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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kBs에서 2014년 2월 28일 방영예정인 3.1절특집방송인 해저 바래미마을의 독립운동에관한 것을 2월24일에 만회고택 명월루에서 촬영한다 함. 다음은 해저마을 독립운동사에 관한 자료입니다.
중요한 핵심들은 이전에는 3세대 독립운동이나 그전 자료가 많이 발견됨에 따라 4세대의 거문적인 독립운동이며 생가기준으로 35분이상이 독립관여나 의사자의 행동을 보인부분과
바래미는 단순한 두메마을이 아닌 최고의 명문가 마을이라는 것, 벼슬과 문집,
심산 김창숙생가의 탄압은 일제시대 혹독했다는 것. (요절과 절손, 행방불명, 파산등)
대표적으로 만회고택 명월루가는 14세대에 걸쳐서 12분진사 6분대과 1분은 안동좌수 일제시대에서는 독립운동가 3분(진림포함)을 배출했으며 이런 명문가들이 많은 마을이라는 것.
독립운동의 정신이 정조16년에 위정만인소인 영남만인소에서 비롯된 것이란 점.(후손들이 대거 독립운동에 나서) 안동의병과 심산탄생의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
특히나 심산생가는 절손과 고문으로 요절등이 많으며 가계가 파산되고 뿔뿔이 흩어져 남은 곳은
명월루 만회고택만이란 점.
심산에게도 항상 거문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끝까지도 함께하며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후원자역활을 수행함.
1. 작은 거인 바래미 마을 소개
바래미마을은 안동도호부 소속에서 일제시대때부터 봉화군내성읍 해저1리소속으로 바뀌었으며 일명 바래미골로 의성김씨 집성촌인입니다. 선비정신이 살아있는 전통 유림마을로서 입향조[팔오헌공 김성구]이래로 김희삼기준으로는 문과 21장, 입향조인 김성구 기준으로는 약200년간 대과 17장, 사마시63장, 안동좌수 12분, 관찰사 4분 유문집80권을 낸 작은 마을로서는 영남은 물론 동시대 기록으로는 전국에서도 유래를 찿아보기 힘든 마을입니다.
바래미마을은 선정과 위정에서도 많은 선정비와 죽음을 불사하는 위정정신은 이조시대에도 수 없이 많이 드려나게 되는데,
특히나 정조16년의 사도세자 신원회복 관련 영남만인소등을 주도하며 죽음을 각오한 선비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영남 유림의 요람이었습니다.
일제 시대에도 약90가구의 작은 바래미마을은 독립운동에서도 거문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2.바래미 독립운동의 역사를 본다면 4세대에 걸친 피눈물나는 독립운동사로 바래미를 보시면 국내 독립운동의 전체가 보일 정도일 것입니다.
먼저 바래미 마을의 가훈은 충효이며 조선의 역사에서 정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던 상소와 선정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선비정신이 바로 독립운동과 맥을 같이 한것으로 보이는데
3)유림운동의 일차와 이차에 걸쳐서 정신적인 지주역활 뿐아니라 대부분의 활동자금과 활동등이 이지역에서 모금됨은 기록으로 나타나(파리장서약사29 심산유고 비밀경찰요사 김창숙문존등 참고)
3. 4세대 독립운동사
바래미 독립운동사 요약
사도세자 신원회복관련상소인 영남만인소(정조16년)를 김한동(당시 교리), 김희택, 김희성(삼계서원원장)등3인이 주도하였으며, 고종때 황준헌에대한 위정척사 만인소는 김희택의 증손인 김조영 이차소수[일차소수 이만손], 정재 유치명의 사도세자 추존상소, 의병활동 등으로 변화함. [정재의 문하생이 많아짐] 정재문하생의 의병에 대거참여, 정재의 부친 유회문도 풍기서원장으로 영남만인소에 적극참여함.
영남만인소의 자신의 원칙과 어떠한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국운이 기울자 의병활동의 단초가 된다함.[한국국사학 연구소 인문강좌 제4강 필자 이욱]
1)제1세대 독립운동사(이 부분은 마을에 전달되지 않아서 잃어버렸던 역사임),永자, 林자시대
가)의병간부 참여2인
** 진림(의병내방장: 창의대장 참모 다음이 내방장)-
안동소파록 김희곤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참조 최근 필자가 발견하여 독립운동가 추서중(홍기의 할아버지의 친동생 )
**하림(의병 서기와 중군장) 국민훈장 하림가는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집이 헐리고 몰락
만주로 이거한 눈물나는 역사 간직
**안동의병은 의병사상 거문적인 지원을 받은 가장 큰 의병으로 바래미 마을은 500원을 지원한 것으로 나온다(안동의병에서 10위권에 봉화인이 4명으로 봉화인의 위상을 나타낸다)
김희곤 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참고
나)의사자
**경암 석림 - 김흥락문인으로 왜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예가 없음을 꾸짖다.(독립운동가 김홍기 유집 참조)
경암공 유사[김흥락 문인]- 우리나라를 합병하여 종묘사직이 망함으로부터 비분 강개 의리를 지킴. 의례준칙이란 것이 나오자 왜왕에게 글을 보내 오랑케가 인륜이 없음을 꾸짖으니 이로써 누차 비방 당해, 독립운동가 덕기의 할아버지로 사례요식을 편찬 하였음..(독립운동가 김홍기 유집 참조)
** 호영- 일제의 유화책으로 은사금을 거절하고 꾸짖다. 봉화향교지 671
**난영 -유화책으로 유림대표에게 전달한 은사금 거절 꾸짖다. 봉화향교지 675
난영의 후손은 독립운동가 남호 김뇌식과 김창희 정조때 초계문신 김희락의 후손임.
**하강부원군 호림(심산 김창숙의 부친으로 영남 만인소를 주도한 희성의 후손이며 23살에 성주 동강종가로 출가한 완전한 바래미인임.
을미( 1985년) 섬나라 도적이 우리나라를 시끄럽게하고 왕비를 죽이고 머리를 깍도록 협박하였다.
부군은 탄식하면서 오랑캐를 없애지 못한다면 이마에 먹칠을 하게되리라함.
고을사람들을 인도하여 거느리고 의병활동을 일으킬 것을 꾀하고 격문을 원근에 돌렸다.
고을원과 관찰사가 겁박함게 집없는 주인일 될지라도 주인없는 집은 되지 않겠다함.
(참고자료 심산유고675페이지 당시 심산 김창숙의 나이18세)
***당연히 호림은 바래미의 분위기와 만인소의 정신과 기개, 타협하지 않는 정신등을 고스란히 간직한 바래미인이며 당시18세인 심산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외에 덕영(참판댁)의 세 아들이 감옥에 있는데 응당 풀릴날이 있을 것이라는 대목(홍기유집 덕영만사편) 확인과 자료 찿는 중임.(이는 1908년경으로 추정됨) 그중 한 분은인 헌식은 이차유림단으로 독립운동가임
영남만인소에서 의병활동과 초기단계의 의사자의 행태들이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바래미 독립운동사로 제1세대의 활동인 것입니다.
2)제2세대 독립운동사(일차유림단사건 일명 파리장서사건) 여기서부터가 신문지상으로 알려진 3세대 독립운동사
파리장서에서 활동한 바래미인과 바래미(林자, 昌자시대)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자 바래미마을 김씨네 100여가구 주민들은 마을 유림의 본당인 명월루에 모여서 절의를 지키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된다.
***일제의 유화책에 맞서 전래의 유교사상을 굳굳하게 지키며 2세교육을 마을 학록서당에서만 시킴으로서 반일의사를 표시했다.
[참고 매일신문 1985년8월16일자]
가) 심산이 경북북부지방을 방문한 목적인 바로 파리장서의 성공을 위해서, 좌도를 움직이는 것과 자금의 수혈입니다.(자금문제가 가장 시급한 현안이었다함)
파리장서 약사29p를 보면 심산이 그길로 장영석을 찿아가지 않고 서명과 좌도 고무도 중요하지만 자금조달이 하나의 시급한 문제였다함 또한 여기서 해외로 가져간 자금의 대부분이 마련된다라고함(교림을 포함한 바래미인들의 물질적인 지원이 대부분아 이지역에서 마련된다함)심산유고를 보면 심산은 초기에 회당의 어려움을 지원할 정도로 개인적인 자금의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순흥 김교림(택동의 후손으로 심산 계열)이다.
유림예장과 사림예장을 한 명문가이자
심산계임
심산유고에는 족숙 교림을 만나고 석탄을 거쳐서 바래미로 들어온다.
교림의 만사에서 내 그대를 만나기 위해서 400리길 산하를 몇 번이나 넘었던가로 여러번 만남을 표현함. 만사로도 고마움을 표현 한것으로 보인다 교림가 또한 만석꾼의 13진사와 6대과의 명문가
(바래미 전해오는 얘기로는 바래미보다 더 많은 자금을 낸것으로 전해진다)
합방전 아버지를 살해한 일본 헌병을 살해하여 원수를 갚는 교림.
초군청을 설립한 교림
후손들은 일본이 눈에 가시 같은 교림가를 고의파산시킨 것으로 봄.
나)다음은 바래미를 방문하여 창도집에서 회식하고 뜻 맞는 몇사람이 홍기집에 모였다.
다음날 권상원장을 맞이하여 권상원장이 좌도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 우리 몇이서 좌도(안동과 예안)를 책임지겠다함.
[채산 권상규 (의병 창의대장 권세연의 아들)은 유림대표를 심방 서명 받는 일을 주선하다고함]
파리장서 서명 받는 일주선(독립운동가 서훈록)
규당공과 함게 갖히었다함(홍기 유집 간찰에서)
또한 안동바래미 마을에서는 족형 창근 창순 족숙 한식 뇌식 족질 홍기를 만나서 좌도 각지방인사와 연락을 부탁하니 모두 쾌히 응했다.
서명은 일부분이고 외에도 8분이 적극 호응하면서 심산의 뜻을 사람을 보내 알리고 서명받는 일을 주선했음을 뜻합니다(성균관대학 발행 김창숙문존 276참고)
창근 한식, 헌식 뇌식도 일차장서부터도 이미 참여했음을 보이고 심산유고에서는 항상 고마움의 표시로 항상 바래미를 언급하면 빠지지 않는 분들임.
심산이 해외로 가져간 자금의 대부분이 이지역에서 걷혔다라고함
가장 검거인이 많았던 성주와 봉화에는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였다(파리장서 약사 참고)
파리장서 약사29 참조
다)경능 창백(만인소 희성후손 심산4촌)성주대한협회지부 창립에도 관여함.
다 파리장서 참여
건영, 순영(만인소 김한동의 후손), 창우 3분이 참여이며 대부분 대표격인 60대이며 노인분들이 6명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함(서명이 3분인 것은 더 이상의 서명은 심산이 말렸다고함) 매일신문참고
일차파리장서에서도 심산 생가 고향에서는 거문적으로 참여함.
일차 유림단 사건인 파리장서에서도 거문적으로 참여가고 자금지원과 파리장서의 성공을 위해서
거문적으로 나섰던 것입니다
3)3세대 독립운동사(2차유림단 사건과 항일과 후학양성외)
가)2차 유림단사건외 (국권회복을 위하여 몽골접경 황무지개간으로 20만원 모금목적 1926년
마을주민 8명이 주도하여 마을100여가구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항소50마리 값인 5,000원을 전달해 (주동자 8인 : 김홍기, 김뢰식, 김창근(김희택후손), 김헌식, 김한식, 김우림, 김창희, 김창백)
4인이 독립운동가 공식추서됨.
이자금은 의별단 김지섭 나석주등의 의열단 자금으로 쓰인다
의열단 관련해서도 창근외 구속된 것으로 알려짐
활동사
**김홍기- 심산 김창숙의 지령을 받고 각지방에 사람을 보내 김지사의 뜻을 알리고 김뢰식에게 전달하며 자금모집(전재산인 2,000원 집을 저당 희사)에 함께 나서기로하며 홍기의 외숙인 강필(곽면우선생과 망미대를 쌓아놓고 울분을 달래던 만산의 아들 )을 방문하여 2,000원을 희사케함(당시 김홍기는 바래미 대표로 1922년부터 추대되며 또한 심산 생가 상징적인 존재로 대부분의 창구 역활을 함)
이 자금지원은 가장 큰 금액으로 알려지고 있음
바래미 자금도 바래미 대표로서 8인주도 5,000원을 전달함
홍기는 바래미마을의 실질적인 대표이자 심산 생가 큰집으로서 상징적인 역활을 하면서
창구역활을 수행하여 심산의 중심인물들과 교류가 많았으며 외에도 많은 분들과의 교류가 나타남
**경능 창백(성주 신간회 창설과 연락책 김동진 포섭)서훈록 토끼굴 같은 세상을 보낸 경능이라 표현함(경능창백만사 참조)
**김헌식이 김화식 포섭 서훈록
**주민들은 물론 인근 안동 영주지방의 친인척까지도 매타작에 시달렸음.
감시와 탄압은 날로 심해졌으나 누구하나 창씨개명에도, 신사참배에도 나서지 않아 그런 일을 다짐하는 명월루에는 매일 고등계 형사들이 배치되었다.
참고로 홍기의 1,000편이 넘어가는 간찰에서도 어디에도 창씨한 흔적은 없다. 홍기와 순우 만창만이 있을 뿐이며,
단발 또한 단호히 거절함.(수백통의 독립운동가들의 창수시와 간찰들이 발견됨)
해방 후 홍기는 이제 국법으로 깍으라면 깍겠다함.
나)창훈은 유학으로는 더이상 어렵다며 선인을 따라 죽지 못할 망정 가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어미 잃는 자식을 버려두고 훈춘으로가서 학교를 창설하고 학교일에 전념함.(만창유고와 개암공파족보참조)
다)신간회, 민립대학, 봉화청년회, 봉영청년동맹, 영남위인전편찬
**창돈[만인소 희성후손으로 심산계열, 봉영청년동맹설립, 신간회 ,봉화민립대학설립, 봉화청년회 주도] (1927.5.28/5.30/8.20자 시대일보 참조)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시 봉화영주 청년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러졌으며, 2차유림에도 연락책으로 참여한 것으로 전해지며 심산과 신채호를 도운 듯(조사해야함), 고문후유증으로 33세 요절, 아들28세 요절, 2분은 행방불명됨.
**창희(비밀경찰요사와 심산유고에서 2차유림단에 참여한 창희는 신간회, 민립대학, 봉화청년회등에서 간부로 지속활동함.) 심산의 자금모집활동가 정수기와 제휴한 것으로도 나와(봉화문화원226페이지 봉화독립운동사 봉화문화원발간.
**김 만기- 경능 창백의 아들로 신간회와 노동운동으로 징역형을 받음. (많은 활동)
외에도 마을에서는 우림(봉화청년회회장), 김보림(민립대 위인전편찬), 김창근(민립대 집행위원장),
창욱(심산4촌 절손)?
김창은 신간회 교육부원(봉화독립운동사)
삼신요원인 정수기를 통한 참여2분
김창식 보림의 아들로 봉영청년동맹 참여
김우림 봉화청년회회장(김희곤교수의 봉화독립운동사 참고)
라)1933년
1)독서회사건 주도자 -창신, 덕기, 중문(공식인정),중열, 중헌 5명 주동, 20대 청년20명이 항일단체인 독서회를 조직
항일전단지를 군내에 뿌리는 것이 임무, 이로 인하여 마을은 다시 한번 수십명이 고문의 회오리에 휘말린다.
마)정수기(심산자금모집책)와 제휴 김창택 김한식 김찬식 김창희
이를 보면서 홍기는 청산에 젊은 원혼들이 가득 하다함, 고문과 매타작에 시달린다고도함.
우리 겨레가 솔개도 전어도 아닐진데 어떻게 하늘에 살겠습니까라고도함.
독립운동가의 2대기록지중의 하나인 기려자 송상도가 사양함에도 유언까지 하면서 발문을 받아간 이유는?
제4세대 독립운동사(학생과 ㅡ입영자외 젊은이들의 항거
1)김창엽- 일본유학시 획득한 정보로 일본이 반드시 망한다는 전단지돌려(국민훈장)
2)김중욱 (김홍기의 제자로) 일본 병영을 집단 탈출하여 중국 덩신장군 휘하에서 장교로서 일본군과 유격전을 치룸.봉화독립운동사(김희곤 교수 참고)
3)김정진(독립운동가)- 홍기의 아들로 대구상고 2학년 재학시 광주 학생의거에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은 태극단을 주도하며 일본에 항거함 동료중 4분이 순국함.
끝으로 이번에 발견된 간찰중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간찰이 매우 많으며 민립대 신간회등의 유관분들과의 교류도 매우 많아,
이름있는 분들의 내왕과 교류가 명월루에서 많이 이루어진 듯 보이며,
이것이 매헌야록과 더불어 양대산맥인 기려수필집의 저자인 송상도가 유언까지 하면서 홍기의 발문을 받아간 이유인듯!
홍기의 시와 유집내용들
물과 달 시원하고 원우 우뚝한 곳
십년만에 찿으니 감회 새롭네
백운동 구름 속에 경자바위 여전하고
뜰안 풀에는 문 밖의 향기 들려오네
세상은 짓밟혀서 풍우속에 어둡고
(***소백산27명 권상용에게 소수서원에 맞겨둠(권상용은 의병대장 권세연 아들)
유자는 쇠잔하여 백발만 성성한데
죽계 마르지 않고 연화봉 고고하여
9)취송족조 덕영(해저)만사 :우리 유림이 겁계에 걸려 초수의 슬픔 있었는데 옛 모습 보전했네 남쪽감옥은 멀리멀고 북망산은 깍아 지른듯 삼형제가 응당 풀릴 날이 있을 것이나 구원에서 어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삼형제라함
23)내종형 강달원 필 (춘양 강필 만산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유곡의 두 어른의 초상은 우리당의... 유곡의 독립운동가 권상익외
우리 겨례가 전어도 아니고 솔개도 아닐진데 가뭄에도 세금을 징발함(극한 재해)
어찌 연못이나 하늘에 살겠습니까?
정와 강공 만산의 유집은 볼 만한 것은 삭제당해
우리숙부(만산)께서 유언으로 남기신 뜻은 저버릴 수 없습니다 춘번 권성후 명섭형(곽종석의 제자로 파리장서 참여 학덕도 높아 홍기와 교류함)은 앞서 허락함 나머지는 만나서 말씀드림(?)
곽면우등과 망미대에서 시를 읊으면서 나라일은 한을 달래던 만산이 남긴 유언? 춘번(퇴계학맥의 계보가 권상익 권명섭으로)
이부분도 연구필요할 듯
1943 요증 문중과 당내 젊은이들이 횡액에 걸린자가 30명(해저,학생운동의 김정진, 김창엽, 김만기, 김창돈의 독서회, 민립대학, 신간회, 봉영청년동맹등이 바래미 주도로 이루어짐외 노동운동 참여 사건등....인듯)혹은 풀려나고 혹은 갇혀있어
(이것은 일제 말기에도 바래미 젊은 이들이 학생운동 신간회등으로 집단적으로 항거 감옥에 끌려가 매타작을 당한 것과 특히나 심산생가 계열에서 절손과 행방물명 요절등이 많음을 표현한 것임
젊은 이들의 원귀등으로 표현하는 것임) 이 작은 마을 의성김가 86가구(타지포함 약100가구 에서 부락마을 전가구가 독립운동에 매진했음을 증명하는 사례 아닌가함)
현재 이름으로본 유관간찰외(국학진흥원에 기탁된 500점은 제외된것임)
1)이동흠관찰60통 독립운동가 이중업아들이며 향산 이만도의 손자이며 김락의 아들 설송체의 대가,홍기의 사돈2)장세형 심산사위11통, 장세명30통(남산종택의 재산을 탕진한 종손 독립운동가로 비밀경찰요사에 자금책으로 나와 연구대상),3)채상규(의병창의대장 권세연아들)3통, 4)권명섭 권상용외(유림단8통)외 닭실가30통, 5)강필외 만산고택50통, 유림단외 민립대 관련)6)김홍기30 7)김창백심산4촌 독립운동(2통)8)김환기(심산 맏아들 )9)손후익(심산의 사돈으로 심산활동의 중심인물) 8통 심산사돈 실질적인 일 많이함10)손덕부 제문 9)김원일 겉봉투1통(이육사형)원일에 대한 편지는 서한록에 실려있어11)김창희(김뢰식 아들로 신간회 심산자금전달 지원상황 전달 민립대학설립1통)12)김중문 독립운동가1통)13)김창순(1통)14)소석권태영 성동수창 민립대설립 15)김우림 민립대학? 7통)16)정재종가 유연박(의병참모1통 유연시50통 유연즙1통 김락의 사위17)김보림 민립대학 위인전 편찬 30통18)
창수시회 야우와 구우 필적감정 필요함(창숙은 벽옹을 고쳐서 우로 씀)19)만주 이거 독립운동가 많이 배출한 김태섭 오록 종손70통20)김학선 사민 민립대학건설 25통(두월 당시 두월은 봉화군소속) 21)김창징 교림아들 2통 22)강호 강영등 민립대학 21)신억직 신간회 회장
22)권상원장(닭실 독립운동가)1통23)김중문(바래미 독립운동가1통 23)
창수시회 해사(김정호의 호가 해사임 필적감정
청산이 등장함 청산은 독립운동가 권상익의 호임(창수시회)나머지의 호들은 알수없어서 앞으로 내용과 인물을 밝혀야함
(외에는 호등으로 판독 어려워)
19)중국 길림성에서 만나라외 중국등 편지14통)
20)심산편지3통 겉봉투1통
21)강국원1통(성동수창멤버 22)김홍기 편지는 약100통이상 서상교편지 3통 23)김정진의 옥중 홍기에게 보낸 서신 20통 24)교류 흔적 김동진 35)송준필 36)김황38(유연즙(무실)
39)권중철(민립대부집행위원장)
40)김황 41)기려수필저자 송상도
대부분이 초서라서 내용이 전혀 파악되지 않으며 200통이상은 전혀 가름되지 않음
또한 국학 진흥원에 기탁된 간찰등500통은 제외 된것임
희삼 이전의 기록인데
제1세 석 경순왕4째아들 태조외손 봉 의성군
제2세 일 내사령
제3세 홍술 감문위 상장군 익찬공신
제4세 국 문화시랑 평장사
제5세 경진 문화시랑 정평장사
제6세 언미 문시중 평장사
제7세 용광 대보
제8세 공우 우금오위별장
제9세용비 고려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 봉 의성군
제10영 봉익대부 찬성사 판정객 시사겸 집현전 직제학
제11 지열(세)초계군수 문과 증 병판
제12 수덕 판서 증 가희대부 이조참판
제13세 용초 전라도 병마절도사 태조개국록 원종공신
제14세 화 진사
15세 종사(수)병절교위 증 예조참의
제16세 계손 수의교위(종6품)
제17세 종혁 좌사랑 산음훈도 증 정삼품
제18세지정 증 좌승지 성암증과
(통상 우리역사는 희삼부터 칩니다)
제19세 희삼 삼척부사 통정대부(문과)행실이 드러나 이조판서 증직 칠봉산 하사받아 선정비
제20세 우굉(개암)진사장원 동광 형 문과 홍문관부제학 강원도 관찰사 퇴계 남명문하 보우탄핵소수
제21세 득하 진사 음직 현감
제22세 율진사 증 좌승지 유문집
제23세 추길 진사 동추(첨추부사) 증 이조참판
제24세 성구(팔오헌)생원문과 삼사 대사성 관찰사 갑과3등
제25세 여건 문과 을과6등등 홍문관수찬 유문집 갈암 이현일 문인 조사석 탄핵
제26세 경환 통덕랑(정5품 증승지)안동좌수
제27세 택동 생원좌량벼슬 역임 음 현감 도산서원 천추역임(일지와공) 이상정이 여강서원강좌에 않을 때 동주로 여러선비 맞이함(만인소 소수인 이휘병 척사만인소 아들 이만손 이휘병은 부친인 이이손이 택동의 외손자)
(교림가는 여기서 갈려)(창돈은 여기서 갈려)
제28세 희성 문과병과3등 삼계서원장 지평 만인소통문을 영남에 띄워(심산과 홍기의 편지에도 등장함) 호림과는 여기서 갈려 호림과 심산 경능창백 만기 창욱은 절손
제29세 재인 수첨지중추부사 호군 안동좌수 남양홍씨 홍종해주손(분림의 생부가 건수가의 작은 집에서 양자감)
제30세 건수 만회 을과 1등 승지 유문집(생원)배 안동 김씨 장진의 달(지평댁의 생가 큰집)
제31세일영 생원2등 배 풍산김씨 학사종택
제32세 태림 진사2등 운촌 진사 성균관 졸 증 면조판서 배영천 의인 이참판댁(촉망 받는 선비였으나 수를 하지 못하고 성균관에서 돌아가심(태림의 친동생이 의병내방장인 진림)
제33세 창세 유인 배 이조참의 강필 하규(만산) 선비들이 놀곳이 못된다며 벼슬길 마다하고 낙향 여 망와 김영조 주손
제34세 순우 홍기 일이차 심산 활동관여 국민훈장 애족장(처가 무실 정제집)
심산 생가는 공식인정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 만창 김홍기 경능창백 김정진 5분이 탄생 했으며
뚜렸한 독립운동 활동을 하신분들 창돈과 만기 교림를 포함하면 8분 그리고 의사자의행동을 보인
호림을 포함하면 9분이 관여하면서 진림의 집은 파산됨
절손과 고문으로 요절 행방불명등의 핍박 받은 역사가 눈물겹게 나타나
창욱(절손)
김창돈33세 사망1928년사망(고문 휴유증)
김중현28세사망1939년 사망(김창돈아들)
중호행방불명1914년 탄생(김창돈아들)
중구 행방불명1929년 탄생(김창돈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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