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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는 우물 안 개구리?
한국 불교에 대한 이런 의문 속에서 만난 법문집 <<21세기
붓다의 메시지>> (자재 만현 스님 지음, 현지궁 현지사 펴냄)는 예사롭
지 않았다. 고백컨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앞서 필자가 언급했던
오랜 의문에 일정 부분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 법문집은 지금 한국 불교계의 오랜 '관습화됀 유산'을
뒤흔듣다. 가히 파천황이다. 냉정하게 말해 '한국 불교의 정체
성에 대한 도전이고, 자기 갱신을 요구하는 사자후'에 다름 아
니었다. <만현 스님과 인터뷰 참조>
"한국 불교가 천 년 넘게 선 불교 영향을 받아서 많은 불자
들의 인식이 고착돼 있음을 잘 압니다. 선종과 대다수 불교학
자들은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을 '마음을 깨치면 부처'라고 해
석합니다. 그러나 나는 견성이 공부의 시작에 불과하며, 부처를
이루는 머나먼 도정의 출발점에 불과하다고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 나라의 불교 가르침은 많이 왜곡돼 있습니다. 교학의 바탕
이 되는 불교 경전 공부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11족~12쪽)
만현 스님은 화두 참구 일변도로 진행되어 온 지금의 한국
불교 수행 방식에 '노!'를 분명히 하는데, 내가 보기에 만현 스
님의 이런 문제 제기는 지난 1981년 당시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의 돈점노쟁과 일단 비견할 만하다. 아니 그 위력은
크게 앞선다. 20년 전의 돈점논쟁이 한국 불교 정체성 자체는
피해간 데 비해(아니 고착시킨 데 반해), 만현 스님 쪽은 훨씬 근
본적인 문제 제기로 시종한다.
이 점을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내 문제 제기
는 불교 교학 발전의 한 획을 긋는 일"(13족)이라고 밝히고 있
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해당되는 자신의 법문은 먼 훗날
평가받을 것"(166쪽)이라는 발언도 던져 놓고 있다. 어쨌든 간에
만현 스님의 발언은 "불교사적으로주목할 만한 큰 사건"(156쪽)
이면서도 지금의 한국 불교계에 뜨거운 메시지다. 무엇보다 현
재의 한국 불교는 정연한 체계를 갖춘 정통 불교가 아니라 심
교, 즉 마음의 종교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우선 강
렬하게 눈에 뜨인다.
왜 그럴까?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법화경>> <<화엄경>>
등을 잘 읽으려 하지 않으니 교학에 어둡고, 거기에 나오는 생
사관을 포함한 핵심 교리들을 방편설 정도로 치지도외하는
몽매한 태도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법
문집은 '우물 안 불교'에 대한 정문일침이다. 자기의 오랜 수행
이력의 내공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당당하다.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구하는 것과 같다고 지금의 불교계에서는 말합니다.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마음자리가 곧 극락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지옥과
극락을 마음 안에서만 찾으며 그것(지옥과 극락)은 따로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때문에) 마음 밖에 엄연히 존재하는 지옥, 극락, 부처와 보살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40쪽)
"선은 자기 존재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 정도로만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지옥이란 것도 우리 마음의 산물로 (가볍게)
봅니다. 서방극락 역시 우주생명의 근원적인 바탕 정도록 봅니
다. ----- (이런 식의 소박한 인식은) 자유와 평등의 정의사회를 구
현할 때 그곳이 바로 극락이라는 비약으로 연결됩니다. 관세음
보살, 관세음보살 하는 말도 우주 생명을 의인화한 것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92쪽~193쪽 요약)
만현 스님은 이 같은 법설이 정법을 능멸하는 외도의 설이라
고 단언한다. 이를테면 선 불교 쪽에선 <<법화경>> 속에 등장
하는 족쇄, 독충, 귀신 등을 비유와 상징으로 해석해 왔다. 대
중교육을 위한 서적 상상력의 장치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법화경>> 11장 <견보탑품>, 15장 <종지
용출품> 그리고 16장 <여래수량품>, 등의 위대한 메시지를
건성으로 읽고 만다.
법신에서 보신 개념으로 대전환
그러면 만현 스님 법문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신
개념 위주의 불교'에서 보신개념 위주의 불교'로 대전
환일 것이다. 보신 개념으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
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말대로 필자는 그런 불교관을 불교 세
계의 새 패러다임 도입과 구축 노력이라고 보는 쪽이다. 대승
경전에 나타난 핵심 정보와 사항이 새롭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읽어보자.
<<법화경>> 16장의 경우, 부처는 "나의 말은 진리이므로, 나
의 말을 믿으라."는 권면으 세 번 되풀이한 뒤 자신이 지난 40
년 간 이 땅에서 설법을 했던 '역사 차원의 석가모니'가 아니
라, 백천만 아유타겁 동안 이미 부처였다고 설파한다. 즉 절대
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궁극적 실재'로서의 부처라는 점을 언명
한 것이다. 따라서 2500년 전 출현한 석가모니란 중생을 위한
현현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당시 제자들은 일상의 차원에 갇힌 채로 부처님 말씀에 그저
당혹해 한다. 11장 <견보탑품> 에서 현실의 이 땅인 영취산
바로 그 자리에서 다보탑이 땅 속으로부터 솟아오른다. 더욱
놀랍게도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는 곳마다 나타나 부처님의 법
문이 옳다고 증명할 것이라 맹세했던 '다보여래'가 그 곳 다보
탑 안에 들어 있었다.
장려한 불국의 장면, 즉 절대세계의 자세한 모습까지를 다시
한번 선명하게 보여줬다. 심지어 제자들 앞에서 석가모니는 다
보여래의 옆 사좌좌에 않아 보이기도 했다. 이야말로 역사 차
원의 이 시공간에 연출해 보인 궁극적 실재, 즉 절대세계의 돌
연한 출현이고, 궁극적 실재와 역사적 석가모니가 하나임을 보
여준 위대한 기적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그동안 우리는 이런 정보를 시적인 상상력으로 읽어
왔다. 대중 교화를 위한 방편설로.... 즉 추상화 내지 관념화
시켜서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자재 만현 스
님의 개입이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인견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부처님 세계의 구체적인 묘사에 다름 아니라는 주장이다. 자재
만현 스님의 불교 세계관을 특징짓는 철두철미한 보신 중심주
의의 등장이다. 무량광으로 된 보신, 절대계에 엄연히 존재하는
보신을 중심축으로 해서 불교 세계를 전면 재구성하는 것이다.
즉, 법신은 비로자나불로 상징되는 빛 그 자체, 진리 그 자체
혹은 우주 그 자체를 말하는 '우주적 몸'. 따라서 보신과는 불
이의 관계인데, 보신은 이 법신을 근거로 해서 나온다. 다
르게 말해 보신은 궁극적 절대계에 존재하는 불신의 구체적인
모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것이 불교학자의 책상머리 발언이 아니고, 독
자적인 수행론과 불교 생사관의 정립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또 만현 스님의 수행 과정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다. 그 문제의
보고서가 <<21세기 붓다의 메시지>>다.
때문에 만현 스님은 한국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 타파, 즉 견
성을 둘러싼 새로운 해석부터 정면에서 문제 제기하고 있다.
흔히 '견성이 곧 성불'이라고 하지만, 만현 스님은 이를 철두철
미 부정한다. 한 마디로 "위험한 표현"일 뿐이라는 지적이
다. 외려 견성은 기나긴 수행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만현 스님은 자신의 수행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말한다. 즉
화두 타파로 인한 마음자리를 깨치는 순간 하늘과 땅의 경계가
확 뒤집힌다는 것, 바로 이때 "내 앞의 모든 게 공이요, 나도
없고 나라는 생각까지도 사라진" 자성광명을 본다.
생각 이전의 본래 진면목이다. 이때 몸뚱이라는 것이 '가짜 옷'
이고, 나라는 것도 '가짜 나'이며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대목부터다.
그 견성의 단계가 완전한 깨달음이고, 따라서 생사윤회를 벗
어나 삼계를 완전히 뛰어넘기에는 턱없는 것
이라고..........., 이 대목에서 만현 스님은 논리와 문자에 굳이 매
달리지 않고 화두 타파 뒤 선정에 들었던 상태의 경험을 털어
놓고 있어 주목된다.
그에 따르면 선정 속에 몰입했던 때, 한 이불 속에서 심한
문둥병 환자와 함께 밤잠을 자게 되었다. 이런 선정 속 상황에
서도 만현 스님은 문둥이의 존재가 자꾸 의식이 됐다. 또 토굴
에서 보림하던 중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다가올 때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진땀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연히 보게
된 미모의 여인을 보고도 마음이 설레었다고 한다. 그의 표현
대로 "(그런 자신이) 역겹고 싫었다."고 한다. 자신의 화두 타파와
선정이 부처님이 말한 진정한 삼매의 경지가 아니었다는 중간
결론을 만현 스님은 그때 내리게 된다.
그 순간 "진여실상이란 용광로에 무명 번뇌나 업장 따위가
모조리 녹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주장했던 지난 날 "나의
법문을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진
여자성을 보았다 해서 곧바로 붓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
았습니다. 부처님과 보살을 뵙고자 했으나 친견은 고사하고 지
옥, 천상도 관할 수 없었습니다. 도솔정토나 서방극락도 끝내
관할 수 없었습니다.'(26쪽~29쪼 요약)
선승인 그가 염불선으로 과감히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그 때
문이다. 이 방향 전환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 사건임에 분명
하다. 염불선. 그것은 조사선 일색의 한국 불교에서 오랫동안
외도로 치지도외 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현 스님은 염불선
이 인도의 용수와 마명, 중국의 혜원, 선도와 각현 그리고 한국
의 의상과 원효 스님 또 서산 선사 등의 수행법이기도 했음을
주목하고 "침묵 속의 정토업을 쌓는" 수행을 거듭했다고 밝힌
다. 가히 놀랍다.
염불선이야말로 수행의 으뜸
이런 용기는 <<화엄경>> <<법화경>> <<율장>>의 가르침대로
무엇보다 계율을 존중하며,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는 수행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임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1970년대
시절의 그 일이 놀랍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 스스로의 수
행인 자력에 의존하는 것에 일정 부분 한게를 긋고 있다
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피라고 하는 타력에 의존하기 시작
한 것이다. 다음 그의 고백을 유심히 음미하기 바란다.
"덕산의 30방을 흔들며, 상에 집착 없는 언어로 공을 읊
고 마치 우주의 주인이 다 된 양 착각 하며 오만을 떨었던 지난
날을 생각하면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30대 중반 서울에
올라와 총무원 상임포교사로 법상에 앉은 지 2~3년이 못돼 나
의 공부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25쪽)
바로 이 지점에서 고유의 불교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다. 그의 단언에 의하면 출가자가 자력의 수행으로 오를 수 있
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까지다. 즉 곧바로 성불한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셈이다. 견성 그 이후부터는 철두철미 부처
님의 가피가 필요하고, 다음 생애에 몸을 받은 아라한의 공덕
이 다시 쌓여 그 결과로 보살의 반열에 오른다.
"문수보살, 보현보살 그리고 관음보살께서 뿌리는 부처님의
광명을 온 몸의 털구멍으로 받아들이는 경계를 종종 만나는 위
력"이 바로 보살의 경계다.
이때 모든 보살이 아닌 최상수 보살 정도가 되면 부처가 뿌
리는 무량광이라는 빛덩어리를 보게 된다. 다음이 부처님 친견
의 경지다. 즉 '불과를 증한 대성자'의 단계에 바로 이때 들어
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의 불신을 절대계의 부처
님 나라에 둔, 즉 법신 보신 화신의 3신을 완벽하게 구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높디 높은 까마득한 위계의 관문 때문에 '견
성 즉 성불'이라는 습관화된 말은 턱없는 노릇인 것이다.
"무량광을 보기 이전에 부처와 보살이 있다 없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범부가 지껄이는 망언일 뿐입니다."는 단언(35쪽)은
여기에서 나온다. 만현 스님은 자신이 구축한 삼신 이론과 부
처 성불 단계론이 11세기 티벳의 전설적인 성자 미라래빠보다
구체적이며, <<반야경>> 등에서 설명된 법신 이론 중심의 부처
설명보다 정교한 것이라고 밝히지만, 지금 이 원고는 그걸 검
증할 수 있는 자리는 안 된다.
용궁에 들어가 <<화엄경>>을 가져왔다는 인도의 용수와 달리
만현 스님 자신은 이 책의 도처에서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말하
지만, 그것 역시 제3자가 쉽게 용훼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불교에 관심 있는 이의 입장에서
보건대 만현 스님의 이 '신 불교론'에서 흥미로운 대목은 불교
가 훨씬 불교다워진다는 점이다. 장려한 체계의 구축과 함께
그가 강조하는 신행 활동의 3박자인 염불 - 계율 - 효도는 출
가자와 불자들을 위한 덕목으로 돌연 떠오르게 된다.
장려한 체계라 함은 수행의 단계와 관문만이 아니라 올바른
생사관을 위해 필수인 대목이다. 이를테면 만현 스님은 부처와
보살이 보신으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
회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고 설파한다. 마음자리를 깨친 정도의
수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지장보살본원경>>에 설명되는 끔
찍한 무간지옥은 실제로 있다. 따라서 출가하여 수행하는 이가
설혹 선근공덕이 있어 견성했다 해도 계율을 지키지 않을 경우
특히 음행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비유컨대 "수행자가 여자를 가까이 하는 행위란 마치 깨끗한
물 한 컵에 똥물 한 방울이 떨어져 그 물을 마실 수 없게 되
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소유와 청정을 지향할 것을 권한다.
이 점 요즘 흔들리는 모습의 불교계에 중대한 암시가 될 것이
고, 지옥과 극락 그리고 윤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망언을
했던 동양철학자 도올 김용옥 역시 가슴 철렁할 노릇이다. 책
에서 만현 스님은 부처 말씀을 인용하며 "정법을 비방하는 구
업은 그 어떤 죄업보다 지중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만현 스님 설법에서 중요한 점은 따로 있다. 삼신을
두루 갖춘 부처의 위신력에 대한 강조다. 훌륭한 상모와 지혜
그리고 자비와 신통을 두루 갖춘 부처는 온 세상에 자재한 존
재로 성큼 부각된다. 만현 스님이 화두 참구에 앞서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 공부를 "가장 훌륭한 수행법"(208쪽)으로 권
장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붓다 중의 붓다께서 일러주신 수행법은 바로 염불선입니다.
위빠사나선도 2500년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공부이기 때문에 훌
륭한 수행법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하고
부르는 것이요. "지장보살, 지장보살'해도 좋습니다.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하면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칭명염불이라고 합
니다."(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