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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받은 신자 : 세례교인
전도서 12장 13-14절 / 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로 불러 모은 자들이 주의 피 공로를 입고 영생하는 생명을 소유하여 서로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상합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몸인 한 몸으로 있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하나 되게 하려고 말입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에서 죄 사함과 함께 생명의 구원을 얻음을 통해 이제는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신앙고백하면서 자신이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서 이 교회로 있는 것에서 있어지는 모든 일에 의무를 갖고 책임 있게 행동하겠다는 약속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행복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에 머문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이란 세계에서 주일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엿새 동안 그 세상에서 살던 그곳에서 나와 하나님의 나라인 세계에서 사는 천상세계를 누림에 있는데, 자신들이 의무를 가지고 돌보며 책임을 가지고 살피며 함께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가족인 성도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매주일을 어머니의 품속에 있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양육하는 일을 위해 목사와 장로와 집사를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가르쳐 제자를 삼으라”라고 한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있게 되기까지 그들을 섬겨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십니다.
교회 성도가 이러한데, 작금의 우리네 모습에서는 매주일을 자신의 원함과 형편의 사정에 의해서 마음대로 예배에 참여하거나 불참하며, 예배의 참여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설교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하며, 성도의 의무와 본분에 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이를 의식하며 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복음을 듣는 행복에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에 갇혀 있다는 것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으로 행복합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과연 복음만으로 행복한 우리입니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란 말이 있듯이 여기에서 멈추고 있고, 그렇게 복음을 듣는 행복에 있음으로 해서, 복음이 주는 진리의 기쁨과 생명의 힘으로 주께서 세우신 교회로 나아감에는 있고자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성도들의 신앙이 점차 이상하게 비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을 봅니다. 사사기와 그 이후의 여러 설교를 통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에 있는 하나님 은혜를 깊이 의존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의로운 도구로 사용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임의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상황에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코로나19에서 보는 바인 마치 전염병이 확산되듯 전체적인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주일예배를 위한 아무런 준비도 없으며, 주일예배 참여를 제 마음대로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교회의 성도의 무리, 곧 회중(교회의 구성원)으로 있으려고 하는지요. “나는 자연인이다!”란 방송에서 보듯이 교회의 구성원으로부터 벗어나 자연 신자 – 감독을 받지 않는 자유한 신자 –로 살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있는다는 것은 주님의 교회의 몸으로 있으면서 주께로부터 공급받는 생명으로 주님의 몸인 교회가 온전히 서나가는 것에 지체의 역할을 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구성원으로 있는 성도들이 사춘기의 충동기에서 있으면서 부모의 훈계를 따르지 않고 자기 조절을 못하고 마음대로 움직이는 청소년과 같습니다. 해서 집에 들어와야 할 필요성이 있으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하듯이 멋대로 합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지닌 교회 직분자들은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에 따른 본분을 다하지 않습니다. 교회 개혁이란 게 무엇인지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워나가시는 그 교회로 있어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교회에 자신들이 어떤 자들인가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그에 따른 인식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것에서 하게 됩니다. 이게 안 되면 그 이후에 해 나가야 할 어떤 개혁(회복)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여, 묻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 어떤 자로 있는지요. 주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라"라고 하신 참된 교회와 관련하여서 다음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1) 먼저 사도행전 8장 1-25절에서 보는 바인 마술사 시몬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 증거에 의해서 딸려 들어온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갖는 집회에 참여하여서 전파하는 복음을 들으며 이 복음에 좋은 마음을 갖고 듣지만 복음에 오해하며 잘못된 생각을 가지며 사욕의 탐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겠다는 믿음을 표현하고 그에 따라서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닌 믿음과 그들에 마음에 받은 세례에는 이것을 선물로 주시는 성령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여, 성령님이 없는 믿음과 세례일 뿐인 것으로, 여기에는 죄 사함도 그리스도와 한몸의 연합도 없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주님의 축복을 운운하면서 성도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교회가 갖는 여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할지라도 그 모두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르며 섬김에 헌신하는 것에서가 아니라, 탐심으로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예배 참여는 지극히 이종교적으로 형식인 외식으로 가져나갈 뿐입니다. 이들은 복음 전파에 귀를 기울여 들음으로써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구도자(求道者)도 아닙니다.
(2) 다음으로 구도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도시대로부터 시작된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 있으면서 복음 전파는 사도의 활동에 의한 사역에서 교회의 사역에 의해 있어나가게 되었습니다. 하여, 교회에서의 설교를 통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진리를 갈망하는 구도자들이 구원 얻는 생명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며, 교회에서 파송하는 전도자(선교사)가 전파하는 복음에 의해 교회 밖에 있는 이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참된 종교의 신앙에 있도록 하고, 또한 교회의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대하는 사람과의 교류에서 구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소개하며 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하는 인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교회는 매주일 예배 참여의 부름 받음에 사람들을 있게 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알아 주께 믿음을 갖게 하는 것에서 예배에서 복음을 전해주는 일을 합니다. 이들로는 아직 구도자의 모습에 있는 까닭에 그들의 마음에 감동 받음에 의해 복음을 듣는 것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또는 한창 복음의 진리를 알아가는 기쁨에 있어 교회의 예배 회집에 응하며 관심과 흥미를 가지며 재미있게 다닐 수도 있습니다. 이분들에게는 세례 받음에 의한 교회 구성원인 신자가 아직 아닌 까닭에 교회는 아무런 의무를 짊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분들에게는 교회와 관련하여 어떤 책임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오며 주일예배를 드리며 교인들의 교제를 가지며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등 어떤 것에도 짐을 지우지 않으며, 자유롭게 행동하게 합니다. 교회는 이들을 진리의 갈망에 있어 그리스도의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보고 진리를 찾겠다는 구도자로 교회에 들어와 있는 까닭에 ‘원입교인’ 또는 ‘신입교인’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교회에 등록한 후 공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들으면서 복음의 진리를 대하는 자들입니다.
(3) 그런가 하면 ‘학습교인’이 있습니다. 이들은 복음의 진리를 갈망하였는데, 교회에 들어와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갈망하는 진리에 빛이 보이기 시작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이를 체계적으로 배움에 있어온 진리의 학습자입니다. 이들은 원입교인으로 일정한 시기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진리의 학습에 있은 자들로 교회에서 가르쳐 온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배움을 갖고서 ‘학습문답’에 응하고, 앞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성경을 탐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받기까지 신앙의 양육에 있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4) 그리고 예배와 교육에 참여하고 신구약 성경을 읽으며 상고하면서 복음의 진리를 마침내 깨달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여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될 것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인 신자로 살아가는 믿음에 있게 된 사람으로 교회의 구성원인 일원이 되어서 교인으로 있는 다른 신자들과 함께 교회를 이루며 살 것을 다짐하며 맹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서 한 분 성령을 통해서 한 믿음을 가지고 한 분 주님을 믿는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니, 곧 세례신자(세례교인)입니다. 이분들의 모습을 사도 바울의 개종에서(행 9:1-18; 22:1-16), 그리고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국고를 맡은 내시의 개종에서(행 8:1-25),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를 이룬 개종자들에서 보게 되는데(살전 1:9-10), 지금까지 숭배해왔던 종교에서 떠나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는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따르는 미움과 배척과 핍박으로 그동안 지니고 누려왔던 부귀와 권세에 의한 지위를 비롯하여 있는 자에게서는 있는 것 모든 것을, 없는 자에게서는 빈약한 그것까지도 모든 것을 빼앗김을 당하며 잃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위험에 처하고 심지어는 결국은 목숨을 잃는 상황까지도 겪음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이 붙들고 있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에 갖는 소망을 놓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다시 오실 날을 열렬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장차 자신들을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구원하여 주실 유일한 구세주이신 것을 알고 그 믿음에 굳건히 서 있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무와 본분을 책임 있게 가져나갔습니다.
이 중에서 각각 어떤 자들인지요. 자신의 존재성과 정체성의 확인에 있으면서 주님의 진실한 신자로 있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1) 원입교인(신입교인)으로서 교회를 다니시는 것에 있으신가요. 그러하시면 매주일 예배에서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주가 되신 내용들을 전해들을 수 있습니다. 잘 들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함에 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2) 또는 학습교인의 상태에 있으신지요. 복음의 입문에 있어 배운 바의 확신에 있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처럼 우상에게서 떠나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주로 받을 수 있는 진보에 있어야 나가야겠습니다. (3) 원입교인과 학습교인의 상태를 지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 사함의 구원과 영생하는 참생명을 주신 주님이심을 믿으며 주로 받음에 있는 성령으로 베푸시는 세례를 받음에 있으신 분인가요. 그래서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가 베푸는 물세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신 분이신지요. 그렇다면, 세례 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로 삼은 자들이며 또한 자신을 그분의 몸으로 둔 자들입니다. 해서 자신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을 것을 온 성도들 앞에서 맹세하여 약속한 자들입니다. 세례를 받고서 주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 것에 있으면, 마술사 시몬에게서 보듯이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푸시는 세례를 받음이 없이 단지 물세례를 받음에만 있는 사람이거나, 세례를 받은 후 계속하여 복음의 진리의 양육에 의한 장성함에 있지 않아 육체의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힘에 있는 까닭입니다.
세례 받은 신자는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한몸의 연합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의 형제들과도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각 지체로 있습니다. 그렇게 한 분 주님의 몸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지체(교회 구성원; 교회를 구성하는 일원)인 까닭에 그 지체로 있는데 따른 의무와 그에 따른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의무와 책임에 따른 마땅히 짊어짐에 있는 본분이 있습니다. 세례교인으로 있는 신자는 세례 받음에 있어나가는 교육 과정에서 “교인의 의무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에 대한 답변을
1) 매주일 공예배를 비롯한 모든 집회 출석의 의무 : 예배 참여
2) 교회 존속을 위한 운영과 성도를 돌볼 의무 : 연보 참여
3) 복음 전파를 비롯한 선한 일을 도모하며 거룩한 사업에 힘쓸 의무 : 봉사(직분) 참여
4) 성경을 힘써 배워 삶에 실천할 의무 : 배움의 학습 참여
5) 진리를 보수하고 교회 헌법에 복종할 의무 : 진리와 교회 권위에 순복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으며 이 의무를 책임 있게 질 것을 굳은 결심과 각오로 말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한 것은 교회를 이루는 무리인 성도로서 복음이 주는 행복을 감사함으로 받고 있는데, 그렇게 행복한 내가 행복하게 내 삶을 잘 살고 있는가?를 자신과 함께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인 성도들과 같이 가져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여, 의무와 본분에 충실함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어 그들이 기뻐하는 삶을 보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세례 받았으나 세례 받은 신자인 교인의 의무에 대한 이해도 인식도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도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는 상황에 처해 있는 실정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혹자는 예배집회 참석을 꼭 의무로 해야 하는가? 라고 하며 주일을 꼭 지켜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이는 주일에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하여, 마치 예배집회 참석이 의무가 아닌,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으며, 매주일을 지키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올무 또는 마음에 기뻐서 하고 있지 못하는 것인양 여기는 생각을 갖습니다. 주일을 지킴과 그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있는 것을 세례 받은 신자의 의무가 아니라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을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요. 주일과 예배만 그런가요. 주일에 예배의 참여와 함께 연보하고 봉사하며 진리를 배우고 주님의 권위에 복종할 그 모두에서 세례 받은 신자의 의무가 아닌 것이 있는지요.
교회의 신앙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삼대표준문서에서 장년을 가르치는 대교리문답서 제1문답에서는 “사람의 제일되는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며, 그 대답으로 “사람의 제일되며 가장 중요하고 고귀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분을 영원히 마음을 다하여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는 어린이를 가르치는 소교리문답서 제문답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질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대답)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자 솔로몬은 전도서 12:13-14에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의 본분을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의 계명, 곧 십계명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사랑)하라”이며, 이어지는 6-10계명은 ”네 이웃을 공경(사랑)하라“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닌데, 이 공경(공손히 섬김)은 1-4계명에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정신인 “네 하나님을 공경(사랑)하라”를 따름에서입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라고 온 율법이 지닌 정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만물과 함께 사람을 지으셨으며, 또한 하늘로부터 거듭남에 있게 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에 마땅히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러한데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함에 있을 수 있는지요. 이를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주로 받아 섬기며 따름에 있는 믿음에 있어 ‘영과 진리(성령님과 말씀)로 예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예배에 있을 수 있도록 한 날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으며, 그리스도인은 안식일 정신의 실현인 ‘주일’로 지킴에서 가져나갑니다.
성도는 이 의무를 지고 있는데,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짊어졌던 율법의 구속력(拘束力)에 의해서가 아닌 신자인 성도의 새로운 삶에 있는 것에서 입니다. 그 중에 첫 번째로 인식해 나간 것이 모든 집회 출석에 의무가 있다는 것이며, 여기에서 강조가 되는 것은 매주일의 공예배 참여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21장 예배와 안식일’의 제7-8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항.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간을 정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합당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적극적이고 도덕적이며 영구적인 명령으로써,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특별히 이레(七日) 중 하루를 안식일로 택정하여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하셨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한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는, 한 주간의 첫째 날로 바뀌어졌다. 성경에는 이 날이 주의 날(主日)로 불려져 있다. 이 날은 세상 끝 날까지 기독교의 안식일로 지켜져야 한다.
8항. 그러므로 안식일은 주님께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고, 그들의 일상적인 일들을 미리 정돈한 연후에, 그날에 하루 종일 그들 자신의 일과,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대한 말이나 생각, 그리고 오락을 중단하고 거룩하게 안식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바쳐서 공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부득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을 해야 한다.
이 기독교의 안식일인 주일은 안식일 정신의 실현에 있는 것으로, 제네바 교리문답1) 제26-27주일에서는 십계명에서의 제4계명을 166문답으로부터 184문답2)에 이르는 질문과 답변을 통해 가르칩니다. 이 중 몇 곳을 봅니다.
(166문) 제 사 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답)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167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 칠일에 쉬도록 하기 위해서 일주일 중 엿새 동안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답) 단순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도록 허락을 내리실 때 일곱째 날은 일해서는 안 되는 날로 보류해 놓으신 것입니다.
(173문) 이 영적인 안식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통치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를 억제하고 우리의 본성적 욕구를 포기해야 합니다.
(179문) 이 날에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교육을 받도록,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도록, 그리고 믿음과 경건의 증거를 나타내도록 함께 예배로 모이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제4계명인 안식일 계명과 예배만 들었습니다만, 안식일의 실현인 주일에 예배의 참여와 함께 연보하고 봉사하며 진리를 배우고 주님의 권위에 복종할 그 모두에서 세례 받은 신자의 의무가 아닌 것이 있는지요.
그런데 이 의무를 책임 있게 다해나가지 않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러해서 주일을 갖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서 무엇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나가는가요. 혹자는 주일에도 자기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배에 앞서는 일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서도 그 모든 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일이 아닙니다. 자기 일이며, 이는 곧 세상에 속한 일입니다. 이를 대비해 보세요. 하나님의 일이 큰 가요? 자기 일, 곧 세상에 속한 일이 큰가요? 하나님은 자신의 안식에 두시고서 하나님의 안식이란 평안에 자기의 백성들이 있어나가게 하셨습니다. 그 안식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은 안식 또는 평안과 전혀 반대가 되는 재앙입니다. 사사기에서 그것을 잘 알려주셨습니다.
교인은 곧 세례 신자인데, 혹 교회에 들어와 새신자등록까지 하며 원입교인으로 있으나 아직 구도자로 있는 것이거나, 학습교인으로 있는 분들에게는 아무런 의무도 책임도 지우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일을 지키며 예배를 드림에 있거나 그렇지 않거나 그에 따른 책임을 운운하지 않으며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이분들에게는 다만 복음을 전해 주어 하늘의 지혜가 주는 말을 들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 기회를 갖는 교회 예배 참석을 임의로 한다고 하여서 책임 있게 할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인으로 주께 가진 신앙고백의 믿음에 의해 세례를 받았거나, 유아세례를 받고 후에 성장하여 복음의 진리의 이해력을 갖고 이를 신앙고백 하는 믿음에 있는 나이에 이르렀을 때에 입교식을 통해 교회 일원이 되었거나 신자, 곧 세례교인으로 있는 분들은 주께 고백한 신앙과 그 신앙을 따라 자신들에게 있는 의무를 알고 이를 책임있게 짊어져 나가고자 한 마음에 굳건히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전도자는 전도서 12장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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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네바 교리문답서는 1542년 존 칼빈(John Calvin)이 제네바 교회에서 자녀들과 새신자의 성경 교육을 위해서 사용하던 교리문답서이다. 칼빈은 이 교리문답서를 작성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권면에 있어 왔다. 교리문답에 의한 교육은 그리스도인에게서 오랜 역사를 가지면서 끊어지지 않고 굳건히 지켜져 왔으니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이러한 교리문답의 교육을 통해서 성경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 왔으며, 또한 중요한 부분을 잘 이해해서 성경 전체를 풍성하게 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교리문답 교육의 강조는 곧 성경 교육의 중요성으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성경 교육과 직결되는 교리문답 교육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으니,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사실에서도 보게 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4-17). 성경 교육의 일환인 교리문답 교육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경외하며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들을 잊지 않으므로 소망을 갖고 살게 하시는 은혜로운 역사이다.
2) [26주일]
166문: 제 사 계명을 말씀해 보십시오.
답: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167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제 칠일에 쉬도록 하기 위해서 일주일 중 엿새 동안 일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답: 단순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도록 허락을 내리실 때 일곱째 날은 일해서는 안 되는 날로 보류해 놓으신 것입니다.
168문: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어떤 일도 하지 말도록 금하신 것입니까?
답: 이 계명은 몇몇 특수한 특징의 고려를 해야 합니다. 즉 안식일 준수는 고대 이스라엘의 낡은 율법 의식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식적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계명은 폐지되었습니다.
169문: 당신은 이 계명이 본래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구약시대에만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답: 그것이 율법의 의식인 한 그렇습니다.
170문: 그러면 이 계명 안에는 의식적 형태 외에 다른 요소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답: 이 계명에는 세 가지의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71문: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첫째로 성도의 영적인 안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의 질서(규율)를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로 종(아랫사람)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고 위로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172문: 영적인 안식이란 무엇입니까?
답: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일들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173문: 이 영적인 안식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통하여 우리를 통치하실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육체를 억제하고 우리의 본성적 욕구를 포기해야 합니다.
174문: 이 일은 일주일간에 한 번만 행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날 끊임없이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전 생애에 걸쳐서 계속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175문: 그러면 왜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데 어떤 일정한 날을 설정한 것입니까?
답: 상징은 사실과 전적으로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어떤 유사한 점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176문: 왜 다른 날이 아니고 제 칠일이 이런 상징을 나타내기 위해서 정해졌습니까?
답: ‘7’이란 숫자는 성경에서 “완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원성”을 표현하는데 매우 적합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영적 안식이 현재 생활에서는 다만 시작한데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결코 완전하게는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27주일]
177문: 여기서 우리 주님께서 자신이 쉬신 것처럼 우리도 쉬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제 칠일은 이 창조물들을 바라보시는 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다 낫게 이 일을 잘 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본보기로 제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 이상 더 바람직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78문: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을 묵상해야 합니까? 아니면 일곱째 날에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답: 이것은 매일 해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것을 위한 특정한 날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3가지 내용 중에서 ‘교회의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179문: 이 날에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 할 일을 무엇입니까?
답: 그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교육을 받도록, 공동으로 기도를 드리도록, 그리고 믿음과 경건의 증거를 나타내도록 함께 예배로 모이는 것입니다.
180문: 이 계명이 종들의 고통 경감과 위로를 위해서도 주어졌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지배 밑에 있는 종들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공공질서에도 유익이 됩니다. 왜냐하면 쉬는 날이 하루 있을 때 사람들은 나머지 날 동안엔 일하는 습관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181문: 이제 이 계명의 내용을 요약해 봅시다.
답: 이 계명이 율법의 이식에 관한 한 이 계명의 이식들은 폐기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의 참된 의미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182문: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답: 우리의 옛사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능력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며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새 생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롬 6:6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183문: 이 계명의 내용 중에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공중기도를 드리며 그리고 성례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회 내에서 제정된 규칙을 준수하고 성도들 사이에 세워진 영적규칙도 위반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184문: 그러면 이런 형식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없는 것입니까?
답: 아닙니다. 유익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진리의 본질에까지 몰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된 지체들이 된 이상 우리는 우리를 그분의 통치에 내어 맡기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일을 중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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