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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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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 지역의 변화기원전 262년, 당시 진나라는 상앙이 실시한 변법의 성공으로 전국의 패자가 되어 있었다. 당시 군주였던 소양왕은 국력이 미약해진 한(韓)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지휘관은 맹장 백기였다. 백기는 진군을 지휘하여 한나라 영토인 야왕(野王, 지금의 하남성 심양)이라는 지역을 점령하였고, 상당의 17개 현은 도읍과의 연락을 취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가뜩이나 작은 나라인 한나라는 두동강이 나고 말았고, 상당의 백성들은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상당태수였던 풍정은 백성들과 모의하여 상당을 조나라에 바치기로 하였다. 도읍지인 신정으로 가는 길이 막혔고, 조국(한나라)이 자신들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또한 당시 진나라에 흡수된 백성들이 진나라의 법치에 적응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이 지역의 백성들 또한 이 의견에 동조하여 대거 조나라로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진, 조, 한 3국은 곧 술렁이기 시작했다.
▶ 양국이 상당에서 부딪히다 서력전 260년 4월, 진나라의 장수 왕홀은 군사를 이끌고 상당을 접수하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민들은 조나라로 도망간 상태였고, 진나라의 지도부는 왕홀에게 상당 군민들을 추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을 간파한 조나라는 명장 염파를 파견하여 군민들을 접수하고 진군을 막게 하였다. 양국 군대는 중원 깊숙한 지역에 위치한 장평에서 부딪혔다. 초기의 움직임은 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진군은 염파의 심리전에 밀리고 말았다. 간헐적인 전투에서 승리는 계속 거두고 있었으나 결정적인 승리는 얻지 못한 상태였다.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보루를 쌓고 진군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6월과 7월의 맹공은 진군의 승리로 끝났으나, 진군은 6국이 합종하여 쳐들어온다는 소문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대로 가면 조군이 승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지휘관, 조괄의 부친은 명장 조사(趙奢)였다. 그는 생전에 진의 군사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전력이 있었던 장수였다. 그는 병사들을 아꼈고, 욕심이 없어서 전투에서 이긴 후 왕에게 하사받은 은상은 병사들에게 모조리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조사는 정작 자기 아들을 천거하기는 꺼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성품 때문이었다. 조괄은 병법에 통달한 수재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외우기만 한 병법을 실전에 응용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거들먹거리고 뽐내는 것을 좋아했다 한다. 그래서 조나라의 조정에서 조괄을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자 조괄의 어머니는 조정에 아들을 천거하면 안 된다는 건의까지 올렸으나, 이는 무시되고 말았다. 반면, 진군의 새로운 지휘관인 백기는 백전노장이었다. 당시 수많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백여 개가 넘는 성을 빼앗을 정도의 공적을 거둔 장수였다. 이러한 지휘관에게 조괄은 애송이에 불과했다.
기원전 260년 7월말에 상앙이 변법을 실시한 지 약 100년 후인 그때 조나라와 전국의 운명을 짊어진 조괄이 장평에 도착하였다. 실전경험이 전무한 조괄은 도착즉시 총공격을 지시한다. 이는 백기가 기다리던 것이었다. 그는 아군을 거짓으로 패하게 한 후, 복병을 배설하고 조나라의 40만 대군을 본진으로 끌여들였다. 보병 중심의 조군은 진의 본진으로 쇄도하였다. 그러나 본진은 이미 보루를 높게 세우는 등 조군의 공격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한 상태였다. 조군은 진군의 수비를 돌파하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였다. 바로 그 순간, 백기는 대기하고 있던 복병에 신호를 보내어 조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조괄은 전군에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군사들의 전열은 흩어지고 있었다. 백기가 노린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곧 진군의 본진에서 기병 5,000기가 쏟아져 나왔다. 기병대는 방진 사이를 헤치고 나와서 조군의 중심을 가로지르며 진격했다. 조군의 대열은 와해되기 시작했고, 진군의 경보병 부대가 조군의 본진을 타격하자 조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당시 진군은 철저한 훈련 덕에 단병접전에서는 당할 국가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조군은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조괄은 서둘러 그 자리에 보루를 쌓게 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순식간에 꽤 튼튼한 보루를 만들어 내었다. 아무리 진군이 조군을 초토화 시켰다 하더라도 40만이나 되는 병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리하여 조군은 진군에게 포위된 채 전쟁은 또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승전은 했으되, 구원병이 온다면 단번에 역전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백기는 본국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소양왕은 직접 장평 근처의 하내로 행차하여 병사들에게 작위를 1계급씩 하사하고, 적의 보급로를 막게 하였다. 본래 진의 법에서는 적병의 수급을 취한 자에게만 작위를 수여했으니 소양왕이 얼마나 사태를 급박하게 여겼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자 전쟁은 총력전의 분위기로 흘러갔다. 단기적으로는 조나라가 유리했다. 그러나 변법으로 정교한 법체계와 행정체계를 갖춘 진나라는 사태를 충분히 역전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조나라는 국가의 전병력을 모두 동원한 상태였으나 진나라는 아직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결국 조군은 완전히 포위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병사들이 진군에게 포위된 지 46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군사들은 산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조괄은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정예군을 이끌고 퇴로를 뚫으려던 그는 진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말았고, 장수를 잃은 조군은 진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전투는 종결되었다.
전투는 끝났다. 그러나 결말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된 진나라는 고민에 빠졌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진나라에는 없었다. 결국 백기는 끔찍한 선택을 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곳에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 전투 후에 취한 조나라 군사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다.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다. 훗날 한 시인이 이 참담한 장면을 다음의 시로 지었다 전한다.
“ | 高臺八尺盡頭顱 何止區區萬骨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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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행동으로 얻게 된 효과는 상당했다. 당시 다른 5국에 경고하는 의미(진나라에 대항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도 있었으며, 조나라에게는 항전의 의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농사를 지을 남자들이 거의 남지 않게 된 조나라는 이후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예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한 조나라는 결국 약 30년 후인 기원전 228년 멸망하고 말았다.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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