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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3927Bible 말씀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예은~★
고려의 왕들
제1대왕 : 태조
고려 태조 왕건은 고려의 제 1대왕이다(재위 918∼943). 본관 은 개성이고 자는 약천이다. 성은 왕, 이름은 건이며, 금성태수인 융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895년(진성여왕 9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년) 정기대감이 되고, 900년 광주·충주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배현경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 <계백요서>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개성)이다.
- 제2대왕 : 혜종
혜종은 전 왕인 태조가 통일을 위하여 너무 많은 왕비들과 혼인을 해 왕위다툼으로 죽은(병으로 죽었긴 했지만) 불쌍한 왕이다. 혜종은 고려의 제 2대왕으로, 자는 승건이다. 태조의 큰아들이며 호장한 기질로,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태조가 죽고 나서 즉위한 다음해인 944년 대광 왕규가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후사로 세우려고 왕제인 요(후의 정종)와 소(후의 광종)를 무고하여 왕의 형제간을 이간하고, 여러 차례 왕을 시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처치하지 못하고 항상 신변보호에 힘쓰다가 병으로 죽었다. 능은 개성의 순릉이다.
- 제3대왕 : 정종
정종은 고려시대의 제 3대왕(재위 946∼949)으로, 자 의천이다. 태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유긍달의 딸 신명왕후이며, 이복형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외척으로 세도를 부린 왕규의 난을 평정하였고,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에 불명경보·광학보를 설치하였다. 947년 서경성(평양성)을 쌓게 하고 도참설에 따라 그 곳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능은 개성의 안릉이다.
- 제4대왕 : 광종
광종은 고려 제 4대왕으로, 자는 일화이다. 태조 왕건의 셋째 아들이고 제 3대왕 정종의 친동생이다. 비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 황보씨이다.
정종의 선위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한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먼저 호족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을 만들어 노주·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 의복제를 제정했으며, 수도 개경을 황도로 개칭하고 서경, 즉 평양을 서도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서북계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위화·무주·안삭·습홀·송성·낙릉·운주·신도·안융 등 주로 평남·북지방에 축성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박평·고주·화주 등, 주로 지금의 함남 지방에 축성하였다. 만년에는 왕권 확립을 위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그래서 죽기 전에는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도살을 금하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 제5대왕 : 경종
경종은 고려의 제 5대왕으로, 자는 장민이며 광종의 장남이다. 어머니는 대목왕후 황보씨이다. 비는 대종 욱의 딸 헌애왕후와 헌정왕후 두 자매이다. 955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즉위하여 전시과를 제정하였다. 뒤에 정치를 등한히 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였다.
- 제6대왕 : 성종
성종은 고려 제 6대왕, 자 온고이다. 태조의 손자로, 어머니는 선의태후 유씨이다. 981년(경종 6년)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고려시대 역대의 왕 중 드물게 보는 명군으로서 내치·외교에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종의 내치 중에서는 관제개혁을 들 수 있는데, 거유 최승로의 자문을 받아, 유교를 국가의 지도원리로 삼고 중앙집권적인 봉건제도를 확립하였다. 관제개혁에 있어 중앙에 3성과 6부를 두었으며, 서무를 분장한 7시를 설치하였다. 또 언론을 맡은 사헌부, 군국의 기밀기관인 중추원 등을 두었다. 한편 지방에는 처음에 12목을 설치하였으나 후에 10도·12주로 나누어 다스렸다. 또 권농정책에 힘썼다.
993년(성종 12년)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의 군대가 고려에 침입하자 서희를 요군의 진영에 보내서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의 군대를 물러가게 하였다. 후에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지금의 평북 일대, 즉 장흥·귀화·곽주·구주·안의(安義)·흥화·선주 등에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능은 개성의 강릉이다.
- 제7대왕 : 목종
목종은 고려 제 7대왕으로 이름 송, 자는 효신이다. 경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헌애왕후 황보씨이다. 990년(성종 9년) 개령군에 봉해졌는데, 997년에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후 모후를 천추태후로 존칭했다.
관리의 봉급제도인 전시과를 개정하고 학문을 장려하는 등 치적이 많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삼고자 김치양과 함께 음모, 후계자인 왕의 당숙 대량원군 순을 승려로 만들어 죽이려고 하였다. 이를 간파한 목종은 서경 도순검사 강조에게 대량원군의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에 의해 폐위되어 충주로 가는 도중에 살해되었다.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숙청하고 대량원군을 왕위에 올렸는데, 그가 즉 제8대 왕 현종이다. 능은 공릉이다.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 문헌에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나와 있다.
- 제8대왕 : 현종
현종은 고려의 제 8대왕으로, 자는 안세이다.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 욱의 아들로,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인 헌정왕후.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 시중 김은부의 딸 원성왕후, 대종의 손녀 원용왕후이다. 처음에 대량원군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 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 강감찬의 뛰어난 전술로 귀주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키고, 선유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최치원 등을 추봉하고 문묘에 종사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를 폐하고, 5도호부 75도에 안무사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8목·56지주·56군사·18진장·20현령을 두었으며, 사심관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이다.
- 제9대왕 : 덕종
덕종은 고려의 제 9대왕으로, 자는 원량이며 이름은 흠이다. 현종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 김씨이다. 1022년(현종 13년) 태자로 책봉되고, 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 및 보성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영인진·파천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 유소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로, 황주량을 수국사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으로 개성에 있다.
- 제10대왕 : 정종
정종은 고려의 제 10대왕으로, 자는 신조, 이름은 휘이다. 현종의 둘째 아들이고, 덕종의 동생이다. 어머니는 원성왕후 김씨, 비는 용신왕후 한씨, 용의왕후 한씨, 용목왕후 이씨이다.
1022년(현종 13년) 내사령에 올라 평양군에 봉해졌으며, 27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34년(덕종 3년)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을 수축, 이듬해 북계 송령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에도 성을 쌓았다. 36년 각 도의 양전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을 더 주었다.
37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44년 천리장성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으로 하여금 《예기정의》 《모시정의》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46년 장자상속과 적서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 제11대왕 : 문종
문종은 고려의 제 11대왕으로, 자는 촉유이며, 현종·원혜태후 김씨의 셋째 아들이다. 1022년(현종 13년) 낙랑군에 책봉되었으며, 37년(정종 3년) 내사령에 임명되었다. 형제상속으로 정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마자 법률개정에 착수하여, 최충으로 하여금 공음전시법·연재면역법·3원신수법·국자제생의 효교법 등을 제정하였다.
69년(문종 23년) 양전보수법을 제정하여 전답의 세율을 정하였으며, 이어 녹봉제·선상기인법 등을 제정하여 내치의 기초를 다졌다. 한편 불교를 신봉하여, 67년 흥왕사를 준공하였다. 왕자 후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는데, 그가 곧 대각국사 의천이다.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도 장려하여 최충의 9재를 비롯한 12도의 사학을 진흥시켰다. 이처럼 내치에 힘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외교에도 힘써 동여진이 북변을 침노하자 이를 토벌하였으며, 후에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특히 송나라와 친선을 도모하여 선진문화 수입에 힘썼다. 이와 같은 현명한 정책이 큰 효과를 나타내며, 고려시대 중 가장 찬란한 문화황금기를 이룩하였다. 유교·불교를 비롯한 제도·시설·무역,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괄목할 만한 수준을 나타냈다. 인재등용에도 높은 안목을 가지고 적재적소에 배치하였기 때문에, 제도개혁·빈민구휼 등에서도 치적을 쌓았다.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서예에도 능하여, 양주 삼천사 대지국사비 비문을 친필하였다. 능은 장단의 경릉이다.
- 제12대왕 : 순종
순종은 고려 제 12대왕으로, 자는 의공이며 문종의 장자이다. 인예태후 이씨의 소생으로, 1054년(문종 8년) 왕태자에 책립되었고, 83년 문종이 죽자 즉위하였으나 그 해에 죽었다. 능은 성릉이다.
- 제13대왕 : 선종
선종은 문종의 둘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 자는 계천이다. 어려서부터 경사에 밝고 제술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만에 죽자 고려 제 13대 왕에 올랐다. 선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선종 1년)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니 그 환영의식이 성대하였다. 의천은 불경과 경서 1, 000권을 바쳤고,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요·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이니 거의 4, 000여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에 13층 금탑을 세우고, 인예왕후의 청에 따라 천태종의 중심사찰인 국청사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에 72현(공자의 제자인 산회 등 72인)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을 모방하게 하였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감성이 풍부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1094년 2월 열병하고, 재위 10년7개월만에 향년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 제14대왕 : 헌종
헌종은 고려의 제 14대왕으로, 선종의 원자이며, 어머니는 사숙태후 이씨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9세에 서화를 잘하였다. 즉위하자 이자의의 난이 있었으나 곧 평정하였다. 다음해 신병으로 왕위를 숙부 계림공 희(숙종)에게 물려준 뒤, 후궁에서 지내다가 14세에 요절하였다. 능은 개성의 온릉이다.
- 제15대왕 : 숙종
숙종은 고려 제 15대왕으로, 자는 천상이고 이름은 옹이다. 문종의 3남으로 순종의 아우가 되고, 비는 유홍의 딸 명의태후이다.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해졌고, 조카인 헌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왕위를 찬탈하여 1095년 즉위하였다.
96년 주전관을 두고 주화인 은병을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2년에는 해동통보를 주조하여 통용하게 했다. 남경을 양주에 세우려고 남경개창도감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또한 불교를 신봉하여 많은 불회를 열었으며, 평양에 기자의 무덤을 만들고 묘사를 세웠다. 1104년 여진족 완옌부의 우야소가 침입했을 때, 임간을 보내어 방어하게 했으나 이를 막아 내지 못하자, 다시 윤관을 보내어 화약을 체결하였다. 이로부터 정주장성 밖에 있는 여진부락은 완옌부의 치하에 들어갔다. 이후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비확장에 착수하려던 즈음, 서경으로 행차 도중 병을 얻어 죽었다.
- 제16대왕 : 예종
예종은 고려 제 16대왕으로, 자는 세민이며, 숙종의 태자이다. 명의왕후의 소생이다. 1100년 왕태자에 책봉되고, 1105년에 즉위하였다. 1108년(예종 3년) 윤관에게 여진을 경략하게 하여 함흥평야에 9성을 쌓았다. 19년 이후 새로 일어난 금나라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학문을 좋아하여 학교를 세우고 국학에 양현고(학생의 후원재단)를 설치하는 등 학문을 진흥시켰다.
- 제17대왕 : 인종
인종은 고려 제 17대왕으로, 자는 인표이고, 예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순덕왕후이다. 비는 이자겸의 제 3녀 폐비 이씨와 제 4녀 폐비 이씨, 중서령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병부상서 김예의 딸 선평왕후이다. 1115년(예종 10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23년 15세의 나이로 이자겸에게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26년(인종 4년) 이자겸이 난을 일으키자 최사전·척준경 등을 시켜 반란을 평정하고 이자겸을 귀양보냈으며, 그의 딸들인 왕비들을 폐출하였다. 또 35년 서경에서 묘청이 난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을 서경 정토대장으로 삼아 이를 평정하였다. 2차례의 내란으로 정국이 불안한 중에도 27년 주·현에 학교를 세웠으며, 29년에는 서적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금·송나라 등과 사신 왕래를 자주 하였으며, 45년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게 하였다. 능은 개성의 장릉이다.
- 제18대왕 : 의종
의종은 고려의 제 18대왕으로, 자는 일승이고 인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공예태후 임씨이다. 비는 강릉공 온의 딸 장경왕후이고, 계비는 참정 최단의 딸 장선왕후이다. l146년 인종의 뒤를 이어서 즉위, 방종했으나 문학을 좋아하고 문신들을 우대하는 반면, 무신들은 천대하였다. 70년 정중부·이의방 등이 난을 일으켜 폐위되었으며, 거제도로 쫓겨났다. 73년(명종 3년) 김보당의 복위운동이 실패하자 계림(경주)에 유폐되었다가 살해되었다.
- 제19대왕 : 명종
명종은 고려 제 19대왕으로, 자는 지단이다. 인종의 셋째아들로 의종의 동생이며, 비는 김온의 딸 의정왕후이다. 1148년(의종 2년) 익양후에 책봉되고, 70년 의종을 몰아낸 정중부 등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무신의 집권 뒤 그들의 횡포가 과거의 문신보다 더 심하여, 사회질서 혼란을 초래하고 전국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자주 일어났다. 김보당·조위총 등이 무신 제거를 위한 난을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97년(명종 27년) 실권자 최충헌에 의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 능은 지릉이다.
- 제20대왕 : 신종
신종은 고려 제 20대왕으로, 자는 지화이다. 인종의 다섯째 아들로 명종의 친동생이 된다. 1154년(의종 8년) 평량후에 책봉되었다가 97년(명종 27년) 최충헌이 명종을 폐함으로써 뒤를 이어 옹립되었다. 즉위년에 만적의 난을 비롯하여, 이듬해 강원도 명주의 난, 진주·금주(김해)·합천·경주·광주 등지에서 잇달아 민란이 일어났다. 국권은 실제로 최충헌이 전단하여 왕은 실권이 없었으며, 1204년 병이 심하여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능은 양릉이다.
- 제21대왕 : 희종
희종은 고려 제 21대왕으로, 이름 영이고, 자는 불피이다. 신종의 장자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다. 비는 영인후 진의 딸 성평왕후이다. 왕 즉위의 공으로 권신 최충헌을 문하시중·진강군개국후에 봉했으나 횡포가 심하자, 1211년(희종 7년) 내시 왕준명 등과 함께 그를 죽이려 하다가 성사하지 못하고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 이어 자연도(영종도)로 옮겨지고, 15년(고종 2년) 교동으로 옮겨졌다. 19년 봉영되어 서울에 살다가 27년 복위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교동에 유배되어 죽었다. 능은 강화의 석릉이다.
- 제22대왕 : 강종
강종은 고려 제 22대 왕으로 자는 대수이고, 이름 숙이다. 명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광정태후 김씨이고, 비는 원덕태후 유씨이다. 1171년(명종 1년) 관례를 올리고, 73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97년 최충헌에게 쫓기어 부왕과 함께 강화도로 갔다. 1210년(희종 6년)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상주국한남공에 봉해졌으며, 희종을 폐한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다. 능은 경기 개풍군에 있는 후릉이다.
- 제23대왕 : 고종
고종은 고려의 제 23대왕으로, 이름은 철, 자는 대명이다. 강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 비는 희종의 딸 안혜태후 유씨이다. 1212년(강종 1년)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씨의 무단정치로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58년 최의가 살해되자 정권을 되찾았다.
재위 기간에 거란·몽골 등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특히 31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몽골의 침입을 받고 강화에 천도하여, 28년 간 항쟁하였다. 왕의 친조와 태자 전의 볼모를 조건으로 강화가 성립되어, 이후 고려는 사실상 원나라의 속국으로서 공민왕 때까지 굴욕을 겪었다. 그 동안 황룡사탑 등 많은 문화재를 소실하였으나, 원나라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격퇴하기 위하여 8만대장경을 조판하게 하고, 유학을 장려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능은 강화의 홍릉이다.
- 제24대왕 : 원종
원종은 고려 제 24대왕으로, 자는 일신이다. 고종의 맏아들로, 비는 김약선의 딸 순경태후이다. 1235년(고종 22년) 태자에 책봉되고, 59년 강화를 청하기 위하여 표를 가지고 몽골에 갔다. 고종이 죽자 60년 귀국 즉위하였다. 개경으로 환도하려다가, 69년 임연에 의해 폐위되었고 원나라의 문책으로 다시 복위되었다. 최탄 등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몽골에 투항하자, 몽골은 서경에 동녕부를 두었다. 그 해 몽골에 갔다가, 70년 귀국하여 개경 환도를 선언하자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으며, 73년 여원 연합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탐라에 다루가치총관부를 둔 원나라로부터 일본정벌을 위한 전함 300척을 만들라는 요청을 받았다. 원나라에서 매빙사가 오자 결혼도감을 설치, 원성을 샀다. 능은 소릉이다.
- 제25대왕 : 충렬왕
충렬왕은 고려 제 25대왕으로,원종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순경태후 김씨이며, 비는 원나라 세조의 딸 장목왕후이다. 구비는 시안공 인의 딸 정화궁주 및 숙창원비 김씨이다.
1260년(원종 1년)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71년(원종 12년) 6월 원나라에 가서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 74년 원종이 죽은 뒤 고려에 돌아와 그 해 8월 왕위에 올랐다. 10월 원나라 세조의 강요로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파견하였으나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으며, 81년(충렬왕 7년)에도 김방경 등이 원나라 병사와 더불어 제2차 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90년(충렬왕 16년)에는 합단의 내침으로 12월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92년(충렬왕 18년) 1월에 환도하였다.
원나라의 지나친 간섭과 왕비의 죽음 등으로 정치에 염증을 느껴 98년(충렬왕 24년)에 세자(충선왕)에게 선위한 뒤 태상왕으로 물러나 원나라에 갔는데, 계국대장공주(충선왕의 비)의 무고로 충선왕이 국새를 빼앗기는 등의 음모사건이 발생하자 선위 7개월 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왕은 그 후 음주 가무와 사냥으로 소일,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1308년(충렬왕 34년) 7월, 재위 34년 만에 죽었다. 원나라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훈고사장의 학을 경사로 전향시키는 등의 치적을 쌓기도 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 때문에 자주성을 잃기도 하였다. 능은 경릉(개성)이다.
- 제26대왕 : 충선왕
충선왕은 고려 제 26대왕으로, 자는 중앙이다. 충렬왕의 아들로, 어머니는 원나라 세조의 딸 제국대장공주이며, 비는 원나라 진왕 감마라의 딸 계국대장공주, 조인규의 딸 조비, 서원후 영의 딸 정비, 홍규의 딸 순화원비 등이었다.
1277년(충렬왕 3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91년(충렬왕 17년)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왕세자의 호를 받았다. 97년(충렬왕 23년) 충렬왕의 총애를 빙자, 횡포가 심하던 궁인 무비와 환관 도성기·최세연 등 40여 명을 죽여 궁중의 기강확립을 기도했다. 이 때 충렬왕은 정치에 흥미를 잃고 있었으므로, 무비 등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98년 충선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하자 정방을 폐하는 등 관제를 혁신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군제·세제를 정비하고 원나라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와의 불화로 원나라와의 사이가 원만치 못하였고, 곧 이어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져 선위 7개월 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는데, 이 때 간신 왕유소 등이 충선왕을 아주 폐하고, 그 대신 서흥후 전을 그 후사로 삼으려는 공작을 했다. 1305년(충렬왕 31년) 원나라의 성종이 죽고, 그 후 황위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을 도왔으므로 그 세력의 힘으로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에 봉해졌고, 같은 해에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위에 올랐다. 복위 후 기강의 확립,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과 공신자제의 중용, 농·잠업의 장려, 동성결혼의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과단성 있는 혁신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정치에 싫증을 느껴, 제안대군 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가 전지로써 국정을 처리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각염법을 제정하여 소금의 전매를 단행하여, 그때까지 사원과 권문세가에서 소금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하는 것을 막았다. 13년(충선왕 5년) 아들 강릉대군(충숙왕)에게 전위하고 계속해서 연경에 머물러 만권당을 지은 뒤 내외의 고금서적을 수집하였으며, 이제현·조맹부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20년(충숙왕 7년) 원나라의 환관 임파이엔토그스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에 귀양갔다가 이제현 등의 간절한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25년(충숙왕 12년) 5월에 원나라에서 죽었다. 그림을 잘 그렸으며, 능은 덕릉(개성)이다.
- 제27대왕 : 충숙왕
충숙왕은 고려 제 27대왕으로, 자는 의효이다. 충선왕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몽골 출생의 의비이고, 비는 원나라 영왕의 딸 복국공주, 홍규의 딸 명덕태후, 원나라 위왕의 딸 조국장공주 및 바이앤후두의 딸 경화공주이다.
1299년(충렬왕 25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1313년 왕위를 물려받고 돌아와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정치를 소홀히 하여 혼란이 오자 이 기회를 틈타 심양왕 고가 왕위 찬탈을 꾀하여 원나라에 무고, 21년 연경에 들어가 돌아오지 못하고 5년간 체류하였다. 25년에 귀국, 이듬해 심양왕에게 선위할 계획을 세웠으나 한종유 등 충신들의 반대로 취소했다. 그 후 눈·귀가 멀어 정사를 못 돌본다는 조적 일당의 무고를 받고 정사에 더욱 염증을 느껴, 30년 태자 정(충혜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갔다. 그러나 아들 충혜왕을 황음무도하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폐위하자 32년에 자신이 복위, 그 뒤 원나라의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고, 공녀·환자의 선발 등을 중지하도록 청원한 사실 등 업적을 세웠으나, 여전히 연락과 사냥에 몰두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글씨를 잘 써 예서에 능했다. 능은 의릉(개성)이다.
- 제28대왕 : 충혜왕
충혜왕은 고려 제 28대왕으로, 충숙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홍규의 딸 명덕태후이고, 비는 원나라 관서왕 초팔의 딸 덕녕공주이다.
1328년(충숙왕 15년) 세자로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이듬해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를 원하여, 원나라 문종이 왕으로 책봉하여 30년에 귀국하여 즉위했다.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원나라에 국새를 빼앗기고 부왕 충숙왕에게 양위한 뒤, 다시 원나라에 가서도 황음광포한 짓을 계속하였다. 39년 충숙왕이 죽자 복위하였으나 방탕함은 여전하여 서모인 경화공주와 수비 권씨를 욕보이고, 미녀가 있으면 귀천을 불구하고 농락하였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그에게 욕을 본 경화공주의 밀고로, 조적 등 심양왕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형부에 투옥되어 경화공주의 사건을 심양왕 일당들의 증언과 대질하게 되었으나 그를 미워하던 백안의 실각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러나 여전히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화를 탕진함으로써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이운 등의 상소로 횡포가 원나라에 알려지자 43년 원나라 사신들이 그를 계양(산동성)에 귀양보냈는데, 이듬해 죽었다.
- 제29대왕 : 충목왕
충목왕은 고려 제 29대왕으로, 충혜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덕녕공주이다. 원나라에 볼모로 가 있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 5년) 선왕이 죽자 원나라에서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 좌승상 상주국의 벼슬을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8세였으므로 덕녕공주가 섭정을 했다. 보흥고·내승·응방 등을 철폐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서연을 열었으며, 권신들이 독점하였던 녹과전을 본래의 소유자들에게 반환하였다.
47년(충목왕 3년)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각 도에 양전을 실시하였으며, 이어 충렬왕·충선왕·충혜왕 등 3조실록의 편찬에 착수하였다. 48년 진제도감을 설치하여 기민을 구제하는 등 많은 선정을 베풀었으나 재위 4년 만에 죽었다. 능은 명릉(개성)이다.
- 제30대왕 : 충정왕
충정왕은 고려 제 30대왕으로, 충혜왕의 서자이며, 어머니는 찬성 윤계종의 딸 희비이다. 1348년(충목왕 4년) 경창부원군에 책봉되고, 같은 해에 충목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49년 원나라로부터 왕으로 책봉되어 7월에 즉위하였다. 외척 윤시우와 배전 등이 세도를 부려 기강이 해이해지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입이 잦아 국정이 문란하였다. 이때 충정왕과 함께 충목왕의 후계자로 물망에 올랐던 강릉대군에게로 민심이 쏠리자, 51년 윤택·이승로 등이, “충정왕은 나이 어려 국정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위시켜 달라”고 원나라에 요청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한 후 그는 강화도로 추방되었다가 다음해에 독살되었다. 능은 총릉(개성)이다.
- 제31대왕 : 공민왕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왕으로, 몽골식 이름으로는 빠이앤티무르이다. 충숙왕의 둘째아들이고, 비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이다.
충목왕이 즉위할 때 강릉대군에 봉해졌다.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숙위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가서, 노국대장공주와 결혼하였다. 원나라의 지시로 충정왕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올랐다. 원나라가 쇠퇴해지자 원나라 배척운동을 일으키고, 52년(공민왕 1년) 변발·호복 등의 몽골풍을 폐지하였다. 56년 몽골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로 복귀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한 정동행중서성이문소를 폐지하였다. 이어 원나라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린 기철 일파를 숙청하고, 100년 간 존속한 쌍성총관부를 쳐서 폐지하는 등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68년 명나라가 건국하자 이인임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에 남은 원나라 세력을 공략하였다. 69년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을 점령, 국위를 크게 떨쳤다.
내정에서는 정방을 폐지하고, 신돈을 등용하여 귀족이 겸병한 토지를 소유자에게 반환시키고,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 개혁적인 정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 뒤 홍건적·왜구의 계속적인 침범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65년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여 불사에만 전심하였다.
정치를 신돈에게 맡겨 정치가 문란해졌으며, 자제위를 설치하여 풍기도 문란해졌다. 특히 홍륜이 익비를 범하여 임신시키자, 이를 은폐할 의도로 홍륜·최만생 등을 죽이려다가,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글씨에도 능하였으며, 특히 대자에 뛰어났다. 능은 현릉이다. 작품에 《천산대렵도》(국립현대미술관) 《노국대장공주진》 《석가출산상》 《아방궁도》 《현릉산수도》 《동자보현육아백상도》 등이 있다.
- 제32대왕 : 우왕
우왕은 고려 제 32대왕으로, 신돈의 시녀 반야의 소생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낳은 아들이다. 1371년(공민왕 20년) 신돈이 처형된 다음 궁중에 들어가, 73년 우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부원대군에 봉해졌다. 때를 같이 하여 명덕태후의 명으로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하였다.
74년 공민왕이 시해되자, 수시중 이인임의 후원으로 10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경연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가 죽은 다음 사냥·음주가무·엽색 등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신망을 잃었다.
여기에다 국왕을 믿고 권력을 휘두른 이인임이 최영·이성계 등으로부터 미움받아 경산부에 유배됨에 따라, 정치적 지지기반을 잃었다. 88년 6월 왕족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에 따라 왕위에서 쫓겨나 강화에 유배되었다. 강릉으로 옮겨져, 89년 12월 그의 아들 창왕과 함께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우왕·창왕은 모두 폐위되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 왕으로서의 시호를 받지 못하여 폐왕 우, 폐왕 창으로 기록되었다.
- 제33대왕 : 창왕
우왕의 즉위는 이성계와 조민수의 세력다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성계는 한동안 병을 핑계로 뒤로 물러나있었으나 완전히 이색과 조민수가 정권을 장악한 것은 아니었다.
1388년 도평의사사·사헌부·판도사로 하여금 권문세 가에 의하여 크게 무너진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의논하여 보고하게 하고, 공부의 법이 문란하여져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모든 공물 을 면하게 하여, 각 도의 원수·도순문사·안렴사 등이 군민으로부터 사선을 취하는 것을 금지시켜 이를 위반하는 자는 죄주게 하고, 회뢰가 성행하는 것을 엄히 금지하게 하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그해 수창궁의 창자가 왕의 이름과 같으므로 수령궁이라 고치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대사헌 조준이 토지제도가 고르지 못한 데에서 오는 여러가지 폐단을 들어 상소를 올렸고, 간관 이행, 판도판서 황순상, 전법판서 조인옥 등도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그 개혁을 청하였다. 또, 좌간의대부 이행 등이 첨설직을 군공이외에 는 그 임명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전선법을 복구하여 문무의 전주는 이부와 병부에서 행하게 하였다. 또, 우상시 허응이 균전의 강행을 상소하였다.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으로 옮겼으며, 최영을 충주 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이어 정방을 폐지하고 상서사를 두 었으며, 또 급전도감을 설치하였다. 또, 대사헌 조준이 상서하여 기인의 제도가 그들을 노예와 같이 사역 하여 그 고통이 심하여 도망하는 자까지 있게 됨을 들어 그 시정을 청하였다.
또한, 전법판서 조인옥이 상소하여 사원의 토지수입과 노비의 고용은 그 소재하는 관에서 수납하여 승도의 수를 헤아려 지급하고, 인가에 유숙하는 중은 범간으로 논하며, 귀천의 부녀는 절에 가는 것을 금하여 위반하는 자는 실절로써 논하고, 부녀로서 중이 되 는 자는 실행으로써 논하며, 향리·역리·노비로서 중이 되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였다.
1389년 1월 경상원수 박위가 병선 100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또, 그해 사관 최견 등이 상소하여 사관 8명을 두되, 각각 사초 2부를 작성하여 관직을 옮길 때 1부는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집에 보관 하여 후일에 증거로 삼게 하고, 겸관과 충수찬 이하는 견문록에 의하여 각각 사초를 작성하여 춘추관에 보내며, 춘추관은 서 울과 지방의 모든 관청에 통첩하여 그 베풀어 행한 바를 보고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8월 유구국 중산왕 밀도가 옥지를 사신으로 보 내자 그를 후히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양광도도관찰사 성석린의 청 으로 주·군에 의창을 설치하였다.
같은해 전객령 김윤후 등을 유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그해 대사헌 조준 등이 상소하여 사전의 폐단을 논하고 경기의 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밖의 땅은 모두 공상과 제사의 용도에 충당 하여 그것으로써 녹봉과 군수의 비용을 충족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산기 이상의 처로 명부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고, 판사 이하 6품까지의 처로서 남편이 죽은 자는 3년간 재가를 금하였다.
또, 그해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뒤 이성계 등이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고 신씨라 하여 두 왕을 모두 폐위시켰다가, 12월 우왕은 강릉에서, 창왕은 강화에서 각각 살해하였다. 이때 창왕은 나이는 10세였다.
- 제34대왕 : 공양왕
고려시대 최후의 임금(재위 1389∼92)으로 이름은 요이다. 신종의 7대손이며, 정원부원군 균의 아들이다. 비는 창성군 진의 딸 순비 노씨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바뀔 때였으므로, 조정에서는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이 격심했으며, 친명파의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뒤에 창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1389년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왕은 과단성이 없는 성품으로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구세력에 이어 새로 실권을 잡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실권을 빼앗겼다가,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망하였다. 공양왕은 폐위된 뒤 원주에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2년 뒤에 삼척에서 살해되었다.
첫댓글 좋은정보 감사합니다.가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