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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업성취 이후 태평과 사치와 향락을 경계하라
진나라는 사마염이 위나라로부터 양위받아 천자가 된 후 16년 만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무제 사마염은 즉위 당시에는 헌상품인 비싼 옷을 사치스러운 물건이라며 태워 버리고 몸소 무명옷을 입고 검소한 모범을 보일 정도로 생활에 절제가 있었으나, 차츰 사치를 일삼고 방종하게 되었다. 그는 대궐에 미녀 만 명을 두게 하였다. 그런데 미녀가 너무 많아 어떤 미녀와 즐길지조차 판단하기 어럽게 되자, 양이 이끄는 작은 수레를 타고 양이 멈추어 서는 곳의 후궁 처소에 들러 환락에 빠졌다. 그러자 미녀들은 그의 총애를 얻고자 자기가 거처하는 집 문에 대나무 잎을 꽂고 소금물을 땅에 뿌려 황제가 자기 방을 찾아 주기를 기다렸다. 왜냐하면 양은 대나무 잎과 소금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 양을 유혹하기 위함이었다. (…) 오나라를 평정하고 나서는 이제는 천하가 태평무사하다고 생각하여 모든 군비를 철거해 버렸다. 이에 그치지 않고 황제는 계속하여 더욱 아름다운 미녀를 구하기에 열을 올렸고, 신하들도 이에 질세라 음탕과 사치의 경쟁을 벌이는 판이 되고 말았다. (서진시대 ; 현대지성본 412-413쪽)
2. 총명하고 인자한 명제
동진 명제의 이름은 사마소인데,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그가 어린 태자였던 어느 날 장안에서 사신이 왔다. 원제가 농담조로 태자 소에게 물었다. “장안이 가까우냐, 태양이 가까우냐?” 그랬더니 태자가 금방 대답하였다. “장안 쪽이 가깝습니다. 사람은 장안에서 올 수 있지만, 태양에서는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제는 그 대답을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 또 언젠가 원제가 여러 신하들과 이야기하다가 여러 신하 앞에서 지난번과 같은 질문을 소에게 던졌다. 그러자 태자가 대답하였다. “태양 쪽이 가깝습니다.” 당황한 아버지 원제는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째서 예전의 대답과 다른 것이냐?” 그러자 소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머리를 들면 태양은 보이지만, 장안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뒤 원제는 더욱 그를 사랑하였다. 소는 커갈수록 인자하고 덕을 갖춘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또한 학문을 좋아하고 무예에 능하였으며, 어진 사람을 존경하였다. 그러면서 언제나 선비를 예의로 대하고 옳은 말이라면 어떤 사람의 제안이라도 잘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유양이나 온교(溫嶠) 등의 평민과도 지위를 차별하지 않고 친하게 사귀었다. (동진시대 ; 현대지성본 433-434쪽)
* 명제는 즉위 후 원제 대부터 반란을 일으킨 형주 자사 왕돈의 진영을 몸소 정탐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 왕돈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여기에 온교 등의 역할이 있었음.
3. 온교가 옷자락을 끊고 임무를 수행하다
진나라 표기장군(驃騎將軍) 온교가 죽었다. 온교는 처음에 유곤에 의해 강동으로 파견되도록 조치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가지 말도록 하였지만 옷자락을 끊고 떠났었다(母不欲 嶠絶裾而去). 이윽고 그곳에 이르고 나서 다시는 북쪽으로 돌아올 수가 없어 종신토록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온교는 진나라 왕실에 마음을 다햐였으며, 왕돈의 난과 소준의 난이 평정된 것도 모두 온교의 힘이었다. (동진시대 ; 동서문화사본 제4권 1291쪽)
* 온교(溫嶠)는 여중군자 장계향의 <학발시>에 나오는 ‘절거(絶裾, 옷자락을 끊음)’의 당사자임.
4. 상황을 분간(分揀)하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얼마 후 진(晉)나라의 안제가 다시 도연명을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진나라가 송(宋)나라에 망한 후 그는 자기의 조상이 진나라의 신하라는 이유로 두 번 다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송나라 문제 때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정절(貞節) 선생’이라 불렀다. 한편 이 무렴 사령운이라는 시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산과 들에서 사냥하기를 좋아하며, 수백 명의 종자(從者)를 데리고 다니며 나무를 베어 길을 내는 등 언제나 거창한 일을 하여 백성들을 놀라게 했다. 어떤 사람이 황제에게 사령운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글을 올렸다. 사령운은 이 말을 듣고 궁중으로 들어가서 다른 뜻이 없음을 변명하여 황제에게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는 전과 다름없이 함부로 처신하여 관리가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사령운은 군사를 일으켜 달아나서 시를 지어 풍자했다. “한(韓)이 멸망하자 장량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서고 / 진시황이 황제가 되자 노중련이 부끄러워했다.” 마침내 관리들은 사령운을 체포해서 광주로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에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남북조시대 ; 현대지성본 467-468쪽)
* 진나라는 東晉을 일컫고, 송나라는 남북조시대 남조의 송나라를 일컬음.
* 전국시대 제나라의 고사(高士) 노중련은, 위나라가 진(秦)나라를 황제국으로 추대하려던 움직임을 강력하게 비판하여 중지시켰는 바, <여중군자 장계향 행실기>에 여중군자의 우국탄식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있음.
5.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건강하게 해야 한다
양나라 무제는 남조시대에 있어 유일무이한 명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사경(四更, 새벽 1~3시)에 일어나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며 서류를 결재하고 공무를 처리하느라 손발이 터질 정도였다. 또 그의 생활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세 끼가 모두 거친 음식이었으며, 이불은 언제나 2년, 모자는 3년을 썼다. 이러한 무제도 만년에 이르러 정치에 싫증을 내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그래서 비단을 짤 때 많은 누에를 죽여야 하기 때문에 살생을 금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다 범인을 처형하게 되면 며칠 동안이나 불쾌한 기분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제위(帝位)에서 물러나 불문(佛門)에 입문하겠다며 네 차례나 동태사라는 큰 절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때마다 신하들이 당황하여 1억만 전이나 되는 엄청난 돈으로 황제를 사는 소동을 벌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무제를 ‘황제 보살’이라 불렀다. 황제 보살은 수많은 사원과 불상을 만들고 불탑을 세웠다. (…) 유명한 달마 대사가 인도에서 건너온 때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 양무제는 즉위한 이래 군비에 마음을 쓰지 않고 오로지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섬겼으므로 군사적으로는 매우 허약하였다. 그래서 후경(동위 출신으로 양나라에 항복한 자)이 대궐로 쳐들어왔을 때 구원병으로 온 군대들이 모두 후경에게 격파당했고, 대궐은 포위한 지 130일 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양무제는 86세의 고령이었지만 여전히 황제로서의 위엄이 있었다. (…) 그 후 양무제는 후경에게 유폐당한 뒤 음식까지도 마음대로 먹지 못해서 울분으로 병이 생겼다. 음식 맛이 써서 꿀을 달라고 했으나 그것을 주지 않자 두 번이나 “고얀 놈 같으니라고” 하며 성난 소리를 지르고는 마침내 죽었다. 양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책망했다. “참으로 자업자득이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남북조시대 ; 현대지성본 476-478쪽)
* 밑줄 친 부분을 ‘사신(捨身)’이라 함. 신라의 법흥왕과 진흥왕도 만년에 왕비와 함께 사신하였다는 문헌기록(「해동고승전」 등)이 있음.
6. 호전(好戰)은 자멸의 첩경이다
드디어 수나라의 모든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였다. 하지만 요동벌판에서의 오랜 악전고투로 말미암아 수나라 군대는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를 알아차린 고구려는 싸움을 걸고 곧 도망치고, 또 싸우고 도망치는 전술을 써서 수나라 군사들의 기운을 빼놓으려 했다. 수나라 군사들은 하루에도 일곱 차례 싸워 일곱 차례 이기는 승전고를 울렸으나 살수를 건널 무렵에는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었다. 이때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사신을 보내 “수나라가 군사를 물리면 곧 수나라에 입조하겠습니다”라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원래 이번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가 입조를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제 고구려가 입조한다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되는 셈이었다. 더구나 군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수 양제는 입조 의사를 받아들이고 철수 명령을 내렸다. 수나라 군사들이 철수하면서 살수를 반쯤 건너는 순간 갑자기 고구려 군사들이 급습하였다. 이때 수나라 군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도망치는 데 급급하여 전멸 상태에 이르렀다(살수대첩). 이때 압록강을 건넌 수나라의 군사는 30만이 넘었으나, 다시 압록강을 건넌 군사는 불과 2천 7백 명뿐이었다. 간신히 목숨을 구해 도망친 수 양제의 체면은 여지없이 구겨졌다. (수나라 ; 현대지성본 492-493쪽)
* 살수대첩은 수나라와 고구려의 두 번째 전쟁이었음. 첫 번째는 수 문제(양견)의 30만 침입으로 허사로 돌아갔고, 두 번째부터 네 번째 전쟁은 수 양제(양광)의 침입에 따른 고구려의 격퇴였음. 세 번째는 살수대첩 이듬해에 있었는데, 수나라 국내에서 양현감과 이밀이 반란을 일으켜 서둘러 귀국해야 했음. 네 번째는 세 번째 침입 이듬해 있었는데, 고구려에 망명해 있던 수나라 병부시랑 곡사정 송환 및 입조 약속으로 조기 퇴각하였음. 이와 같은 수나라의 연이은 무모한 침입은 수나라를 개국 37년 만에 무너지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음.
7. 식견과 지조와 천심
이연의 둘째 아들 이세민은 식견이 매우 넓고 도량이 하늘같이 넓었으며, 게다가 영리하고 빼어난 용기도 있어 결단력이 뛰어났다. 그는 수 양제 시대에 나라가 몹시 어지러워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천하통일의 큰 뜻을 품고 배적이라는 사람과 진양지방의 현령인 유문정과 깊이 사귀었다. 어느 날 유문정이 이세민에게 말했다. (…) 이때부터 이세민은 부하들을 훗날 필요하게 될 요소요소에 몰래 배치시켰다. 그즈음 이연은 국경지방을 침범한 돌궐족을 맞아 싸우고 있었는데, 도무지 신통한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 양제로부터 큰 벌을 받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였다. 이러고 있던 참에 이세민이 이연을 찾아왔다. “지금 수 양제가 잔인무도하고 횡포가 심해서 천하의 백성이 극심한 도탄에 빠져 있습니다. 아버님께서 만약 오늘의 지조를 그대로 지키신다면 결국 엄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우리 집안은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번 기회에 천심으로 따르셔서 의병을 일으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아버님도 곳곳에서 도둑들을 훌륭하게 토벌하셨으므로 그 공적이 많으시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상은 받지 못하시고 오히려 몸만 점점 위태롭게 되실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은 그 화를 미리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00-502쪽)
8. 학문을 좋아하고 좋은 보좌를 받을 것
이세민은 틈만 나면 학관에 가서 학문을 논의하여 때로는 밤중에 이르는 일도 있었다. 일찍이 당 고조(이연) 시절에 이세민의 부하 중 지방으로 전출되는 사람이 많았다. 두여회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지방 전출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방현령이 세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지방에 전출되는 것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두여회는 왕자를 보좌할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얻어 통치하신다면 두여회만한 보좌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민은 이연에게 아뢰어 두여회를 수도에 머물게 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았다. 한편 방현령이 조정에 나가 정사를 아뢸 때마다 고조 이연은 방현령을 칭찬했다. “그대가 내 아들을 위해 여러 가지를 말해 주기 때문에, 나는 비록 아들과 천리나 떨어져 있지만 마치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것과 같소.”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종이 맨 먼저 한 일은 궁녀 3천여 명을 대궐에서 내보낸 것이었다. 태종은 학문을 좋아해서 홍문관을 설치하며 서적 20만여 권을 모으고 학문에 능한 사람을 뽑아서 일을 보게 했다. 태종은 정사를 듣는 때가 되면 학사들을 내전으로 불러 옛날 사람의 언행을 논의하거나 고금의 정치에 대한 장단점을 비교 검토하여 때로는 밤중에 가서야 겨우 그만두곤 하였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08-509쪽)
9. 오직 진심으로 임할 뿐이다
어느 날 한 신하가 글을 올려 아첨하는 신하를 물리치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태종이 물었다. “어떻게 그것을 구별할 수 있겠소?” 이에 그 신하가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짐짓 성을 내시어 시험해 보십시오. 그때 이치를 따져 굽히지 않는 사람은 충직한 신하요, 위엄을 두려워하여 ‘지당합니다’라고 따르는 사람은 아첨하는 신하입니다.” 그러자 태종은 “내가 스스로 그러한 속임수를 쓰고서 어찌 신하들에게 충직하라고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오직 진심으로 임할 뿐이다” 하며 이를 물리쳤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09쪽)
10. 형벌을 무겁게 하기보다는 좋은 정치를 할 것
또 한 신하가 형벌을 무겁게 해서 도둑을 막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에 대해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사치를 금하여 경비를 절약하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세금을 적게 하고, 청렴한 관리를 골라 써서 백성이 먹고 입는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한다면, 저절로 도둑은 없어질 것이다. 무엇 때문에 법을 무겁게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냐?” 그리하여 몇 해 후에는 길에 떨어진 물건이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없었고, 상인이나 나그네는 안심하고 함께 잘 수 있었다. 태종은 일찍이 이런 말을 했다. “천자는 그 나라에 의해 서는 것이요, 나라는 백성에 의해 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을 괴롭혀서 천자 한 사람의 씀씀이에 쓰는 것은 마치 자기 살을 베어 자기 배를 불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짓이다. 배는 불러도 몸은 죽어 가는 것과 같이 임금이 흥해도 나라는 멸망할 것이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09-510쪽)
11.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
태종은 깊은 감회에 젖어 힘들었던 지난 10년을 생각하며 좌우에 있던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나라를 세우는 창업과 나라를 온전히 지키는 수성 중에서 어느 편이 더 어렵겠소?” 그러자 방현령은 창업이 더 어렵다고, 위징은 수성이 더 어렵다고 대답했다. 이들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난 황제는 말했다. “방현령은 나와 함께 천하를 얻기 위하여 몇 번이나 죽을 고비에 부딪치고 나서 겨우 살아 남았으니까 창업의 어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오. 반면에 위징은 천하를 얻은 뒤에 나와 함께 천하를 다스려 항상 교만과 사치는 부귀에서 생겨나고 환난은 일을 소홀하게 하는 데서 생겨남을 두려워하고 있소. 그러니까 수성의 어려움을 알고 있소. 그러나 지금은 창업의 어려움은 지나갔고, 수성의 어려움에 직면해 있소. 이제부터는 경들과 함께 두려워하고 경계하여 이 수성의 업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1-512쪽)
12. 충신보다 양신이 되어야 한다
위징이 어느 날 황제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신을 양신(良臣, 어진 신하)이 되게 하시고, 충신(忠臣, 충직한 신하)이 되게 하지 마옵소서.” 이에 태종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도대체 양신과 충신이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오?” “순임금을 섬긴 직과 설과 고요는 군신이 마음을 합해 천하를 다스리고 함께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것이 신이 말씀드리는 양신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라의 걸왕을 섬긴 관용봉과 은나라의 주왕을 섬긴 비간은 임금의 앞에서 임금의 잘못을 꺾고 공공연하게 임금에게 충언을 하는 바람에 몸은 주살당하고 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신이 말씀드리는 충신입니다.” 황제는 이 말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2-513쪽)
13. 물욕에 얽매이지 말고 어진 사람을 보배로 여길 것
어느 날 한 신하가 태종에게 아뢰었다. “안휘와 강서 지방에서는 은이 많이 납니다. 이것을 정부에서 거두어들이면 해마다 수백만 금의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태종은 “경은 지금까지 한 번도 어진 사람을 추천한 일이 없는데, 지금 은의 이익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옛날 요순은 어진 사람을 보배로 여겨 오직 이것을 얻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구슬은 산에 버리거나 개울에 처넣었소. 한나라 환제와 영제는 이와 반대로 돈을 모아 자기 물건으로 삼았소. 경은 나를 환제나 영제와 같이 물욕에 얽매인 군주가 되게 하려는 것이오?” 하며 그 의견을 물리쳤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5-516쪽)
14. 좋은 정치를 위한 열 가지 조건
정관(貞觀) 13년 여름, 가뭄이 계속되었다. 황제는 신하들에게 무슨 까닭으로 하늘이 화를 내리는 것이냐고 물으며 그 이유를 말해 보라고 했다. 그때 위징은 항목별로 숨김없이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정관 초에 비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점점 소홀해지셔서 끝을 온전히 하지 못하실까 염려되는 열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사신을 보내어 여러 나라에서 거두어들이는 일. 둘째, 검소하지 않고 사치하여 방종하는 일. 셋째, 욕심을 부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 넷째, 소인을 가까이 하고 군자를 멀리하는 일. 다섯째, 진기한 물건을 귀하게 여기고 헛일을 하는 일. 여섯째, 현자를 쓰지 않고 수월하게 어진 사람을 버리는 일. 일곱째, 함부로 사냥을 하는 일. 여덟째, 지방의 관원이 공사(公事)를 아뢰는데 만나 보지 않는 일. 아홉째, 교만해서 욕심이 깊어지고 아무 까닭 없이 함부로 군사를 일으키는 일. 열째, 백성을 부려서 피폐하게 하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태종은 그의 직언에 깊이 감탄했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6쪽)
* ‘貞觀’은 「주역」 계사하전의 “天地之道 貞觀者也(하늘과 땅의 도는 곧게 보는 것이다)”에서 채용한 연호로, 당 태종은 재위 24년간(626~649년) 이를 바꾸지 않고 일관하였으며, 태종의 좋은 정치를 ‘貞觀之治’라 함. 이에 비해 그의 아들 고종(재위 649~683년)은 연호를 빈번하게 바꾸었음(永徽 - 顯慶 - 龍朔 - 麟德 - 乾封 - 總章 - 咸亨 - 上元 - 儀鳳 - 調露 - 永隆 - 開耀 - 永淳 - 弘道). 재위 35년 간에 무려 14차례나 연호를 바꾸었음.
15. 경서에 능통한 사람을 관리로 채용한다
정관 14년, 황제는 국자감대학에 거동하여 친히 공자와 안회에게 제사지내는 예식을 보였다. 이때 널리 천하에 이름난 유학자를 불러 학관으로 삼고, 이 학관들로 하여금 글을 강의하고 토론하게 했다. 학생으로서 한 가지 이상의 경서에 능통한 사람은 관리에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면서 학사(學舍)를 1,200채나 증축하고 학생도 3,260명으로 늘렸다. 또 무관 둔영에도 박사를 보내서 경서를 강의하게 하여 경서에 능통한 사람이 있으면 선발 추천하여 관리로 채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주위 나라의 학자들이 모두 장안으로 모여들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신강, 토번, 일본에서도 자제를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켜 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강의에 참석하는 사람이 8천여 명이나 되었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6쪽)
16. 양신 위징이 죽자 친히 비문을 지은 태종
정관 17년, 위징이 죽었다. 태종이 이 소식을 듣고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이것으로 외관을 바로잡을 수 있다. 옛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세상의 흥망의 인과관계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남을 거울로 삼으면 내 행동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위징이 죽어 나는 진실로 거울 하나를 잃었다”라고 탄식하며, 위징을 장사지낼 때에는 친히 비문을 썼다. (당나라 ; 517쪽)
17. 어진 신하
태종 황제가 난세의 천하를 잘 다스리도록 하는 데 방현령과 두여희의 공로는 컸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공로를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 무렵 왕규와 위징은 곧잘 황제의 잘못을 간했으므로, 방현령과 두여희는 그 두 사람의 어짊에 양보하고 자기들은 관여하지 않았다. 또 이세직과 이정은 군사를 잘 쓰는 명장이었으므로, 방현령과 두여회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그들 두 사람의 군사적 방침을 그대로 실시했다. 그리하여 천하에 태평을 가져왔지만, 이것을 전혀 자기들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황제의 덕으로 돌렸다. 이와 같이 그들은 자기들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공적을 잘 알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당나라의 으뜸가는 신하로 삼을 만한 어진 신하였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9쪽)
18. 군주된 자의 곤란한 점
그해(정관 23년, 649년) 5월에 황제가 세상을 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24년(재위 626~649년)이 되던 해였다. 황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그 다음에는 문교(文敎)와 덕으로 천하를 안정시켰다. 그러면서 황제는 항상 스스로 교만함과 사치스러움을 두려워하였다. 어느 날 황제는 이런 말을 했다. “군주된 자는 오직 한마음으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데, 그 마음을 살피는 자는 무수히 많다. 혹은 힘으로 위협하는 자도 있고, 혹은 변설로써 군주의 시비선악을 바로잡으려 하는 자도 있으며, 혹은 아첨하며 군주의 마음을 사려는 자도 있다. 또 간사한 계교로 속이려는 자도 있고, 군주가 좋아하는 것으로 유혹하려는 자도 있다. 그러한 자들이 수없이 나서서 각기 자기를 내세워 출세를 하려고 한다. 이러한 자들이 팔방에서 모여든다. 그러므로 군주된 자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고 빈틈을 보이게 되면 바로 이들에 말려들어 멸망이 뒤따라올 것이다. 이것이 군주된 자의 곤란한 점이다.” 태종은 위엄 있는 제왕의 풍채를 신하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항상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신하들이 직언하기 쉽도록 유도하고, 직언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후히 주어 충간하는 신하가 가까이 오게 했다. 다만 만년의 고구려 정벌 때 저수량이 간절히 말렸지만, 이를 듣지 않은 일이 한 번 있었을 뿐이다. (당나라 ; 현대지성본 519-521쪽)
19. 측근들에 휘둘리기 쉬움을 명심하라
간신의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문종(당 제14대 황제) 시대의 어느 날, 환관의 우두머리 구사량이 환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천자에게 틈을 줘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술·가무·놀이 등으로 재미있게 해줘야 하며, 그리하여 그 밖의 일은 전혀 생각할 틈이 없도록 해야 한다. 특히 천자가 절대로 책을 읽거나 학자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천자가 지혜로워지고 전대(前代)의 흥망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사물의 도리를 연구하고 시비곡직을 알면 우리 환관들은 배척될 수밖에 없다. 천자가 어리석어야 한다는 것, 바로 이것만이 우리 환관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명심하라.” (당나라 ; 현대지성본 564쪽)
20. 후당 명종과 재상 풍도
후당 명종(이사원)은 근엄하여 여자를 멀리했으며, 사냥 같은 오락을 즐기지 않았다. 또 환관에게 정치를 맡기지 아니하고, 재물을 사사로이 가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청렴 강직한 관리를 발탁해 쓰고, 뇌물을 받는 관리를 처벌했다.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그의 말과 행동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난리가 끊이지 않았던 당시에 오직 명종의 치세 때만은 평화가 유지되었다. 이때 각지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은 매우 어려운 문체와 형식으로 씌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글을 모르는 명종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글을 잘 아는 사람을 등용했는데 선택된 사람이 풍도(馮道, 882~954)였다. 풍도는 후당에서 시작해서 후진·후한·후주에서 모두 중용되었고, 또한 거란에도 입조하여 모두 다섯 나라에서 재상으로 기용된 특이한 인물이다. 즉 5조(朝) 8성(姓) 11군(君)에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처세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하였다. “입은 곧 재앙의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곧 몸을 자르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가는 곳마다 몸이 편하도다(安身處處牢).” (5대 10국 시대 ; 현대지성본 594쪽)
* 풍도의 신조는 ‘사당무실(事當務實, 일은 마땅히 실질에 부합되도록 해야 한다)’이었음(자치통감 후당기 제7권).
21. 5대 10국의 최고 명군 후주 세종
천하 석권을 노리던 세종은 끝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재위 6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은 한 번 명령을 내리면 반드시 그것이 수행되었는지를 맹렬히 추궁하여 수행하지 않았을 경우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기를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성을 공격하고, 적과 접전이 벌어졌을 때 화살이 사방에서 비오듯 해도 태연자약하였다. 임기응변의 재주가 뛰어났으며, 가끔 다른 사람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묘한 계교를 써서 부하 장수들을 놀라게 했다. 또 정치면에서도 매우 총명하고 통찰력이 뛰어나 아첨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음모를 낱낱이 적발해서 벌주었다. 여가가 있으면 유학자를 불러 사서(史書)의 강의를 듣고, 각 왕조 흥망의 원인을 비교 연구했다. 그는 탈세나 병역을 피하기 위해 출가하고 있던 승려들을 환속시켰으며, 절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구리 등을 몰수하여 군사 비용 등 나라의 경제에 사용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이라든지 묘한 노리개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언제나 “나는 감정에 얽매여서 상을 주거나 벌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인사 면에 있어서도 문관과 무관을 공평하게 등용하여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했다. 사람들은 세종의 총명을 두려워했으며 동시에 어진 덕을 사모했다. 그런 그가 애석하게도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가 죽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5대 10국 시대 ; 현대지성본 609쪽)
22. 학문을 익혀 교양에 정통할 것
처음에 태조는 재상 조보에게 좋은 연호를 생각해 보라 하여 ‘건덕(乾德)’으로 고쳤다. 그 뒤 어떤 궁녀가 가지고 있던 촉(蜀)의 거울에 ‘건덕 4년에 이것을 만들었다’고 한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태조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학사 두의를 불러서 그 연고를 묻자 두의가 아뢰었다. “옛날 촉왕이라 참칭한 왕연의 연호에 ‘건덕’이 있었습니다.” 태조는 두의의 말을 듣고는 탄식해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재상에는 학문이 있는 사람을 써야 한다.” 조보는 일찍부터 조광윤(태조)의 작전참모로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며 조광윤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다만 그는 학문을 익히지 않아 교양에 정통하지 못했던 것이 흠이었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17쪽)
23. 북송 태조 조광윤의 리더십
태조는 백성들 가운데 덕행이 있는 사람에겐 상을 주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 사이가 화목한 사람은 관리로 채용했다. 또 인재를 중히 여겨 친히 과거시험 문제를 냈고, 그 응모자를 직접 살펴 인재를 구했으며, 진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의 이름을 발표하여 정실에 의한 합격을 방지했다. 수나라 때부터 실시되었던 과거제도에 의한 인재등용이 실제로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송나라 때부터였다. 그렇게 하여 송나라는 ‘진사 지상주의’였다. 아무리 가문이 좋아도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지 않고서는 좋은 벼슬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뽑은 관리에 대한 대우도 어느 왕조보다 각별하였다. 이런 풍조는 송나라의 ‘문치주의’를 확립시켰다. 바야흐로 당나라와 남북조의 귀족정치, 5대 10국의 군인정치가 가고, 송나라의 문관정치가 된 것이다. 태조는 때때로 국자감을 방문하여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시찰하고, 또 조서를 내려 세상에 묻혀 있는 고전과 진서를 찾도록 하였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30쪽)
24. 학문과 독서를 통해 고금의 성패를 파악한 태종
태종(송 태조 조광윤의 아우)은 학문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짐은 달리 좋아하는 것이 없소. 다만 독서하기를 좋아하는데 책을 통해 고금의 성패를 알아 좋은 점은 따르고 나쁜 점은 경계할 뿐이오.” 그러면서 그 유명한 「태평어람」 1천 권을 1년에 독파하였다. 이에 재상들이 말렸다. “하루 세 권씩이나 보시면 옥체에 매우 해롭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짐은 어릴 적부터 독서를 즐거해 독서의 요령을 터득하고 있소. 책에 유익한 말이 씌어 있으면 결코 지루하지 않소. 옛말에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만 권의 책을 읽는다고 했는데, 그 말은 제법인 것 같소.”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37쪽)
* 송 태종의 명으로 편찬된 「태평어람」을 태종은 하루에 세 권씩 읽으면서, ‘책은 펼치기만 해도 이로움이 있다’고 한 데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란 성어가 나왔음. 「태평어람」 1천 권은 동양의 백과사전인 ‘유서(類書)’임.
25. 「논어」로 명재상이 된 조보, 학자와도 같았던 태종
당시의 재상 조보는 유능한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공부를 많이 못한 흠이 있었다. 언젠가 태조로부터 책을 읽으라는 권고를 받고부터는 결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 후 조보는 조정에서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면, 그 전에 반드시 방 안에 들어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가 죽은 뒤에 집안 사람들이 그의 책궤를 열어 보니 그 속에 「논어」가 있었다. 조보가 어느 날 태종에게 아뢰었다. “저는 「논어」 한 질을 가지고 있는데, 그 절반은 선제(先帝, 송 태조 조광윤)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는 데 썼고, 절반은 폐하를 도와 천하를 편안하게 해 드리는 데 썼습니다.” (…) 마치 학자와도 같았던 태종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22년 만에 죽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9세였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40쪽)
26. 재상 이항의 인문공부와 혜안
이항이 재상으로 있을 때 왕단은 참정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항은 항상 「논어」를 즐겨 읽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재상으로서 천하의 정치를 행해 보면, 「논어」 가운데 있는 ‘씀씀이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며, 때를 가려 백성을 써야 한다’라는 두 구절도 좀처럼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의 가르침은 평생토록 외워 언제나 배워야 한다.” 이항은 날마다 전국 각지에서 보고해 오는 홍수와 가뭄, 그리고 도둑 등에 관한 일을 낱낱이 천자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단이 말했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까지 낱낱이 천자께 아뢰어 번거로우시게 할 것은 없지 않습니까?” 이에 이항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소.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시오. 지금부터 백성의 고난이 어떤 것임을 잘 알아두셔야만 하오. 그렇지 않으면 장년이 되어 음악이나 여색에 빠지시거나, 혹은 사냥에만 열중하시거나, 혹은 쓸데없이 건축을 하고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는 데 재미를 붙이시거나, 아니면 커다란 제사를 지내신다든지 하게 되오. 나는 이미 늙었으므로 그런 것을 보기 전에 죽겠지만, 참정에게는 반드시 뒷날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오.” 그 후 과연 진종(송나라 제3대 황제)은 봉선이니 제사니 토목공사니 해서 큰 일들을 한꺼번에 벌여 놓았다. 왕단은 곰곰이 회상하며 탄식하였다. “이항 어른은 참으로 성인이었구나!”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46-647쪽)
* 밑줄 친 부분은 「논어」 학이편 제5장인 ‘子曰 道千乘之國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使民以時’의 ‘節用而愛人 使民以時’에 해당함.
27. 구양수가 인종에게 바친 글(1) : 군자에게만 진정한 벗이 있는 법
소인에게는 진정한 벗이 없고, 오직 군자에게만 진정한 벗이 있는 법입니다. 간혹 소인이라도 눈앞의 이익을 같이 할 때에는 일시적으로 결합되는 일이 있지만, 그것은 거짓 벗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눈앞에 이로운 것이 있을 때에는 서로 다투어 가지려 하고, 이익이 없어지면 마음이 떨어져서 심지어 서로 해치기까지 합니다. 이와 반대로 군자의 길은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서로 돕고, 나라에 일이 있으면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와 같이 시종일관 절개를 바꾸지 않는 것이 군자의 붕당(朋黨)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은 모름지기 소인들의 거짓 붕당을 물리치고, 군자의 진정한 붕당을 채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입니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58쪽)
28. 구양수가 인종에게 바친 글(2) : 천하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
예로부터 천하를 제패한 분들은 누구나 천하를 잘 다스리려고 다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혼란이 오고 말았는데, 그것은 의심하기 좋아하고 또 자신의 의견이 제일이라고 생각한 데서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한 번 의심이 생기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의심스럽게 됩니다. 충성과 간사함을 구별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모든 신하가 의심스러워 보입니다. 이렇게 될수록 믿을 것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임금은 더욱 자기 주장만 내세우게 됩니다. 그럴 때 충신들은 반드시 이치를 따져가면서 시비를 가리려 할 것이고, 임금은 자기의 의견이 꺾이게 되어 노여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욱 자기 의견을 내세우게 되고 충신을 멀리하게 됩니다. 결국 간사하고 아부하는 신하가 이 틈을 노려 임금의 비위를 맞추고자 옳은 것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은 옳다고 합니다. 임금은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하는 그들을 기특하게 여기고 즐거워하면서 그들의 간사함은 보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충신은 배척을 당합니다. 이것이 천하가 혼란에 빠지는 이유입니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58쪽)
29. 천하를 다스리는 열 가지 조항
어느 날 인종은 범중엄 등을 불러들여 붓과 종이를 주고 천하를 다스릴 의견을 쓰게 했다. 범중엄 등은 황송하여 일단 물러나와서 의논한 끝에 열 가지 조항의 의견서를 써서 바쳤다. 첫째, 관리의 임명과 면직을 공평하게 할 것. 둘째, 실력이 없이 정실로 출세하는 것을 막을 것. 셋째, 시험을 보고 인물을 뽑아 쓰는 제도를 한층 더 엄중히 할 것. 넷째, 모든 관청의 우두머리를 엄격히 선발해 쓸 것. 다섯째, 국유지를 공정하게 처리할 것. 여섯째, 농업과 누에치기를 적극 보호할 것. 일곱째, 국방에 힘쓸 것. 여덟째, 백성의 부역을 가볍게 할 것. 아홉째, 황실의 은혜와 위신이 널리 고루 미치게 할 것. 열째, 명령은 모두 신중을 기할 것.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59-660쪽)
30. 사마광이 인종에게 바친 세 장의 글과 오계
사마광은 사간원이 된 후 세 장의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첫째는 임금의 덕을 논한 것으로, 임금된 자는 어짐[仁]·밝음[明]·날램[武]의 세 가지 덕을 갖추어야 함을 자세히 논했다. 둘째는 임금이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논한 것으로, 신하를 관직에 임명할 때 주의할 일, 공로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상을 주고 죄 있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말했다. 셋째는 군사를 선발하는 요령을 논한 것으로, 군비는 양보다도 질이 더 중요함을 설파했다. 그 후 사마광도 오계(五戒)라는 글을 써서 바쳤다. 천자의 임무를 지킬 것, 시간을 아낄 것, 원대한 계획을 세울 것, 작은 일을 소홀하게 하지 말 것, 헛 공론을 버리고 실천을 존중할 것.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61-662쪽)
31. 정치든 학문이든 역사의식을 가지고 하라
그(정명도) 죽자 아우 정이천은 그 비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주공이 별세한 다음에는 성인의 도리가 행해지지 않고, 공자가 별세한 다음에는 성인의 학문이 전해지지 않는다. 도리가 행해지지 않으면 백세에 이르도록 좋은 정치가 있을 수 없고, 학문이 전해지지 않으면 천 년이 되도록 진정한 선비가 나오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진정한 선비가 나오지 않으면 과연 세상 사람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필경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살아 하늘의 도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정명도 선생은 공자가 별세한 지 1천 4백 년 뒤에 태어나시어 이단을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물리쳐 성인의 도를 다시 밝히셨도다. 그리하여 맹자 이후의 오직 한 분 뿐이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77-678쪽)
* 정명도가 맹자 이래 도통(道統)을 계승하였음을 천명한 글임.
32. 여자 요순 황태후
철종 8년, 황태후가 죽었다. 태후는 임종할 때 철종의 앞에 이대방과 범순인 등을 불러 말했다. “이 늙은이가 죽은 뒤에는 반드시 젊은 천자를 업신여겨 말을 듣지 않는 자가 많이 생길 것인데, 반드시 그들을 제압해 주시오. 그리고 공들도 일찌감치 벼슬에서 물러나 새로운 사람들이 천자를 돕게 해주기 바라오.” 태후는 9년 동안 철종(북송 제7대 황제)을 대신해서 정치를 맡아 보아 천하를 태평스럽게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은 그를 ‘여자 요순’이라고 부르면서 칭송했다. 태후는 자기 친정인 고씨 가족을 특별히 대우하는 일도 없었고, 태자를 높여 주기 위해 두 황자와 황녀까지도 멀리했다. 그러면서 공평하게 천하를 다스렸으므로 당시의 조정에는 어진 신하가 가득하였다. 태후는 군사(軍事)를 싫어한 신종(북송 제6대 황제)의 뒤를 이어 백성과 함께 평화로운 세월을 보냈다. 이 시대에 서융의 추장 귀장이 국경을 수비하던 군사에게 붙들려 수도로 호송되어 왔는데, 태후는 그를 석방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의 부하들을 송나라로 불러다가 귀화시켰다. 한편 서하는 그 임금 병상이 죽은 다음 어린 왕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송나라 국경을 공격해 와서 속국으로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태후는 그것은 권력을 잡은 몇몇 못된 자들의 짓이요, 왕이나 백성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며 다만 방비를 더욱 엄중히 하라고만 할 뿐이었다. (북송시대 ; 현대지성본 682쪽)
33. 만고의 충신 악비를 시기질투한 군상(群像)
이때 악비는 호북과 경서의 선무사가 되었다. 회동의 선무사 한세충과 강동의 선무사 장준이 오래 전부터 금군과 싸워 공을 세워 왔는데, 악비가 한낱 이름 없는 병졸에서 발탁되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은 그들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몹시 못마땅한 일이었다. 악비는 그들을 특히 공손하게 대했지만, 그들은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악비가 동정호의 도둑 양요를 토벌하고부터는 장준은 더욱 악비를 미워하여 두 사람 사이는 날로 멀어져 갔다. 그 뒤 고종이 다시 건강으로 옮겼을 때, 악비는 고종을 뵙고 송나라를 부흥시킬 계책을 올렸다. 이 무렵 진회는 추밀부사로 임명되어 오로지 화친만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회는 악비의 전공(戰功)을 시기하며 악비가 올린 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서 끝내 고종이 그 계책을 채용하지 못하게 했다. 이때 악비는 어머니가 죽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고종은 복중(服中)의 악비에게 사신을 보내서 복직을 명했다. (남송시대 ; 현대지성본 723쪽)
* 남송 멸망기에는 문천상·허형·유병충·사천택·염희헌·조시상·육수부·장세걸 같은 만고의 충신도 많았지만, 진회·가사도 같은 간신 중의 간신도 있었음.
34. 주희가 개진한 정치의 근본과 급무
몇 달 뒤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주희는 이를 굳이 사양하고 다만 한 장의 글을 올렸을 뿐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천하를 다스리는 정치의 근본과 오늘의 급무(急務)가 무엇인가를 말했다. 제왕의 학문이란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달려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대본(大本)은 폐하가 친히 덕을 쌓는데 있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오늘의 급무로서 여섯 가지를 적시하였다. 첫째, 태자의 교육을 그르치지 않을 것. 둘째, 대신의 임명을 신중히 할 것. 셋째, 기강을 바로 세울 것. 넷째, 풍속을 바로잡을 것. 다섯째, 백성의 힘을 기를 것. 여섯째, 군비를 갖출 것. (남송시대 ; 현대지성본 734-735쪽)
35. 천하 제일의 학자 주희의 주자학에 붙었던 위학(僞學)의 프레임
그러자 황상이 말했다. “만약 폐하의 덕을 더욱 높이고 학문을 닦아서 옛날 성왕의 도를 밝게 하실 생각이시면, 반드시 천하 제일의 학자를 청해서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이에 광종이 놀라 물었다. “아니, 그런 인물이 우리나라에 있단 말이오? 그게 대체 누구요?” “주희야말로 천하 제일의 학자라 할 것입니다.” (…) 주희는 수도로 오기 전부터 영종의 측근들이 조정의 일에 간여하여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경향이 차차 짙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깊이 근심하고 있었다. (…) 주희는 수도로 올라와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한탁주는 상을 후하게 주어 공로를 인정해 주되, 정치에는 결코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글로 인해 그는 한탁주의 노여움을 사서 조정에 들어온 지 겨우 46일 만에 파면되어 한직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유중흥은 분개했다. “이번에 주희 선생이 조정을 떠나게 된 일에 대해 백성들은 모두 슬퍼하고 있다. 천하 제일의 학자가 조정을 떠나야만 한다면, 누가 조정을 떠나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만약 의로운 선비가 모조리 조정을 떠나 버린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린단 말이냐?” (…) 그 후 한탁주는 학자들의 이름을 장부에 모두 기록하여 ‘위학(僞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우고, 주희를 그 수괴로 만들었다. 이에 기록된 사람은 수십 명에 이르렀다. 그 무렵 주희가 71세를 일기로 죽었는데, 당시 위학의 무리에 대한 금령(禁令)은 대단히 엄중했지만 주희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은 수천 명이나 되었다. (…) 주희가 죽은 이듬해, 위학에 대한 금령도 완화되어 과거 사건에 연좌되었던 사람 중에 복직되어 자유롭게 된 사람이 차차 많아졌다. 그러나 풍속은 이미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남송시대 ; 현대지성본 737-740쪽)
36. 칭기즈칸의 불행과 극복
칭기즈칸(成吉思汗)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었다. 달단족(타타르족)에게 붙잡혀 끝내 살해된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칭기즈칸의 일가는 비참한 생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그림자 외에는 함께 가는 이 없고, 말꼬리밖에 채찍도 없는’ 비참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다른 부족의 습격으로 아내 부르테까지 약탈당해야만 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용맹한 젊은이로 성장하였다. 원래 몽골족은 용맹함을 숭상하는 민족이었고, 그리하여 용맹스러운 사나이에게 자기 몸을 던져 의지하려는 풍습이 있었다. 몽골의 각 부족은 칭기즈칸에게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그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 그리하여 달단족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몽골지방을 완전히 석권하였다. 나아가 서몽골 최대의 부족인 내만을 토벌하여 몽골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몽골부족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몽골의 부족대회를 소집하며 대집회를 열었는데, 하얀 천자의 깃발을 세워 놓은 자리에서 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칭기즈칸은 몽골민족을 철저하게 군사조직으로 편제하였다. 우선적으로 10호-100호-1,000호-10,000호라는 조직을 만들어 전투단위로 삼았다. (원나라 ; 현대지성본 744-745쪽)
* 칭기즈칸은 이름은 테무친이고 원나라 초대 황제 태조가 되었음. ‘칭기즈’는 ‘위대한’의 뜻이고, ‘칸’은 ‘군왕’의 뜻임.
37. 원나라의 현자 정치인 야율초재(1)
야율초재는 원래 요나라 왕족으로 금나라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다가 몽골이 금나라 연성을 공격할 때 그곳에 남아 있었다. 성이 함락된 후 칭기즈칸의 후한 대우에 감복해 그의 참모가 되었고, 이후 칭기즈칸을 도와 천하의 영웅으로 만든 주인공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60세 때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세 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니로부터 중국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그는 박학다식하였으며 천문·지리·역법·정치에 밝았고, 유교와 불교 그리고 의학과 점술에도 능통하였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의 연성을 함락시켰을 때 야율초재라는 금나라 귀족이 사로잡혔다는 것을 알고 그를 직접 만났다. “짐이 그대의 조국 요나라의 원수를 갚아 주었는데, 그대의 감회는 어떠한가?” 그러자 야율초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臣)의 조부도 아비도 그리고 신도 모두 금나라에 출사하였습니다. 한 번 신하로 따른 이상 두 마음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전혀 금나라에 복수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에 칭기즈칸은 야율초재가 마음에 들어 그의 측근으로 삼았다. 이때 칭기즈칸의 나이는 63세, 야율초재의 나이는 29세였다. 야율초재는 키가 8척이었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목소리가 낭랑하였다. 이것들은 몽골인들이 위대한 남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조건들이었다. 칭기즈칸은 이렇게 말했다. “야율초재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리신 사람이다. 앞으로 모든 정사는 야율초재의 의견대로 집행하라.” (원나라 ; 현대지성본 749-750쪽)
38. 원나라의 현자 정치인 야율초재(2)
한편 그 당시에는 관청과 백성들 모두 서역의 색목인(아랍인)으로부터 돈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래서 빚을 진 사람은 해마다 원금의 갑절이나 되는 이자를 물었다. 그 이자 붙는 것이 마치 양이 새끼를 낳는 것처럼 불어난다 하여 양고리(羊羔利)라 불렀다. 이 때문에 집을 날리고 처자까지 잡혀도 빚을 청산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러자 야율초재는 빚을 관청에서 대신 갚아 주도록 조정에 청하여 그대로 실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돈을 빌려 쓰고 그동안 지불한 이자가 원금과 같은 액수가 되었을 때에는 더 이상 갚지 말라. 그 이상 지불할 필요가 없다.” (…) 야율초재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그 처리에 그릇됨이 없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엄숙한 태도를 잃지 않았고,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없었으며, 항상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나라에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사나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말할 때에는 성실한 자세로 임했다. 어느 날 야율초재가 대궐에 들어가니 태종(원나라 제2대 황제, 이름은 오고타이, 칭기즈칸의 삼남)이 그를 보고 말했다. “공은 또 백성들을 위해 큰 소리로 울려고 들어왔소?” 그러자 야율초재가 이렇게 대답했다. “한 가지 이로움을 얻는 것보다 한 가지 해로움을 없애는 것이 낫고, 한 가지 일을 보태는 것보다 한 가지 일을 덜어내는 것이 낫습니다.” 그는 평소에도 함부로 떠들거나 소리내 웃지 않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온화하고 겸손했으므로, 그 높은 덕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몽골의 조세제도를 정비하였다. 국가가 모든 징세권을 갖도록 하여 지방관리들의 수탈을 막았으며, 한인(漢人)들에게 관대한 정책을 썼다. (…) 야율초재는 중국인의 등용에 앞장서 그가 등용한 중국 지식인은 4천 3십 명에 이르렀다. (원나라 ; 현대지성본 757-759쪽)
39. 성인의 길을 밝히고자 한 학자 정치인 요추
그 무렵 요추라는 학자가 은거하면서 성인의 길을 밝히는 것을 자기의 직책으로 삼았는데, 쿠빌라이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불렀다. 요추는 부름에 응하여 쿠빌라이를 만나 보고는 그가 총명하며 매우 재주가 뛰어난 사람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남의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고, 장래 이 사람은 반드시 큰 일을 할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요추는 자기의 생각하는 바를 글로 써서 바쳤다. 그 글은 첫머리에 요임금과 순임금, 우임금, 탕임금, 주나라 문왕의 가르침과 세상을 다스리는 순서를 다루었다. 그러면서 한 나라를 통치하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방법을 논하고, 다시 그것을 여덟 항목으로 분류해서 자세히 논파했다. 다음에는 잘못된 정치의 폐해를 서른 항목에 걸쳐 설명하였다. (…) 그 무렵 쿠빌라이는 모든 군사에 명령을 내려 이제까지 노예로 부려 왔던 중원의 포로 유학자를 놓아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에 몽골은 처음으로 ‘한림국사원(翰林國史院)’을 세워 각지의 학식 있는 유학자를 뽑고 교수로 삼아서 학문을 장려했다. 어느 날 요추는 세조 쿠빌라이(원나라 제6대 황제, 제5대 황제 헌종[몽가]의 아우)에게 아뢰었다. “폐하께서 건국사업에 있어서는 태조 이래의 법을 지켜 오시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있어서는 창시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폐하께서는, 첫째로 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내시며 나라의 기초를 굳히시고, 둘째로 황태자를 세우셔서 황통(皇統)에 동요가 없게 하셔야 하고, 셋째로 유능한 신하를 골라서 일을 맡아 보게 하셔야 합니다. 넷째로 경서연구소를 열어 폐하께서 항상 스스로 수양하실 것이며, 다섯째로 국경의 수비를 굳게 해서 적의 침입을 막으셔야 하고, 여섯째로 식량을 저축하여 흉년에 대비하셔야 합니다. 일곱째로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셔야 하고, 여덟째로 농법과 양잠을 장려하여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셔야 합니다. 이상 여덟 가지를 몸소 철저히 시행하시기 바랍니다.” 쿠빌라이는 그의 의견을 듣고 매우 흡족해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시행하였다. (원나라 ; 현대지성본 760-761, 768쪽)
40. 쿠빌라이의 포부
쿠빌라이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예로부터 하늘의 명을 받아 천하를 모두 차지하여 천자의 자리에 있는 자는 반드시 훌륭한 국호를 세워서 왕업을 계승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이 행하는 일이 아니다. 당(唐)이란 ‘탕(蕩)’ 곧 ‘넓고 크다’는 뜻이니, 요임금은 이것을 국호로 삼았다. 이어 우임금이 일어나고 다시 탕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기에 이르렀는데, 우임금이 정한 국호인 하(夏)는 ‘크다’는 뜻이요, 탕임금이 정한 국호 은(殷)은 ‘가운데’라는 뜻이다. 후세로 내려오자 국호도 달라져서 옛날처럼 글자의 뜻으로 국호를 정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진(秦)이라 일컫고 한(漢)이라 일컫는 것은 처음에 일어난 땅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수(隋)라 일컫고 당(唐)이라 일컬은 것도 역시 처음에 봉해진 영토의 지명을 그대로 쓴 것이었다. (…) 나는 이제 국호를 세워서 ‘대원(大元)’이라고 하려 한다. 이것은 「역경」의 ‘건원(乾元)’ 곧 ‘하늘의 덕’이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다. (…) 이제 온 천하의 임금이 된 나는 천하를 다스려 편안하게 함에 있어 무엇으로써 이를 행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인(仁)’을 지녀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일의 성취는 자연스러움에 따르고 감히 인위적인 것을 더하는 일 없을 것이니, 정치의 길을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에 일치되도록 열어갈 것이다. 실로 ‘원(元)’이라는 국호는 참으로 그 뜻을 헤아려서 이름 지은 것이다. 다만 진실로 그 이름이 영원하기를 원할 뿐이다. 하늘 아래 우리 영토의 신하들과 함께 이 큰 이름을 융성하게 함을 기뻐한다. 모든 신민은 내 깊은 뜻을 알라.” (원나라 ; 현대지성본 775-776쪽)
* 요임금은 도(陶) 지방에서 태어나 당(唐) 지방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 종래의 학설인 바, 쿠빌라이가 ‘唐=蕩’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 하겠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