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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쾅, 쿠르르,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진다. 코끼리 무리가 달려드는 듯하다. 잘 생긴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 박사가 펄쩍 뛴다. 가파른 절벽을 내달린다. 성궤가 눈앞에 있는데! 영화 ‘레이더스: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1981)의 한 장면이다. 만약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한국판 ‘레이더스’를 찍는다면 그 주인공은 단연코 <음식디미방>일 것이다. 조선시대 고서적 <음식디미방>은 영화 속 ‘잃어버린 성궤’만큼 330여년 전 주방의 비밀이 가득한 보물이다. 장금이도 탐낼만한 음식의 비법들이 꼼꼼히 적혀 있다. 이 책은 조선 중기 석계 이시명 선생과 결혼한 장계향 선생이 75살이 되던 해(1672년)에 쓴 최초의 한글 음식조리서이다. 이전에 허균의 <도문대작>이나 김유의 <수운잡방> 등의 요리책들이 있었지만, 모두 한자로 기록된 책들이었다. 이 책에는 재령 이씨 석계 이시명 선생의 종가음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
한 편의 드라마처럼 세상에 빛을 드러내다
이 보물책이 세상에 나오된 사연은 한 편의 드라마다. 1960년 당시 경북대 교수였던 김사엽 박사가 이시명 선생의 둘째 아들 존재 이휘일 선생의 후손 서가에서 책을 발견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서책’임을 단박에 알아봤다. 김사엽 박사는 논문을 통해 이 책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전통음식연구가들은 금은보다 엄청난 보물이 이 책에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판 ‘인디아나 존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5년 황혜성 선생(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기능보유자. 2006년 12월 타계)은 <음식디미방>을 보기 위해 경상도로 길을 나섰다. 그는 버스에서 한 학생에게 ‘재령 이씨댁’을 물었는데, 그 학생이 재령 이씨 13대 종손 이돈씨였다. 당시 그는 대학 1학년이었다. 장계향 선생의 285주기 불천위(집안의 뛰어나신 분의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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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 | |
이렇게 황혜성 선생과 인연이 닿은 <음식디미방>은 <다시 보고배우는 음식디미방>(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저), <음식디미방 주해>(백두현 경북대학교 교수 저) 등의 여러 권의 책과 각종 논문들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책은 경북대 고문서 보관실에 있다.
13대 종손 이돈(71)씨와 종부 조귀분(60)씨는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집안의 음식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조씨가 만든 석이편(석이버섯떡)은 단맛이 거의 없고 담백하다. 석이버섯을 잘게 다져 찹쌀가루, 쌀가루와 섞어 떡을 만들고 그 위에 잣가루를 얹었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다. 첫 맛은 너무 거칠어 떡인지 의심이 간다. 하지만 한 개, 두 개, 먹을수록 자꾸 손이 가게 하는 묘한 맛이 있다. 이 떡을 만드는 법은 <음식디미방>의 면병류 석이편법에 자세히 나와 있다. 종부는 “장씨 할머니 음식 중에 잡채, 대구껍질느르미, 동아느르미, 모시조개탕 등이 인상 깊다”고 말한다. | |
집안 몰락으로 흩어진 유물 찾으려 돈 버는 일부터 나서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에 있는 <석계고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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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원에 살고 있는 종손과 종부는 노구에도 조상이 남긴 유산을 아끼고 세상에 알리는 데 여념이 없다. 장계향 선생이 노년을 보낸 고택(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원리) 옆에 집을 지어 종가를 새롭게 단장했다. 최근엔 <음식디미방>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곧 고향에 내려갈 예정이다.
60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운 종부는 안동 지역에서 열리는 종가포럼에 참여하고 종가음식에 대한 강연도 한다.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추운 겨울에도 고운 한복을 여며 입고 길을 나설 정도로 열정이 가득하다. 300여년 전 총명했던 장계향 선생을 보는 듯하다. 그는 “후손으로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라며 겸손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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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탄한 삶을 산 듯 보이는 종손은 ‘의지의 한국인’이다. 그의 아버지 이병흠씨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다. 집안은 황폐해졌다. 전쟁통에 집안의 유물들은 하나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씨는 종손으로서 그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월급쟁이로는 뜻을 이루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한 그는 10년간 잡아온 교편을 접고 37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설립한 가방회사는 1970~80년대 ‘백만불 수출탑’에 이어 ‘오백만불 수출탑’을 탈 정도로 성공했다. 그는 집안의 유물들을 찾기 시작했다. <전가보첩>은 그렇게 해서 다시 찾은 집안의 유물이다. “할머니를 알리는 일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이라고 종손은 지금도 생각한다. | |
시와 서예에도 능했고 나눔에도 큰 손
장계향 선생을 흔히 ‘정부인 장씨’라고 부른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이 숙종 18년에 이조판서를 지내면서 ‘정부인’칭호를 받았다. 장계향 선생은 1598년(선조 31년) 경상북도 안동 금계리에서 경당 장흥효 선생(고려 태조 정필의 후예)과 첨지 권사운의 여식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19살에 재령 이씨 운악 이함 선생의 셋째아들 석계 이시명 선생과 혼인했다. 장흥효 선생은 제자인 이시명 선생이 아내와 사별하자 자신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장계향 선생은 윗동서 두 명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맏며느리 역할을 맡았다. 병자호란 이후 은둔생활을 시작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도 지켰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도 훌륭하게 키웠다.
시도 잘 짓고 서예에도 능했던 장계향 선생은 사람을 아끼는 마음도 넉넉했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이함 선생의 문집에 할머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살림이 넉넉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도토리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였다고 해요. 끼니 때 연기가 안 나는 집에는 사람을 보내 양식도 주었답니다.”종손의 기억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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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향 초상 | |
장계향 선생은 25살이 되던 해 친정어머니가 죽자 새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가 어린 이복동생들을 남기고 죽자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살림을 보살폈다. 지금 고택이 있는 영양군은 장계향 선생이 시아버지가 죽자 남편과 터를 잡은 곳이다. 셋째 아들 갈암 이현일 선생인 남긴 책 <정부인 안동장씨실기>에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다. | |
기록된 모든 음식 개량화해서 좀 더 실용적으로 복원
<음식디미방>을 세상에 알리는 데 종손과 종부만 열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2006년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가 결성돼 일부 음식을 재현하고 있다. 2009년엔 영양군청에서 허성미 안동과학대 교수에게 ‘음식디미방 레시피 표준화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최근까지도 <음식디미방>에 기록된 모든 음식을 개량화해 좀더 실용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책에 기록된 음식법이 매우 체계적이고 과학적이어서 복원이 쉬웠다. 하지만 면 요리는 까다로웠다”고 말한다.
복원을 위해 한 가지 음식을 수십 번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기록한 양은 엄청나게 많아요. 평상시에 늘 먹는 요리가 아니라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 집안의 큰 행사, 보양이 필요할 때 만들어 먹었던 요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 교수가 복원한 <음식디미방>의 음식은 저칼로리 건강식이다.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아 자극적이지 않고, 대부분 찌는 방법을 사용해 담백하다. 그 중에서 ‘느르미’가 독특하다. 밀가루가 들어간 소스 같은 것이다. 잡채도 특이하다. 당면이 들어가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채소가 어우러진 음식이다. 종부 조귀분씨는 이 복원작업에도 큰 도움을 줬다. 맛을 보거나 만드는 방법을 지켜보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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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불은 ‘매운 불’, 고명은 ‘교태’, 부패한 건 ‘독한 고기’
영양군 음식디미방 보존회에서 재현한 <연근채가재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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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디미방>의 뜻은 ‘음식 맛을 아는 법’이다. 그 법을 살짝 들여다보자. 총 146가지 조리법이 있다. 면병류(면과 떡)가 18가지, 어육류(생선과 고기)가 74가지, 주류 및 초류(식초)가 54가지. 부록으로 ‘맛질방문’이 있다. 꼼꼼히 살펴보면 재미난 것이 많다. 밥과 죽에 대한 요리법이 없다. 밥짓기는 너무 평범해서 뻔 하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국수는 밀가루가 아니라 메밀가루와 녹두가루로 만들었다. 당시엔 귀한 음식이었다.
모든 음식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다.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게 임진왜란 때라고 하니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 대신 천초, 후추, 마늘, 파가 들어간다. 육류요리가 많은 데 재료는 주로 소의 위나 개고기, 꿩고기다. 개고기의 창자로 만든 순대는 별미 중 별미다. 개장찜, 개장느르미, 누렁개 삶는 법까지 세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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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발바닥 요리도 있다. 각종 한과와 떡 만드는 법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숭어나 모시조개, 참게로 만드는 요리들도 있어 다양하기까지 하다. 양반집답게 술 빚는 법도 여러가지다. 다식은 두장의 기왓장을 붙여 불에 데워 만드는데, 오늘날 과자를 굽는 것과 비슷하다. 허 교수는 “버섯종류로 추정되는 진이나 곰발바닥, 자라, 참새, 개 등만 빼면 요리법에 들어가는 많은 식재료가 지금도 구하기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부록 ‘맛질방문’은 장계향 선생의 외가댁 맛질마을(지금의 예천)의 맛을 기록한 것이다.
장계향 선생의 표현법 역시 재밌다. 그는 강한 불을 ‘매운 불’, 고명을 ‘교태’, 부패한 고기를 ‘독한 고기’라고 불렀다. <음식디미방>을 ‘규곤시의방’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책의 표지에 적힌 한자 때문이다. 후손들이 적은 것으로 추정한다. 본문의 첫머리에 있는 한글 ‘음식디미방’은 장계향 선생이 적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 맞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우리 맛에 관심이 많은 이라면 이 보물책을 보기 위해 누구든 ‘인디아나 존스’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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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이 뭐시당가! 희한하게 생겼구만이라! 동치미는 동치민디, 우째 반토막이여! 쬐깐한 게 애기들 맹크롬 생겼구만!” ‘밀양 박씨 나주 종가’의 종부 임묘숙(83) 선생이 대청마루에 동치미를 내놓자 이 댁을 찾은 이들이 한마디씩 한다. 임씨가 “이거이, 반동치미여, 울 집에서 많이 해먹제”라고 대답한다. 지난해 12월 16일 종부, 임씨와 그의 아들, 박경중(63)씨가 살고 있는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263호로 지정이 되면서 방문하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름도 ‘나주 박경중 가옥’에서 ‘나주 남파 고택’으로 바뀌었다. 남파는 박경중씨의 고조부 박재규 선생의 호이다. 이 댁의 종손은 박경중씨다. 그는 조선 인종 때 지방관헌을 했던 박부동 선생의 15대손이다. | |
누이의 분홍빛 저고리같은 빛, 국물이 끝내~줘요!
종부가 선보인 ‘반동치미’는 이 집의 내림음식이다. 모든 재료가 동치미의 반이라서 붙인 이름이다. 세상의 ‘반’은 상실과 부족, 결핍을 떠오르게 하지만 임씨의 ‘반’은 다른 세상의 풍족함을 보여준다. 반동치미의 국물이 알려주는 종부의 넉넉한 맛의 세계다.
이 댁 반동치미는 국물색이 발그스레하다. 우리 누이 분홍빛 저고리 같다. 이 국물색의 정체는 무엇일까? 임씨가 알려준다. “고추가루제, 고춧가루, 우리 집 반동치미에는 빨간 고춧가루가 쬐까 들어가부러.” 임씨의 반동치미는 섬세하다. “무 잎삭 달린 거, 고놈 중간 크기로 고르고, 3쪽, 4쪽 잘라~.” 그렇게 십자로 무나 배추를 자르고 그 안에 갖은 채소와 과일로 만든 소를 채워 넣는다. 소는 새우젓국과 고춧가루로 버무린 것이다. 살짝 뿌린 고춧가루가 시간이 지날수록 반동치미 국물 사이로 물감처럼 번진다. 색의 비밀이다. 한 입 먹을 때마다 아삭아삭 시원한 맛이 청량한 하늘만큼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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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종가 생선전 | |
이 댁의 음식에서 반동치미만 신기한 것이 아니다. 지난 12월12일 박경중씨의 증조부 박정업씨의 제사에는 고서적 같은 향긋한 음식들이 즐비했다. 노련한 대장장이처럼 임씨는 눈 깜박할 사이에 뚝딱뚝딱 진수성찬을 만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서 며느리, 손주며느리, 서울에서 온 친척 아낙네까지 진두지휘했다. 금방이라도 툭하고 튀어오를 것 같았던 민어, 조기, 병치, 돔, 굴비는 종부의 손을 거치자 노르스름하고 얌전한 생선들로 변했다. 임씨는 손주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생선의 매끄러운 껍질에 고소한 양념(간장, 마늘, 파, 깨, 참기름)을 바르고 석쇠 사이에 끼워 넣고는 숯불에서 구웠다. 고기집도 아닌데 신기하다. | |
남파고택 안채 전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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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며느리 김선경(31)씨는 “저는 못해요. 할머니만 하시죠. 잘못 익히면 생선껍질들이 금세 벗겨져요. 제사상에 못 올리죠. 적당한 불을 아세요.” 김씨는 할머니, 임묘숙 선생의 음식솜씨에 대해 할 말이 많다. “같은 나물인데도 할머니가 하시면 맛이 달라요. 3년째 배우고 있는데 쉽지 않아요. 할머니는 제사 일주일 전부터 밑간을 하시고 준비하세요. 전날 장을 다 보시고요, 친정어머니께 죄송하지만 맛이 완전히 달라요. 종가의 음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탈리아에서 성악을 공부한 세련된 김씨의 눈에는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고추전도 특별하다. 커다란 고추의 배를 갈라 그 안에 다진 쇠고기와 채소들을 넣은 고추전은 빵빵한 소시지 같다. 구운 홍어 맛도 도통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다. 홍어를 굽고 난 다음 양념(간장, 깨, 파, 참기름)을 바른다. 하나하나가 정성스럽다. 이 댁 음식에는 집에서 짠 참기름이 많이 들어간다. 임씨는 전을 지지면서 “그라제, 예부터 참기름이 넉넉해서 많이 쓴당가. 근디 요즘 ‘전철’은 안 좋아, 옛날 것이 좋았지”라고 말을 잇는다. 전철? 지하철이 아니다. 임씨가 프라이팬을 부르는 명칭이다. | |
7년 만의 첫 외출이 ‘할아버지’와의 첫 데이트
종부 임묘숙 선생은 18살 때 박씨 가문의 독자 박승근 선생과 결혼했다. 임씨가 시집와서 7년 만에 한 외출이 ‘할아버지’와 한 첫 데이트였다. “나갈 일이 없제, 바느질 하는 참모, 애기 봐주는 애기 다 집에 있고, 필요한 것도 일하는 사람들이 다사다주니깅, 나가면 또 소문나, 박씨 각시 왜 나왔지 하고.” 엄한 양반 댁이었다. “할아버지(박승근)가 내 손을 잡고 나주역으로 가는 거여, 그때께 광주에서 제재소를 좀 했제, 손 꼭 잡고 미장원이랑라는 델 델고 갔어.” 수줍은 임씨의 긴 생머리는 발랄한 파마머리로 변했다. “그 양반이 만두를 사줬어, 어찌나 맛난지.” 박승근 선생이 36살에 병으로 요절하는 바람에 임씨는 31살에 혼자가 되었다. 박경중씨가 11살 때다. 임씨는 평생 그 추억을 가슴에 담고 산다.
부부금슬은 좋았다. 대대로 자손이 귀했던 이 집에서 임씨는 6형제를 낳았다. 애처로워서 아끼고, 순해서 챙겨주고, 기특해서 보듬어주는 며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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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중 선생의 증조부. 박정업 제사. | |
유달리 손님 치르는 것을 좋아했던 시어머니의 성품 때문에 집안에는 늘 30~40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손님과 집안사람들의 끼니, 집안 행사는 임씨가 주로 챙기는 일이었다. “시아버지가 밉기도 했제, 10시에 아침상 받으시고 3시에 점심상 받으시고 저녁 9시에나 저녁 자시는 거야, 겨울에는 얼마나 춥던지, 상 차리는 게 힘들었어.” 임씨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동네에서 현명하다고 소문난 종부였다. “그때께는 화순(임씨 고향)에 중학교도 없었어, 촌이라, 양반집이라서 (외지로) 여자 혼자 못 보냈지.”
예부터 종부의 미덕 중에 최고는 ‘잘 나누는 것’, ‘잘 베푸는 것’이다. 임씨는 ‘나누는 것’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짱’이었다. 임씨는 제사가 끝난 후 그 많은 음식을 친인척과 오신 손님들에게 나눠주었는데 그 방법이 기가 막혔다. 똑같은 양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다. 어느 집은 노인이 많으니 부드러운 음식을, 어느 집은 애기들이 많으니깐 단 과자를, 집집마다 사정에 맞게 바리바리 싸주었다. 할머니가 나눠준 음식을 보따리에 싸서 집에 갈 때쯤이면 모든 이들의 얼굴에 한가득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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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인 둘째 며느리는 누리집 만들어 할머니표 된장 선봬
남파고택의 대청마루 풍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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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박씨 나주 종가’는 6대조부터 부농이었다. 5대조 박성호, 4대조 박재규를 거치면서 나주 땅 반은 ‘밀양 박씨 나주 종가’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나주사람들은 배를 곯지 않기 위해 아침나절이면 이 댁의 일을 해주러 몰려들곤 했다. 하지만 세상사 늘 한결같지 않다. 박경중 선생은 “우리 증조부 박정업 할아버지는 한량으로 인심이 후한 양반이었제. 아버지 몰래 일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주고 그랬제. 근디 10년간 친구한테 빚보증을 잘못 서서 재산을 거의 날렸제. 그 화병으로 세상 뜨셨어”라고 말한다.
임씨의 시아버지인 박준삼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21살 때 3·1운동에 앞장섰다가 종로경찰서에서 옥살이 했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도 고향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신간회’나주지회 상무위원,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나주협동상회’를 만들어 일본상인들의 상권과 경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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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나주지부 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에 설립한 청운야간중학교는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였다. 청운야간중학교는 1963년 나주 한별고등공민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부농이었던 선대에는 독립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박준삼 선생의 동생 박준채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1929년 11월3일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된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도화선이 된 여학생 박기옥과는 사촌이었다.
종손 박경중 선생은 아버지보다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더 많다. “울 할아버지는 일본에서 영문학 공부했는데도 한글운동에 열심히 셨어. 제문도 한글로 쓰셨제.” 그는 할아버지 말씀이라면 꼼짝을 못했다. “전남대학교 법대를 가고 싶었는데 할아버지가 기어코 농대로 보내버렸제. 농사만 지으라고.” 그는 군대 갔다 와서 농사 짓고 소를 키웠다. 성실하게 일한 만큼 보람도 따랐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나주문화원장을 지냈고 이어서 전라남도의회 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그의 아내 강정숙(59)씨와는 연애결혼했다. 강씨가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주 한별고등공민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 사랑이 꽃폈다. 그는 지금 나주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박경중 선생은 슬하에 쌍둥이 남자형제와 딸을 두었다. 큰 아들 박준영(34)은 서울에서 외국계은행을 다니고 있고 재작년에 아들 박준량을 얻었다. 박경중씨는 “우리 준량이한테 거는 기대가 크제, 우리 종손이여”라며 웃는다. 박씨의 둘째 며느리 김선경씨는 최근 누리집(www.npgotaek.com)을 인터넷 세상에 띄웠다. ‘남파 고택’이라고 이름 지은 할머니의 된장을 세상에 선보이는 장터다. “할머니 된장이 너무 맛나요, 건강한 음식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어요.” 종부 임씨의 손맛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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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깔깔깔, 호호호호,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하얀 눈이 지붕과 소나무 가지마다 걸린 조용한 한옥 앞에서 사람들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바쁜 걸음이다. 한겨울인데도 ‘강릉 선교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강릉을 여행지로 정한 이들이라면 이곳을 빼놓지 않는다. 조선시대 만들어진 이 가옥은 소박한 미와 아름다운 정원들로 인기다. 건물들을 돌아 걸을 때마다 결마다 농도가 다른 나무들이 우아함을 뽐낸다. 고개라도 바짝 치켜들라치면 배시시 웃는 아이의 입꼬리처럼 올라간 기와들이 눈에 들어온다. 봄이면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여름이면 시원한 연못의 물향기가 꽃내음처럼 싱그럽다.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인 무경 이내번(1703~1781)이 지은 집이다. 이내번의 선조 완계군 (효령대군의 7대손)은 한양에서 충주로 내려갔는데 인조반정 때 공을 세워 그의 아버지를 완풍부원군로 칭했다고 한다. 그 후 가세가 기울자 이내번이 모친(안동 권씨)을 모시고 강릉으로 거처를 옮겼다. 강릉은 모친의 친정이었다. 그래서 과거 이 댁을 ‘완풍종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 |
무나 재료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
들머리에 있는 기록을 꼼꼼히 읽다보면 어디선가 맛난 냄새가 난다. 이 댁의 부엌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냄새다. 거기엔 이 댁 며느리 홍주연(58)씨의 손맛이 배어 있다. 그는 둘째 며느리지만 1992년부터 강릉 선교장 8대 종부 성기희(2002년 작고)씨를 모시면서 맛을 이어받았다. 시어머니에게서 ‘두부선’, ‘전체수’ 등 담백하고 쫄깃한 집안음식의 맛내는 법을 배웠다.
홍씨는 “어머님은 엄하셨다. 무나 재료를 썰 때 몇 센티미터도 오차가 생기면 야단이셨다.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건져라, 썰어라, 알려주셨고, 내가 간을 하면 맛을 보시고 ‘됐다’ 하시면 100점이라는 소리셨다”로 말한다. 시할머니도 음식 솜씨가 좋았다. 어릴 때 기억에 오랜만에 고향집 가면 추운 겨울에도 30분이면 뚝딱 맛난 음식이 나왔다. 어머니에게 “할머니 따라 가실라면 아직 멀으셨어요”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고 선교장을 지키고 있는 차남 이강백(64)씨가 회고한다. 홍씨도 집안 여인네들처럼 뚝딱뚝딱 음식을 만든다. ‘선’이라는 요리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음식이다. ‘우리 몸에 좋은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호박이나 오이, 가지 등에 다진 쇠고기 등을 소로 집어넣고 짧은 시간 끓이거나 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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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음식.전체수 | |
이 댁의 ‘두부선’은 부드러운 두부 속에 영화 <아바타>를 담고 있다. 두부를 한 입 베어 물면 ‘나비족’의 숲에 들어선 것처럼 자연의 향이 물씬 풍긴다. 그 향취를 입 안 가득히 즐길라치면 돌연 그 숲을 종행무진 날아다니는 ‘이크란’을 만난 듯 놀라움이 머리카락 끝까지 뻗친다. 작은 덩이가 되어 콕콕 박혀 있는 쫄깃한 쇠고기와 닭고기, 석이버섯이 비상하는 기운을 뿜어내기 때문이다.
두부선 한 덩이면 화성 탐험대가 며칠 버틸 식량이 된다. 그만큼 영양식이다. “간은 소금으로만 해요, 천일염을 사다가 간수를 빼고 볶아서 써요”라고 홍씨가 말한다. “설탕도 잘 안 써요. 선교장 뒤에 있는 감나무를 이용하지요. 홍시를 소쿠리에 받쳐두면 물이 빠지는데 그것을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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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전공자답게 색색 채소와 황태보푸라기로 ‘구절판’
황태보푸라기 구절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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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한 영양식이 휙 하고 입안으로 사라지자 ‘전체수’(全體需)가 나온다. ‘전체수’는 닭, 꿩 또는 물고기 따위를 통째로 양념하여 구운 적을 말하는데 이 댁은 닭다리로만 한다. 모양도 희한하다. 닭다리가 마치 발레리나처럼 보인다. 닭다리에 칼집을 내고 갖은 양념을 해서 하룻밤 재운 후에 굽고 한지로 위쪽을 싸서 먹는다. “예전에 조상들은 손에 기름이 묻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그래서 색색 한지로 손잡이를 만든 거지요.” 홍씨는 맛도 맛이지만 모양을 내는 데도 수준급이다. 대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이답다.
황태어장이 가까운 곳답게 황태를 이용한 음식도 많다. ‘황태구이’ ‘코다리찜’의 바삭바삭하면서 쫀득한 맛은 견줄 데가 없다. 음식이 어딘가 심심하면서 허전한 느낌이 들지만 다 먹으면 속이 편해서 부듯하다. | |
색색 채소와 북어보푸라기가 함께 너른 접시에 등장하는 ‘황태보푸라기 구절판’은 홍씨의 아이디어다. 치자나 녹차를 이용한 물로 절인 무에 채소들과 보푸라기를 싸먹는 요리다. 아삭아삭 숲의 한 모퉁이를 씹다가 쭉쭉 눈앞에 떨어지는 나뭇가지를 한번 밟고 상큼한 시냇물에 발 담그는 맛이다. 홍씨는 종가댁 자손과 결혼해 그 음식을 배우고 새로운 음식도 만들어 더 풍요롭게 했다. 그가 서울에서 이곳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온 것은 1992년이다. 남편 이강백씨는 효자였다. 이씨는 아버지 이기재씨가 1980년 돌아가시고 어머니 성씨가 혼자 지내면서 건강도 나빠지자 강릉으로 내려왔다. 당시 성씨는 칠순이 넘은 나이였다. | |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8대 종부 성기희 선생은 선교장을 지키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꼬장꼬장하고 영특한 신식여성이었다. 친정아버지는 여자도 학문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한 지식인이었다. 충북 단양이 고향이지만 일찍 서울로 올라가 신식교육을 받았다. “어머니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를 가고 싶으셨는데 여자를 안 뽑아서 서울여의전을 가셨지요. 일본 폐망을 앞 둔 때였는데 간호원이 부족하니깐 어린 학생들까지 전쟁터로 끌고 가려고 했어요. 그 소문이 돌자 집안에서 우리 아버지와 급하게 결혼을 시켰지요.”
성기희 선생은 21살 때인 1941년 4살 위인 선교장 8대 종손 이기재씨와 결혼을 했다.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물게 하얀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도 다녀왔다. 성기희 선생은 33살에 3남2녀 자녀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도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직장생활도 하면서 대학교육을 마쳤고 1974년 다시 강릉 선교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건국대, 국민대, 이화여대 등에서 복식과 예절을 가르쳤다. 남편 이기재씨가 강릉 2대 시장에 취임하자 그 옆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울 생활을 정리했다. 관동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89년 차문화교류 사절단 등으로 중국을 방문하는 등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한 당찬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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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등 전직 대통령들 줄줄이 발길
강릉 선교장이 지금처럼 사람들에게 개방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게 된 데에는 이강백씨의 공이 크다. “1992년에 내려왔을 때 비가 새고 기와는 떨어지고 볼품이 없었지요. 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 생각에 꽃을 심고 다듬었지요.” 그는 선교장을 ‘손님이 오는 집, 사람들과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선교장은 전통문화체험관도 있고, 한옥 체험과 전통의 맛도 볼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를 만들어 다른 고택들도 사람들과 함께 교류하고 소통하는 장소가 되도록 돕는다. 육순이 넘은 나이에도 밤길을 마다않고 차를 몰아 전라도, 경상도로 종횡무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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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 | |
그의 선교장 자랑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연못에 반쯤 걸쳐 있는 ‘활래정’은 연꽃이 활짝 핀 계절이면 마치 큰 숲 위에 떠있는 안락한 보금자리처럼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전직 대통령들 대부분이 다녀가셨지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활래정’을 좋아하셨어요. 다리가 불편하시니깐 많이 걷지는 못하시고 돌에 한참을 앉았다가 가시곤 했지요. 정계 은퇴를 선언하신 후에 많이 다녀가셨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도 있다. “대통령을 마치시고 다녀가셨는데 강원도 마지막 여행이셨어요. 인간적인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진 찍자고 하면 거절 한 마디 안 하시고 팔짱을 끼셨죠. 그때 다과와 차, 떡을 드시고 가셨어요.”
안채에 있는 ‘열화당’은 이곳을 찾은 문인들과 가족들이 정담을 나누는 공간이다. 출판사 ‘열화당’과 같은 이름이다. 대표 이기웅씨도 이 댁 사람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크고 작은 행사가 이곳에서 치러진다. 아름다운 고택이 주는 그윽한 미가 맛과 함께 어우러져 더욱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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