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리 마을 동신제
문창리 동신제 제단 송단
아래 내용은 2010년도 민속학과 이주환 님이 민간신앙론 경북의 마을신앙 상주시 이안면 문창1리 동신제 유래와 변천과정 등을 정리한 자료다.
목 차
1. 마을개관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2) 행정구역상의 변천 3) 자연마을의 명칭과 위치 4) 마을의 인구와 생업
2. 동제의 내용 1) 제당 (1) 제당의 명칭과 위치 (2) 제당의 형태와 역사
2) 제의 (1) 제의 명칭 및 신격, 유래 (2) 제의 주관 및 선정 (3) 제의 비용 (4) 제물 준비 (5) 제의절차 (6) 제의의 결산
3. ‘문창1리’ 동제의 특징과 변화
4. 경북 마을신앙의 일반적인 양태와의 비교
5. 결론 및 소감
6. 참고문헌 및 제보자 1. 마을개관 1) 마을의 위치와 유래 ‘문창1리’는 마을의 서쪽과 북쪽에 있는 작약산(芍藥山:770m)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서 동쪽에 지산천(芝山川)을 두고 있다. 남쪽에는 ‘양범1리’와 맞닿아 있으며 32번 국도가 지나고 있는데, 이 국도를 따라서 5분 거리에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점촌?함창 I.C가 있다. 문창1리는 산이 울창하고 들이 넓어 일찍부터 큰 마을을 형성하였다. 이 마을은 순흥 안씨, 의령 남씨, 함양 박씨가 처음 개척하였으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본래 ‘무리’라고 불렸으나 마을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명칭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 마을에서는 원래 선비가 많이 났었고 앞으로도 선비가 많이 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마을 원님이 문창으로 개칭했다고 하나 이 역시도 너무 오래되어 언제인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학문을 숭상하여 인재를 배출하는 고장으로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었고 지금까지도 국회의원, 장·차관 등 정부 요직에 오른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또한 마을 동쪽에는 송단(松壇)이라는 소나무 숲이 있어 시문(詩文)을 음송하기도 하여 문(文)이 창성(昌盛)하는 뜻에서 문창이라 부른다고도 한다.
2) 행정구역상의 변천 문창1리는 함창군 상서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경동면과 서봉면 일부를 문창리로 병합하여 상주시 이안면에 편입되었다.
3) 자연마을의 명칭과 위치 문창1리는 녹동, 동역(동녁), 양지마, 음지마, 독미안(동미안, 동만)의 5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녹동은 동역의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노루미기 또는 놀구너미라고 한다. 마을 주변에 나무가 많이 우거져 있는데 300여 년 전 뒷산에는 사슴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졌다. 노루→놀구→노구→녹. 상주지역 옛 사람들은 산에 사는 짐승 ‘노루’를 ‘놀구’라고도 했다. ‘노루’는 ‘느르’ 즉 ‘늘어 난’의 뜻과 음이 비슷한 ‘노루’로 옮아 간 것이다. 또 ‘녹’은 ‘홍문록’의 준말이기도 하다. 동역은 발음 편의상 동녁이라고도 불린다. 이 지역은 두지골, 두곡(杜谷)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양지마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60여 년 전 문창리 주민 일부가 동쪽 들을 따라 이주하여 살면서 마을을 형성하였는데 문창의 동쪽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동역(동녁)이라 하고, 지형이 사방이 꽉 막힌 뒤주처럼 생겼다고 하여 두지골이라 한다고도 한다. 두지골, 두곡(杜谷) / 상주지역에서는 ‘뒤주’를 ‘두지’라고 한다. 그러나 ‘두곡’은 ‘뒷마을’, 또는 ‘동방지역’의 뜻이다. 뒷(두, 後)+골(谷)=‘뒷골’→두곡. ‘뒷골’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두곡(杜谷)’이 되었다. ‘역’은 ‘언저리’의 뜻이 있다. 양지마는 양짓마, 양촌으로 불리는데 동역의 남서쪽과 독미안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마을의 중심으로 마을회관이 위치해 있는 곳이다. 양지에 있다하여 양지마라 한다. 음지마는 양지마의 남쪽에 있는 마을로 독미안의 남동쪽이 된다. 양지마의 반대로 음지에 있다하여 음지마라 불린다. 독미안은 음지마의 북쪽이고, 양지마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발음 편의상 동미안, 동만으로 불린다. 묘처럼 생긴 산의 모양에서 유래했다. 독미산 안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 독미동(獨美洞), 독미안이며 뒷산에는 폭포와 약수터가 있고, 동쪽에는 안 송정(-松亭)이라는 소나무 숲이 있고, 서쪽에는 불당골이 있어 아름다워 독미동이라 했다고 한다. 독미안의 송단을 안송단이라고 하며 예전부터 부녀자들이 화전놀이를 하던 곳이라고 한다. 반면, 동제를 지내는 송단을 이와 구별하여 밖송단이라고 한다. 보통 송단이라 하면 제의를 지내는 밖송단을 말한다.
4) 마을의 인구와 생업 마을 인구는 67가구 129명이다. 주민들의 연령 평균은 70대로 매우 노령화된 상태이며 남성인구보다는 여성인구가 많다. 순흥 안씨, 의령 남씨, 함양 박씨가 처음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나 한국전쟁을 전후로 하여 마을 주민을 구성하는 성씨가 다양해졌다. 현재 마을은 150년 전에 들어온 조씨, 반씨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마을에서 조씨와 반씨 성을 가진 가구 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녹동귀농마을은 주로 외지인들이 많은데 이곳을 제외하고는 대다수의 마을 주민들이 토박이다. 마을 주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장뇌삼 밭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이 마을 토박이들은 주로 논농사를 하고, 장뇌삼 밭은 1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지인이 운영하고 있다. 부분적으로 배나 감을 재배하는 과수원도 보이나 면적은 그리 넓지 않다.
2. 동제의 내용 1) 제당 (1) 제당의 명칭과 위치 문창1리의 제당 명칭은 송단(松壇)이다. 원래 이곳이 소나무를 중심으로 팽나무, 참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이었던 것에서 유래했다. 제당은 산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마을 내부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 입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문창1리로 접어드는 도로를 따라서 마을의 중심인 양지마 쪽으로 들어오다 보면 좌측에 소나무로 둘러싸인 곳을 석축이 받치고 있는데 그곳이 제당이다. 제당 주변에는 장뇌삼 밭이 있다.
(2) 제당의 형태와 역사 이 송단은 원형으로 되어있다. 참나무 한 그루와 소나무 다섯 그루가 원형의 송단을 둘러싸고 있으며, 나무 사이에는 올 초에 친 금줄의 형태가 일부 남아있었다. 원래는 제단 앞에 있는 작은 돌의 옆에 팽나무가 1그루 있었으며 소나무가 이들을 둘러싸고 그 주위를 참나무가 둘러싸는 형식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 팽나무와 소나무, 참나무는 그 수명이 약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이 중 팽나무와 소나무는 몇 해 전부터 죽은 상태로 있어서 5년 전에 당시 이장의 주도로 모두 베어버리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 간에 갈등이 촉발되어 동제가 단절될 우려도 있었지만, 송단에 고사를 지내고 다시 소나무를 심는 것으로 문제는 종결되었고 이로 인해 동제도 이어지게 되었다. 대리석으로 된 제단은 동쪽을 향해 있으며 그 앞에는 위로 돌출된 작은 돌이 있다. 이는 규모가 작아 입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남근 모양을 닮아서 남근석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마을 사람들은 특별한 명칭 없이 단지 돌이라고 한다. 이 돌은 원래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어디서 가져왔는지, 누가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없다. 또한 마을 사람들은 그 돌에다가 대고 제의를 지낼 뿐, 다른 의미는 없고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다. 1980년 경지정리로 인해 송단과 그 밑에 있는 밭의 높낮이 차이가 심해져서 송단이 무너질 우려가 있어 석축을 쌓아놓았다. 현재 제단 옆에 있는 효행비는 당시 석축을 쌓는데 큰 공헌을 한 남석원을 위해 세운 것이다.
2) 제의 (1) 제의 명칭 및 신격, 유래 제의 명칭은 동제이다. 마을 사람들은 동고사, 동신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동네에서 지내는 고사, 동네를 지켜주는 신을 위한 제사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신격에 대해서는 마을 안에서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신에 대한 명칭부터 신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현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사시는 분은 물론이고, 제보자의 증조할아버지께서도 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제의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도 마찬가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제당에 있는 참나무의 수명이 200년이 넘었다는 것과 위의 제보자의 선친의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제의를 했다는 것으로 보아 약 2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2) 제의 주관 및 선정 제의에는 제관, 축관, 주판을 선정하는데 제관은 제의에서 절을 하는 사람이고, 축관은 축을 읽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판은 제물을 준비하는 사람인데, 현재는 마을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로 제물 품목이 대폭 축소되면서 10여 년 전부터 따로 선정하지 않는다. 제관과 축관은 제의 전에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마을 사람들의 생기복덕을 하나씩 따져가면서 선정하는데 너무 나이가 많아서 활동력이 없는 사람은 제외한다. 이 때문에 했던 사람이 5년 안에 또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은 제관 선정은 제의 사흘 전까지는 이루어져야 하는데 생기복덕뿐만 아니라 병이 없고, 그 해 흉한 일을 겪지 않은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관이 되면 삼일기도를 올린다고 하는데, 그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과거에는 일주일씩 기도를 드렸으나 너무 길어서 사흘로 줄였고, 기도 기간에는 마스크도 하고 다닐 정도였으나 지금은 하지 않는다. 제관으로 선정되면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린다. 이 때 금줄은 대문에 걸며 송단의 금줄과는 달리 제의가 끝나면 바로 치운다. 황토는 대문 앞에 일직선이 되게 양쪽에 각 세 군데씩 총 여섯 군데를 뿌린다. 제관은 외출을 자제하고 흉한일이 있는 사람과의 접촉도 피하며 말도 적게 하고 남녀유별을 지켜야 한다. 또한 제관은 매일 목욕을 해야 하는데 과거에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냇물에 구덩이를 파서 목욕도 하고 그 물을 길어와 집에서 사용하였다. 냇물이 깨끗하지 않을 때에는 논의 수로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을 사용하였다. 냇물과 구덩이를 판 샘이 도로공사로 없어져 버린 후로는 밖에 나가서 흉한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집에서 목욕을 했지만, 현재는 목욕탕을 가는 경우가 많다. 축관, 주판 모두 제관과 같이 삼일기도를 드리고 금기를 지킨다. 특히 음식의 경우에는 가족과 함께 준비하기 때문에 주판을 선정할 때는 가족의 생기복덕 까지도 고려했다. 주판이 없어지면서 한 때 제관이 음식을 준비했었고 자연스럽게 제관 부인의 생기복덕도 고려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제물의 축소로 떡이나 밥 없이 술, 포, 삼실과를 기본으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제관 부인의 생기복덕은 고려하지 않는다.
(3) 제의 비용 과거에는 소나 돼지를 잡는 대규모의 제의를 하면서 제의 비용이 많이 들었으나 제물이 상당 부분 축소된 현재는 15~20만원으로 축소되었다. 제비는 과거에는 마을 사람들이 한푼 두푼 모아 자율적으로 충당하였으나 현재는 마을기금으로 충당한다. 마을기금은 옛날부터 이 마을에서 해오던 상여계의 전통에 의해서 지속되어져 왔다. 그러던 것에 몇 년 전 마을 사람들이 가구당 3만원씩 낸 것과 2004년에 개인적으로 기부한 재원이 더해져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마을기금은 필요한 경우에 각 가구의 각출과 개인적인 기부를 통해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마을기금은 마을에서 총무를 정해서 관리한다.
(4) 제물 준비 제물은 현재 상당 부분 축소가 된 상태이다. 과거에는 돼지나 소를 잡아서 크게 했었으나 마을의 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점차 축소되어 2005년까지는 밥, 국, 탕, 떡, 포, 육적, 조기, 배추전, 두부전, 대구전, 간장, 도라지, 숙주나물, 고사리나물, 무나물, 시금치, 밤, 대추, 곶감, 술 등을 올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 조차도 축소되어 술과 포, 밤, 대추, 곶감의 삼실과를 기본으로 하여 어느 집에서 준비하느냐에 따라 추가된다. 이렇게 주, 과, 포로 제물이 축소가 된 것은 5년 정도 되었으며 그 이유는 주판이 사라지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을인구의 감소와 노령화 때문이다. 예전에는 술을 마을에서 직접 담갔으나 지금은 정종을 산다. 제물 준비는 주판이 담당하였으나 10여 년 전부터 주판을 선정하지 않은 이후로는 제관이 담당했었다. 이처럼 제관 집에서 제물을 준비하다가 현재는 제물의 축소로 제관과 축관이 적당한 날을 정해 같이 장을 보러가는 것으로 대신 한다. 제관과 축관은 장에 가서 돗자리, 초 등 제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로 구입해온다. 예전에는 함창장날에 맞춰서 장을 보러갔으나 지금은 함창 또는 점촌에 있는 시장까지 나간다. 제물을 사는 곳은 따로 정해지지 않았고 각 제관과 축관이 마음 맞는 곳에 가서 알아서 산다. 단, 살 때는 절대로 흥정을 하지 않고 달라는 대로 값을 준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걷어서 제물을 샀기 때문에 농협에서 모두 신권으로 교환하여 준비하였으나 지금은 마을기금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 제물을 사가지고 와서는 제관의 집에 제물을 보관하고, 집에서 제물을 준비한 후 제의에 사용한다. 집에서 제물을 준비할 수 없는 경우에만 마을회관을 이용하여 제물을 준비한다. 제기는 동제제기가 따로 있어서 양지마, 마을회관의 뒤편 낮은 산에 있는 제기창고에 보관했었다. 제기창고는 흙벽돌에 지붕은 짚으로 되어있었으나 낡아 무너질 우려가 있어서 시멘트 벽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조하였다. 제기도 낡아서 30여 년 전에 새 제기로 교체하였으나 20여 년 전 쯤 모두 도난당해 현재는 각 제관 집에서 쓰는 제기를 사용하고 제기창고도 방치해둔 상태이다. 현재 제기창고는 대나무로 둘러싸여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형체만 볼 수 있으며 그 안에는 떡시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5) 제의절차 제의는 제관, 축관, 주판만이 참여할 수 있으며 여자는 절대로 참가할 수 없다. 요즘은 주판이 없어져서 제관, 축관 둘이서만 제의를 진행한다. 동제 며칠 전에 제관과 축관의 집과 함께 송단에도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는데 이 때 송단을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들 사이사이에 금줄을 치며 제단 앞에 있는 돌에도 금줄을 친다. 원래는 동제가 끝나고 금줄을 걷었으나 현재는 집 앞에만 치우고 송단은 치우지 않고 그냥 둔다. 제의는 분향, 재배, 헌작, 독축, 소지올림, 재배, 음복, 철상의 순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과정은 3헌관이 없는 축소된 유교식 절차로 독축과 소지를 올리는 것을 제외하면 일반 기제사와 같다. 제관과 축관은 제당을 청소한 후 제물을 제당으로 운반하고 정월 14일 11시 50분 무렵에 진설을 한다. 이렇게 정월대보름 첫 시에 제관이 향을 피우고 강신에 들어가면서 시작하는 제의에는 약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10여 년 전만해도 제물을 운반할 때 지게를 사용하여 운반하였지만 지금은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차로 운반한다고 한다. 제물의 진설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따로 정해진 것이 없다. 각 집에서 제사를 지내던 대로 진설을 하기 때문에 가가례에 따른다. 현재는 제물의 내용이 상당부분 축소가 된 상태라서 꼭 준비해야하는 주, 과, 포만 준비하고 그 외에 추가적인 것은 제물을 준비하는 각 제관과 축관의 재량에 따른다. 따라서 그 해에 제의를 어느 성씨, 어느 집안에서 준비하는가에 따라 제물의 내용과 진설 방법이 다르다. 축문은 존재하는데 마을 이장이 따로 보관해두는 것이 있으나 꺼내서 보는 일은 거의 없다. 마을 어르신들 중에서 반씨 어르신과 남씨 어르신 두 분이 축문을 전부 외우고 계시고 그 분들께서 매 해마다 작성하신다. 소지는 총 세 번 올린다. 먼저 각 성씨별로 되어있는 소지를 올리고, 동네주민들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소지를 그다음으로 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축의 번식과 건강과 관련된 소지를 올린다. 소지를 올린 후에는 그 자리에서 간단히 음복을 하고 철상을 하는 것으로 제의가 마무리된다. 철상이 끝나면 제단에 문종이와 제수를 조금씩 놔둔다. 과거에는 제수를 놔두면 사람들이 와서 몰래 먹었다고 한다. 이것을 먹으면 재수가 좋기 때문에 일부러 숨어 있다가 제사가 끝나고 제관 일행이 내려가면 이를 몰래 먹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이 그 문종이에 글씨를 쓰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는 생활형편이 나아져서 이러한 일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참기름 종지에 담긴 참기름까지 가져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6) 제의의 결산 제의의 결산은 정월대보름 오전 10시 무렵에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동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9시부터 마을회관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술과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새마을지도자가 동회를 개최한다. 동회에서는 그해 마을에 있는 중요한 일에 대해서 논의하고 일 년 동안 사용한 마을기금을 정산·보고한다. 제의 비용에 대한 정산은 따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마을기금을 정산·보고할 때 그 안에서 같이 한다. 동회가 끝나면 풍물놀이와 윷놀이를 하면서 먹고 마시고 하루 종일 즐긴다.
3. ‘문창1리’ 동제의 특징과 변화 문창1리의 제의는 약 2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제보자의 증조할아버지 때에도 제의를 지냈다는 것과 송단에 있는 참나무의 수명이 약 200년이라는 점에서 이를 추측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제당이나 제의에 대한 유래나 모시는 신의 신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제당이나 제의에 대한 유래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모시는 신의 신격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은 특이한 점이다. 제단인 송단 주변의 나무의 수명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 제단 앞에 있는 남근석 형태의 돌, 그 돌에도 금줄을 친다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방향으로 신격을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마을 주민들이 신격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함부로 추측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특히, 제단 앞의 돌은 매우 특이한 경우지만 이에 관해서는 산에서 가지고 왔다는 것 외에는 달리 명칭이나 유래, 전설을 알고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별다른 해석을 시도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 유래나 신격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속에서도 과거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은 문창1리의 동제를 지금까지 지속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의 동제는 5년 전에 송단에 있는 나무를 베고 다시 심을 때 한 번의 위기를 맡았다. 당시 나무를 베면서 동제 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옛날부터 내려오던 동제를 없앨 수는 없다하여 고사를 지내고 나무를 다시 심었다. 이처럼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마을 주민들의 생각은 ‘문창’이라는 마을 명칭이 주는 자부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도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동제가 급격히 축소되어 가는 추세이고 동제를 지켜야 한다는 마을 사람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결국, 언젠가는 문창1리의 동제가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문창1리’ 동제의 변화는 다음과 같다.
4. 경북 마을신앙의 일반적인 양태와의 비교
위의 표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5년에 조사한 경북 지방 21곳의 마을신앙을 표로 간략히 정리한 것이다. 위의 표와 ‘경북 내륙지방의 산간신앙 전승양상에 대한 고찰’을 살펴보면 일반적인 경북 내륙지방의 마을신앙에 대한 특징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일반적인 경북 내륙지방의 마을신앙과 상주시 이안면 문창1리의 마을신앙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일반적인 경북 내륙지방 마을신앙과 문창1리의 마을신앙은 제의 명칭이나 제의시기에 있어서 거의 같게 나타났다. 경북 내륙지방의 제당 형태는 당집형보다 제단형이 많은데 문창1리 역시 당집이 없는 제단형이었다. 신격에 있어서는 문창1리의 신격 자체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그 차이를 알 수 없었다. 제당의 위치는 마을 내부로 일반적인 경북 내륙지방의 마을신앙과 비슷하게 나타났고, 제의 절차에 있어서는 문창1리의 경우 3헌관이 없는 유교식 절차의 축소된 형태로 3헌관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유교식 절차를 따르고 있었다. 제의의 성격은 폐쇄형으로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뽑힌 사람만이 제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같게 나타났다. 또한 경북 내륙지방의 마을신앙에서 나타나는 특징인 황토와 금줄이 공통으로 존재하는 것, 우마소지가 존재하는 것, 개인소지를 가구별이 아닌 성씨별로 연장자가 있는 성씨 순으로 올리는 것, 동네제기가 존재하는 것이 문창1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5. 결론 및 소감 문창1리의 동제를 살펴본 결과, 문창1리의 제의는 경북 내륙지방의 일반적인 제의 형태에 가까운 형태로 유지되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동제의 큰 틀은 유지되고 있지만 과거에 비해 많은 부분이 축소되거나 간소화되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는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 그리고 마을 사람들에 대한 동제의 신성성 약화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축소와 간소화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일어날 경우, 문창1리의 동제는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마을신앙의 축소와 간소화가 비단 문창1리만의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창1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농촌에서 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남아있는 인구도 75세 이상의 노인인구가 대다수가 되면서 더 이상 제의를 치를 사람이 없게 되고 있다. 이러한 농촌의 현실은 거스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사라져가는 마을신앙의 현 모습을 기록하고 보존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6. 참고문헌 및 제보자 1) 참고문헌(가나다 순) (1)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마을신앙-현장조사보고서下』(국립민속박물관, 2007)
(2)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의 마을제당-제8권:경상북도편』(국립민속박물관, 2005)
(3) 김종대, 『한국 민간신앙의 실체와 전승』(민속원, 1999)
(4) 김종대, 『한반도 중부지방의 민간신앙』(민속원, 2004)
(5) 이필영, 『마을신앙의 사회사』(웅진출판, 1994)
(6) 조희열, 『상주지명총람』(상주문화원, 2003)
2) 제보자(가나다 순) (1) 남상두, 남, 50세, 농업(새마을지도회장) / 010-3522-6930
(2) 전창현, 남, 71세, 농업(이장) / 011-282-5246
(3) 홍무렬, 남, 68세, 농업 / 010-9282-5688 |
출처: 산삼마을 문창 (문창특수작물작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문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