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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귀족과 시민(13세기말~14세기)
십자군 전쟁이 소환한 미술의 기지개..
13세기말, 피렌체는 십자군 원정의 반대급부로 성장하여 지중해를 포함한 유럽일원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자림매김한다..
한국전쟁 월남전의 반대급부로 경제 부흥에 성공한 일본이 생각나는 대목이지 않은가요?
이러한 환경에서 귀족과 신흥 부호의 합의로 공화정 체제가 유지되어 정치적 자유와 시민 참여의 문호가 열립니다.
다양하고 자유로운 사고는 문화를 고양시켰고 예술가와 학자들은 보다 윤택한 삶을 추구하려는 위정자들의 보호를 받는 환경이 조성되었죠!
자유로운 환경에 문인인 단테, 보카치오등이 활약하였고, 단테의 절친으로 알려진 "조토"도 중세적인 전통에서 탈피 사실주의, 입체감, 감정표현등 과거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을 소환하면서 미술 사학자들에게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인정받는다.
단테 알리기에리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가 그린 단테의 초상화
*단테
두란테 델리 알리기에리(이탈리아어: Durante degli Alighieri, 1265년 ~ 1321년 9월 13일 또는 9월 14일)는 두란테의 약칭인 단테(Dante) 또는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로 널리 알려진 이탈리아의 시인이다. 피렌체의 알리기에리 혹은 알라기에리(Alagh(i)eri) 가문의 일원이다(단테의 아들 야코포의 설명: “Durante olim vocatus Dante, condam Alagherii de Florentia”). 두란테 알리기에리의 이름은 "장수하는 날개가 달린 자"라는 뜻인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남긴 다양한 영향들의 결과를 예언한 실로 상징적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단테는 『향연』(Convivio, 1304-1307)에서 처음 ‘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망명 생활이 시작되고, 이제 자기가 꿈꾸었던 ‘제국의 권위’(la imperiale maiestade)에 대해 숨김없이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일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제국의 목적도 ‘좋은 삶’(vita felice)에 있다고 전제한다.개별 도시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위해 ‘왕국’(regno)이 만들어지지만, 정복욕에 사로잡힌 ‘인간성’(l’animo umano) 때문에 인간의 세계는 전쟁과 갈등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고 부언한다.
이러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전 세계가 ‘왕정’(Monarchia) 또는 ‘하나의 군주정’(uno solo principato)을 구성해야 하며, 이러한 형태의 통치체제에서 비로소 개별 국가들은 각자의 영토에 만족하고 서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찌 오늘날 USA를 지칭하는 느낌..
왕정이 失政을 하면 대안은 있었겠죠?)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단테가 로마 교회를 평화를 구축하는 데에 큰 장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비록 백파의 일원으로 반(反) 교황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1289년 캄팔디노 전투에서 아레쪼(Arezzo)의 황제파를 적대한 것에서 보듯 큰 틀에서는 반(反) 황제파이기도 했다. (오늘날 표현이면 아나키스트인가요?)
보편적 평화를 위한 ‘단일한 보편적 권위’는 로마인들이 공화정 아래에서 구축한 제국과 같은 것이고, 로마 제정의 황제가 계승했던 역할은 로마 교회의 영적인 일과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제국의 ‘통치자’(imperiatus)의 권위는 신으로부터 직접 전해지며, 동일한 이유에서 로마 교회가 세속의 일에 관여함으로써 오히려 제국의 출현을 방해한다고 주장한다.
단테의 세속적 정치권력이 갖는 자율성에 대한 논의는 선언적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후반기 저술에 속하는 『제정론』(De Monarchia, 1314)에서, 기존의 생각들을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첫째, ‘제국’은 세계인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좋은 삶’은 인간의 지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보편적 평화가 보장될 경우에만 실현되며, 이러한 이유에서 ‘세계’(humana civilitas)는 보편적 평화를 가져다 줄 ‘한 사람’에 의한 통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의미하는 ‘초인간적’ 정의를 인간이 이성을 통해 구축한 ‘인간적’ 정의와 구별하고, 후자도 종교적 구원과는 무관하지만 그 나름의 세속적 타당성을 갖는다고 역설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인간은 인간적 정의를 세속에서 실현할 수 있게 되었으며,고대 로마가 힘을 통해 구축한 평화는 바로 이러한 정의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해 준다는 것이다.
결국 『제정론』에서 단테는 로마교회로부터 독립된 세속 정치권력을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을 넘어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노래했던 『신곡』과는 달리, 『제정론』은 신의 은총을 통한 철학적 계도가 아니라 신으로부터 직접 부여된 통치자의 권위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저술 모두 이성의 잘못된 사용이 가져온 인간적 비극을 전제한다. 『신곡』의 ‘지옥에서의 신의 정의’(giustizia li sdegna)는 『제정론』에서의 ‘인간 종족’(genus humanum)에 대한 탄식으로 이어진다.
『제정론』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극복하는 방식을 초인간적 정의의 실현이나 계시와 이성의 조화에서 찾지 않는다. 대신 보편적 평화를 향유함으로써 인간적 정의를 실현하는 제국이 르네상스와 함께 찾아온 근대의 여명을 맞이한다.
단테는 『신곡』에서 길을 안내하는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와 많은 점을 공유한다. 전쟁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제국을 통한 평화를 열망한다.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시적 영감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보편적 평화에 대한 전망도 공유한 것이다.
*보카치오
그의 아버지는 상인으로서 환전상을 경영하였으며 그는 사생아로 체르탈도라는 고장에서 출생하였다. 피렌체에서 아버지의 업을 익히는 한편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다. 14세 때에 장사를 배우기 위해 나폴리로 보내졌는데 보카치오는 "그 6년간은 시간 낭비 외에 얻은 바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새로 6년간을 법학 연구에 보냈으나 별로 공부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에 대해서는 깊은 감격과 의욕을 가져 열심히 독학을 하였다. 당시 문예 부흥 운동이 한창이던 나폴리에서 그는 유쾌한 사교 모임에도 참여하고 친구도 사귀며 인문학자에 의해 고전 문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 여성과의 열렬한 연애 경험은 청년기 문학 창조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을 맞아 백방으로 직업을 구하다 피렌체 시 정부의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의 학식과 재능, 능변으로 교황이나 그 밖의 여러 영주에게 사절로 파견되는 행운이 있었다.
이 즈음 그에게 있어서 가장 뜻있고 줄거운 사건은 청년 시대로부터 만나고자 소원했던 페트라르카를 만나게 된 일이었다(1350년).
그의 만족과 기쁨은 비길 데가 없었으며 친교는 더욱더 두터워져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362년 점쟁이가 말한 죽음의 예언을 믿은 그는 은둔 생활로 들어가 모처럼의 고전 연구를 그만두려 하였으나 페트라르카의 권유로 연구를 계속하였다. 노령과 빈곤, 질병에 시달린 나머지 나폴리에도 피렌체에도 흥미를 잃어 고국에 돌아가 숨어 살며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페트라르카의 죽음(1374)에 크게 충격을 받아 전년에 피렌체 정부의 요청에 의해 맡았던 <신곡>의 강의도 중단하였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애를 마감하였다.
*조토
아래의 글에 조토가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기에 조토의 기사 링크로 총총..
https://naver.me/5VmqrKMu
스승없는 제자가 없기에 "조토"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덜 유명한 "치마부에"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단테는 신곡에 다음과 같은 표현을 남겼다!
"치마부에는 자신이 회화의 영토를 지배했다고 생각했지만, 조토의 명성이 그의 이름을 어둡게 만들었다." 이태리식 청출어람 표현인데 신곡을 꼼꼼하게 읽어보지 않아서 사실 확인은 패쉬~~
인터넷의 정보를 제대로 신뢰하기 힘들지 않나요?ㅎ
치마부에의 초상~~
삼위 일체의 세부묘사~~
별 설명이 없어도 여전히 비잔틴풍이 느껴지시나요?
*치마부에
치마부에(Cimabue, 1240년 경 ~ 1302년 경)은 이탈리아의 화가이다. 조토 디 본도네의 스승이며 피렌체 파 화가의 스승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비잔틴 예술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우아함·자연스러움·현실감 등이 깃들어 있다. 작품으로 산프란체스코 성당의 <십자가형> <묵시록> <성모> 등의 벽화가 있다.
산타트리니타의 성모/치마부에/1285년경(좌)
오냐산티 성모/조토/1310경(우)
미술 평론가의 평인데 동의하시나요?
인터넷의 도록 그리고 음영의 표현 원근법등이 눈인 들어오지만 제 시각으로는 도찐개찐~~
달리 "미린이"이겠어요?
조토의 작품중 대표작이자 명성을 알린 작품은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마리아와 예수의 생애를 그린1305년경에 완성한 프레스코화이다..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이탈리아 동북부의 파도바에 위치한 조그마한 예배당이다!
지오토의 14세기 프레스코화가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내부..
벽화 속 7가지 미덕과 악덕이라는 초점으로 伊 스크로베니 예배당을 서술한 조금은 현학적인 "제임스 세일"을 글부터 소개~~
이탈리아 베네토 지역 파도바에 위치한 스크로베니 예배당은 이탈리아 예술의 가장 큰 보물 중 하나다. 길이 20.88m, 너비 8.41m의 이 작은 예배당은 내부 전체를 장식한 벽화의 높은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예배당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이탈리아 예술가 조토(1267~1337)다. 그의 이름은 한동안 ‘화가’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였다. 그로 인해 미술의 한 장르인 회화는 르네상스의 시작이후 700여 년간 시각 예술의 대표이자 주류가 됐다.
조토 시대 이전 기독교 미술은 비잔틴 양식에 입각한 성상화(聖像画)가 주를 이뤘다. 정적인 묘사에 집중한 이 양식은 예수의 인간성보다는 신성한 본성을 강조했다. 지오토는 기존 예술계를 타파하고 인간의 감정을 묘사하며 자연의 관찰에 근거한 작품을 그렸다.
‘황금문에서의 만남’(1303~1306), 지오토. 프레스코화
예배당의 벽화 중 하나인 ‘황금문에서의 만남’에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인 안나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 요아킴에게 달려가 입 맞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조토는 예수의 고난이나 아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처럼 신학적 순간이 아닌, 인간의 사랑을 묘사했다.
조토는 인간을 예술에 도입해 심오한 신학적 의미를 담았다. 이는 단순히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신을 위한 예술을 구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최후의 심판’, 조토. 프레스코화, 스크로베니 예배당 내부
‘최후의 심판’과 성부 여호와의 세부 묘사~~
예배당의 서쪽과 동쪽 끝에는 각각 천사들에 둘러싸인 성부 여호와와 최후의 심판 속 예수가 거울을 통해 마주 보듯 그려져 있다. 성부는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젊은이로 묘사됐다. 이는 요한복음 14:9 ‘나를 본 이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는 구절과 일치한다. 이처럼 조토는 성경에 입각한 깊이 있는 신학적 이해를 그림에 표현했다.
조토는 7가지 미덕과 7가지 악덕을 벽화 속 그림으로 묘사해 자신의 신실함을 승화시켰다.
7대 악덕과 미덕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영향을 받아 정의됐다. 14개의 초상화로 구성된 이 작품의 배치는 특별하다. 7개의 악덕은 각각 그 해결법인 미덕과 마주하고 있다. 이 작품의 내용과 배치는 예배당에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도덕적이며 영적인 요소를 부여한다.
7가지 미덕과 악덕은 수평, 수직으로 작용한다. 어리석음은 신중함으로 상쇄된다. 신중하지 못하면 불성실함으로 이어지고, 불성실은 분노로 이어진다. 또한 타인을 시기하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희망을 잃게 된다.
라틴어로 어리석음을 뜻하는 단어는 ‘스툴리타리아(stultitia)’다. 이는 단순히 어리석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우둔함, 비이성적임을 뜻하기도 한다.
7가지 미덕과 악덕에 나오는 어리석음(왼쪽)과 신중함(오른쪽)
그림의 왼쪽은 ‘어리석음’의 초상화다. 그림 속 남성은 뚱뚱하고 감각적 쾌락에 중독돼 있다. 그는 바르지 않은 자세로 서서 깃털로 장식된 우스꽝스러운 왕관을 쓰고 있다. 허리띠에 달린 방울은 소리를 내 주의를 끈다. 입을 벌린 표정은 무지를 나타내고, 동물처럼 신발을 신지 않고 있다. 손에 들린 곤봉은 덜 다듬어진 형태다. 이는 기교 없는 단순한 무력을 의미한다.
오른쪽 그림은 어리석음을 상쇄하는 신중함을 뜻한다. 신중함은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하는 미덕이다. 그림 속에는 한 여성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다. 우아하게 정돈된 책상은 질서와 목적을 암시한다.
그녀는 오른손에는 과학을 상징하는 나침반을, 왼손에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들고 있다. 이는 ‘너 자신을 알라’는 고전적 교훈을 따름을 의미한다. 어리석음을 상징하는 남성과 달리 그녀는 머리를 약간 앞으로 숙이고 있다. 이는 경청하는 자세의 표본으로, ‘어리석음’의 우둔하고 비이성적인 태도의 해결법을 상징한다.
7가지 악덕 : (오른쪽부터) 절망, 시기, 불신, 불의, 분노, 불성실, 어리석음
7가지 미덕 : (오른쪽부터) 희망, 신에 대한 사랑, 믿음, 정의, 절제, 인내, 신중함
조토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삶의 나침반을 구현했다.
7가지 악덕과 미덕은 우리 삶을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르네상스 예술의 꽃봉오리 역할을 한 조토는 후대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전하고 있다.
참고로 위의 글을 적은 제임스 세일(James Sale)dms)은 50권이 넘는 책을 출판한 작가이다. 2017년 고전시인협회 연례 대회에서 1위를 수상했으며, 최근에 시집과 ‘최고 성과 팀을 위한 동기 부여 매핑’(Routledge, 2021)을 출판했으며 그의 글 번역본을 참조하여 편집했습니다.
미사여구 일변도의 글이라 "비평과
대안"도 제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망구 제 생각으로 조금 첨가한 것외에는 조토를 알자는 생각으로 저자의 글은 충실히 전하려고 기술했습니다!
바쁜 시간 이탈리아까지 가보기 힘든 분도 원작의 분위기를 느끼면서 감상이 가능한 장소가 있어 소개합니다..
일본 시코쿠의 나루토에 있는 오츠카 국제 미술관에 원작에 준한 도판으로 만든 전시실이 있습니다.
조토의 작품외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등 엄청난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니 가보시기를 권유하며 밴드에 소개한 내용 링크합니다!
https://band.us/band/87344862/post/602
현대인들의 시각에는 우피치, 바티칸에서 접하는 조토의 작품은 고졸하고 담백해보이면서 눈높이에 적합하지 않지만 중세의 말미 분들에게는 처음 접하는 충격적인 사실화로 느껴진 모양입니다..
우리도 조토의 작품을 더 느껴보기 위해 위의 현학적인 설명의 갑갑한 예배당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렸던 것 같은 포멧으로 그린 스크로베니의 "예수의 생애"를 별 다른 설명없이 본인만의 느낌으로 만나봅시다..
총38장면중 쉽게 찾아지는 23장면만 모아보았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예배당을 방문한 후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볼 필요는 없다.
그림 자체가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라고 극찬을 했지만 서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그래도 성경에 대한 이해나 도슨트의 도움이 필요한 분이 많겠죠..
예수의 탄생
프레스코화 중 하나인 <예수의 탄생>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탄생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세울 것이다'라는 최후 심판의 예언을 반영하여, 아기 예수를 향해 있는 흰 양은 '선'을, 반대쪽을 보고 있는 검은 염소는 '악'의 의미로 표현하였다
동방박사의 경배..
아기 그리스도 성전에 봉헌
이집트로 피신..
아기들을 학살하는 헤롯의 병사들~~
학자들 사이에서 토론하는 그리스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받음..
가나의 혼인 잔치..
나사로의 부활~~
호산나 합창속의 예루살렘 입성..
성전의 정화
유다의 배신
최후의 만찬..
조토가 노년에 접어들어 그린 작품으로 건축물과 테이블을 활용한 원근법, 인물들
의 상호작용에 따른 감정과 그에 따른 표정 등 사실적인 묘사와 공간감을 더욱 완숙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그리스도..
유다의 입맞춤..
대사제 카야파 앞에 선 그리스도..
조롱당하는 그리스도..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가는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애도..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는 장례를 치를수 없었지만 아리아태마 사람 요셉은 빌라도에
간청하여 장례를 치른다..
너무 밋밋한 느낌이 들어 미술사학자가 "애도"를 보면서 느낀 감상문을 옮겨봅니다..
1. 마른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는 애도의 분위기를 배가시키는 배경의 역할로 그림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고 있으며,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경사진 담벼락은 시청자의 눈을 예수의 얼굴 쪽으로 시선을 인도하고 있다
2. 사도 요한으로, 그의 팔은 단축법에 의해 멀리 있는손을 의도적으로 작게 그렸으며 그림의 중앙에 위치시켜 3차원의 공간감을 강조하고 있다
3. 그리스도의 신체를 만지고 부여잡고 있는 여인들의 행위와 표정 묘사는
신성의 권위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4. 등을 보이는 여인 또한 기존 중세 미술에서는 절대 볼수 없는 과감한 표현이며, 뒤로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인의 '등'을 통해 우리는 감정을 억제하며 흐느끼고 있는 인물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이렇게 나열된 평을 보느니 그냥 보면서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더 바람직하죠!
학술적이고 논리를 들추면서 경직된 느낌으로 작품을 접하는 것보다 최소한의 감상을 위한 기본을 준비한후 본인의 눈과 감성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나를 붙들지 마라~~
그리스도의 승천
성령..
사도의 수는 다시 열두명~~
유다의 자리를 마티아가 제비에 뽑혀 이어받았다.
운보 김기창의 작품 "예수의 생애"를 소개했던 글중 운보의 집 링크해봅니다..
운보의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예수 연작에 조토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합리적인 추측이 되기도~~
https://band.us/band/87344862/post/494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졌으며 그의 기지와 재주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것 역시 상당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우리는 샤르트르 대성당이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조각 작품들을 만든 거장들
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들이 당대에 충분히 평가받았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러한 명예는 그들이 봉사했던 대성당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의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하고 있다. 그의 시대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곰브리치의 서술을 나열하였는데 예술가에 대한 평가는 "조토 전후"로 나누는 합리적인 명분을 제시하는 듯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조토에 대해 당시의 정형화된 미술 양식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을 진실하게 표현한 점을 높이 평가하며 '중세적 관습에서 벗어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연 화가'라 존경을 표했다.
르네상스를 개척한 조토를 곰브리치의 목차에 따라 한단락으로 수도 없는 직품중 형편이 허락하는 한 소개~~ 저는 다음편에서 쭈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