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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
2023년 8월 20일 주일 예배
( 인도,설교: 정성욱 선교사 )
❤ 다같이 기도함으로 8월 20일
주일 예배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저희들에게
안식할 수 있는 주일을 허락해 주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 온라인으로
다함께 모여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희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은혜를 받게 해주시고 저희와 가족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응답해 주실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본문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1.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12.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5.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16.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
20.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1.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23.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24.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29.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30.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1.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32.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33.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34.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35.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아멘!
❤️ 한주간도 평안하셨는지요?
오늘 말씀에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 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저는 조만간에 일본 간사이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우선 제가 일본 선교를 하는 이유는
첫째 일본 주요 도시에는 우리나라와
온세상 사람들이 관광을 하러 오기
때문에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온세상에
마지막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앞서 1차 일본 선교여행에서도
말씀을 드렸듯이 현재 일본의 복음화율은
0.4% 정도이며 이마저도 대부분에
교회들이 노령화가 진행되어 목사가
없는 무목 교회가 많으며 일본의
기독교는 나날이 쇠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번에 1차 일본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거의 4일 만에 교회 예배당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은 앞서 설교에서
언급을 하였듯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우리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일 예배에서는
제가 선교가는 일본의
간사이 지방에 대해서 자료를
참고하여 설명을 드리며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
인구는 세계 12위로
1억 2329만명입니다.
저는 요나의 사명으로
일본 선교를 가는데
요나의 외침으로 니느웨 백성
12만명이 구원을 받았기에
세계 인구수 12위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언어:
일본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일본어
하나입니다.
시차:
일본 전국은 우리나라와 시간대가
동일합니다.
제가 이번에 선교가는
간사이 지역은 오사카시를 중심으로
2000만의 인구가 모여사는 지역입니다.
저는 이번에 아래의 도시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근처에 다른 시들도 선교를 가겠지만
여기에는 거기서도 중심이 되는 7개의
도시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사카시
교토시
고베시
나라시
아카시시
이메지시
와카야마시
제일 먼저 간사이 지방
"오사카부의 인구는 야간 인구가 약 884만명(전국 3위), 주간 인구가 약 924만명(전국 2위)이다. 낮에 통근·통학 등에 의해 주변 부현에서 70만명 가까이 유입(40만명 이상의 순유입)되는 인구가 있다.
2020년 국세조사 기준 오사카부의 외국인 인구는 253,814명으로 부 인구의 2.9%에 해당한다. 재류 외국인들을 국적·지역별로 보면, 한국·북한적이 전체의 38.9%를 차지하지만, 이는 매년 감소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대만 국적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2,697명 감소의 29%로 감소로 돌아섰다. 한편, 베트남 국적은 증가가 계속되고 있으며, 2018년 4,581명 증가의 15.4%를 차지한다. 이하 마찬가지로 필리핀 국적은 3.7%, 네팔 국적은 1.6%, 인도네시아 국적은 1.6%, 미국 국적은 1.2%, 브라질 국적은 1.1%, 태국 국적은 1.0%, 미얀마 국적은 0.6%이다.
2020년 국세조사 기준 오사카부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은 오사카시(275만2,412명)이다.
1. 오사카시
간사이 지방
오사카부에 속함.
고대에는 나니와[難波], 중세 이후에는 오사카[大坂] 또는 고사카[小坂]로 부르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현재의 지명으로 고쳐졌다. 일본문화의 여명기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6세기 말∼7세기 중엽]부터 세토나이카이와 수도 아스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을 이루어,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문호로서 발전하였다. 또한 그 시대를 전후하여 오진왕[應神王] 등 몇몇 국왕이 이곳에 왕궁을 조영한 일도 있다. 그 뒤 요도가와강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항구의 기능을 잃자, 중세에는 시텐노지[四天王寺]·이시야마혼간사[石山本願寺] 등의 문전(門前)도시로서의 명맥을 유지해 온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사카성(城)을 구축함으로써 다시 활기를 되찾아 급속한 발전을 보였다. 도요토미 정권 멸망 이후 오사카는 도쿠카와 막부[德川幕府]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요도가와강의 수운이 열리고 전국 각 영주(領主)의 쌀을 비롯한 물자교역지가 되어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이미 에도 및 교토[京都]와 더불어 3대 도시로 일컬어졌다. 메이지유신 후에는 재빨리 근대공업을 일으키고, 개항(開港)·축항에 의해 상공업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하였다.
전형적인 상공업도시로 상업·공업 이외의 산업은 극히 미미하다. 에도시대 이래의 상업도시로서의 전통을 지니고 있어서, 도쿄[東京]와 더불어 일본을 동·서 2개의 상권(商圈)으로 나누고 있다.
도쿄와 더불어 일본의 2대 교통중심지이다. 신칸센[新幹線]을 비롯하여 철도·지하철·도로가 발달하여 교토[京都]와 나라[奈良]·고베[神戶] 등 인근의 도시 및 관광지를 연결하고 있다. 오사카항(港)은 부두설비가 갖추어진 근대적 항만으로 세토나이카이를 중심으로 국내항로 외에 외국항로의 화물선 출입도 빈번하다. 시역 밖의 북서쪽에는 오사카 국제공항이 있고, 오사카만에는 간사이[關西] 국제공항이 있다. 오사카에는 교토·나라 등의 인근도시에 비해 관광자원은 많지 않으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 만큼 유적지가 많다. 오사카성(城)을 비롯하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의 하나인 시텐노지[四天王寺], 일본의 3대 민속제전의 하나인 천신제(天神祭)로 유명한 덴만궁[天滿宮] 등의 사찰·신사(神社)가 있다. 한편 도톤보리[道頓堀]·센니치마에[千日前]·난바[難波] 등지를 포함하는 속칭 미나미[南]와 우메다[梅田新道]를 중심으로 하는 속칭 기타[北] 등지는 환락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밖에 미술관·박물관 및 스포츠 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오사카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약 30만명)인데, 특히 시(市) 동부의 이쿠노구[生野區]는 전국적으로 보아 한국 교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구이다."
"17세기 에도(현 도쿄)에 도쿠가와 가문이 집권한 에도 막부가 설치되기 전까지는 예부터 천황이 바로 옆에 있는 교토와 오사카가 있는 긴키(간사이) 지방, 상인들이 모여서 막대한 부를 자랑하던 사카이가 계속 일본의 중심지였다.
천년 수도인 교토에 천황이 있었으며, 오사카는 교토의 외항으로 성장하여 오랫동안 상업 중심지 구실을 했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쥐게되고 1583년 거대한 오사카성을 쌓고 오사카를 자신의 거점지역으로 삼은 이후부터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가문이 멸문할때까지 정치적으로도 중심 도시가 된다.
일본에서 도쿄와 함께 재일교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재일교포의 절반 가까이가 이들 두 지역에 대략 반반씩 몰려있다. 이쿠노 구에는 일본 최대급의 코리아타운도 있다.
쓰루하시역 주변이 그 본거지이다. 그래서 일본 혐한 우익들은 오사카를 대판민국이라 까거나 '다이사카'라고 부르기도 한다.다만 2010년대 기준으론 오사카의 재일 교포는 감소하고 도쿄의 재일 교포는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향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다수의 저비용 항공의 취항과 방송에 다수 출연한 덕분에 매년 가장 많은 한국인이 방문한다.
오사카도 관광지로 괜찮은 도시지만,
그보다 주변에 교토, 고베, 나라현 등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는 좋은 관광 도시들이 많기에 오사카를 기점으로 해서 관서 지방 투어를 하는 관광객이 많다.
인천국제공항, 김포국제공항, 대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 제주국제공항 등에서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향하거나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팬스타 여객선으로 갈 수 있다. 배를 이용할 경우 소요 시간은 약 19시간이다. 오후 3시에 승선해서 다음 날 10시에 도착. 길어보이고 실제로 길긴 하지만, 사실 바다 구경하고 배에서 자는 시간을 빼보면 한두 번 정돈 생각만큼 지루하지는 않다."
중심역
"교토나 고베로 가는 전철이 모인 오사카·우메다역의 러시아워 인파는 도쿄의 시나가와역에 준하는 수준이다."
번화가
"오사카 시내의 번화가로는 우메다, 난바, 신사이바시, 텐노지, 쿄바시 등이 있으며, 오사카시 바깥에는 한국의 신도시 역할을 하는 센리 뉴타운, 센보쿠 뉴타운등이 있다."
2. 나라시
간사이 지방
나라현에 속함.
나라시는 나라 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도시인 동시에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역사 도시이고, 나라시 연간 관광객은 약 1,300만명이다. 또한 오사카의 위성 도시이기도 하고, 시 서부 지역에 주택 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그리고 나라시는 중핵시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에 도시의 추정 인구는 373,189명이었고 인구밀도는 km2당 1,348명이었다. 나라 시에는 147,966세대가 살고 있다. 인구가 가장 집중된 곳은 오사카와 연결되는 긴테쓰 선의 연선 지역이다. 등록된 외국인 수는 약 3,000명으로 이 중 한국인과 중국인이 각각 1,200명과 800명으로 가장 많은 집단이었다.
한국어로 ‘국가’를 의미하는 ‘나라’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백제에서 건너온 많은 인맥과 이주자들 (구다라노 코니키시 가문의 창시자 포함)과 함께 그들은 일본문화 발전에 참여했다. 그후 나라는 백제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설계되고 건설되었다. 우리는 ‘나라’라는 이름이 왕국을 의미하는 백제에서 유래한 도시라고 떠올리게 될 수 있다.
2022년 7월 8일에는 이 곳에서 선거 유세 연설을 하던 아베 신조 전 일본 내각총리대신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나라시에는 유명한 사슴공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서를 보면 예수님을
사슴으로 비유합니다.
아가 2장
9.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그리고 이어서 휴거 구절로 유명한
아래의 구절이 나옵니다.
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이번에 저는 일본 선교를 위해서
난생 처음으로 캐리어를 구입하고
캐리어에 비밀번호를 하나님의 숫자인
777로 설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에 아가서 2장 9~10절을
하나씩 더하면 숫자 21 됩니다.
(7+7+7=21)
하나님의 숫자인 777은 숫자 21
되는데 21을 더하면 성부성자성령님을
뜻하는 숫자 3이 나옵니다.
(2+1=3)
나라시의 자매 결연도시는 제가
자주 전도가는 경주시입니다.
경주는 1000년간 왕이 살았던
신라의 수도였지요.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천년왕국이
실현된다고 하며 우리나라 왕이 신라에
수도 경주 왕궁에 살았듯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새예루살렘성 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떠한 성도들이
예수님과 함께 천년왕국에 들어가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나오나요?
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하더라도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의 표로 보는
코로나 백신은 순교를 하더라도
절대 받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처럼 우리는 인내의 말씀을 지켜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휴거를 사모해야
됩니다.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주님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휴거가 코 앞이고 천국의 문이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우리 모두가 이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고
결코나가지 아니하는 새예루살렘성에
모두 입성하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 교토시
간사이 지방
교토현에 속함.
"교토(京都)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수도(미야코)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교토에는 6, 7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이 정착하였다.
794년 간무 천황은 나라(奈良)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헤이안쿄(平安京)라 하였고 일본 역사에서 헤이안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토는 1868년 메이지 유신 때 수도를 도쿄로 이전하기까지 일본 수도로 남아있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를 세우고 교토 소사대(京都所司代)를 두어 교토를 다스렸다. 교토는 에도, 오사카와 함께 3도(三都)라 불렸다. 1869년 메이지 정부가 도쿄로 천도함에 따라 교토는 1,000년 이상 이어오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문화 도시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그러나 새 천황의 정식 즉위식은 계속 교토에서 거행되었다."
교토시도 신라의 경주처럼
천년동안 왕이 살았던 도시였습니다.
"미국은 2차 대전 말에 원자 폭탄의 목표로 일본의 정신적 중심이었던 교토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루즈벨트와 트루먼 정부의 국방 장관 헨리 스팀슨은 유서깊은 고대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여 공격 목표를 교토에서 나가사키로 수정하였고, 교토는 그 피해를 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토는 마치야로 불리는 전통적인 주택 같은 전쟁 이전의 건물들이 여전히 풍부하게 남아있는 일본의 몇 안되는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현대화로 교토역 복합단지와 같은 새로운 건축물들이 세워지면서 전통적인 교토는 계속 파괴되었다.
교토는 도시가 세워진 이래 잠시 동안 일본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나 16세기 말에 오사카와 에도에 추월당했다. 전쟁 이전에 교토는 고베, 나고야와 가장 큰 도시의 4위, 5위 자리를 교환했다. 1947년에 3위로 복귀하였으나 이후 다시 떨어졌다. 1960년대에 5위로 다시 떨어졌고 1990년대에는 7위까지 떨어졌다.
원래의 도시는 중국의 전통적인 풍수에 따라 고대 중국의 수도 장안(현재의 시안시)을 모델로 해 배치되었다. 황궁은 남쪽을 바라보고 결과적으로 우쿄(수도의 오른쪽 부분)는 서쪽에, 사쿄(수도의 왼쪽 부분)는 동쪽에 놓였다.
인구는
2015년 통계로 1,475,000명이다.
관광업 또한 교토 경제의 커다란 기반을 형성한다. 도시의 문화 유산은 일본의 학생들과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계속해서 교토를 방문하게 만든다. 2007년에 도시 정부는 6년 연속 교토의 방문객 수가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발표했고 지역 브랜드 조사에서 일본에서 두 번째로 매력적인 도시로 선정되었다.
교토 시는 학생의 거리로서도 알려져 시내에 38개의 대학, 단기 대학이 있다. 이러한 대학 간의 상호 교류를 깊게 하고 경제계와의 제휴를 강화하기 위한 재단법인 대학 컨소시엄 교토가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2003년 이후 매년 10월 상순에 교토 학생 제전을 개최하고 있다.
교토시는 약 1,600개의 절과 400개의 신사, 궁전, 정원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일본에서 전통 건축물이 가장 잘 보존된 도시다.
교토는 맛있는 일본 음식과 요리가 풍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바다로부터 떨어져있고 많은 절들의 도시라는 교토의 특수한 환경은 교토 지역만의 다양하고 특수한 요리들을 발전하게 했다(교야사이 京野菜). 전통적인 문화가 많이 남아 있으며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교토 사투리는 교토벤이라 불리며, 간사이 사투리의 일종이다.
일본 국보의 약 20%, 중요 문화재의 약 14%가 교토 시내에 있다.
이 중 임진왜란 당시 귀무덤 미미즈카, 장보고 기념비가 있는 엔랴쿠지, 그리고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가 있는 도시샤(同志社) 대학 등 한국인과 관련이 깊은 관광지가 많다."
교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인들에 귀와 코가 있는 무덤인
미미즈카가 있는 곳이며 일제강점기
시절 백신 마루타 실험으로 죽음을 맞이한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으로
윤동주 시인은 교토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며 항일 운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아래는 위키백과에서 가져왔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에 건너가 1942년 교토 도시샤 대학 (同志社大學) 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福岡刑務所)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宋夢奎)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이렇기 때문에 코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오래 살지를 못하고 요절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토시의 자매도시는
제가 5년 가량을 살면서
전도하였던 대구광역시입니다.
대구광역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 백신을 맞았기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또한 온세상 사람들이 미혹을 받아
코로나 백신을 맞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사탄에게 속아 코로나
백신을 맞은 것을 회개하고 지금
부터는 순교를 하더라도 백신을 거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4. 고베시
"효고현의 현청 소재지. 인구는 1,521,741명(2021년 7월 기준),
면적 557.02㎢ 이다.
고베시의 서남쪽에 있는 나가타(長田)구에는 효고현 최대의 한인타운이 조성되어 있다. 인구의 10%가 외국인이며 대부분이 재일한국인이다. 이 지역은 다른 한인타운보다 한국 음식점이 눈에 띄게 많다. 특히 '신나가타(新長田)역' 앞은 일본 전국 '불고기 전문점의 격전지'라고 할 정도다. 평양 출신의 한국인이 낸 평양냉면집도 이곳에 있다. 도쿄와 오사카에 분점이 있는데 나가타점이 원조라고 한다. 10여 년 전까지 오래된 목조가옥이 밀집해 있던 나가타구는 고베 대지진의 피해를 입은 후 길거리를 재정비했다. 다시 조성된 한인타운 내에는 한국인계 금융기관인 '효고 해바라기 신용조합(兵庫ひまわり信用組合)'의 본사도 들어섰다.
효고현[兵庫縣]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를 이루는 국제무역도시로, 일본 제3위의 무역항이다.
1995년 1월 17일 긴키[近畿] 지방을 강타한 마그네튜드 7.2의 대지진으로 고베에서만 사망자 4,484명, 부상자 1만 4679명, 가옥 완전파괴 6만 7421동, 반파 5만 5145동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지진의 진앙지는 고베 앞바다의 아와지섬[淡路島]이었다.
고베에는 서양 음식점이 유난히 많다. 고베항 개항 이래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면서 양식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테이크나 하이라이스, 커틀릿을 주 메뉴로 하는 가게가 제일 많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의 음식은 물론 중국, 한국, 홍콩, 인도, 대만, 러시아, 브라질 요리 전문점도 있다. 또한, 서양음식문화의 영향을 받아 빵과 케이크가 발달했다. 1940년대에 문을 연 일부 베이커리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리고 아래는
어느 블러그에서 가져왔습니다.
"대지진은 고베를 직격했다. 도로, 교통, 가스, 전기 등 기간산업은 무너졌고 6,500명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8만 5천호 이상의 집이 무너지고 20만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지역공동체는 무너졌으며 가족과 친지를 잃은 사람들의 슬픔이 도시를 덮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소에서 생활하였는데 한때 이재민이 22만명이 넘은 적도 있다고 한다.
고베시에서는 이재민들의 생활을 위해 '롯꼬 아일랜드'에 가설주택을 지었다. 주택은 그야말로 조잡한 수준으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빨래를 해서 널어놓으면 습해서 곰팡이가 슬었다. 평수로 얼마나 될까?! 방1~2, 작은 부엌에 좁은 거실을 한 집의 형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1997년에 고베로 들어와서 이 가설주택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거동이 불편한 분이 '벨'을 누르고 찾아가 심부름을 해주고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일을 했었다. _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고베시 인구는 152만명, 후는 142만명/자원봉사자 수는 대지진후 5개월 기준으로 122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말하자면 나도 그 122만명중 한사람이다.
바다로부터 오는 충격으로 대부분의 피해는 바다 가까이에서부터 가장 크고, 산으로 갈수록 적은 양상이었다. 어디서나 그렇듯 산으로 갈수록_고베에는 전설의 롯꼬산이 있다_고급주택가들이 즐비하고 부자들이 살고 바다쪽은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 고베대지진에서도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쪽이 훨씬 심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자기가 살던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모르는 사람 옆에서 생활을 다시 꾸려야 한다는 것, 고령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잃고 동네를 등지고 새로운 곳에서 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이들도 속출했다.
쌀배달을 하면서 만난 제주도 출신의 할아버지를 잊지 못한다. 대지진의 충격으로 말을 잃어버린 한국분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할아버지는 한국말을 하나도 못하셨다. 알아듣지도 못하셨다. 가족이 없고 동네사람들도 모르니 할아버지의 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석달을 할아버지집에 방문했는데 헤어질 때쯤 내게 말씀하셨다. 어눌한 한국말로 자기는 제주도 사람이며 어릴 적에 일본으로 왔다고."
저는 지진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
선지자 요나의 사명으로 일본 선교를
가는 것이며 일본에는 일본인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기에 우리나라 언어를 잃어버린
할아버지 처럼 잃어버린 우리나라
사람들을 구원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일본어를 비롯하여
한국어로 되어있는 복음의 플랜카드와
한국어 전도지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또한 이번에 일본에서 입고 다니는
복음의 옷에도 일본어 다음으로
한국어가 들어 가는 것입니다.
5. 아카시시
긴키 지방
효고현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30만명이다.
6. 히메지시
현내 제2위의 상공업과 인구를 가지는 도시로 중핵시로 지정되어 있다. 관광업으로는 국보이며 세계 유산이기도 한 히메지성이나, 서쪽의 히에이 산으로 불리는 쇼샤 산 엔교지, 일본 3대 일람의 나다노켄카 축제, 반슈 가을 축제가 유명하고, 국내는 물론 해외로부터의 관광객도 많다.
인구는 약 52만명이다.
히메지 시는 1889년 4월 1일에 성립되었다. 히메지는 또한 "신킨 금고의 왕국"으로 불리며 네 개의 신킨 금고의 본사가 이곳에 위치해 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에 일본 제국 정부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도를 도쿄에서 히메지로 옮기는 것을 고려했었다.
자매도시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창원시 (구 마산시)이다."
창원시는 제가 순회전도를 시작하고
최근까지 살았던 김해시 옆에 있는
도시로 제가 자주 전도를 갔던
지역입니다.
7. 와카야마시
긴키지방
와카야마현에 속함.
인구는 35만명
5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이와세센즈카 고분군이 축조되었다.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도요토미 히데나가에 의해 와카야마성의 축성이 시작되었다.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씨 편에 선 아사노 요시나가가 기이국 와카야마에 37만 6천 석을 받고 와카야마 성에 입성하였다. 1619년 7월 19일에 도쿠가와 요리노부가 기이 와카야마에 55만 5,000석을 받고 와카야마 성에 입성해 기슈 도쿠가와 가를 창설하였다.
자매도시는
우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교회가
복음의 자동차와 복음의 배너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대한민국 제주시입니다.
와카야마현은 최근 윤동주 시인과
같은 나이인 27세에 우리나라 남자
여행객이 그곳에서 실종된 곳입니다.
알고보니 일본에서 실종된 한국인들이
제법 되었는데 이처럼 저는 영적으로
해석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으러
일본 선교를 가는 것입니다.
아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광
비교 자료입니다.
"31일 한국관광공사와 일본관광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일본을 찾은 한국인은 312만9천명으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86만2천명)의 3.6배였다.
방일 한국인은 코로나 전인 2019년 상반기(386만3천명)와 비교하면 81.0%까지 회복한 상태다.
이에 반해 방한 일본인(86만2천명)은 2019년 상반기(165만4천명) 대비 52.1%에 그쳤다.
일본 방문객 중 한국인은 전체의 29.2%를 차지해 1위다. 한국 방문객 중 일본인도 1위지만 비중은 19.5%로 더 낮았다.
올해 상반기 일본을 찾은 전체 외국인은 1천71만2천명으로, 한국을 찾은 외국인(443만1천명)의 2.4배였다.
한국인만 일본을 많이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도 한국보다는 일본을 더 많이 찾는 상황이다.
상반기 일본을 찾은 대만인은 177만1천명으로 한국을 찾은 대만인(40만2천명)의 4.4배였다.
홍콩인도 일본 방문객이 91만명으로 한국 방문객(16만9천명)의 5.4배였으며, 미국인의 경우 일본 방문객이 97만2천명으로 한국 방문객(51만4천명)의 1.9배였다.
태국과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도 일본 방문객이 한국 방문객보다 많다."
끝으로 이번 2차 일본 선교가
결정 되었던 것은 순회전도 영상에서
언급을 하였듯이 울산 출신의 조선통신사 "이예"선생 때문이였습니다.
아래는 네이버 지식백과에
나오는 이예선생의 내용입니다.
"2010년 6월 외교통상부는 2010년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조선 세종 시대 이예(李藝, 1373년 ~ 1445년)를 선정하였다.
이예의 가장 두드러진 공적 중의 하나는 조선 건국 초기, 왜구의 침입으로 불안정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를 안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 이전 우리 외교사에 있어 대일외교를 주도한 전문 외교관, 이예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태조~세종 시대 60년간 184회의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이중 조선 초기 18년간에는 총 127회(연평균 7회)의 침입이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연평균 1회 정도에 그치고 있다.
그마저도 계해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444년 이후로는 왜구의 침입이 한 차례도 없었다. 이 시기는 고려말(공민왕 22년)에 출생하여 1445년(세종 27년)에 별세한 이예의 활동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왜구의 침입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은, 대일 강경책과 함께 이루어진 적극적이고 긴밀한 대일 외교의 결과였으며, 대일 외교의 핵심에는 이예가 있었다.
그는 43년간 외교관으로서 40차례가 넘게 일본을 왕래하면서, 때로는 원칙과 강경책을 앞세우고 때로는 회유책을 동원하여 대일 외교 일선에서 맹활약하였다. 이러한 이예의 노력은 1443년(세종 25년)에 조일 통교(通交)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함으로써 결실을 맺게 된다.
계해약조는 대마도의 세견선을 매년 50선으로 한정하고, 조선으로의 도항(渡航)선은 문인(文引, 도항 허가증)을 의무적으로 받도록 명시함으로써 조선초 대일관계 안정화에 기여했다.
또한, 이예는 왜인의 체류 문제, 입국 허용 조건 등을 지속적으로 협상해 나감으로써 대마도 중심의 대일 통교체제 수립을 주도했다. 이로써 울산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와 유구, 대마도 등지에서의 평화와 안정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예는 나라에 대한 충(忠)과 어머니에 대한 효(孝), 그리고 국민에 대한 사랑(愛)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나라와 국민을 위해일한 진정한 외교관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예는 외교관으로 활약한 43년 동안 지략과 협상을 통해 667명의 조선인을 일본으로부터 귀환시켰다.
8세에 왜구에 의해 어머니를 납치당한 이후 평생 동안 어머니를 찾아다닌 그는 고려 말부터 횡행했던 왜구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가족과 멀리 떨어져 낯선 섬나라에서 고생하는 국민들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원래 울산 관아의 중인(中人) 계급 아전 출신이다. 1396년 왜구에 붙잡혀간 자신의 군수를 구하기 위해자진하여 대마도까지 잡혀간 후, 결국 군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고, 조정은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신분을 올려주고 벼슬을 하사하였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군수를 구하겠다는 신념으로 목숨을 걸고 왜구의 배에 올라탄 일이 외교관으로서 첫 발을 내딛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예는 이후로 40여 차례가 넘게교토, 큐슈, 오키나와, 대마도 등에 파견되었는데, 71세의 노년에도 대마도에 붙잡혀간 조선인 귀환 협상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건강을 걱정하는 세종에게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이 섬(대마도)에 출입한 신(臣)이 가는데 누가 감히 사실을 숨기겠습니까”라며 대마도행을 자청할 만큼 깊은 충성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훌륭한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문지식과 유창한 외국어 능력 및 협상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아우르는 것이 바로 '지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교란 곧 국제 관계를 지휘하는 지략이다. 전투를 벌이지 않고도 지략을 통해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예가 1401년에 50명, 이후 1410년까지 매년 일본을 왕래하며 500여 명, 1416년 40여 명 등 15차례에 걸쳐 667명의 조선인을 귀환시킨 사례는 대일외교에 대한 경험과 전문지식에 기반한 그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예는 쉽게 말해 조선의 ‘일본통’이었다. 그는 오늘날로 치면 아프리카나 이라크 같이 험지라 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동아시아 외교의 변방이었던 유구(오끼나와)와 일기도(이끼) 등에도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일본의 자전(自轉) 물레방아와 사탕수수 도입을 건의하고 우리의 대장경 및 불경 보급을 통한 불교문화와 인쇄문화 일본 전파를 위해 노력하는 등 문화외교에도 앞장섰다.
조선초 일본에 대해 이예만큼 잘 아는 인물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기도와 대마도의 정세(情勢)와 병세(兵勢), 일본 선박이나 문물의 장점, 문인제도, 대일 통교 정책까지, 이예가 얼마나 일본에 대해 통달한 사람인지 상세히 알 수 있다.
1426년 세종이 54세의 이예를 일본에 보내며 “(일본을) 모르는 사람은 보낼 수 없어 그대를 보내는 것이니 귀찮다 생각지 말라”며 손수 갓과 신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그는 독보적 대일 외교통이었다."
아래는 울산제일일보에서 발췌했습니다.
"1404년(태종 4)에 시작해 1811년(순조 11)까지 약 400년간 총 24회 파견된 가운데, 충숙공 이예 선생은 그 중 총 4회나 파견돼 외교와 문화교류의 역할을 수행했다.
통신사를 가장 자주 파견한 임금은 세종대왕(6회), 통신사로 가장 많이 파견되었던 인물은 울산 출신인 충숙공 이예 선생(4회)이었다."
이예 선생은 울산 출신이기도 하지만
조선통신사들은 임금의 명을 받아
한양에서 출발하여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갔습니다.
울산 중구 태화동 834-4(충숙공이예선생유허비각), 울산 중구 태화동 834-1(이예공원)이 있으며 현재 30키로나 되는
이예도로가 건설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주의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고 준비해야 됩니다.
누가복음 3장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또한 이예 선생은 자신을 대신하여
왜구에게 끌려가 어머니를 찾으러 조선
통신사로 일본으로 자주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많은 조선인들을 구원해 왔습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마지막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저도
제2의 조선통신사가 되어 마귀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러 일본으로 가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예 선생의 출생 연도는
주님 곧 오신다는 숫자가 나오는
1373년이고 그의 죽음도 우연히도
73세이기에 이처럼 주님 다시 오시기
가까운 마지막때에 이예 선생 처럼
일본 선교 40회는 힘들것 같지만
공식적으로 이예 선생이 조선통신사로
교토에 있는 국왕을 4회 접견 하였고
앞전에 이미 말씀을 드렸듯이 저도 일본 선교를
가능하다면 4회는 하고 싶은 것입니다.
(3회 도쿄도 4회 훗가이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일본 1차 선교와
이번 2차 선교를 통하여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성도님들의 중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저도 무사히 귀국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려 이땅에 오셨듯이
주의 종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일본 선교를 떠납니다.
주의 종에게 성령의 충만함과
지혜와 건강을 주시고 사역을 하는데
필요한 물질도 주옵소서!
우리의 이번 일본 선교를
통하여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을
찾아 구원하게 하옵소서!
역사하여 주실것을 믿고 감사를 드리오며
곧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