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봄(0521)
유 병 덕
2015harrison@naver.com
어디가나 빗장이 걸려있다. 어쩌다 나가보면 탐정처럼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코로나 왕국에서 밖으로 나가려니 눈치가 보인다. 내 몸은 가택연금 상태다. 요즈음 집콕이니 방콕이니 하는 신조어가 나오는 것을 보니 처지가 비슷해 보인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인간을 제 방식대로 재배치하고 있다. 이제 부대끼며 살아온 삶의 방식은 박물관으로 보내야 할듯하다.
서재가 유일한 숨 쉴 공간이다. 그러나 서재에 쌓인 책들을 보니 내 마음이 어수선하다. 삭풍이 사라지고 따스한 봄볕이 창틈으로 들어온다. 이쯤 되면 서재에도 봄기운이 피어 날 터인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인들이 선물이라고 준책을 마다않고 들고 온 탓일까. 그런데다가 돌이나 유리, 그리고 알류미늄으로 만든 수많은 패들이 둥지를 틀고 있다. 차가운 삭풍을 몰아내듯 지난흔적을 지워야 봄이 올듯하다.
이곳저곳에서 두더지처럼 흔적이 나타난다. 그간 서로 안면이 있다며 ‘특강이다, 무슨 위원이다.’ 라는 이름으로 소환한다. 까닭도 없는 인물정보회사에서는 최근 활동하는 교수니, 작가니, 농부호칭을 추가하려 한다. 한편으로 고마운 일이지만 내 마음은 아니다. 천상에 구름처럼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고 싶은데 걸림돌이 된다. 내 자유를 더 이상 빼앗지 말라며 두부모 자르듯 끊어버렸다. 이제 서재만 남았다.
서재의 흔적을 몽땅 지우려다 순간 멈칫 했다. 주교님의 말이 떠올라서이다.
“어려운 일이 생겨 중요한 결정할 때 3일만 기다려요”
그를 솔뫼성지에서 만났다. 당초 아시아청년대회로 준비한 것이, 프란치스코 교황까지 방문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교황의전에서부터 방문객 안전에 이르기까지 심란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라 서둘렀다. 그는 기다리라고 한다. 천주교대전교구청과 바티칸 교황청은 우리의 행정 수행방식과 다르다. 교황 일정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키지만 쉬는 시간을 두었다. 이로 인해 교황의 모습이 부드럽게 소화된듯하다. 솔뫼성지와 해미성지에서 아시아청년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서울 광화문 시복식까지 모두가 하나가되어 그날의 감동을 그려낸 것이다. 그 주교님께 기다림과 비움의 미학을 배웠다.
그 때를 생각하며 햄릿처럼 서재를 둘러보았다. 책장에 끼어놓은 책들을 보니 헌법, 행정법, 행정학…, 전문서적들이다. 다시보고 싶지 않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내 곁에서 무지를 일깨워준 스승이다. 자세히 보니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이 떠오른다. 종로경찰서 뒤 고시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K는 지금 뭘 하는지, 사례연구로 화폐의 유통속도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명쾌한 논리로 감동시켰던 그 강사는 지금도 있는지 궁금하다. 서재의 구석구석에 담긴 수많은 지난 일들이 머릿속으로 종횡무진이다.
방 한쪽 모서리에 익숙한 물건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미 유통기간이 끝난 것도 모르고 서로 잘난 체하고 있다. 재질이나 크기, 생긴 것도 제각각이다. 오랫동안 지켜보니 사랑스럽다. 명패, 상패, 훈장증, 학위증서, 기념패, 감사패, 공로패라는 다양한 이름을 달고 있다. 한때 거실 진열장에서 폼 잡고 있던 호시절도 있었지만, 이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끈에 묶여 끌려 나갈 판이다. 하나하나 잡아 만져보니 땀이 녹아있는 징표들이다.
책상 옆에 놓인 노란 메모장무더기가 아른거린다. 30여년 넘게 기록한 나의 역사다. 주요 현안이나 이슈를 정리한 노트다. 국제회의자료, 문화재단 설치, 프란치스코 교황방문 준비, 메르스감염병 관리대책, 백제문화제 행사…, 100여권이 넘어 보인다. 지난세월 함께한지라 헤어지기 싫은가보다. 손으로 잡으려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한쪽 눈을 찔끔 감고 문밖으로 밀어냈다.
지인들이 보내준 책들이 창가에 무질서하다. 내 키 높이만큼 쌓아놓아 봄볕을 가리고 있다. 그사이로 냉기만 흐를 뿐이다. 학위논문, 출판기념 시집, 에세이, 수필, 산문집들이다. 그들의 생각과 영혼을 담아놓은 소중한 산물이라 함부로 할 수 없는 처지다. 이름까지 자필로 써놓아 내다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철학을 오래 연구한 지인에게 물었다. 그는 대학에서 정년퇴임하면서 연구실을 정리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우선 재미와 깨달음 그리고 감동을 주었던 책을 골랐다. 그래도 애매한 것이 있으면, 먼 훗날 다시 꺼내 읽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만한 글귀가 들어있는 책을 을 빼 놓고 모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책의 제목과 내용의 목차를 읽어가며 갈라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또 읽고 싶은 좋은 책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다. 대부분 문밖으로 밀려나갔다. 저자의 친필이 들어있는 쪽은 명예훼손이 될까 두려워 조심스레 뜯어냈다. 서재에서 몰아낸 책들은 해고된 노동자처럼 보였다. 들어 눕기도 하고 거꾸로 서있기도 한다. 언뜻 보니 토사구팽 당했다고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가슴 한쪽이 쿵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이별을 고한다. 헤어짐에 미련을 두는 것은 집착이다. 나와 동거 동락했던 책들과 땀이 얼룩진 흔적을 떼어내는 아픔은 잠시다. 사흘 만에 답답했던 서재가 훤해졌다.
그 주교님의 말대로 비우면 또 새로운 것이 채워진다. 어느새 서재의 빈 공간으로 따스한 봄볕이 숨을 쉰다. 노트북을 꺼내 비대면 강의를 준비하다보니 책상 위로 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제 서재에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