의 향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 후 [베이직(basic)] 컬렉션을 디자인하며 명성을 쌓아온 이들은 94년 [ D & G]컬렉션을 런칭,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스타일로 전 세계의 젊은이에게 토털룩을 제시했다. [D & G]는 자기 개성표현 욕구가 강한 20대 초반에서 20대 후반의 패션리더층을 타겟으로 하며 색상은 내추럴 톤을 기본으로 다양한 원색을 포인트 색상으로 전개하고 있다.
■ 티파니 Tiffany
하이얀 리본,블루박스로 기분좋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티파니의 아름다음은 1837년 찰스루이스가 오픈한 최초의 티파니 매장에서 비롯되다. 티파니의 항상 높은 등급의 원석과 재료를 탁월한 장인 기술로 훌륭하게 디자인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신은 당시 사회적으로 급부상하고 있던 '아메리칸 스타일'과 호응하게 되었다. 160년이 지난 오늘,전세계 100개이상의 매장을 통해 티파니는 모든 축복된 날들을 위한 가장 품위있는 선물의 상징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티파니는 1877년 남아메리카의 킴벌리 광산에서 287.5캐럿의 최상급 다이아몬드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후 1년간 정밀검사 후에 이원석의 절반이상을 깎아냄으로써 지금까지 발견된 팬시 옐로우 다이아몬드 가운데 가장크고 우수한 다이아몬드가 탄생되었다. 불꽃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광채를 발하는 티파니의 다이아몬드는 전통적인 브릴리언트컷에 비해 32면이 더 많은 90면으로 연마되었으며 지금도 뉴욕 5번가 티파니 본점1층에 전시되어있다.
티파니가 판매하고 있는 다이아몬드는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다이아몬드 1%도 채안되는 품질을 자랑한다. 또한 웨딩링으로 유명한 육지 세팅은 최초로 다이아몬드를 뱅드에서 분리시켜 6개의 발이 다이아몬드를 떠받들고 있는 디자인으로 다이아몬드를 통과하는 빛의 반사를 보다 왼벽하게 구현하여 자연스러운 광채가 최대한 살아나도록 하고 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픈 사람들을 위한 티파니는 지난 160년을 거쳐 21세기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광채를 발할 것이다.
■ 테스토니 A.Testoni
테스토니의 구두와 피혁제품은 이태리 중부에 위치하는 볼로냐시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태리 가죽제품의 본고장이며 숙련된 장인들이 모여 양질의 가죽제품을 생산해 내 는 것으로 유명한 볼로냐는 이미 13세기 초부터 최고급 구두로 유명해져 이태리의 귀족과 부호들이 앞다퉈 볼로냐산 구두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구두 전문가들에게 볼로냐는 예부터 소위 가장 편하다는 ' GLOVE EFFECT ' 공법으로 명성이 높았다. 구두 안의 솔기를 두번 박는 특수한 이 구두 밑창 기법은 현재 전 세계에서 테스토니만이 유일하게 전수받아 그 맥을 잇고 있는데, 고객에게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는 독특한 기법으로서 현대의 어떤 기계 나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산에 177공정이나 거치는 '볼로냐 공법 '이다. 이 기법은 숙련된 장인들의 오랜 경험과 기술이 있어야 하며 이런 특징은 테스토니를 전세계 적으로 저명인사들에 의해 선택되어지게 했다. 오늘까지 테스토니의 신조는 오로지 착용자에게 최대로 편안한 최고의 신발 및 가죽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즉 좋은 구두란 부드럽고 앞 부분에 여유가 있으며 유연하게 구부로져야 하는 반면, 중심이 딱딱해서 적당히 체중을 실어주고 발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뒷 부분이 꼭 맞아야 한다. 테스토니는 이러한좋은 구두의 조건에 가장 적합한 구두이며 실리콘 처리를 통한 방수로 발의 통풍을 막거나 공정을 쉽게 하기 위해 화학적 산처리를 하는 일이 없다.
또한 테스토니가 가장 세심하게 신경쓰는 부분, 예를 들어 가죽, 색의 배합, 우아하면서도 유행하는 스타일의 선택은 세계의 안목높은 고객들에게 우아하고 우수함을 보증하는 품질 증명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테스토니 로고는 두 마리의 사자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옛날부터 테스토니 가문의 기본 컬러로 사용되는 보르드색상(와인색)은 한때 왕실 전용의 색이었으며, 어떠한 복장에도 어울리는 색으로 클래식하고 우아한 테스토니의 색으로 대표된다.
■ 까르띠에 CARTIER
까르띠에 컬렉션-까르띠에 예술 [까르띠에]는 1847년 아돌프 피가로의 수제자였던 루이 프랑스와 까르띠에가 31세의 나이로 파리 몬토르게이 거리에 위치한 피가로씨의 보석상을 인수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56년은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를 지배하면서 경제부흥의 시기를 맞은 때였다.
까르띠에는 이런 분위기에 맞춰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였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을 얻어 1899년 파리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부띠끄를 열었다. 까르띠에는 영국 왕실의 웨일즈 왕자에 의해 [왕의 보석상이자 보석 중의 왕]이라는 세례를 받았고 1902년에는 영국 에드워드 7세에 의해 [영국 왕실의 보석 제작자]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 까르띠에의 주 고객은 프랑스의 유지로부터 시작되어 스페인, 포루투갈, 루마니아, 이집트의 왕가, 모나코의 왕족과 귀족, 알바니아 궁전, 미국의 재벌인 록펠러, 밴더빌트, 굴드, 포드사의 가족들과 영국의 윈저공작부인, 세계적인 영화배우 바브라 허튼, 그리고 니나 다이어 등 이루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명사들이 있다. 창업주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 1세는 그의 아들 알프레드에게 기술과 경영권을 물려주었다. 알프레드 역시 아버지의 꿈이자 자신의 꿈이였던 까르띠에의 모든 기술을 그의 세아들에게 이어 주었다. 이들은 각자 고도로 발달된 경영감각 및 최고를 추구하는 미적 감각으로 대단한 창의성과 모험정신을 통해 까르띠에를 [세계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보석상]의 위치에 올려 놓았다. 이들은 프랑스의 부띠끄 외에도 고급패션의 중심지인 영국과 뉴욕의 5번가에 모던 플랜트 빌딩을 짓고 까르띠에 본사를 세워 전세계적으로 그들의 아름다운 보석을 알리고 있다.
또한 최고의 품질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 페르시아만 등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명성에 걸맞는 최고급의 소재를 추구하고 있다. 어느덧 150여년이란 역사를 가지고 최고급 보석만을 생산해 내는 까르띠에는 현대미술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
1925년에 [아르데코 운동]에 앞장섰고 1984년에는 현대미술을 위한 까르띠에 재단을 설립하여 21세기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89, 90년에는 [까르띠에 컬렉션-까르띠에 예술]이란 기획전시회를 파리 쁘리 팔레 박물관에서 열기도 했다.
■ 발리 BALLY
1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최고의 품격과 품질의 대명사로 알려져 온 발리 구두의 생산은 예상 외로 우연한 기회에 시작되었다. 151년 스위스의 쇠넨베르트 ( SCHONENWERD) 에 살던 칼 프란츠 발리라는 고무줄 공장장의 아들은 파리로 출장을 가서 아내의 구두를 사려 했으나 발 싸이즈를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12켤레의 여자구두를 사 가지고 와서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하는 고무 밴드를 붙여 아내가 신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발리는 이렇게 자신의 저택인 펠스가르텐(FELSGARTEN)에서 아내의 구두를 손보며 앞으 로 전 세계 구두 업계를 이끌어 갈 사업을 구상하게 되었다.
■ 구찌 GUCCI
귀족적 취향과 세련된 감각 [구찌]는 이탈리아의 마구아 피혁제품의 생산으로 출발, 격조높은 우아한 귀족적인 취향과 현대여성의 세련된 감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토털 패션 브랜드로 인식 전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브랜드. 창업자인 구치오 구찌씨에 의해 말안장과 가죽 제품을 제조하면서 시작된 [구찌]는 그의 아들 로돌포가 가방, 구두 등의 피혁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로돌포의 아들 모리지오는 숄, 스카프, 향수 등으로 사업을 확장, 지금의 구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가 바로 루치아노 소프라니와 손을 잡고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성립시킨 장본인이다.
네임벨류를 인정받은 구찌의 명예를 바탕으로 프레타 포르테 라인은 성장가도를 달려 오늘날 전세계 1천2백여개의 체인망을 형성하고 있다. [구찌]는 1990년대부터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트렌디하고 모던한 콜렉션과 젊고 경쾌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시킨 주인공은 디자인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이다.
톰포드는 거리나 나이트크럽에서 얻은 새로운 영감으로 섹시한 가죽 샌들, 스파이크 힐, 테크니컬 디자인에 구찌 특유의 금색 말재갈 문양을 혼합시킨 스타일을 등장시켰다. 최첨단의 디자인과 구찌 특유의 전통을 혼합해 놓은 그의 작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구찌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는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를 현대에 맞게 적절히 조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감각은 복고물결에 편승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구찌가 갖고 있던 클래식함과 품격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변형시켜 여성들에게 새로운 섹시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옷은 구찌의 클랙식함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래적인 클래식함과 모던의 미묘한 균형을 찾았으며 이렇게 디자인된 의상들은 구찌의 모든 아이템과 토털 코디네이트 됨으로써 완벽한 룩을 제시, 매시즌 새로운 실루엣으로 끊임없는 변혁의 움직임을 메시지로 전하여 패션계의 이슈가 되고 있다.
■ 막스마라 MAXMAMR
이태리의 대표적인 브랜드 1951년 도토레 아실마라모티에 의해 창립된 이태리의 대표적인 브랜드 막스마라는 1983년에 국제적인 사업을 시작, 전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총 6개의 브랜드를 가지고 전세계 70여개국에 걸쳐 500여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클래식하고 우아한 코트와 베이직한 스타일의 완벽한 코디네이트 룩으로 높은 명성을 쌓아오며 기성복 업체로는 유일하게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가하고 있는 막스마라는 도시 여성의 이미지를 더욱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는 지적이고 클래식한 모든 여성들을 대상으로 일관된 이미지를 펼치고 있다.
또한 스포츠웨어와 시티웨어를 전문으로 패션의 흐름을 잘 반영하는 클래식한 스타일과 하이퀄리티 소재를 사용, 질좋은 품질로 인기가 높은 막스마라는 도시에서 입기에 가장 적절한 타운웨어가 트레이드 마크이며 깨끗하고 심플한 디자인, 쿨한 이미지로 많은 도시여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막스마라는 여성다움을 잃지 않는 도시여성들을 위한 콜렉션인 막스마라(Max Mara)에서부터 보다 젊고 개성적인 표현을 원하는 여성을 위한 트렌디한 스포츠막스(Sportmax), 주말이나 여가시간에 입을 수 있는 자유롭고 경쾌한 콜렉션인 위크엔드(Weekend), 일상을 위한 모던한 스타일의 아이블루스(I Blues), 가장 젊고 캐주얼한 느낌의 블루스클럽(Blues Club) 등 여성의 모든 라이프 스타일을 포괄해서 표현하는 다양한 콜렉션을 전개하고 있으며 각 브랜드마다 유명 크리에이터들에게 일을 맡겼다.
막스마라에서는 대부분의 고객층이 명확하게 형성돼 있다. 다양한 길이의 코트나 스커트에 팬츠를 매치, 이지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가 하면 미드리프 톱과 어울리는 짧은 힙본팬츠, 지퍼로 활동성과 패셔너블함을 강조한 재킷 등은 상큼함을 강조하고 샤프한 수트와 엘리건트한 코트들은 시크한 멋을 강조하는 등 각 고객의 구미에 맞는 다양한 아이템들을 선보인다.
클래식하고 여성스러운 멋이 그대로 살아있는 96 F/W 막스마라 콜렉션은 완벽한 고상함과 자연스러움, 개성을 강조한다. 수트, 코트는 깨끗하고 단순한 라인으로 정리돼 매우 현대적이고 세련된 도시풍 스타일의 실루엣을 제안하며 하이웨이스트와 전체적으로 길어진 기장이 특징이다. 특히 카멜계의 색상을 고급스러운 소재의 사용과 함께 정교한 장식과 완벽한 마무리로 전형적인 엘레강스한 무드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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