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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아카데미 / 쉴만한 물가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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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알아 가는 장 스크랩 루터의 종교 개혁과 95개 반박문-종교개혁일 1517년 10월31일(펌)
선한 청지기 (shin-gilja) 추천 0 조회 120 12.10.05 16: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교개혁기념일을 맞아》

루터의 종교 개혁과 95개 반박문

 

 

 

10월 31일은 개신교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뜻 깊은 날이다. 세인들은 이 날을 세상의 재미와 향락을 추구하는 할로윈 축제일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운동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타락과 부패로 얼룩진 중세 교회의 상징과도 같았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비텐베르그 성문 앞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게재함으로써 역사상 가장 찬란한 종교개혁의 여명을 밝혔다. 성경적 진리에서 멀어진 교회를 ‘오직 말씀’과 ‘오직 믿음’으로 돌이킨 이 위대한 복음의 세계사적 전환을 이룬 이 날을 기념하여, 개신교회는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정하고,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지키고 있다. 올해로 우리는 491년째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는 셈이다.

 

 

비록 오늘날 개신교회가 다양한 교파와 교단의 이름으로 존재하지만 세상의 모든 개신교회는 본질적으로 종교개혁의 우산 아래 머물고 있다. 종교개혁은 개신교회의 역사적 근원이며, 신앙적 근거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교파와 교단을 떠나 참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말씀으로 개혁되는 교회의 본질과 수단과 목적을 종교개혁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하였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개신교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면서도 역사적 종교개혁과는 무관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심지어 개신교라는 깃발을 내걸고도 루터를 위시하여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신앙 정신에 역행하는 일들을 서슴없이 행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사실인가? 애석하게도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의 발화점이 되었던 루터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오늘날 대중적인 개신교회와 종교개혁 사이에 얼마나 깊고도 넓은 심연이 존재하는지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차적으로 루터의 비난의 대상은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였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도 이 부분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은 조상들의 부끄러운 역사적 실례를 교훈삼아 적어도 외형적인 면에서는 부단한 자기 개혁을 시도하여 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시대의 개신교는 너무나 많은 점에서 오백년 전의 로마 가톨릭 교회를 닮아있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부패한 중세 교회를 향한 항거일 뿐만 아니라 중세 교회의 어두운 전철을 밟고 있는 현대 교회의 참담한 실상에 대한 고발이기도 하다.

 

 

먼저 95개 반박문은 진정한 회개에 대한 촉구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회개란 종교적인 의식에 의한 회개나 심리적인 반성이 아니라 심령으로부터 죄를 미워하고 죄인 됨을 인정하는 참회를 가리킨다. 진정한 회개는 신앙의 출발점이다. 참된 회개는 인간의 본성과 속성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며 하나님 앞에 무익한 자임을 신앙 고백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유행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라. 죄에 대해 민감하지도 않을뿐더러 죄인 됨을 강조하는 교회나 설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결부된 죄악의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고민하는 교회와 성도를 찾아보기 힘들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말하지만 그 분의 공의로운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는 애써 숨기려 한다. 순수 복음을 대체하고 있는 각종 종교적 상품(프로그램)들은 죄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감각 없는 종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다.

 

 

참된 회개 없이도 간편하고 쉽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고안된 상품이 면죄부이다. 교회는 구원을 매개로 이 상품을 판매하고, 사람들은 돈을 주고 이것을 산다. 면죄부를 손에 넣은 사람은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보장받고, 면죄부를 파는 사람은 그 댓가로 물질과 명예를 챙기니 서로를 윈윈(win-win)하게 하는 탁월한 마케팅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루터는 구원을 조건으로 면죄부를 팔고 사는 사람 모두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면죄부는 참된 회개의 필요성을 감소시키며, 거짓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면죄부 판매가 횡행하고 있다. 쉽게 믿고 편하게 천국 가자는 신앙은 그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과 전적인 헌신,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고난과 순종의 열매 없이도 구원을 받을 만한 다양하고 선택적인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오늘날 교회의 복음이야말로 현대판 면죄부이다. 그러나 예수 없는 십자가, 십자가 없는 예수를 전하는 면죄부 복음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증거한 복음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조롱하는 전형적인 거짓 복음이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종교 지도자의 청빈한 삶과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 대해 일갈한다. 영혼 구원보다 물질에 마음에 두는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며, 그런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면죄부 판매 수익으로 성직자들의 배를 불리고 더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였다. 그때 루터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거둬들인 물질을 교인들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교회는 구제와 자선에 더욱 힘쓰라고 권하였다. 또한 진정한 성도라면 외형적 건물을 집는 일보다 무엇보다 무너진 마음의 성전을 수축하는데 집중하라고 지적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95개 반박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교회 개혁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깨우쳐 준다. 종교개혁 기념 주간을 맞이하여 진리로서 ‘개혁된 교회(reformed)는 날마다 개혁되어져 간다(reforming)’는 종교개혁의 대원칙을 다시 한번 마음에 아로새기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고 온전한 교회와 신앙을 세워나가도록 각고면려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다(*).

 

 

요즘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할로윈 데이로 기억되는 날(10월 31일)이 교회 역사적으로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닌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올해는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된 지 492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 신분의 루터는 비텐베르그(Wittenberg) 성 정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조항으로 구성된 반박문을 붙이므로써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치켜들었습니다.

 

그러나 루터 자신마저도 이 한 장의 격문이 인류 역사에 얼마나 위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번민과 사색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루터는 영민하였지만 언제나 인생의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에 가운데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원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어느 해 극적인 자연 현상을 경험한 후에 성 안나(루터 아버지의 수호신)의 이름으로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을 포기하는 대신 처절하게 구원에 매어 달렸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도원의 엄격한 계율과 고해성사와 지속적인 선행과 종교적 금욕 생활에 집중하였습니다. 어느 책에서는 이로 인해 거의 순교 직전에 이르렀다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당시 대부분의 성직자들처럼 이러한 고행들이 자신의 모든 죄를 씻고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전통적인 방법은 구원을 향한 열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애쓰면 애쓸수록 깊은 절망의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하였습니다.

 

 

행위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판단한 루터는 비텐베르그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부름을 받은 이후부터 성경 자체를 보다 철저하게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밤낮없이 말씀을 붙잡고 씨름하며 묵상하였습니다. 특히 바울이 전한 복음을 깊게 파고들었습니다. 성경 강해의 권수가 더해 갈 때마다 진리의 빛이 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참된 복음의 핵심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침내‘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관한 상관관계를 성경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이신칭의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영적 암매함이 최고조에 달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 사도와 정통 교부들에 의해 계승된 바른 성경 해석의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조명탄이었습니다.

 

 

복음의 참 진리에 눈을 뜨게 되자,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지는 교회 개혁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예일대학교의 베인튼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하였듯이 면죄부는 16세기 교회를 거대한 타락의 늪으로 이끄는 빙고 게임이었습니다. 면죄부를 사는 순간에 과거와 미래의 가능한 죄까지 사함 받을 수 있다는 주문에 순진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이 위험천만한 교회 놀음에 판돈을 내걸었습니다.

 

34세의 젊은 신학자 루터는 이 문제를 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허심탄회하게 고민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신학자나 목회자나 심지어 교회에서 일하는 사무원마저도 로마 교회의 직속 관할아래 있었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교회 개혁을 향한 그의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1517년 만성절 바로 전날 밤에 펜을 들었습니다. 진리에 굳은 확신으로 면죄부와 연옥 사상, 그리고 로마 교회의 교황주의와 성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조항들을 조목조목 써내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자신이 묵었던 성의 정문 앞에 이 내용을 게시하였습니다. 이 반박문은 출판 기술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당시였음에도 불과 수 주 만에 유럽 전역에 퍼질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당황한 로마 교회에 의해 루터는 사제로서의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하였으며, 나중에는 영구 제명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루터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걸쳐서 팽배해져 있는 교회 권력의 남용 현상과 그릇된 가르침의 누룩을 더욱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같은 해(1520)에『독일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독교인의 자유』라는 그 유명한 3대 명저를 세상에 내어 놓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저술들을 통하여 참된 교회 개혁은 신앙의 영역 안에 남아 있는 비성경적이고 세속적이고 미신적인 행태의 신앙을 제거해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나아가 교회 개혁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서 순수한 기독교적 신앙과 지성이 올바른 영향과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은 칼빈과 더불어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막대한 영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후로 개혁 정신이 보다 체계화되면서 많은 논쟁을 통해서 루터의 종교개혁의 한계와 루터주의자들의 신학적 모순에 대해 생산적이고 비판적인 점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루터를 ‘위대한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부르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의 겸손함과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기독교를 다시 순수하고 바른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복음적 전환을 이끌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반천년 전, 독일의 어느 성 문앞에서 울렸던 진리의 망치소리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즈넉한 이 계절에 루터의 숨결이 배여 있는 서적들과 함께 우리 가슴 속에 식어가는 종교개혁의 불씨를 함과 적들에 대한 담대함과 참된 교회와 그 안에 거하는 성도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성경적 다시 한 번 되살려 보는 것이 어떨까요?(*)

 

 

두어달 전, 화란에서 유학중인 친구 목사로부터 안부 전화를 받았다. 타향살이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교회 개혁과 관련된 주제로 옮아갔다. 이것저것 대화를 나눈던 중에 그가 경험하고 있는 화란 개혁 교회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물었다. 친구는 자신의 사견(私見)임을 밝히면서 매우 조심스럽게 직접 경험한 한가지 사례를 들려주었다. 작년은 세계 칼빈주의 3대 신학자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였단다. 이 일을 기념하여 오래전부터 화란 개혁 교회와 성도들이 성대한 종교개혁 세미나를 기획하였다는 소식을 접한터에 설레는 마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고 하였다.

 

 

몇 일에 걸쳐 진행된 세미나는 매우 알차고 유익한 프로그램들로 가득하였다. 하지만 행사 기간 내내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담과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유인즉, 바빙크라는 개혁 신학의 거목과도 같은 이의 이름을 내세운 특별 행사였음에도 참석한 사람들의 수가 극히 적은데다, 젊은이들의 모습은 눈에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친구를 정말 당황스럽게 하였던 것은 애써 참석해 준(?) 사람들중에는 바빙크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하였다. 개혁 신학의 본고장이라는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아니면 화란 사람들의 바빙크에 대한 무관심이 못내 섭섭했던 탓일까? 화란 교회의 풍경을 전하는 친구의 목소리에는 짙은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감상은 친구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바빙크의 <개혁주의 교의학>에서 읽었던 몇 구절들이 마치 비수처럼 나의 심장을 파고 들었다. “대략 1750년대에 개혁주의 신학의 몰락은 어디서나 확인되었다. (중략) 엄밀한 칼빈주의는 땅에서 날마다 잃어가고 있다. (중략) 미국에서도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은 진지한 위기에 들어선 것이다. (중략) 칼빈주의에 대한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바빙크는 1세기 이후에 펼쳐질 오늘날의 칼빈주의의 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바빙크 개인과 그의 신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불행하게도 한 세기전, 그가 내어놓은 칼빈주의 운명에 관한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적중되고 있는듯 하다.

 

 

올해로 제488주년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였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행사들이 기획되고 진행될 것이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데 교파와 교단의 구별은 없어 보인다. 많은 교회들이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기념 예배와 특별 집회를 갖는가 하면 신학교와 연구 단체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학술 토론회와 심포지엄을 개최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종교개혁 기념 체육대회라도 열릴 판이다. 이러한 행사들을 통해 종교개혁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종교개혁 주간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좀더 정직하게 말한다면, 장로교회 목사로 부름을 받은 이후 한번도 만족할만한 종교개혁 주간을 보낸 적이 없다. 종교개혁 주간이 되면 더욱 명료해지는 “과연 우리는 종교개혁의 진정한 상속자들인가? 과연 우리는 종교개혁의 명실상부한 후예인가?”하는 근원적 물음앞에 여전히 궁색해지는 내 자신과 갈수록 착찹해지는 작금의 교회 현실 때문이다. 우리는 다시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고 있다. 만약 우리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나 칼빈주의의 후예라고 생각한다면 또다시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영적 책임감과 두려움을 갖고 이때를 톺아보자. 다시 묻는다. 이토록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종교개혁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개혁으로 돌아가야한다고 할때 누구에게로, 어떻게 돌아갈 것인가?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루터의 종교개혁의 의미와 한계

 

 

종교개혁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단연코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이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참람한 종교적 거짓과 부패에 맞서 「95개 반박문」을 비텐베르그 성문앞에 게재하였다. 그 날밤, 이 회심의 도전장을 내걸고자 두드렸던 망치 소리는 천여년동안 어둠속에 방치되었던 진리의 빗장을 여는 울림이 되었다. 「95개 반박문」은 요원의 들불처럼 삽시간에 유럽 전지역에 퍼져나갔으며 종교개혁을 염원하는 이들의 마음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낙후한 인쇄 기술을 감안하면, 기적과도 같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95개 반박문」이 종교개혁의 서막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면, 그의 대담하고 소신있는 종교적 열정과 행동은 종교개혁이라는 마차를 이끄는 용감한 근위병의 모습 자체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세인들조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류의 업적중 하나라고 평가할만큼 후세에 남긴 그의 업적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을 논함에 있어서 루터와 분리할 수 없음에도 우리의 시선을 그에게만 고정시킬 수 없는 몇 가지 중대한 사실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빛나는 영광의 순간도 많았지만 어두운 그림자 또한 길게 드리워져 있다.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상 가장 엄청난 영적 다이너마이트의 발화점이 되었지만 엉성하고 거추장스러운 잔해들이 너무 많이 너부러져 있었다. 루터는 카톨리 교회를 향해 비판의 날을 세웠지만 그들의 잘못된 진리 체계를 허물만큼 결정적이지 못하였으며, 이신칭의와 만인제사장주의같은 카톨릭 교회와 차별되는 개신교 신학의 금자탑을 세웠지만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한 교회와 세상을 향한 종교개혁의 남다른 애착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후대로 접어들면서 세상 세력들의 타협과 절충속에서 그의 개혁의지는 현저하게 약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미완(未完)의 개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보다 정밀하고 완성도있는 이해가 부족하였던 점이다. 루터 개인의 의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보다 덜 엄밀했던 그의 신학적 이해는 언약론과 성찬론과 국가론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그의 과도하거나 부족했던 성경 해석 방식은 그의 사상적 계보를 잇는 루터주의자들에게 이르러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은 허용 가능하다'는 식의 보편과 관용의 해석적 틀로서 성경 전체를 이해하려는 신학적 변질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루터주의자들은 모든 세상 사람을 위한 루터를 요청하기 위해 종교개혁자 루터를 희생시켰다.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칼빈주의에 관한 진실 혹은 거짓

 

 

이러한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모든 이들에게서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종교개혁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루터와 칼빈의 꿈과 목적이 공유될 수 있는 그 무엇이었을지라도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는 많은 차이점을 가졌으며, 다른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또한 부정할 수 없다. 루터주의와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다. 개신교(Protestant)란 로마 카톨릭과의 구별을 둘때, 사용하는 낱말이듯이 칼빈주의는 루터주의에 대한 변별적(辨別的) 용어이다. 사실 후자는 반종교개혁적 세력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적들의 입장에서 볼때에, 이미 두 그룹 사이에는 내용상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대목이다. 세상의 모든 개신교도들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을 말하지만, 우리 스스로를 루터주의자하지 않고 칼빈주의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교개혁의 본질적인 성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할때에, 루터와 루터주의에게서 머물 수 없는 이유또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은 내용을 떠나서 루터교회나 타 교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리 반길만한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처한 보다 심각한 딜레마는 타 교단에 속한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를 장로교회 교인이요, 개혁교회 교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해 냉소적이고 심지어 부정적인 명목상의 칼빈주의자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보수’ 혹은 ‘보수주의’라는 말이 새로운 시대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수구꼴통’이라는 낱말로 묘사되듯이 ‘칼빈주의자’ 혹은 ‘칼빈주의’는 시대와 타협할 줄 모르는 오만하고 독선적인 신앙과 신학쯤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즘 되다보니, 칼빈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단과 교회 심지어 신학교에서까지도 종교개혁은 언급하더라도 칼빈과 칼빈주의는 너무 강조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을 간절히 염원한다고 하면서도 칼빈주의식의 종교개혁에는 고개를 절래 흔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가장 참된 종교개혁를 향한 꿈과 의지가 있다면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서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있음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칼빈주의자로서 극복해야 할 가장 시급한 내적 장애는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배움과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에서 가장 홀대받는 것이 칼빈이라는 소리가 있을만큼 칼빈과 칼빈주의는 별로 인기가 없다. 칼빈주의를 신학 이념으로 표방하는 교단과 신학교는 많지만 그것을 목회 현장에까지 제대로 적용하고 있는 교회를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쉽지 않다. 칼빈주의 신학은 장로교회의 이념적 근간이요, 사상적 뿌리이다. 삼척동자라도 알만한 상식인데도 장로교 신학교에서 칼빈주의를 강조하지 않고 장로교회 간판을 걸어놓고도 칼빈주의를 말하지 않는 오늘 우리의 교회 현실은 마치 한편의 유쾌하지 않은 블랙코미디을 보는 느낌이다.

 

 

왜 이런 모순이 상식이 되어가는지를 물으면 이렇게들 답한다. “칼빈주의는 칼빈 개인을 위한 신학이야”, “칼빈주의는 세상에 대해 너무 냉소적이고 협소하잖아. 21세기 교회의 트랜드와는 어울리지 않아”, “칼빈주의는 성경주의라기 보다는 교리주의야”, “칼빈주의는 너무 예정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 “칼빈주의는 사변적이지만 복음적이지 않아”... 하지만 오늘날 칼빈주의에 대해 만연해 가는 이러한 부정적인 인식들은 대개의 경우 칼빈주의에 대해 정확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무지에서 비롯되었거나 칼빈주의를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들이 꾸며낸 교묘한 루머에 불과하다. 칼빈이나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부담스럽다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 용어들에 관한 오해와 편견이 있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포기해버리는 일은 몸이 더러운 아이를 방에 들이려고 씻긴 후 더러워진 물과 함께 아이를 내다 버리는 꼴이다. 바르게 앎이 없는 사람일수록 주변적인 영향에 동요되듯이, 칼빈주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사람일수록 칼빈주의를 쉽게 체념하고 포기한다.

 

 

한가지 되짚고 넘어가자. 칼빈과 칼빈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칼빈이라는 한 인물의 인격이나 지식이나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적 진리가 감추어졌던 암매한 역사속에서 칼빈이라는 한 인물과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진리의 풍성함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를 주목하자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칼빈 개인의 신학을 신성시하거나 칼빈주의는 오류가 없는 신학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정밀한 성경 해석의 틀과 내용이 칼빈주의라는 신학안에 내재되어 있기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보다 성경적이며, 보다 순수하며, 보다 엄밀한 교회와 성도를 세워나가기 위함이다. 따라서 만약 누구든지 칼빈 개인을 우상화하거나 칼빈주의의 교리를 성경보다 우위에 두거나 칼빈주의에 속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칼빈과 칼빈주의라는 낱말의 사용 여부와 상관없이 사악한 이단임에 틀림없다.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선 종교개혁

 

 

그렇다면 우리가 루터와 루터주의를 넘어서 칼빈과 칼빈주의로 나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종교개혁의 의미를 논할때에 이 칼빈과 칼빈주의를 회피해서는 안되는가? 오늘날 복음주의를 대변하는 루터주의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칼빈주의가 어떤 차이점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한번 다시한번 바빙크의 진술에 귀를 기울여보자.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인은 신론적으로 생각하고, 반면 루터주의 그리스도인은 인간론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칼빈주의자는 역사 안에 서서 머물지 아니하고 이념 즉 영원한 하나님의 결정에까지 끌어 올라간다는 것이요, 루터주의자는 그 입장들을 구원사의 중심에서 취하고 더 깊이 하나님의 성장에까지 꿰뚫고 들어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칼빈주의자들의 경우 선택이 교회의 핵심이고, 루터주의자들의 경우 칭의가 교회의 항존적이고 항상 출발하는 조항이다. 칼빈주의의 경우 첫째되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에 이르시느냐에 있고, 그와 대조적으로 후자의 경우 어떻게 인간이 축복에 이르느냐에 있다. 전자의 경우 이교도주의, 우상에 반대하는 싸움이고 후자의 경우 유대주의, 행위거룩에 반대하는 싸움이다. 칼빈주의자는 그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되돌리고 물(物)의 원인을 추적하며 앞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되게 하기 전에는 쉬지 않는 반면에, 루터주의자는 현상에 만족하고 그가 신앙을 통하여 부여받은 축복에 안락하는 자들이다.”(「개혁교의학」중에서)

 

바빙크의 이같은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루터주의와 칼빈주의에 대한 한 시대속에 머문 평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이 진술을 하기 앞서 매우 정교한 필치로 초대교회로부터 20세기초 까지 교회가 처한 역사적 정황과 교리를 구체적으로 더듬은 이후의 결론이다. 즉 칼빈주의의 신학은 사도들의 성경이해에 충실하였던 초대 교부들의 신학이요, 교부들의 해석을 총망라했던 어거스틴의 신학이요, 종교적 거짓과 부패에 맞서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성경적 사상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낸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에 대한 총체적인 신앙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가장 엄밀한 이해와 적용이 역사적 칼빈주의의 신학과 신앙속에 담보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와 루터주의를 비롯하여 다른 교단의 신학과 신앙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과 경건성이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그 곳에 진리의 닻을 내릴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칼빈이나 칼빈주의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금물이지만 밀도있는 확신의 결핍또한 문제이다. 칼빈과 칼빈주의에 대한 무수한 오해와 편견은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진리를 향해 걸었던 정도(正道)로 나아가는데 장애나 핑계가 될 수 없다.

 

 

만약 바빙크와 나의 견해에 동조할 수 없다면 도서관에 가보라. 인터넷 검색창을 두드려보라. 종교개혁과 관련하여 칼빈과 칼빈주의에 관한 수많은 자료와 책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 줄것이다. 칼빈으로부터 개혁교회 3대 신앙 고백(하이델베르그, 벨직, 도르트)의 작성자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참여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 그룹, 수많은 청교도들, 바빙크와 박윤선 그리고 일일이 이름을 열거할 수 없지만 오직 하나님께 영광만을 위해 전 삶을 드린 진리의 파수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칼빈주의라는 보석을 캐어내었고, 칼빈주의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켜내었다.

 

 

그리고 칼빈주의에 대한 그들의 가열찬 확신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칼빈주의는 종교개혁의 핵심이요, 진리체계의 최고봉으로서 신학으로서 오대양 육대주로 퍼져나갔으며,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어오고 있다. 하지만 칼빈주의 영향은 교회와 성도에게만 국한 될만큼 협소하고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세상의 전 영역(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등)에 걸쳐 가장 고상하면서도 근본적인 생의 원리를 제공하였으며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관조와 통찰을 제시해 주었다.

 

 

칼빈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과 칼빈주의의 몰락의 원인

 

 

그러나 칼빈주의의 탁월한 진실성과 막강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칼빈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예를 들어, 삼위일체, 예정론, 언약의 통일성, 도덕법과 주일 성수등)들은 언제나 다른 신학으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었으며, 세상과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 세상의 권세를 누리려는 교회와 신앙으로부터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왔다. 칼빈주의 신앙이 뿌리를 내리는 곳마다 성경적이면서도 진실한 신앙고백들이 작성되었고 경건의 삶으로 회복되는 놀라운 경험이 나타났음에도 칼빈주의는 박해와 억압의 그늘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진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고난과 위기의 기로에 서 있어야만 했다. 칼빈주의는 성경의 주된 가르침을 벗어난 적이 없지만 세상의 주류 신학으로부터 모함과 질시를 받아야만 했다.

 

 

칼빈주의의 역사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사람마다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 중 한 가지는 칼빈주의는 어느 때에도 보편적이거나 대중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칼빈주의의 내용 자체가 세상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세상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칼빈주의는 인간의 전적부패,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선택, 제한적인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사상을 주장한다. 한마디로 칼빈주의는 인간의 경험보다 성경의 확실성을, 타협적인 인간 본성보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현상적인 사색보다 계시 의존 사색을, 인간의 공로와 행위보다 오직 믿음과 은혜를 고집한다. 이러한 개혁주의의 강조점은 신학과 신앙과 교회가 좀더 인간적이고 좀더 세상적이기를 바라는 모든 이들의 양심과 행동을 불편하게 만든다.

 

 

둘째, 칼빈주의가 결코 대중적일 수 없는 또 한가지 이유는 칼빈주의에 대한 도전 세력들의 영향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바빙크의 지적대로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부정적인 반향들은 17세기부터 칼빈주의가 몰락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기에 이르러서는 몰락이 정착되는 현상이 구체적으로 목격되었다. 칼빈주의를 훼파하기 위한 도전은 수세기동안 신앙의 영역에 제한됨없이 거의 전방위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칼빈주의를 훼파한 대표적인 사상과 원리들이다.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신적 권위와 확신으로부터 탈피를 시도한 「데카르트주의」, 성경의 객관성보다 내적 주관과 경험을 신학의 원리로 삼은 「재세례파」,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의 작품으로 만든 「아르미니우스주의」, 언약의 실체를 언약의 경륜의 흐름으로 전락시킨 「코케우스주의」, 경건한 삶에 대한 추구와 의지를 진리의 핵심으로 대체한 「경건주의」, 신이 지배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신을 영원의 시간속 감옥에 가둔 「이신론」, 인간을 신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규정한 「민주주의」, 신학과 교리를 포기하고 교회의 성공과 확장에 몰입한 「부흥주의」,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반칼빈주의적이거나 혹은 비칼빈주의적인 세력을 한데 규합하고 선동함으로써 칼빈주의의 몰락을 주도적으로 이끈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것이다.

 

 

칼빈주의에 관한 비관과 낙관

 

 

만일 우리가 칼빈주의라는 신학적 배경안에서 교회를 이루어가고 있으며, 스스로를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상들이 칼빈주의의 몰락에 얼마나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얼마나 치명적인 오류를 생산해 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교회와 신앙은 역사적 상황과 분리될 수 없다. 칼빈주의의 발흥과 성장과 몰락의 과정은 역사속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렇기에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역사를 바르게 조망하는 역사적 안목이란 가히 필수적이다. 하물며 칼빈주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끊임없는 역사적 반성과 통찰을 통해 칼빈주의의 정체성을 바르게 확보해 가는 일은 설교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일만큼 중요한 목회자의 책임인 동시에 의무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칼빈주의의 몰락의 그림자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길게 드리워져 있으며, 우리는 부지부식간에 매우 가파른 내리막길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종교개혁을 외치며 칼빈주의를 말하는 많은 이들이 이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와 교단에서조차 칼빈주의 신학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가속되어가고 있다. 역사의 굴곡속에서도 그토록 수많은 칼빈주의자들이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었던 신학 주제들이 교단과 강단으로부터 밀려나고 있다. 칼빈주의 신학을 지탱하고 참된 교회의 연합을 도모해주던 역사적 신앙고백은 한낱 과거의 빛바랜 추억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더 이상 신학과 교리를 강조하지 않는 사이, 교단과 교회 간의 실제적인 신학적 구별점은 사라지고 상호간의 관용과 화합이 교회를 평가하는 최고의 가치 기준으로 자리잡혀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의 구호만 가득한 종교개혁이란 교단의 영향력 강화와 교회의 외적 성장과 확장 그리고 목회자 개인의 목회 비젼과 성도 개인의 종교적 성취감을 고무시키기 위한 수단이상의 의미가 없다. 우리가 처해 있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분명한 자각과 통렬한 반성과 뼈를 깍는 갱신의 노력없이는 칼빈주의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전히 종교개혁이 우리에게 화두(話頭)로 주어진 이상, 언제라도 참된 종교개혁에로의 적극적 가능성은 열려있다. 모든 시대의 종교개혁이 우리 주님의 주권가운데 있다는 사실은 이 땅에서 칼빈주의자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확실한 희망이 된다. 참된 종교개혁의 역사를 돌아보는 사람마다 우리안에 있는 잘못된 종교개혁의 환상을 포기하게 될것이며, 우리안에 남겨진 종교개혁의 거룩한 과업을 깨닫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한, 종교개혁의 전통은 계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교회를 향하신 변함없는 바람이요, 요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개혁은 계속되고 있다. 참된 말씀안에서 죄악을 통회하며 자신을 부정하며 성실과 정직으로 말씀에 깃댄 삶속에서, 거룩한 말씀의 선포가 있으며 성례와 권징의 정당하고 바른 시행을 통해 참되게 세워지는 교회속에서, 역사적 칼빈주의의 신학적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말씀앞에 부끄럼없는 목회자를 배출하는 선지 동산에서 종교개혁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만나고 있다. 종교개혁의 생명이 살아숨쉬는 한, 칼빈주의는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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