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책의 저자는 학살자들을 축복한 한경직 목사를 반란방조혐의로 대검찰청에 고발한 이선교 목사님. 맨뒤에 소개가 나옴.
<<다시 써야할 한국 기독교사>>
그들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며 지금도 통곡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현재까지 한인여성 정신대는 약 20만 정도가 이런식으로 강제 및 유혹되어 동남아 각 사령부에 배치되었으며 사령부에서는 20-30명 단위로 부대배치하여 일본군이 짠 시간표에 따라 계급별 부대별로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악한 일을 자행하였다.
위안부는 외출이 금지되고 허가 없이는 지정지역을 떠날 수 없다. 위안부는 아침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하루에 10-20 여명의 일본군을 상대하였다. 수입은 업자가 60% 위안부가 40%를 차지한다고 하였으나 업자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 위안부의 수입을 착취하였다.
요시다 세이지는 전남지역에서 일본인 경찰 4-5명과 조선인 경찰 30-50명의 협조로 7-8대의 트럭에 나눠타고 마을에 도착 마을을 완전 포위한후 모두 부녀자들은 길가로 끌어내고 젊고 건강한 여성은 모조리 트럭에 태워 강제로 끌고 갔다.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여성들은 일찍 결혼하여 아이를 안고 오면 얘기를 잡아 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갔다. 비명을 지르는 여자는 때려 쓰러뜨린 후 끌고 갔다.
그는 10-20만 정도가 정신대로 끌려갔고 이중 5천명 정도가 조국으로 가지 않고 일본에 있으면서 이름을 바꾸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연합군은 이들을 포로로 취급하여 조사를 했기 때문에 이들의 명단은 지금도 있으며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에 도서관에 가면 누구든지 볼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나 한국인들이 이 분야에 대해서 전혀 연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에 있는 종군 위안부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관심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고 오히려 조언까지 한다.
그는 그의 잘못을 죽기전에 회개하려고 한국에 왔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일본과 조선인 위안부]라는 두권의 책도 출판했다고 한다.
위안부 생활이 곤욕스러워 탈출하다가 붙잡혀 모진 매를 맞았으며, 상처도 치료하지 못한 채 위안부 생활을 했다. 현재 서울 강남구 일원동 영희국민학교 외 전국에 보관되어온 학적부에는 이께다씨가 담임하고 6학년 4반 여학생 70여명 중 5명이 1944년 7월 2일 일본 도미야마 불이월 정신대원으로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끌려갈 당시 나이는 12-14세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다씨는 자기가 맡았던 반 외에도 14-15 정도가 정신대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렇게 끌려간 학생의 수와 명단이 전국 국민학교에 보간된 학적부에서 현재 속속 발견되고 있다.
1942년 12월 김활란은 <신시대>에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라는 글을 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전시 동원에 적극 협력하라고 외쳤다.
1941년 12월 모윤숙은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직후 조선임전 보국단이라는 친일 어용단체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우리들 여성의 머리 속에 대화혼이 없고 보면
이 위대한 승리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
이라고 권장하였다. 이런 여성에게 전두환 정부는 3.1문화상을 수상했고, 1990년 그녀가 죽은 후 노태우 정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으니 국민정신이 제대로 되겠는가?
김동환, 노천명, 김동인, 주요한, 김상용, 서정주, 장덕조, 김소운 등은 일본을 대대적으로 찬양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반도호텔에서 미.영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15명이 참석하여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다음은 목사들의 주장을 요약하였다.
1.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황금만능주의 밑에서 운전되는 것이 미국입니다. 선전만 잘하면 전국적으로도 지위를 얻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던 것입니다. 이 형세를 그대로 방임해 두면 동아공영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기보다 명백한 것입니다.
영원히 광만 뻗도록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 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적이 없었다.
(1943년 12월 5일자 매일신보에 기고)
그는 해방 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까지 하였다.
2.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
미국은 동양이나 우리 일본에 대해서 온갖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괴롭힘으로써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우월감을 갖고 싶어하는 것도 그런 것입니다.
그는 후에 장로교 통합측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3. 정춘수 목사(조선감리교 총감독)
기독교의 교훈이나 시범 안에서 이 세상은 장차 멸망할 것이라고 말해진 것은 한 번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이 옴으로써 조선 고유의 윤리, 도덕, 미풍양속이 파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기회를 주시와 완전히 감리교 교회를 혁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명칭부터를 조선감리교단으로 고치고 일본정신에 합치하는 황도주의화된 일본적 기독감리교회로서 매진하게끔 된 것입니다.
정의의 칼을 뽑아 대동아전쟁을 시작하고 불과 수일동안에 혁혁한 전과를 거둔 것은 진실로 감격을 금할 수 없는 바입니다. 어제 홍콩의 적군이 괴멸했습니다. 그 완전한 함락이 시간문제임을 믿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유쾌함과 감격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정춘수는 해방후 천주교로 개종, 평신도가 되어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죽었다.
7. 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
이번의 대동아전쟁이야말로 황국의 흥폐가 아시아의 성쇄를 결정하는 성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황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할 결심이 있을 뿐입니다.
8. 윤치영(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총무)
대동아 성전을 위해서 정의의 칼을 뽑은 제국의 사명은 팔굉일우의 대 이상과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달성하고자 1억 1심으로 매진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나 사실상으로나 그들의 모순을 제제하는 실물 교훈인 것입니다.
9. 윤일선 목사(세브란스의전 교수)
루즈벨트 그가 미국의 국책을 그르친 장본인이긴 하지만 임기 4년 중에 그의 이름으로 아주 미국을 망쳐먹게 되든가 다행히 반성해서 강화를 청해 오든가 혹은 장기전이라는 이름만을 걸어놓고서 임기가 끝나면 실제는 패군지장으로 하야를 하거나의 어느 하나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11.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
오늘날 조선의 기독교회는 재출발이 요구되고 있다. 도대체 신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았다고 하는 자가 인간답지 않은 생활을 해서 된단 말인가. 미.영인의 식객 노릇을 하면서 선량한 신자로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신을 그따위로 믿느냐 말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그것을 서양인에게서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교회를 자기 손으로 운영하고 그 교리를 제 머리로 고쳐 생각하려는 노력 정도는 해 봄직도 한 일인 것이다.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 국가는 일본 국가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939년 박희도는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반도 2천만 동포는 일본정신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황도를 앙양해야 한다. 또한 폐하의 적자로서 황국 일본의... 현재의 내지인 조선인이라는 호칭이 단순한 지방적 호칭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라고 하였다.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라고 단정하였다. 친일파인 그들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들에게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분단이 외세에 의한 것이라고 미국과 소련을 규탄할 수 있는가! 친일파들은 독립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가. 감히 기독교는 얼굴조차 들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진실로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이대로는 절대 안된다.
웨슬레는 "우리는 사람의 잘못된 행실을 징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얼마동안은 그를 참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가 잘못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우리 가운데 계속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네 형제가 범죄하거든 권고하고 듣지 않거든 증인을 세워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다(마태 18:17).
친일파 그들은 반드시 처벌받아 강단과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해방과 함께 기독교는 범 회개운동이 있어야 했는데 우리는 회개운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유는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는 친일파들 때문이며 그들은 반성은 커녕 변명으로 일관하여 분열과 분단을 추래하였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어 기독교와 한국정신을 부패하게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너무 쉽게 용서해주고 잊어버리고 있다.
현재 기독교 목사들의 사고방식은 거의가 어용 사상이 지배적으로 어용목사가 훌륭한 목사요 국가를 사랑하는 목사로 인식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로 우리는 혼돈가운데 있다. 그들은 국민들에게 비겁한 마음과 자기를 위한 어용기회주의 사상을 전염시켜 사회 어느 한 곳 부패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여 마귀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였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암적존재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토록 반성하지 않는 자들을 용서해 주고 덮어 주고 변호하고 찬양하는 것이 기독교 사랑인 것처럼 기독교 사상을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성 회복과 정의가 실현되기는 실로 어려운 일이다. 어용사상이 사라지지 않는한 이땅에 도덕성 회복은 요원하다.
오다나리치는 1908년 일본 오사카에 태어났다. 광주 일본교회 담임목사 다나가에게 오다가 질문하기를 "왜 일본인에게만 전도하고 조선인에게는 전도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다나가 대답하기를 "정복자 일본인이 피정복자 조선인에게 회개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도가 물건을 도둑해 가지고 물건 주인에게 용서하기를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937년 12월 숭실학교 강당에서 5일간에 걸쳐 신사참배 반대 강연을 하다 구속되었으나 잠시후 석방되었다. 1938년 1월 수원경찰서에 투옥되어 5개월간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일본경찰의 끈질긴 추격에 그는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피하여 일본신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1942년 1월 재일 조선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후 재일 대한 기독교회 후쿠오카와 교토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1980년 9월 27일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니시다 목사도 오다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한국교회를 도왔으며 특히 성결교회를 도왔다. 그는 진주성결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는 1985년 2월 8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경직 목사는 1992년 6월 18일 여의도 63빌딩에서 뎀 풀턴상 수상 축하식 인사말에서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했습니다"라고 47년만에 회개를 하였으나 그는 회개할 일이 너무 많은 목사이다.
친일 어용들과 그 후예들은 첫째로 일본의 탄압에 못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며, 둘째로 양심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주위의 강권에 못이겨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이 명예와 출세욕에 눈이 어두워져 하나님과 조국을 배반한 것이다. 이러한 친일 어용들을 숙청하지 못하여 현재 대한민국 교과서에 16명의 친일어용 작가 19개 작품이 실려 학생들에게 어용사상을 교육시키고 있다.
정신대를 폭로한 일본의 이케다씨는 지금도 한국의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으며 그 죄책 때문에 결혼까지 포기하였다고 한다. 자기 국민도 아닌 다른 국민이요, 정신대로 끌려가는 것을 찬양한 일도 없지만 단 한가지 담임선생이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부패하지 않겠는가. 그 결과 우리 민족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고, 하나님의 심판은 준비되어 있었다(에레미아 1:16-17).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잠언 14:34)
기독교의 분열
1945년 8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다 평양 감옥에 있던 많은 교역자들이 출옥하여 집에도 가지 않고 평양시내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있으면서 한국교회 재건에 관한 5가지를 1945년 9월 20일에 발표하였다. 출옥한 이기선 목사는 5가지 원칙을 지지하는 산정현교회를 중심으로 30여교회를 합쳐 1949년 5월 독노회를 조직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분은 다음과 같다.
이기선 목사, 고흥봉 목사, 채정민 목사, 한상동 목사, 주남선 목사, 오윤선 장로, 김인희 전도사, 김화준 전도사, 서정환 전도사, 조수옥 전도사, 이현숙 전도사, 최덕지 전도사, 손명복 전도사, 이주원 전도사, 방계성 장로, 박신근 집사, 장두희 집사, 양대록 집사, 이광록 집사, 김형락 선생.
1945년 11월 14일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 월곡동교회에서 평북노회 교역자 퇴수회가 있었다. 강사는 이기선 목사와 박형룡 박사였고 참석한 교역자는 200여명이었다. 여기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 재건운동의 5원칙을 발표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2.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간 통회 자복할 것.
3. 목사나 장로가 휴직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4.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5.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 할 것.
이상의 5가지 원칙에 신사참배 결의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등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홍택기 목사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괴변을 토하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반대하여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 1월 초순 평북 차령관교회에서 김인희 전도사가 심령부흥회를 인도하였다. 이 집회에 북한과 만주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한 성도들이 모여들어 회개와 감격의 울음바다가 되었고 집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부흥회를 끝내고 그속에 모인 교역자들이 재건교회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북한 전교회에 취지문을 발송하기로 하고 산회하였다. 1946년 4월 평북 선천읍 황금동 창고에서 김정희 전도사가 중심되어 55명이 재건교회 창립예배를 드렸다.
1949년 북한 정부에서는 1946년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모든 교회 재산을 정부에 헌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교회는 하루 아침에 재산을 몰수당했다. 이 작업은 기독교연맹을 통하여 시작되었다. 교회당 몰수에 항거한 목사는 김길수, 신현교회 이유택 목사와 정일선 목사, 유계준 장로 등 극소수였다. 이들은 끝까지 공산정부에 항거하였으나 결국 몰수당하였다. 유계준 장로는 1950년 6월 24일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어 총살당하였다.
산정현교회 정일선 목사, 남산현교회 송정훈 목사, 김철훈 목사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반대하다 북한에서 순교당하고 말았다.
조만식 장로는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50여 만명의 당원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여 북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단체가 되었다.
많은 동지들은 조만식 장로의 신변이 걱정이 되어 월남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 장로는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월남 권유를 거절하였다. 조장로 여동생 조신여와 아들 조자홍은 월남하였다.
1950년 10월 13일 국군이 평양을 향해 진격하자 김일성이 평양에서 북쪽으로 이송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 장로는 "평양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거절하자 내무서원에 의해 총살당하게 되었다.
1946년 김일성 비서인 강량욱 목사의 권유로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였다. 기독교도연맹위원장 박상순, 회장 김익두 등이었다. 1947년 신사참배를 한 강양욱은 이 조직을 확대하기 위하여 황해도 신천교회 김익두 목사를 회장으로 추천하고 부회장 김응순, 서기 조택수 목사를 선임하였고, 전산동 목사를 설득하여 이 조직에 가입시켰다. 또한 김익두 목사가 회장이 되자 북한의 교역자가 거의 이 연맹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천 서부교회의 담임목사이며 기독교연맹 회장인 김익두 목사는 1950년 8월 8일 비행기 전차의 군납헌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한다."라고 하면서 평양에서 기독교인 전쟁 승리 총 궐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 9월 8일 감리교는 탈퇴 즉시 변홍규, 이규갑, 이윤영 목사 등이 동대문교회에서 모여 재건중앙위원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이규갑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하였으나 별 호응이 없었다.
감리교는 신학교를 재건 변홍규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감리교 부흥파는 계속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친일파 교역자들의 즉시 사퇴를 권고하자 정춘수, 이동욱 목사등이 사퇴하였다. 1946년 4월 7일 재건파는 수표교회에 모여 강태희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일로 재건파와 부흥파의 치열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감리교 부흥파의 목표는 일제의 잔재와 부역 교역자들의 완전퇴진을 주장했고, 재건파측은 죄가 많고 적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죄를 통회하는 신앙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부흥파에서는 첫째로 신사참배한 교역자는 임원에서 제외되어야 하며 둘째로 임원은 양파에서 동일하게 선출하여야 한다는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재건파에서는 이것을 수락하여 극적으로 합동을 하게 되었다.
1947년 1월 7일 종교교회에서 연합총회가 개회되었을 때 강태희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고 임원이 재건파에서 많이 선출되자 부흥파는 이탈하여 단독총회를 하여 다시 분열이 시작되었다.
1947년 1월 11일 연합회의에서 감독을 의장으로 고치고 강태희 목사가 의장이 되었다. 총회는 친일파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친일반역자들이 감리사로 출세하게 되었다. 1947년 2월 3일 홍현설, 변홍규 등 40여 명 목사와 문창모, 박현숙 등 평신도 56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내용은 "교권을 잡은 재건파가 교회 장정을 유린하고 불법적 방법으로 연합을 가로막고 친일파를 두호하고 있다. 특히 친일교역자 19명은 감리교에서 추방되어야 한다고 고발하였다. 고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성서모독죄: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배척하였고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경을 거부하려 하였고 김진철 학생이 신학교에서 구약성서를 읽었다고 출교시켰다.
2) 신사참배찬양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 가미나다를 설치케하고 상동교회를 신사로 만들고 교역자들을 미소기바라에 참여케하였다.
3) 재산매매비리죄: 감리교 37개의 교회건물과 31개의 목사관을 매각처분하였고 공주 영명학교 농지 18,360평과 은퇴교역자를 위한 땅도 매각처분한 돈 40만원 중 절반은 일본군을 위하여 비행기 헌납금으로 하였고 나머지는 총리원에서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특히 은퇴교역자 농지매각은 1945년 9월에 하였다. 사용처를 밝혀라.
4) 배신교역자: 친미적인 교역자 40여명을 해직 강등 자격취소를 하였고 그리고 일본 정부당국과 야합하여 그들을 투옥, 고문하게 하였다.
1947년 11월 17일 동대문 감리교회에서 이규갑, 변홍규 등은 부흥파를 재조직하여 의장에 이윤영, 서기에 김진호, 감독에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을 선출하였다. 많은 성도들은 재건파에서 부흥파로 옮겼다. 정춘수는 천주교회로 강태희는 교회에서 사임하였다. 1949년 4월 20일 다시 합동총회가 개회되어 김유순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하니 양파에서는 서로가 환영하여 합동이 성공하였다. 1954년 3월 16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다시 분열되었다가 1958년 8월 다시 재통합이 되었다.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9일-10일 서울에서 재건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원 7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 대표로 이성봉, 조기함, 조한수, 이용선, 최학철 목사 등이 38선을 넘어 참석하였다. 재건의장에는 60만세 사건 때 기독교에서 유일하게 혼자서 만세를 부른 천세광 목사가 되었다. 교단명칭도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라고 변경하였다.
이때 총회장에 박현명 목사가 추대되었고, 신학교도 개교가 되어 이건 목사가 교장이 되었다. 박현명 목사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한 분이요, 이건 목사는 징병제를 찬양한 분이었으나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았다.
1945년 9월 18일 출옥성도가 많은 경남노회는 서둘러서 경남 재건노회를 조직하고 신사참배교역자들에게
1) 목사 전도사 등은 일제히 자숙한 후 일반 교회를 시작할 것.
2) 자숙기간이 종료되면 교회는 교직자에 대한 시무투표를 실행하여 그 진퇴를 결정할 것.
1946년 7월 9일 제47회 정기노회에서 임원진의 총사퇴를 요구하고 출옥성도 주남선 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이에 친일파 목사들은 "신사참배는 이미 우리 양심으로 해결할 것이며 지금 해방이 되었다 해서 죄로 운운함은 비 양심적이다."라고 하면서 오히려 출옥성도를 비양심적이라고 매도하면서 교묘히 자숙안을 삭제하고 피하였다. 그로 인해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열린 제48회 노회에서는 신사참배가 죄냐 아니냐를 가지고 웃지 못할 논쟁이 시작되었다. 신사참배자들의 뻔뻔스런 태도에 한심할 지경이었다.
1946년 4월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담임하고 있던 한상동 목사는 공산주의자들의 위협과 친일목사들과의 갈등으로 견디지 못하고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박사와 만나 고려신학교를 세울 것을 협의하였다.
1946년 6월부터 8월까지 진해에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힘이 되어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47년 제48회 경남노회에서는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고, 학생추천 취소 결의를 하였다. 그 이유는 극단 보수주의 선교사를 영입했다는 것이다.
이에 1946년 12월 3일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라고 선언하고 신사참배 교역자들과 결별하였다. 경남노회 67개 교회도 제48회 노회 결의에 항거하고 한상동 목사 지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박형룡 박사가 교장에 취임하였다.
경남노회는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947년 3월 10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노회장 김길창 목사와 임원 전원이 사임하고 신사참배에 대해 통회하고 출옥 성도들의 마음을 상치 않게 하여 수습하였다. 한상동 목사도 제49회 경남노회에서 탈퇴를 철회하였다.
그러나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신사참배 교역자들은 1948년 7월 "고려신학교와 소위 신성파에 대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한상동 목사에 대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1948년 9월 21일 경남노회 49회 임시노회에서 44대 21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취소하였다. 이렇게 되어 경남노회는 출옥 성도 지지파와 적극반대파 중간파로 갈리어졌다. 1948년 5월 총회에서 정치부장 김관식 목사는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다. 1950년 4월 1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권영호 목사 사회로 개회되었고, 고신파 문제로 난항이 거듭되어 유회를 거듭하였다.
김재준 목사는 축자 영감설을 부인하였다. 이에 보수진영에서는 성경 오류설에 대한 해명과 취소와 사과를 요구하였다. 이일로 총회는 수라장이 되어 기마경찰대가 동원되어 총회는 해산되었다. 6.25 두 달 전 일이다.
1947년 4월 대구에서 제33회 총회시 51명의 연서로 김재준 교수의 강의 내용에 대한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새벽예배 시간에 학생끼리도 서로 싸움하여 수라장이 되었고 특히 정규오, 이노수, 손치호, 이성권, 이치복, 손두환 학생들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를 해명하라고 요구하고 나왔다. 진정서 내용은
1)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다"라는 학교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
2) 근대주의와 고등비평 성서해석법 도입
3) 김재준 교수의 문서설과 성서 권위부정, 정통교회 공박, 성경에서 삼위일체 교리 찾을 수 없다. 칼빈 예정론은 숙명론이다.
4) 송창근 교수의 공관복음 금과 돌 설명
5) 정대위 교수의 속죄론이 이해할 수 없다. 등의 내용이다.
1948년 김재준 교수를 1년간 유학을 시키고 박형룡, 명신홍, 김진홍, 심문태, 서고도, 로라복 등의 교수가 보강되었다. 장로회 신학교 설립위원들은 1948년 5월 20일 서울 창동교회에서 개교하기로 하고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추대하고 1948년 6월 서울에서 제35회총회시 장로회 신학교 직영으로 할 것을 가결하였다.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총회가 대구 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을 때 조선신학교측은 장로회 신학교측의 대의원을 총대로 인정하지 않자 서로가 인정하지 않아 조선신학교측이 강단에 올라가 총회장을 끌어내리고 기물을 파괴하는 대 소동이 벌어져 기마경찰이 출동되어 총회는 해산되었고 특별위원의 수습방안에 따라 정회하고 회의는 9월로 연기되었으나 6.25의 난리로 9월에도 속회되지 못하였다.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제36회 총회가 속회되어 총회 직영 새 신학교를 대구서 개교하기로 하였다. 이때 총회 서기는 유호준 목사였다. 이렇게 되어 총회신학교는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개교가 되었고 교장에 김부열 선교사, 교수에 박형룡, 한경직, 권세열, 계일승, 명신홍, 김치선 등이었고 1953년 9월 2일 박형룡 박사가 교장이 되었다.
1952년 4월 29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37회 총회때 김재준 목사는 교수의 면직, 목사직 박탈,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불채용으로 처벌하자 1953년 4월 25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제38회 총회시 한국 기독교장로회로 되었다.
1951년 5월 24일 남북이 치열한 전쟁중에 있을 때 기독교 대표들은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하지 않고 장로교 36회 총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개회되어 총회에서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되어 신앙을 지켜온 고려파를 정죄하고 출옥성도가 제외된 가운데 경남노회가 조직되었다.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고신측이 되었다.
<<다시 써야할 한국 기독교사>>
발행처: 풀빛목회, 1993년 4월 발행
저자: 이선교/1942년 11월 평양 동산동 출생, 성결교신학교 졸, 서울 신학대학원 졸, 현재 수유리 백운교회 담임목사
환난의 현장에서 몸소 환난을 당하면서 현재의 고난을 하나님께 호소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환난을 해결하려는 믿음의 노력은 하지 않고 자기만 살기 위하여 양을 버리고 도망쳐온 한경직 목사외 다수의 목사들이 또 도망쳐 고난에 동참하는 종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미군의 도움으로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도강파와 잔류파는 서로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사회는 어느 한 구석 썩지 않은 곳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목사들의 사명이 무엇인가 "악인에게 경고하여 악한길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다"(에스겔 33:8).
전도와 사회참여는 기독교인의 의무요 하나님의 명령이며(마태 5:13-14) 기독교인의 성결의 삶의 연장이고 웨슬레 신학사상이며 로잔언약이다. 1993년 3월 이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