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 왕 때에 (ejn hJmevrai" @Hrwv/dou tou' basilevw":엔 헤메라이스 헤로두 투 바실레오스)
헤롯은 평범한 평민출신으로 이두메 사람들의 두령이었던 안티파텔(Antipater)의 아들이었다. 그는 주전 73년경에 태어났으며 주전 47년경에 갈릴리 통치자가 되었고 주전 40년경에 로마의 군주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유대의 왕”이란 칭호를 받은 사람으로 주전 4년까지 유다를 통치했다. 예수께서 나신 시기를 정확하게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헤롯 왕은 주전 4년경에 죽었다. 마태복음 2:1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방박사를 만난 시점을 어림 2년을 잡는다면 예수는 주전 6년 이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누가복음 2:2절에서 예수가 태어난 시기는 구레뇨(Quirinius)가 수리아 총독이 되고 처음으로 호적을 하라고 명했던 때라고 한다. 역사적으로 구레뇨가 호적을 하라고 명했던 시기는 주후 6년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시기가 최소한 1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요셉은 갈릴리 사람으로 호적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에 갔다고 한다. 호적을 한다는 것은 세금을 내기 위해 “납세자 등록을 한다”는 것이다. 사실 주전 4년경에 헤롯이 죽고 그의 왕국은 그의 세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주후 6년까지 유다와 사마리아는 아켈라오(Archelaus)의 영토였고 갈릴리와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였고 요단강 넘어 북부 지역은 빌립의 영토였다. 수리아의 총독 퀴리노는 위의 영토들 중에서 오직 아켈라오 영토의 세금만 관할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갈릴리에 살면서 헤롯 안티파스에게 세금을 내야하는 요셉이 아켈라오에게 세금을 내기 위해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을 등록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런 면에서 누가복음보다는 마태복음이 오히려 역사적 사건에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영토가 분할되기 전 즉 헤롯 왕(1세)이 죽기 전에 이 호적 등록을 시켰다면 갈릴리에 살던 요셉이 베들레헴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을 등록을 하러 베들레헴에 올라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의 탄생 시기는 헤롯 왕 통치 말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유대 베들레헴에서 (ejn Bhqlevem th'" !Ioudaiva":엔 베뜰레엠 테스 유다이아스)
우리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면 당연히 유대 땅에 있는 다윗 왕의 고향 베들레헴만을 생각한다. 만일 베들레헴이 단지 한 장소의 이름이라면 굳이 “유다”라는 표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베들레헴도 있었다. 스불론 지역에도 베들레헴이란 마을도 있었다(수 19:15, 삿 12:8,10). 이곳은 오늘날 베트 람(Bet Lahm)에 해당하는 마을로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1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태는 아마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유대 땅이란 의미의 !Ioudaiva"(유다이아스)를 기록했다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Ioudaiva"(유다이아스)는 구체적으로 유대 땅을 가리킨다. 마태복음에서 !Ioudaiva(유다이아)라는 표현은 항상 팔레스타인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마태가 이런 지명을 본문에 기록한 다른 이유는 단순히 지역혼동을 피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유다 지파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데에 있다. 마태복음에서 유대는 땅은 중요한 주제이다.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는 유대 땅에서 나셨고 그리고 유대 땅에서 죽을 것이다. 베들레헴은 유대 땅에 속한 지명이고 다윗 왕의 고향이다. 위치로 볼 때 유대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9.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삿 17:7-9, 19:1, 룻 1:1,2, 삼상 17:12). “베들레헴”이란 본래 히브리어로 “떡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동방으로부터 (ajpo; ajnatolw'n: 아포 아나톨론)
박사들이 동쪽 방향에서 왔다. (박사들의 숫자에 관해서는 11절에서 논의한다). 성경 밖에서 말하는 “동쪽” ajnatolhv(아나톨레)는 하늘의 세계가 올라오거나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하늘에 있는 장소를 가리킨다. 본문에 있는 ajnatolw'n(아나톨론)은 복수로 쓰였기 때문에 사실 “동쪽들”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동쪽”의 복수형 ajnatolaiv(아나톨라이)는 창세기 2:8절에 있는 동방의 에덴동산처럼 동쪽에 있는 지역 즉 동양(Orient)을 가리킨다. Lagrange에 따르면 동양은 요단강이나 사해바다 건너편인 아라비아를 가리킨다고 한다. 특히 박사들이 예물을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진귀한 물건들을 많이 취급했던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연관지을 수 있다. 순교자 Justin도 역시 박사들은 아라비아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Tertullian도 아라비아에서 온 것으로 보지만 특히 시편 71:10,15절하고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동방에서는 박사들을 거의 왕과 같이 여겼다. 이들은 왕들의 선생으로 왕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박사들의 근원지로 가능성이 있는 메소포타미아를 동양 또는 동방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 1:20이나 2:2,10절에서 박사들은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지인 바벨론 왕궁에서 꿈을 해석하는 일도 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에서 박사들은 징조를 해석하고 별들과 달들을 관찰하여 행운의 날과 불행의 날들을 가리켜주고 달력의 복잡함을 설명해주는 선견자들(seers)과 관련이 있다.
박사들이 (mavgoi: 마고이)
Herodotus에 따르면 이란 땅에 정착했었던 Aryan Medes는 6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Magi(마기)는 그 부족들 중 하나로 메디아 사람들(Medes)의 영적인 부분을 담당했었다. 이 부족이 꿈 해몽하는 일도 했었다. 이들의 종교적 영향력은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던 주전 5세기에도 상당히 컸었다. 이들이 봉헌하여 드려진 제사만이 진짜 제사였다고 Herodotus는 말한다. 이 Magi(마기) 부족이 천문학 점성술 등에 빠져있고 자신들이 심오한 지식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헬라 사람들의 천문학 서적에 있는 “마술사, 무당”이란 mavgo"(마고스)와 같은 부정적인 말로 취급되었다. 사도행전 8:9절에 있는 “마술을 행하여”란 mageuvwn(마규온)이나 사도행전 8:11절에 “마술에”란 mageiva"(마게이아스)나 사도행전 13:6절에 있는 “박수를”이란 mavgon(마곤)이나 사도행전 13:8절에 있는 “박수”란 mavgo"(마고스)는 이런 부정적인 말로 사용된 경우이다. 마태복음에 있는 동방박사 mavgo"(마고스)는 헬라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말하는 “마술사, 무당, 박수”라고 볼 수 없다. 이들은 특이한 사건들을 알려주는 징조를 별들의 이상한 움직임으로 알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으며 영적인 면에 관심이 많은 mavgo"(마고스) 부족 같은 “지혜 있는 사람, 박사”라고 보아야 한다. 신약에 표기된 헬라어 mavgoi(마고이)는 “박사”란 의미의 단수명사 mavgo"(마고스)의 복수형이고 주석에서 학자들이 기록하는 Magi(마기)란 표기는 헬라어 mavgo"(마고스)에 해당하는 라틴어 magus(마구스)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는 “박사들”이란 우리말과 같이 사용한다.
박사들은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 나심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문제는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보면 이들은 단순히 우상숭배자들이다. 더욱이 이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런 멸시받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들어오게 된다. 마태는 이미 족보에서 이방 여인들이 들어있는 메시야의 혈통을 소개했다. 이방인이면서 여자들이 메시야의 족보에 들어있다. 이와 같은 일이 예수의 탄생 때에도 나타난다. 예수가 탄생했을 때 유대인들은 그가 메시야임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방인들 그것도 별을 연구하는 박사들이 처음으로 메시야의 탄생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이방인들을 그의 자비하심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의 운명을 통하여 이미 계시된 하나님은 인종과 도덕의 장벽을 넘어 누구든지 심지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동방박사들이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만의 메시야가 아닌 모든 인류의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를 위한 이 메시야는 마태복음 끝부분인 28:19절에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의 대상인 동방박사들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마태복음의 아이러니이다. 유대인들도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가 난다는 말씀을 알고 있었고 예루살렘에 온 동방박사들도 이런 유대인들을 통해서 베들레헴에 메시야가 난다는 말씀을 알게 되었다. 두 그룹 모두 말씀을 알고 있지만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집에서 조용히 있거나 음모를 꾸미고 있는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그 말씀을 열심히 따른다. 경멸받던 사람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경건하다는 사람들은 말씀을 무시한다. 이것은 1세기에 살았던 마태가 경험하고 있는 실제 상황이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유대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들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았고 말씀 밖에 있던 이방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
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Pou' ejstin oJ tecqei;" basileu;" tw'n !Ioudaivwn:푸 에스틴 호 텍떼이스 바실레우스 톤 유다이온?)
동방박사들은 새로 태어난 유대인의 왕이 예루살렘 안에 헤롯 궁전에 있는 줄로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 궁에 와서 새로 태어난 왕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왕 예수는 예루살렘에 없었다. 오히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서 새 왕을 찾았던 것이 헤롯과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이 공식적인 유대인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헤롯 앞에서 “유대인의 왕”을 찾았다. “유대인의 왕”(basileu;" tw'n !Ioudaivwn:바실레우스 톤 유다이온)은 헤롯 이전에 얀네우스(Alexander Jannaeus:주전 103-76)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붙였던 칭호였다. 지금은 헤롯의 공식적인 칭호가 “유대인의 왕”(basileu;" tw'n !Ioudaivwn:바실레우스 톤 유다이온)이다. 사실 헤롯 왕은 이두메인이었다. 이두메인들은 힐카누스(John Hyrcanus:주전 134 - 104)에 의해 강제로 유대교에 개종한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이두메인인 헤롯의 유대적 신분에 의혹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는 헤롯에게 위험한 적수였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십자가에 붙인 죄목도 “유대인의 왕”(basileu;" tw'n !Ioudaivwn:바실레우스 톤 유다이온)이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 대망은 바벨론에 포로로 살던 유대인들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에 알려졌다. 바벨론은 천문학과 점성술이 번성하던 도시였다. 인류를 위한 해방자, 왕 중에 왕이 바벨론 서부에 태어나실 것이라고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사들이 묻는 질문은 매우 자연스럽게 들린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런 질문은 박사들이 유대인이 아닌 것임을 보여준다. 헤롯 주변에 있는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하는 마태 당시 배타적인 유대인들을 대표하는 반면에 동방박사들은 왕이신 구세주의 초자연적인 징조를 이해하고 그 복음을 믿었던 이방인들을 대표한다. 박사들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대망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그러나 대략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이 왕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 지 알려고 한다. 주목할만한 사실은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가 마태복음 수난 이야기(27:11,29,37)에서 다시 언급된다는 것이다. 메시야이신 이 왕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의 왕국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질문을 통하여 이방인들인 동방박사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이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동방박사들은 별을 연구해서 예언을 말하는 이방 예언자들이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동방박사들의 전형적인 모델을 구약에서 찾는다면 예언자 발람을 들 수 있다. 발람은 하나님을 아는 이방인 예언자였다(민 24:4,16, LXX). 발람은 동쪽 산에서 왔다(민 23:7, 22:5). 발람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말하며 야곱에게서 나올 별에 대해 예언했다(민 24:17).
동방에서 (ejn th'/ ajnatolh'/:엔 테 아나톨레)
지리적인 지식이나 천문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동방”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신학적인 면에서 “동방”을 이해할 수도 있다. 1절에서 막연하게 관사도 없이 복수로 “동쪽들”이란 ajnatolw'n(아나톨론)을 쓰다가 본 2절과 9절에서 관사와 함께 단수로 th'/ ajnatolh'/(테 아나톨레)를 썼다. th'/ ajnatolh'/ (테 아나톨레)는 “그 동방, 그 동쪽”이란 의미 외에도 “그 돋는 해, 그 떠오르는 해”란 의미도 된다. 두 번째 번역은 메시야 시대를 암시하는 구절로 한글 개역 성경 누가복음 1:78절은 ajnatolh;(아나톨레)를 “돋는 해”라고 번역하였다. 예레미야 23:5절과 스가랴 3:8, 6:12절에서 헬라어 구약성경 70인역본(LXX)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가지, 싹, 순”이란 히브리어 성경(MT)에 있는 jm'x,(체마흐)를 Ajnatolhvn(아나톨렌)으로 번역했다. 이런 이유로 ajnatolh;(아나톨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메시야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순교자 져스틴(Justin)은 헬라어 구약성경 70인 역본(LXX)의 민수기 24:17절에 있는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ajnatelei' a[stron ejx Iakwb:아나텔레이 아스트론 엑스 야콥)란 구절에서 “나오며”에 해당하는 ajnatelei'(아나텔레이)를 설명할 때 스가랴 6:12절에 메시야를 가리키는 Ajnatolhvn(아나톨렌)를 인용하였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져스틴에게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오심은 “한 별의 떠오름”이었다. 별이 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별이 떠오름은 탄생을 의미하던 당시의 사상들을 반영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민수기 24:17절에 있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한 사람은 선지자 발람으로 역시 “동편에서”(ajp! ajnatolw'n:압 아나톨론) 온 사람이다(민 23:7).
마태 당시에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아람어로 번역된 책들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탈굼(Targum)이다. 마태도 아마 이런 탈굼들을 통해서 민수기 24:17절을 접했을 것이다. Pseudo-Jonathan의 탈굼을 보면 “야곱의 집에 권세 있는 왕이 다스릴 때, 이스라엘의 권세 있는 왕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을 때”란 구절이 나온다. 또한 Fragment Targum에는 “한 왕이 야곱의 집에서 나올 것이요, 한 구세주 다스리는 자가 이스라엘의 집에서 일어날 것이다”란 구절이 있다. Damascus Rule이란 책은 민수기 24:17절에 관해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한다: “별은 다메섹에 오실 율법의 해석자이시다. 기록된 데로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고 한 왕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 왕은 온 회중의 왕자이며 그가 올 때에 그는 셋의 모든 자손들을 칠 것이다.”
그의 별을 (aujtou' to;n ajstevra:아우투 톤 아스테라)
헬라어 ajsthvr(아스테르)는 항상 “별”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또한 a[stron(아스트론)은 “별자리”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헬라 사람들은 별들을 신성시하거나 또는 별을 살아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생각했다. 구약이나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을 보면 하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사 45:12, 시 19:2, 147:4, 148:3). 별들이 떨어지는 것은 계시적 징조이다(사 13:10, 막13:25, 계 6:13). “새벽별”은 권위와 영광을 상징한다(계 2:28). 일반적으로 별을 신성시 하던 당시에 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던 동방박사들이 헤롯에게 나타나서 유대인의 왕이 새로 태어남을 알리는 별을 보았다는 보고는 헤롯과 유대 지도자들을 당연히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로마의 학자 플리니(Pliny)는 각 사람마다 태어날 때 빛이 생기고 죽으면 빛을 잃어버리는 별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반박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들의 출생과 죽음에는 하늘의 징조가 있었다는 사상은 널리 받아들였다. Mithridates와 Alexander Severus의 출생 때에는 하늘에 새로운 별이 나타났었다고 한다. Suetonius는 며칠동안 밤에 혜성이 나타났을 때 네로(Nero) 황제가 얼마나 놀랐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왜냐하면 혜성은 매우 중요한 인물의 죽음을 예고한다고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네로는 그의 나라 안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 중에서 몇 명을 죽임으로 그 불길한 징조에 관한 액을 때웠다. 결과적으로 동방박사에게 나타났던 별들이나 헤롯이 탄생한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일들은 당시 기록들을 보면 드문 일은 아니었다.
본문에 언급된 별은 일반적인 별이 아니라 “그의 별”(aujtou' to;n ajstevra:아우투 톤 아스테라)이다. 예수를 가리키는 신성한 별이다. 학자들에 따라 이 별을 자연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신학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먼저 자연 현상에 의한 해석을 보면 주전 12-11년 경에 나타났었던 헬리 혜성, 주전 7-6년 경에 목성과 토성이 일치됨으로 나타났던 특별한 별빛, 또는 특별한 별의 현상 등으로 예수의 별을 풀이한다. 초기 기독교 교부였던 오리겐(Origen)은 이 별이 혜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혜성이 하늘에서 빛날 수 있지만 동방박사처럼 사람을 인도하거나 또는 어떤 집 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기적의 별”로 해석하는 입장이 있다. 동방박사들은 예정된 왕이 탄생했다고 알리는 기이한 별 때문에 모이게 되었고 또한 그 별의 인도함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별”은 어떤 “별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섭리하신 “기적의 별”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탄생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인 것처럼 이 기적의 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사건이라는 설명이 마태의 신학에 근거한 좀더 논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동방박사들을 인도한 별을 민수기 24:17절에 있는 발람의 별과 연관시켜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있는 별은 메시야가 아니다. 메시야에게 인도하는 별이다. 이런 면에서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당시 점성술에 지나치게 빠져있는 신앙을 반박하기위해서 초대 교부들에 의해 인용되었다. J. Danielou는 동방박사 이야기에는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리아에 있던 별 숭배 신앙을 중화시켜보려는 마태의 의도가 있다고 보았다.
2:3
온 예루살렘이 (pa'sa @Ierosovluma:파사 히에로솔루마)
“예루살렘”은 도시 이름이다. 본 절은 도시를 의인화(personification) 했다. 구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용법이다. 물론 의미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pa'"(파스)를 사용해서 일반화 시킨 경우를 예수의 수난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다(마 27:25). 헤롯과 뜻을 같이하는 “온 예루살렘”이 메시야의 탄생 소식에 소동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예수를 죽일 목적으로 어린 아이들을 학살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도 “온 (예루살렘) 성”이 소동하기 시작했고(마 21:10) 이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였다(마 27:25).
소동한지라 (ejtaravcqh:에타락떼)
헤롯은 명철하고 능력 있는 장군이며 연설가며 정치가였다. 주전 25년경에 이스라엘에 큰 흉년이 있었는데 이때 헤롯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왕궁에 있는 금제품들을 녹여 주기도 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해 극장이나 경기장들을 건축했으며 주전 19년경에는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 성전은 후대에 헤롯 성전이라고 불리었다. 그는 또한 가이사랴(Caesarea) 항구도시를 건설했으며 마사다(Masada) 요새를 건축하였다. 이 마사다(Masada) 요새는 주후 73년경에 천여명의 유대인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포로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결한 장소로 유명하다. 헤롯은 유대인 역사에서 솔로몬 왕 이래로 위대한 건축가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이 헤롯은 또한 잔인하고 질투가 많고 난폭한 왕이었다. 그는 그의 부인과 남매지간이며 대제사장이었던 아리스토불루스(Aristobulus)를 물에 빠뜨려 죽인 후에 그를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면서 슬퍼하는 척 했다. 그는 그의 부인 Mariamne와 그녀의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 중에 셋을 죽였다. Caesar Augustus가 농담 삼아 “헤롯의 아들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헤롯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적이 있다. 헤롯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는 예루살렘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자신이 죽는 동시에 그들을 처형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 방법으로 그가 죽을 때에 예루살렘 성 안에 큰 슬픔이 있게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안하면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기뻐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난폭한 헤롯에게 동방에서 온 순진한 박사들이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은 순진한 아이들을 죽여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헤롯의 불같은 성질을 돋우는 것이었다.
2:4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sunagagw;n pavnta" tou;" ajrcierei'" kai; grammatei'" tou' laou':쉬나가곤 판타스 투스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그람마테이스 투 라우)
요세푸스에 따르면 말년에 헤롯 왕은 공의회(Sanhedrin)를 제압했기 때문에 그들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 왕의 출생지를 알기 위해 유대인 지도자들의 도움을 구한다. “대제사장들”(tou;" ajrcierei'":투스 아르키에레이스)이라고 복수로 기록한 이유는 아마도 전직 대제사장들과 현 대제사장과 귀족들인 대제사장들의 가족들을 포함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래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한 명만 두게 되어있으며 평생 동안 가지는 직분이고 세습되는 직분이다. 헤롯 계열의 왕들이나 로마 통치자들의 변덕에 따라 대제사장을 자주 세우기도하고 폐하기도 하였다. 요세푸스는 신약 시대 당시 대제사장들 숫자만 28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요세푸스도 신약에서처럼 “대제사장들”(tou;" ajrcierei'":투스 아르키에레이스)이라고 그의 책에 기록하고 있다.
서기관들 (grammatei'":그람마테이스)
서기관들은 본래 성경에 권위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었다. 전문적으로 기록만 하는 필경사들(copyist)이었다. 성경에 관련된 글을 기록하다보니 점차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의미가 확대되어 서기관이란 칭호가 “학자”를 뜻하기도 했다. 유대 학문이란 거의 성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서기관들(grammatei'": 그람마테이스)은 성경 즉 율법을 잘 아는 선생, 율법에 관한 전문가, 율법 교사 등을 가리킨다.
2:5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En Bhqlevem th'" !Ioudaiva":엔 베뜰레엠 테스 유다이아스)
헤롯 왕이 특별 위원들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출생지가 다윗 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라고 소개된다. 베들레헴이 메시야의 출생지라는 유대인들의 믿음은 본 마태복음 2:5절 외에도 요한복음 7:42절과 구약을 아람어로 번역한 탈굼(Targum)에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7:42절이나 탈굼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 탄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에서 “오심”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곳이 다윗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태는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나심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예수는 장성하였을 때 이미 나사렛 예수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어떻게 갈릴리 사람이 메시야가 될 수 있는가”라는 당시 질문(요 1:45-46, 7:41-42,45)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 위해 마태는 예수의 탄생지는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ou{tw" ga;r gevgraptai dia; tou' profhvtou:후토스 가르 게그랍타이 디아 투 프로페투)
마태는 1:22절에서 이사야 7:14절을 인용하면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이니”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미가 5:2절을 인용하면서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라고 썼다. 같은 구약 인용이지만 전자는 “성취”에 초점을 맞추고 후자는 “기록”에 초점을 맞춘다. 1:22절은 요셉의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한 말씀이었고 본 2:5,6절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헤롯 왕에게 한 말이었다. 주의 사자를 통해서 마태는 예수 탄생이 구약 예언의 성취임을 확신하고 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크리스찬들의 고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탄생에 대한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의 반응은 분명히 달랐다. 만일 이들이 본문처럼 헤롯 왕권을 지지하는 권력 세력이었다면 이들도 소동을 피우는 헤롯처럼 두려워했을 것이다. 마치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처럼 새로운 유대인의 왕이 나심으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 권력이 무너질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당시 로마 권력과 결탁하여 명예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 구원자이신 메시야(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다렸는지 사뭇 의심스럽다. 오히려 로마에 직접적으로 억압을 받는 평민들이 해방자 구원자 메이야(그리스도)를 절실히 열망했던 것이다. 예수를 따라 다녔던 무리들 역시 이런 평민들이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리스도의 출생지를 언급하는 것은 예언이 성취된다는 기쁨과 확신에서가 아니다. 그래서 마1:22절처럼 구약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헤롯의 추궁에 못 이겨 의심과 두려움으로 그리스도의 탄생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구약 인용에는 단순히 “이렇게 기록된 바”라고 마태는 적고 있다. 이런 표현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서도 그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했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예수의 탄생에서조차 그의 그리스도이심을 의심하고 있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2:6
이 인용문은 주로 미가 5:2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삼하 5:2절에서 한 구절을 첨가시켰다. 또한 단어 배열에 있어서 미가서의 히브리어 본문이나 헬라어 본문(미 5:1, LXX)과도 약간 차이가 난다. 미가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마태는 미가서에 있는 “에브라다”를 “유다 땅”으로 바꾸어 기록했다. 그 이유는 메시야이신 예수가 유다 땅 출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같다. 마태는 삼하 5:2절에 있는 “목자가 되리라”(poimanei':포이마네이)란 구절을 미가 5:2절에 첨가시켰다. 구약에서 목자는 왕에 대한 비유로서 다윗과 연관시켜 사용했다. 다스리는 자인 그리스도의 두 가지 면이 대조되는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셨기에 왕으로서의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또한 베들레헴 목동 다윗과 같이 부드러움, 인자함, 성실함을 가지신 분으로 표현된다.
2:7
별이 나타난 때를 (to;n crovnon tou' fainomevnou ajstevro":톤 크로논 투 파이노메누 아스테로스)
마태복음이 기록되던 당시에 사람들은 특이한 별이 나타나면 커다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탄생하게 될 때에도 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로마의 시인 버질(Virgil)은 한 별이 나타나서 로마 제국이 세워져야 하는 장소로 로마를 창건한 전설적인 영웅 Aeneas를 인도했다고 기록한다. 유대인 작가 요세푸스(Josephus) 또한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때에 예루살렘 위에 머물러 있던 별과 1년 동안 계속 운행했던 혜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돌보시며 그의 백성들에게 온갖 징조를 통해 미리 예고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다”는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특히 이것을 “그 나라(이스라엘)에서 나온 어떤 사람이 세상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란 유대인의 믿음과 연관시키고 있다. 특이한 별이 나타남과 연관된 큰 사건에 대한 생각을 헤롯 역시 가지고 있던 것 같다. 베들레헴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올 것이란 구약의 예언을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들었다. 헤롯 자신 말고 이스라엘에서 다스리는 자가 나타나는 것은 역시 큰 사건이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특이한 별이 나타났다고 하는 보고도 역시 큰 사건이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그 별이 나타난 시기에 관심을 갖고 동방박사들에게 묻는 것이다. 이 사건을 밝혀내기 위해서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은 베들레헴에 가서 구약의 예언과 관련된 새로운 아기가 정말로 태어났는 알아보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절을 보면 헤롯은 동방박사들을 직접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를 찾아보라고 했다.
2:8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o{pw" kajgw; ejlqw;n proskunhvsw aujtw:호포스 카고 엘똔 프로스퀴네소 아우토)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린 후에 예루살렘으로 와서 자기에게 직접 알려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는 헤롯의 표현과 2:16-18절에 나타난 헤롯의 진짜 의도와 대조를 이룬다. 말로는 경배하지만 진짜 의도는 죽이는 것이었다. 유대교와 한창 갈등을 겪고 있는 초대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헤롯의 행동은 마태 당시 초대교회를 해치려는 거짓으로 교회를 접근하려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거짓으로 경배한다는 말만하고 실재로는 죽이는 행동을 하는 악한 헤롯의 모습과 예수를 경배하러 왔다고 말하고 행동으로도 예수께 예물을 드리면서 진심으로 경배하는 선한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대조시키면서 당시 마태 교인들에게 신앙적인 모습 어떠해야 하는지 깨닫게 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
2:9
왕의 말을 듣고 (ajkouvsante" tou' basilevw":아쿠산테스 투 바실레오스)
마태는 족보에서 다윗에게 왕이란 칭호가 붙었다가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후에는 왕이란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헤롯에게도 마찬가지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전에는 왕이란 칭호를 붙이다가 경배한 후에는 더 이상 왕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본 구절은 헤롯에게 왕이란 칭호를 마지막으로 붙이는 경우이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2절에서 찾던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하면서 헤롯은 상징적으로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동방박사의 경배와 동시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 되는 것이다.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proh'gen aujtou;", e{w" ejlqw;n ejstavqh ejpavnw ou| h\n to; paidivon:프로에겐 아우투스, 헤오스 엘똔 에스타떼 에파노 후 엔 토 파이디온)
헤롯 왕을 만난 후에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마을인 베들레헴을 향해 떠났다. 헤롯 왕은 이미 유대인의 왕이 나신 곳이 베들레헴임을 알게 되었다(5절). 그래서 동방박사들에게 베들레헴이라고 알려주고 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8절).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인도하는 별의 역할이 분명치 않다. 아마 마태는 상징적인 의미로 별의 인도함을 기록했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여호와께서 앞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비추어 인도하셨다(출 13:21이하, 40:37이하). 이렇게 앞서 가시다가 구름이 머무는(e[sth:에스테)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진행을 멈추고 진을 쳤다(민 9:17). 마태복음에서 별이 동방박사들을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별이 머무는(ejstavqh:에스타떼) 곳에 동방박사들도 멈추어 아기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던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에 유대인들을 인도하셨던 특별한 섭리로 지금은 동방박사와 같은 이방인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본 구절은 현재 유대인 크리스찬들이 다수였던 마태 교회 내에 이방인 크리스찬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들어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별이 박사들을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인도하였다. 마지막 종착점은 아기 예수가 계신 곳이었다. 멀리 이방 지역에서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별의 역할은 목회를 상징하기도 하고 말씀을 상징하기도 한다. 별이 인도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목회나 말씀도 사람들을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목적이 되어야 한다.
2:10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ejcavrhsan cara;n megavlhn sfovdra:에캬레산 캬란 메갈렌 스포드라)
동방박사들의 기쁨이 최고에 달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이렇게 기뻐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해석에 따라 다르다. 바로 앞에 9절 원문 일부분을 직역하면 “그 별이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설 때까지 그들을 앞서 인도하였다”란 의미가 된다. 아직 별이 머물러 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별이 도착지에 머물러 선 것에 대한 기쁨이라기보다는 별의 나타남에 대한 기쁨이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머물었을 때에는 별에 대한 기록이 없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별에 대한 기록이 9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렇다면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동방에서 보던 별이 없어졌다가 다시 나타나서 인도하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일 수 있다. 다른 해석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에도 별은 여전히 있었는데 헤롯 왕에게 베들레헴이란 지명을 듣고 난 후에 보니 그 별이 베들레헴 쪽으로 있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여행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쁨에 매우 기뻐한 것일 수 있다. 마지막 해석은 다음절인 11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11절에서 동방박사들은 아기가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별은 이미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본 절에 표현된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아기 예수 있는 곳에서 정지하고 있는 별에 대한 기쁨이 된다. 오랜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동방박사들 의 기쁨,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유대인의 왕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마침내 찾아낸 동방박사들의 기쁨은 계속 운행하던 별이 정지하면서 도착지를 알렸을 때 극치에 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를 찾아 낸 것이다. 동방박사들의 이런 기쁨은 마태 교회 내에서 이방인 크리스찬들의 기쁨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방법은 다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방인 크리스찬들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낸 동방박사들의 기쁨과 맞먹는 것이다(마 21:9, 눅 1:14, 롬 15:10).
2:11
집에 들어가 (ejlqovnte" eij" th;n oijkivan:엘똔테스 에이스 텐 오이키안)
예수께서 탄생한 장소와 동방박사들이 들어간 집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다. 누가복음 2:7절에는 예수께서 베들레헴 한 “여관에서”(kataluvmati:카탈루마티) 탄생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마태복음 본 절에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만난 곳은 베들레헴 한 “집”(oijkivan:오이키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Albrecht는 아기 예수가 “여관”에서 탄생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할례를 받은 후 몇 달이 지나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 “집”에 있을 때에 동방박사들이 찾아 왔다고 해석한다. 사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후 얼마가 지나서 동방박사들이 도착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아기가 태어난 지 12일째 되는 날 우리 달력으로 1월 6일 경에 동방박사가 집에 도착했다고 한다. Sabourin은 마태복음에 “집”이란 표현을 중시하면서 요셉이 베들레헴에 있는 집에서 꽤 오래 머물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특히 헤롯 왕이 살해할 아이들의 나이를 두 살 아래로 둔 것을 근거로 베들레헴에서 장기적으로 머물렀다고 본다.
현재 예수의 탄생지에 세운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Queen Helena가 선정한 장소에 콘스탄틴 황제가 주후 325년 세운 건물이다. 후기 것은 Justinian I세(주전 527-563)에 의해 같은 장소에 세운 것으로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건물이 변경되었다.
아기께 경배하고 (prosekuvnhsan aujtw'/:프로세퀴네산 아우토)
외경이나 이슬람 코란과 달리 마태복음에 있는 아기 예수는 동방박사를 만났을 때 조숙한 사람처럼 지혜의 말을 하지도 않고 기적을 행하지도 않는다. 어떤 커다란 영광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없다. 갓난아기의 모습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아들(人子)로서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갓난아기 예수께 동방박사들이 경배를 드린다. 동방박사들은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prosekuvnhsan:프로세퀴네산)는 기록은 마태복음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시험받으실 때 마귀를 향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너는 경배하리라”(proskunhvsei":프로스퀴네세이스)라고 말씀했다(마 4:10). 그런데 마태복음 시작부분인 본 구절에서 예수께서 경배 받는 모습이 나온다. 주목할 사실은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서도 경배 받는 모습이 본 절과 같은 구절 proshvnegkan aujtw(프로세퀴네산 아우토)을 사용해서 기록되어 있다(28:9,17). 이것은 마태가 간접적으로 예수는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말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사람의 아들이신 갓난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에게 하나님으로서 경배받는 예수를 보여주는 본문에 대해 초대 교부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예수의 인성(humanity)과 신성(divinity)을 모두 들어있다고 보았다.
“경배하다”란 proskunevw(프로스퀴네오)는 사람에게 충성으로 경의를 표할 때에나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할 때에 사용되는 말이었다.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께 경배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다. 마태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이 단어의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불투만(Bultmann)은 마태가 이런 세심한 표현을 통하여 예수의 위상을 하나님의 위치로 올려놓았다고 해석했다. 예를 들면 예수가 경배 받는 모습이 마가에서는 1번 밖에 안나오지만 마태에서는 10번 나온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와 그에게 경배했다. 이것은 마치 이방인들이나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성지를 순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찾아와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참조, 마 8:11). 아기 예수를 만나서 기뻐하고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반응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경배하게 된다. 하나님은 동방박사를 불러서 경배하게 하듯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이시다. 이사야 60:3절처럼 민족들이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올 것이고 왕들이 그리스도의 광명으로 나올 것이다. 시편 72:11절처럼 왕들이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를 섬길 것이다.
보배합을 열어 (ajnoivxante" tou;" qhsaurou;":아노익산테스 투스 떼사우루스)
헤롯은 칼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은 보배합을 가지고 예수를 찾는다.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보물 상자 즉 보배합을 열어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예물을 예수께 드린다. 예수와 진실한 만남은 동방박사들이 보배합을 열 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한다. 신앙이란 예수를 경배하는 행위이며 또한 자신들이 세상에서 소중히 여겼던 것을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께 드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dw'ra, cruso;n kai; livbanon kai; smuvrnan:도라, 크뤼손 카이 리바논 카이 스뮈르난)
세 가지 예물로 인해 동방박사들이 모두 3명이었다고 쉽게 추정하지만 전통적으로 동방박사들의 숫자는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가장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Priscilla 카타콤(catacomb)의 "Cappella Greca"에는 3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Peter와 Marcellinus의 카타콤에 있는 후기 그림에는 2명으로 묘사되어 있다. 동방 정교회(Eastern Church)에서는 12명이었다고 주장해왔다. 서방에서는 예물 숫자로 추정해서 3명이었다고 했다. 어떤 전승을 보면 동방박사 3명의 이름을 가스파(Gaspar), 멜키오(Melchior), 발따사(Balthasar)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전승이 언제부터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단지 6세기 논문인 Excerpta Latina Barbari와 역시 6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Armenian Infancy Gospel과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Venerable Bede에서 동방박사들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사야 60:6절에서 회복된 예루살렘의 영광을 묘사할 때 스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찾아 올 때 금(crusivon:크루시온)과 유향(livbanon:리바논)을 가지고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지상의 왕들에게 드리는 예물로 금과 몰약(시 45:8)이 적절한 것이라면 유향(livbanon:리바논)은 성경 전통에 의하면 하나님께 드렸던 희생 제사를 상징한다(레 2:1, 렘 17:26, 41:5). 유향은 남부 아라비아나 북부 Somaliland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에서 추출한 진액이다. 이것을 1/8인치에서 1/4인치까지 물방울처럼 만들어서 판다. 이 유향은 갈아서 분말로 만들기도 하는데 이 분말 가루는 태울 때 거무스름한 연기와 함께 향기를 낸다. 이것이 성막에서 향을 만들 때에 사용된 유향이다(출 30:34-38). 이 유향은 소제를 드릴 때에도 사용되었다(레 2:1,2,14,15,16, 6:14,15). 마태가 살던 당시에 사람들은 이 유향을 기름 바를 때나 의약품에도 사용했다. 몰약(smuvrnan:스뮈르난)은 아라비아나 에티오피아 등지에서 자라는 향나무들에서 나는 누르스름하거나 불그스름한 진액으로 탈 때 거의 연기를 내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는 것이 유향과 다른 점이다. 몰약은 향수나 미용에 사용되었으며 향 재료, 화장품 재료, 의약품 재료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는 관유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었다(출 30:23). 요한복음 19:39절에 보면 예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를 때에도 몰약이 사용되었다.
초대 교부 오리겐(Origen)은 동방박사들이 드린 예물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금(cruso;n:크루손)은 왕을 위한 예물로 몰약(smuvrnan:스뮈르난)은 죽을 사람을 위한 예물로 유향(livbanon:리바논)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해석했다. 왕으로 오신 예수를 위한 예물로 황금을 드리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수를 위한 예물로 몰약을 드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한 예물로 유향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황금은 충성을 유향은 신성을 몰약은 고난과 장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왕께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동방에서 Magi(마기) 즉 지혜가 있는 박사들이 온다는 것은 마태 당시에 교인들에게 생소한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헤롯 왕이 주전 10년이나 9년경에 Caesarea Maritima 건축물을 완공했을 때 많은 나라 사신들이 예물을 가지고 헤롯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에 찾아 왔었다. 또한 주후 66년경에 아르메니아(Armenia) 왕 Tiridates가 수행인들을 데리고 로마에 왔었다. 수행인들 가운데는 이웃에 있는 세 명의 파르티아(Parthian) 통치자들의 아들들도 있었다. 그들이 로마에 도착했을 때 로마에는 큰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Tiridates는 네로 황제를 찾아와서 경의를 표했다. 네로 황제는 그를 아르메니아(Armenia) 왕으로 승인해주었다. 이후에 Tiridates 왕 일행은 그들이 왔던 길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배를 타고 돌아갔다. 재미있는 사실은 로마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Plinius는 Tridates 왕과 그 일행을 라틴어로 Magus(마구스)라고 불렀는데 이 단어는 마태복음에 있는 동방박사를 가리키는 라틴어 원어 Magoi(마고이)와 같은 말이다.
2:12
꿈에 ... 지시하심을 받아(crhmatisqevnte" kat! o[nar:크레마티스뗀테스 캇 오나르)
동방박사들은 요셉처럼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다. 이것은 동방박사들이 요셉처럼 하나님의 호의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태는 앞에서 꿈을 계시의 수단으로 자주 사용하였다. 여기서 “지시하심을 받아”란 crhmatisqevnte"(크레마티스뗀테스)는 후기 헬라어에서 신의 경고를 가리킬 때 사용했었다. 지시 받은 내용은 헤롯에게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런 지시가 없었다면 동방박사들은 돌아가는 길에 약속대로 헤롯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동방박사들은 헤롯왕의 사악함을 모를 정도로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아기 예수의 경배자로 부르셨다.
다른 길로 (di! a[llh" oJdou':디 알레스 호두)
동방박사들은 마침내 다른 “길”(oJdov":호도스)로 돌아간다. 마7:13-14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oJdov":호도스)과 마 21:32에서 세례 요한의 의의 “길”(oJdov":호도스) 등은 마태가 “길”을 자주 상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여기서 동방박사들이 오던 길을 그리스도와 만나는 “경배, 예배”라고 한다면 동방박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다른 길은 그리스도를 만난 그 기쁨으로 세상을 향한 “섬김, 봉사, 선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기똥차다.. 기천아, 하나님께서 너에게 더 풍성한 지혜와 지식을 선물로 주시기를 기도할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