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2018.3.22.
창은
문이 아니다. 문으로는
사람이 들어오고 나간다.
하지만,
창은 문처럼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다.
문으로는 열지 않는
한 밖을 내다볼 수 없다.
문은 그저 열거나
닫힌다. 문과
창은 모두 열어 통풍할 수 있지만,
이는 대개 창문의
소임이다. 창으로는
또한 빛이 들어온다.
이는 창문만이 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창문의 다른 중요한
역할은 밖을 보는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저 창을 바라보기만 하면 알 수 있다.
창이라면 한옥에도
있지만, 전통
한옥의 창은 창호지를 발라 밖을 내다보려면 문을
열어야 했다. 판유리의
대량 생산은 건물 외벽 전체를 유리로 만드는 등 현대
건축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나는 투명한 유리가
달린 창의 이야기를 하련다.
내가
어려서 살던 시골의 커다란 한옥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이 없었다.
창호지를 바른 문으로는
바람 소리, 빗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
밝은 해가 떴는지
저녁의 어스름이 덮쳐 오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대부분 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을 통해 바깥세상을 온전히 볼 수는
없었다. 우리
시골집 안채와 사랑채의 마루에는 수십 개도 넘는
유리문이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전부 간유리였기
때문에 창호지를 바른 문보다 밖을 보는 데는 나을 게
없었다.
내가
처음 본 말간 창은 초등학교 교실에 있는 창이었다.
나는 그 창으로 가끔
하늘의 구름과 운동장의 아이들을 보았다.
그러나,
어린 내게 창밖의
세상을 주의 깊게 쳐다보기에는 흥미 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
창으로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한 것은 버스를 타고 시골집과
서울을 오가면서부터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과 사람들을 보며 여러 인상을 받고 글을 쓰기도
했다. 또,
고향을 오가면서
설렘과 외로움을 느끼기도 하고.
그렇게 창은 내게
내면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을 관찰하는 길을 열어 주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때 나는 일본
강점기에 지어진 성신여대 앞의 작은 한옥에 살았다.
나의 방에는 창호지
문 말고도 대각선으로 60cm가량
크기의 두 개의 미닫이창이 내 책상 옆에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친구들과
함께 몰려다니기보다는 혼자 공상의 세계에 빠졌다.
그래서,
나는 그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쳐다보고 구름의 흐름,
새의 날갯짓,
동이 트고 노을이지는
풍경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넓게
세상을 볼 수 없이 겨우 지붕 너머의 풍경과 서너 평
남짓의 마당이 담기는 창이었지만 그래도 창은 방에
있는 내게 세상을 보여주는 렌즈였다.
한편,
창은 희망의 문이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은 오직 유리창을
통해서이다. 그
창문을 통해 활기차게 움직이는 바깥을 본다.
계절이 불러오는
변화를 알아챈다.
그러면서,
좁고 갇힌 방을 나와
어서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꿈을 꾼다.
그러기에,
창은 희망을 주는
문이다. 아마도
감옥이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런 희망을 꿈꿀 창이
없기 때문이리라.
또,
창은 관찰자의
도구이다. 사방이
유리창으로 만들어진 많은 현대 건물에서 우리는 세상을
언제고 내다볼 수 있다.
관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주시 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거리를 지난다.
이렇게 보이는 사람과
소통 없이 그의 움직임을 눈여겨볼 수 있다는 것은
관찰자에게 세상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같은
우월감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창은 방관자를 위해
존재한다. 유리창은
통해 세상을 보는 현대의 우리는 좀처럼 밖에서 벌어지는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열 수도 없는 고층
건물의 벽을 이루는 유리는 볼 수는 있으나 구원의
손길이 될 수 없는 단절된 세계이다.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는 것은 그러기에 방관자의 행위이다.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이도 아니고 벌어지고 있는 일이 나와
관련이 있지도 않은데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유리창은
통해 밖은 보는 이는 관광객이나 야생 동물 관찰자처럼
간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관찰(방관)자는
자신이 살피는 피 관찰자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면
움찔한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누군가를 유심히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치면 당황해 성급히 눈길을 돌린다.
누구도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리창을 그냥 그래도
두지 않고 커튼이나 블라인드 등의 창문 가리개를
설치하여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시간만 세상을 내다보고자
한다. 그러니,
햇빛을 가리는 것만이
유리창을 가리개로 가리는 이유는 분명 아니다.
나도
이렇게 남이 나를 보는 것은 개의하지만 밖의 환한
빛은 받아들이면서도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
나 같은 이를 위해
사생활 보호 필름(privacy
film)이 있다.
우리 집은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인 패밀리룸과 남쪽 면 전체가 유리로
된 다이닝룸 쪽은 외부 사람이 전혀 들여다볼 수가
없다. 그래서
햇빛이 너무 강렬할 때만 블라인드를 내린다.
그리고,
거기 앉아서 뒤뜰의
꽃과 나무, 잔디와
벌과 새들을 보는 걸 좋아한다.
시간의 변화와 별과
달을 한가롭게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침실에는 사생활 보호 필름을 모두 붙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집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타인들이 눈치채지 못한
채 의도하지 않고 쳐다볼 수 있다.
물론 지나가는 이들과
소통 하거나 그들의 행위에 간여하지 않고 그저
관조하면서. 그러니,
창은 내게 숨어 있는
관찰자의 자유를 주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창가에 앉아
그런 자유와 은밀함을 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