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디카시 제목의 낯설음은 무관함이 아니라 긴장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에덴의 동쪽
오늘이 어제를 밀어내고 또 내일로
역사의 부유물 둥둥 떠 흐르는 메콩강
■ 베트남을 가다
60대가 되면 해외 대학에서 강의하며 한국을 떠나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2016년 3월 학기부터 창신대를 사직하고 중국 정저우경공업대학교로 옮겼다. 벌써 10년 전이다. 10년 동안 디지털 노마드로 살아오고 있다. 2022년 1월에는 베트남 메콩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베트남에 1년 이상 체류했다. 지금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어느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 중국도 그립고 베트남도 그립다. 올해는 중국 칭다오를 다녀오기도 했다. 중국에 체류할 때 기차나 버스를 타고 카이펑, 시안, 우루무치 등 중국 대륙 곳곳을 여행했다. 베트남에 체류하면서도 역시 껀터, 호찌민, 붕따우 등을 여행했다.
호찌민에서 메콩대학교가 있는 빈롱으로 가면서 버스 안에서 찍고 쓴 디카시가 「에덴의 동쪽」이다. 메콩강은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아홉 마리 용의 강이라는 의미의 구룡강이기도 하다. 빈롱에 소재하는 메콩대학교를 구룡대학교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라오스·태국·캄보디아를 거쳐 베트남 남부에 이르면, 거대한 메콩델타를 이루며 여러 갈래로 분기된다. 이때 형성되는 대표적인 수로가 전통적으로 아홉 개로 인식되었고, 베트남에서는 이를 “아홉 마리 용이 바다로 내려가는 모습”에 비유한 것이다.
메콩강의 거대한 물줄기가 베트남 남쪽 끝자락에서 형성한 메콩델타의 한 중심인 빈롱에서 1년 넘게 체류했던 것은 중국 정저우와 함께 내게 대한민국 너머를 볼 수 있게 한 소중한 체험이었다, 메콩강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보다 생명의 젖줄로서의 역할에서 시작된다. 수천 년 동안 굽이쳐 흐르며 실어 나른 비옥한 퇴적물은 메콩델타를 형성하게 함으로써 세계적인 곡창지대가 되게 했다. 메콩 강물 덕분에 이 지역은 베트남의 식량 안보의 보고로 끝없는 푸른 논밭과 풍요로운 과수원을 품은 풍요로운 약속의 땅으로 기억된다. 강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어머니였고, 이 농업적 풍요는 곧 문명이 뿌리내리고 번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메콩델타는 고대에도 문명을 꽃피웠다. 1세기경 번성했던 푸난 왕국의 무역로와 정착지들이 바로 이 강변을 따라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현대에 들어서는 프랑스 식민 지배 하에서 메콩강은 쌀과 상품을 착취하기 위한 수로로 악용됐고 운하 건설도 식민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 또한 미국과의 전쟁을 치를 때도 격렬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메콩델타 사람들은 이 물길을 따라 투쟁했고, 강물은 자유를 향한 염원과 고통을 모두 품어 안았다. 아홉 마리 용으로 상징되는 메콩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라, 메콩델타의 역사, 문화, 그리고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디카시 「에덴의 동쪽」은 씌어졌다. 이 작품은 제목과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사이의 미적 거리를 제대로 확보하고 있다. 5화에서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간의 미적 거리를 다뤘다. 디카시가 상호텍스트성을 제대로 구축하기 위해서는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사이의 거리 조정이 핵심이다. 이것 못지않게 제목과의 미적 거리 확보 역시 중요하다.
사진기호는 베트남 빈롱의 메콩강 하류, 곧 메콩델타의 물길이다. 이 물은 중국 티베트 고원에서 유장하게 흘러 베트남 남부 하구로 흘러온 자연기호이다. 이 사진기호는 자연 풍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시간이 퇴적된 공간을 감각적으로 제시한다.
오늘이 어제를 밀어내고 또 내일로
역사의 부유물 둥둥 떠 흐르는 메콩강
이 문자기호는 메콩강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여기서는 지리적 대상이 아니라, 시간의 은유로 호출된다. “오늘–어제–내일”이라는 시간의 연쇄 속에서, 메콩강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부유”하며 “둥둥 떠”서 아홉 갈래로 흐른다. 이는 역사라는 것이 단절되거나 종결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채 떠다니는 상태임을 드러낸다.
사진기호는 자연기호로서의 메콩강이지만 문자기호는 시간과 역사라는 추상적 기호로 기능한다. 두 기호는 메콩강을 동일 대상을 가리키지만, 서로 다른 인식 차원에서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도 미적 거리를 확보한다.
이 작품의 결정적 미적 장치는 제목 ‘에덴의 동쪽’이다. 이 제목은 사진기호에도, 문자기호에도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메콩강이라는 지명도, 물도, 델타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성서적·문명사적 상징을 호출함으로써 드러낸다. 에덴의 동쪽은 성서에서 실낙원 이후의 세계, 곧 인간이 노동과 고통, 역사 속으로 던져진 장소다.
인간이 에덴에서 추방된 것은 장소의 이동을 넘어 존재의 변형이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아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에덴에 머물 수 없었다. 그 변화의 결과로 주어진 상징적 공간이 바로 에덴의 동쪽이다. 성서는 그 실낙원의 방향을 굳이 ‘동쪽’이라고 명시한다.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며,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 에덴의 동쪽은 앞으로만 열려 있는 시간의 입구다. 그곳에서 인간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린다. 땀 흘려야 양식을 얻을 수 있고, 실패도 하고, 또 다시 시도도 한다. 고통은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자,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대가다. 에덴의 동쪽은 마냥 절망의 땅이 아니다. 물론 그곳에는 고통과 불안, 죽음의 인식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와 문화가 시작된다. 인간은 더 이상 신의 품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세계를 짊어지고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 에덴의 동쪽은 그 책임이 처음 주어진 자리다.
이 작품의 제목 ‘에덴의 동쪽’은 ‘낙원 이후’의 현실이다. 이런 원형적 상징이 이 제목으로 붙여짐으로써 메콩델타는 더 이상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실락원이 현장으로 남아 있는 공간이 된다.
제목 에덴의 동쪽과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간에 확보하고 있는 미적 거리가 이 작품의 미적 코드의 핵심 키가 되는 것은 그 적절성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제목과 사진기호와 문자기호 간에 지시적 관점에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완벽한 비동일성을 구축한다. 그러나 에덴 동쪽의 원형상징성은 메콩강의 자연기호인 사진기호를 넘어 실락원 이후 인류 역사의 환유로서의 메콩강으로 문자기호적 의미를 생성하게 해 비동일성의 동일성을 확보하게 한다.
디카시에서 제목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이미 만들어 놓은 세계에 또 하나의 거리와 방향을 설정하는 일이다. 제목은 보충물이 아니라, 작품의 호흡을 조율하는 장치다. 디카시는 본질적으로 두 개의 기호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세계가 몸에 와 닿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기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순간에서 솟아난 시적 충동이 응축된 문자기호다. 이 두 기호는 동일한 세계를 가리키지만, 결코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디카시는 이 이질적 기호가 충돌하며 생기는 긴장에서 성립한다. 제목은 이 긴장에 개입하는 제3의 기호다. 제목이 사진기호를 그대로 가리키면, 사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메콩강을 찍어 놓고 제목을 ‘강’이라 부르는 순간, 사진기호는 세계가 아니라 설명이 된다. 반대로 제목이 문자기호를 요약하거나 반복하면, 언술은 이미 끝난 의미로 굳어진다. 이때 디카시는 열려 있는 텍스트가 아니라, 닫힌 설명문이 된다.
디카시의 제목은 너무 가까워도 안 되지만 너무 멀어서도 안 된다. 미적 거리란 바로 이 적절한 심리적 간극을 뜻한다. 그것은 의미의 단절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건너가야 할 거리다. 제목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를 대신 말해 주지 않고, “왜 이 둘이 이런 제목 아래 놓였는가”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남긴다. 그 질문이 살아 있는 동안, 디카시는 살아 있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이미 충분히 난해한 경우가 있다. 이미지도 쉽게 읽히지 않고, 언술 역시 압축되어 있다면, 제목까지 멀어질 경우 독자는 진입 자체를 포기한다. 이럴 때 제목은 한 발 다가와야 한다. 다만 다가온다는 것은 설명한다는 뜻이 아니다. 제목은 의미의 방향이나 정서의 좌표를 살짝 제시함으로써, 독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손잡이가 되어야 한다. 반대로 사진기호와 문자기호가 너무 밀착되거나 각각의 의미가 쉽게 드러나 있을 때도 있다. 사진이 이미 언술을 설명하고, 언술이 사진을 반복하거나 둘 기호 자체의 의미도 쉽게 드러나면 작품은 스스로를 과잉 규정한 셈이다. 이 경우 제목까지 가까워지면 디카시는 숨을 쉴 공간을 잃는다. 이때 제목은 의도적으로 거리를 벌려야 한다. 다른 시간, 다른 문화, 다른 사유의 층위를 호출함으로써 작품을 다시 열어 주어야 한다. 제목은 여기서 이탈의 장치가 된다.
디카시에서 제목을 붙인다는 것은, 기호 사이의 균형을 조율하는 일이다. 제목은 다리가 아니라 간극이며, 요약이 아니라 유예다. 제목이 정확하게 작동할 때,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도 이 호응한다.
좋은 디카시의 제목은 언제나 조금 낯설다. 그러나 그 낯설음은 무관함이 아니라 긴장이다. 독자는 그 긴장을 따라가며 사진을 다시 보고, 언술을 다시 읽는다. 그 반복 속에서 비로소 디카시는 하나의 극순간 멀티언어예술로 완성된다.
■ 예술이라는 강
지금 디카시 창작에 있어서 제목을 어떻게 붙일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제목은 소재를 반영할 수 있고, 주제를 반영해서 붙일 수도 있다. 또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 붙일 수도 있다. 제목 하나 잘 정해서 작품이 되는 경우도 많다.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는 평범한데 제목이 좋아 좋은 디카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디카시의 제목은 사진기호와 문자기호라는 두 기호와의 거리 조정으로 결정된다. 그 거리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미적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예외는 있다. 거리 조정에 실패한 제목인데도 좋은 디카시가 되기도 한다.
디카시도 예술이다. 예술은 창작 방법론으로 다 설명될 수는 없다. 일급 예술가들은 기존의 창작 방법론에 구속되지 않는다.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탄다. 깊은 강을 자력으로 배 없이는 건널 수 없다. 강을 건넌 뒤에는 나룻배를 머리에 이고 다니지는 않는다. 예술 창작에서 창작론은 나룻배다. 처음 강 앞에 섰을 때, 즉 아직 세계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형상화해야 할지 모를 때, 창작론은 반드시 필요하다. 창작 이론은 창작자가 물에 빠지지 않도록 돕는 도구다. 강 저편에 도착한 순간부터는 혼자 걸어가야 한다, 일급 예술가는 이 지점을 안다. 일급 예술가는 창작론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은 이론에 매이지 않는다. 필요할 때는 타고, 건너면 내려놓는다. 너무 이론에만 묶이면 창작은 언제나 강가에 머문다. 예술에서 성숙이란 새로운 창작론을 더 많이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 이론을 버릴 수 있는 용기에 가깝다. 나룻배를 버린다는 것은 창작론을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론이 제 역할을 다했음을 인정하는 행위다. 예술은 강을 건너는 일이지, 배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일급 예술가는 배를 타되 배에 살지 않는다.
등단한 시인들 중에도 여전히 자기 작품에 대한 믿음이 안 가서 창작론에만 기대거나 유명 시인이나 비평가가 자신의 작품을 평가해야만 안심을 한다. 이제부터 그러지 말기를 바란다. 시인은 배를 머리에 이고 가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
베트남 메콩대학교 연구실에서
첫댓글 "시인은 배를 머리에 이고 가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간다"라는 말씀을 새깁니다.
창작론의 포로가 되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 잘 탐독했습니다.~
디카시를 쓰면서 제목이 먼저
떠오르면 디카시 완성하기가
수월합나다
그 만큼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중요한것이라 생각 합
니다
교수님 배웁합니다
고맙습니다^^
열심히 읽고 익히고 있습니다. 읽고 배우는 저희보다 더 부지런히 올려주셔 너무 감사합니다 ^^
이제껏 올려주신 어떤 연재보다 더 귀하게 읽고 배우고 있습니다
제목은 기가 차게 써두고 이끌어내지 못할 때가 종종 있는데... 오래 머물어봅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자꾸 읽고 또 읽으며 공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