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강론(요한 18,1-19,42)
강이냐시오 부제
오늘은 찬미예수님 이라는 인사말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는 말로 여러분에게 저의 죄를 먼저 고백할까!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군중이라는 틈에 숨어 살아남기 위해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자신의 옷을 벗어 나귀의 발굽아래 깔고 푸른 가지 흔들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소리 높여 외치던 예루살렘 백성들도, 죽는 한이 있어도 당신을 모른다 하지 않으리라 큰소리치던 베드로도, 이제는 모두 다 떠나가 버렸습니다. 골고타 언덕 위에 애처로이 처절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한 마리 어린 양, 희망이 끊어진 채 해골산 마루턱에 쓸쓸히 십자나무 한 그루 만이 서 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다윗의 자손” 이라면 외치던 군중의 환호소리, 그 소리는 예수님을 향해 흔들던 푸른 나뭇가지가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가듯 시간이 흐를수록 배신과 음모, 모함과 조롱, 마침내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라고 오늘 우리는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수난성지주일부터 오늘 주님 수난 성금요일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이중성을 바라보며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라고 할 정도의 분노와 자괴심마저 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율법을 준수하며 나름 올바르게 살아가고자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독사의 족속이며 위선자라고 그들의 이중성을 질타했건만 우리 자신의 모습 또한 그들과 못지않음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보게 됩니다.
피조물의 입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며 피조물의 손으로 성체(聖體)에 못을 박아 무참히 십자가에 매달려 죽인 예수님의 주검 앞에 무심히 오늘도 저는 무릎을 꿇고 간절히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없애 달라고, 죽음에서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고통조차 해결 못하고 맥없이 고통 중에 십자가에서 죽은 그분에게 내 고통을 없애 달라고 하니, 이보다 더한 역설이 있을까요?
얼마 전 저희 강화 수도원의 닭장에서는 본능적으로 서열을 정하기 위한 처절한 아빠(父)닭과 아들(子)닭의 결투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결과는 젊은 아들닭의 승리였습니다. 처참히 아들닭에게 볏술이 뜨여져 나가며 왕좌에서 밀려난 아빠닭의 심정, 과거 자신을 따르던 무리는 온데간데없고 힘겹게 홀로 살아가는 아빠닭을 바라볼 때면 예수님께 비춰진 우리의 모습이 이와 같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생각 없는 닭대가리라 그럴 수 있다지만 이성적 사고를 한다는 인간이 어찌 사랑과 정의를 떠들면서 음모와 배신 그리고 폭력과 살인을 예수님께 저질러 수 있습니까?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이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과연 어떻게 하느님의 모상성을 찾을 수 있는지 자문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존경받지 못할 때, 멸시와 모욕을 받을 때, 특히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할 때는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지 못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의 몸을 뚫고 들어온 대못의 쓰라림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과 그들의 모욕, 조롱이 예수님 자신을 더 아프게 하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저의 이런 생각과는 다른 분이셨습니다. 십자가가 위에서 당신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피를 통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우리 인간들과 지금 만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미워하고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구원의 물과 피가 흘러나오도록, 그것을 통해 용서와 화해의 길을 걷도록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변합없으신 주님의 사랑에...인간의 모습은 초라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크신 사랑으로 당신을 내어주시는 주님께 작은 소리의 고백이나마 드리고 싶습니다...
상황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하지만 부자는 자부심이 큰 점도 있지만 성찰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상 자신을 볼 수 있는 힘이 없읍니다. 그리고 어느정도의 욕구가 차면 그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읍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렇게 구약의 예언자 판관 율법등의 여러 방식을 주셨지만 얼마 못가 효력이 떨어지고 변질까지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침묵" 이라는 강수를 쓰셨읍니다.
이는 힘이 없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침묵처럼 가장 강하고 분명한 자기 주장과 반론의 무마는 없읍니다.
빌라도 앞에서도 유다인들과 군중들 앞에서도 묵묵히 그저 그 "침묵"이라는 가장 강한 어필로 인류의 죄를 만방에
적나라하게 들어내시고 또 그 죄들을 안고 성부 하느님께 그러한 인류의 대속으로 자신을 희생하여 우리를 구원하셨읍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면 됩니다.
...그 상처를 통해 구원의 물과 피가 훌러나오도록, 그것을 통해 이해와 사랑의 길을 걷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귀한 말씀 나눠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부활 지나고 읽는 성금요일 묵상이라 느낌이 새롭습니다. 묵상 나눔에 감사드립니다.
용서와 화해 실천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려면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세월이 흘러야 할까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와 화해 한다는게 정말 힘듭니다. 감히 용서라는 말을 하는 것 또한 너무나 건방지지만요.
그러나, 용서는 아니라도 화해를 하려고 손을 내밀고 마음을 열려고 노력 중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가슴에 사무치도록 아픔과 고통이 따름을 느낍니다.또 어떻게 해야 이토록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는지요.회개하며 반성합니다.좋은 강론 감사합니다.가슴에 팍팍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