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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0.12.31.PM2시)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
광명에서 게송을 설함
아직도 코로나가 한참 성하고 있지만 그나마 2020년을 우리는 이렇게 무탈하게 잘 넘기는 것 같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고 또 내년 초까지 계속해서 우리는 화엄경 공부하는 이 정신, 이 마음, 이 기도 이것을 절대 놓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기 바란다.
연공최귀(連功最貴)라, 계속해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귀하다.
우리들의 정신끈을 절대 놓으면 안된다. 정신끈을 딱 붙잡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 그것 밖에 달리 없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정신끈 놓치지 말고 이 화엄경에 의지해서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야할 줄 믿는다.
오늘은 ‘광명에서 게송을 설함’이라는 내용이다. 역시 여래현상품으로서 여래께서 그 모습을 나타내다, 하는 뜻이다. 그 가운데 광명에서 게송을 설하다.
9. 광명에서 게송을 설함
1) 장소를 밝히다
이시(爾時)에 제보살광명중(諸菩薩光明中)에 동시발성(同時發聲)하야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대
그때에 모든 보살들의 광명 속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러한 게송을 설하였습니다.
광명에서 소리가 나온다. 화엄경은 대개 광명 또는 부처님의 사자좌, 보살님들, 그것도 역사적인 보살이 아니라 화현한 보살님들 이런 데서부터 법문을 설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한 것의 정확한 뜻은 알 수가 없지만 실재하는 사람의 소리를 내어서 법으로 한들, 무슨 특별히 다를 것이 있겠는가.
화엄경을 편찬하고 결집한 분들의 정신세계에서 펼쳐지는 형식이다. 그것을 잘 아시고 그 안에 들어있는 뜻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된다.
그 형식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어떤 의도로 광명에서 소리를 내어서 게송을 설했다 라고 했는지, 광명 그 자체가 사실은 법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눈을 뜨고 사물을 바라보고, 이 세상 모든 현상들을 보고 듣고 감지하고 느끼고, 수용하는 이런 일들이 그대로 법이다. 그것이 법문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다.
제광명중출묘음(諸光明中出妙音)하야 보변시방일체국(普徧十方一切國)하사
연설불자제공덕(演說佛子諸功德)으로 능입보리지묘도(能入菩提之妙道)로다
모든 광명 속에서 미묘한 소리를 내어
시방의 온 국토에 널리 두루 하사
불자들의 모든 공덕을 연설하여
보리의 묘한 도(道)에 들게 하도다
모든 광명 속에서 미묘한 소리를 내어
시방의 온 국토에 널리 두루 하사
그 소리가 시방의 온 국토에 두루 한다는 것이다.
불자들의 모든 공덕을 연설하여
불자들이, 이 순간 우리가 화엄경을 공부하고 있는 여기에 동참한 60여명의 불자들의 모든 공덕을 연설하고 있다.
보리의 묘한 도(道)에 들게 하도다
앞으로 나오는 내용들이 전부 보리의 묘한 도에 들게하는 이야기다, 그런 내용이다.
2) 체용자재(體用自在)
겁해수행무염권(劫海修行無厭倦)하사 영고중생득해탈(令苦衆生得解脫)하사대
심무하열급노피(心無下劣及勞疲)하시니 불자선입사방편(佛子善入斯方便)이로다
겁의 바다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들을 해탈케 하되
마음은 하열(下劣)하거나 피로함이 없으시니
불자들이 이 방편에 잘 들어갔도다.
겁의 바다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고
겁의 바다라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이다. 오랜 세월동안 수행하고 수행해서 게으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화엄경 공부를 안하고 놀면 뭐하겠는가?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낼 거리가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가 화엄경을 이렇게 읽는 시간, 화엄경 법문을 듣는 이 시간이 가장 값지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 세월이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역시 그 가치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아셔야 된다.
그렇게 아시고 계시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겁의 바다 수행함에 게으르지 않고
고통 받는 중생들을 해탈케 하되
저도 끊임없이 통증이 있고, 고통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있다. 그것은 별거 아니고 저보다 더 훨씬 심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역시 화엄경공부, 저는 화엄경 공부 또 화엄경 강설 책을 쓰고 그 외 다른 강설책을 많이 썼다. 아프고 나서 얼마나 많이 썼는지 모른다.
그럴 때 누가 ‘어떻게 아픈 몸으로 그렇게 할 수가 있느냐?’ 하면 ‘아 이것이 진통제다. 나의 진통제다’ 이런 말을 저는 입에 달고 했다. ‘이것이 진통제지 달리 다른 더 좋은 진통제가 없다’ 이렇게 표현했듯이 고통받는 중생들을 해탈게 한다. 화엄경 공부가 고통을 해탈케 하는 것이다. 고통에서부터 벗어나게 하고, 고통을 면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코로나가 이렇게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데 그 뉴스를 안볼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만 계속 계산하고 있은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그저 우리는 적당히 알고 그다음엔 화엄경 공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가장 값지게 시간을 보내는 길이다. 또 인생을 정말 값지게 사는 길이기도 하다.
마음은 하열(下劣)하거나 피로함이 없으시니
하열하거나 피로함이 없으시니, 왜 피로함이 없겠는가마는
불자들이 이 방편에 잘 들어갔도다
불자들이 이 방편에 잘 들어갔도다. 이 방편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의 길이다. 거기서 모든 해결책이 다 나오게 되어 있다.
진제겁해수방편(盡諸劫海修方便)을 무량무변무유여(無量無邊無有餘)하사
일체법문무불입(一切法門無不入)하사대 이항설피성적멸(而恒說彼性寂滅)이로다
모든 겁이 다 하도록 닦은 방편으로
한량없고 끝도 없고 남음도 없어
온갖 법문에 다 들어가되
그 성품은 적멸(寂滅)함을 항상 설하도다
모든 겁이 다 하도록 닦은 방편으로
화엄경에서 시간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그저 겁의 바다, 아승지세월, 모든 겁이라고 한다.
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가로 세로 높이 이것이 40리나 되는 큰 바위가 있다고 하자, 그런 크고 넓고 두꺼운 바위에 하늘에서 선녀들이 1년에 한번씩 내려와서 거기에서 놀다가 가는데 그 가벼운 천녀의 옷을 입고 바위에 앉아서 한 번씩 놀다가 갈 때, 바위가 닳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닳을지는 모르겠다. 닳는지 마는지 어쨌든 1년에 한 번씩 천녀들이 내려와서 놀다가 가서 그 바위가 다 닳아서 없어진 세월을 1겁 이렇게 말한다. 겁이라고 하는 의미를 겨자겁, 반석겁 하는데 그것은 반석겁이라고 말한다.
겨자겁은 가로 세로 높이가 40리 되는 큰 함이 있는데 그 함에 겨자씨를 가득히 채워놓고 그 채웠던 함에서 겨자씨를 1년에 한 개씩 꺼내어 다 비웠을 때, 그렇게 오랜 시간이 다할 때를 1겁이라고 한다. 그것이 겨자겁이다.
반석겁, 겨자겁 참 대단하다. 깨달은 사람들의 안목으로 숫자를 이야기할 때 그렇다. 단순하게 우리는 100년을 산다고 하더라도 100년 정도의 기준을 두고 모든 시간을 계산한다. 흔히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계산을 하는데 그런 관념이 없다. 깨달은 사람들은 아주 오랜 세월이 마음에 딱 이렇게 들어오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 수준에 맞춰서 이야기 하다보니 그런 반석겁이니 겨자겁이니 하는 겁을 이야기 한다.
그 겁의 바다 또는 모든 겁이 다하도록 이런 표현들을 거침없이 쓴다. 우리가 시간성을 초월해 버리면 그런 이야기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고 믿는다.
한량없고 끝도 없고 남음도 없어
온갖 법문에 다 들어가되
그 성품은 적멸(寂滅)함을 항상 설하도다
그 성품은 적멸함을 항상 설하도다. 고요한 마음 상태가 되면, 예를 들어서 그전에 우리 사형님 통광스님이 칠불에서 불사를 하기 전에 천일기도를 세 번을 했나 그러면서 아자방과 6.25때 다 타버린 칠불사를 전부 복구를 다 하면서 기도를 했다.
‘기도할 때에 어떤 경험을 했느냐?’ 제가 물었더니 저녁에 예불하러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데 어느새 바깥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는 것이다. 저녁 먹고 예불하러 들어가서, 예불하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바깥이 환해지는데 그것이 ‘얼마나 시간이 걸렸다, 지루하다, 힘들다’ 그런 생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기도를 했는데 ‘문수보살 문수보살’ 문수도량이니까 문수보살 기도를 했는데 어느새 새벽이 와서 바깥이 훤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밖이 훤하니 ‘아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는가’‘바깥에 불이 켜졌나, 어쨌나’ 해서 문을 열어 보기도 하면 벌써 동쪽에서 훤하게 밝아오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했다는 것이다.
적멸한 정신상태가 되면, 진정으로 고요한 정신 상태가 되면 시간 가는 것을 모른다. 우리가 보통 정해놓은 하루 24시간, 해가 뜨고 지고, 해가 뜨고 지고 하는 그런 것이 거기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정신이 적멸한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적멸한 상태에 들어가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통광스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하셔서 칠불사를 잘 복구를 했다.
내가 늘 그런다. ‘스님은 원력수생이다. 아마 칠불사를 위해서 원력으로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 정말 그 스님은 원력수생이다. 사람이 그렇게 원력으로 태어나야지, 이 불법을 알고나서는 업에 끄달려서 태어나면 안된다. 설사 태어나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태어나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 금생의 원력을 아주 단단히 먹고 태어나야 한다. ‘화엄경 공부를 하겠다’ 아니면 ‘출가인이 되어서 뭘 하겠다’ 아니면 세속적으로 예를들어서 ‘나는 아주 노래 잘 부르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들을 모두 기쁘게 하겠다’ 그런 것도 원력을 단단히 먹고 태어나면, 태어날 때는 모른다, 어린아이가 뭘 알겠는가? 그런데 환생처럼, 요즘 천재 소년 소녀들이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들이 있는데 심사하는 사람들이 환생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인데 ‘환생같다’고 ‘환생같다’고 이런 말을 하는 경우를 본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원력을 단단히 먹고 태어나면, 태어나서 세 살 네 살 다섯 살 여섯 살 초등학교 들어가고 이런 정도로 되면 벌써 원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머리가 좋아서 부처님한테 가까이 한다든지, 불경을 가까이 한다든지, 보살행을 잘 한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슬슬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스님은 칠불사를 그렇게 복구하기 위해서 원력으로 태어났다, 제가 그렇게 믿는다. 본인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적멸의 힘이라고 하는 것, ‘그 성품은 적멸함을 항상 설한다’ 우리 본래의 성품은 적멸한데,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모든 현상 경계에 끄달려서, 여기 빼앗기고 저기 빼앗기고 정신없이 사느라고 정신의 근육이 안생긴다. 한참 선방에서 화두를 들어보면 한철만 열심히 하면 정신에 근육이 생기는 것을 아주 잘 느끼고 알게된다. 운동을 예를 들어서 젊을 때 한 일주일만 평행봉을 하든지 철봉을 하든지 역기를 든다든지 일주일만 계속 해보면 팔 다리에 근육이 생기는 것을 그냥 느낀다. 그런데 우리 공부가 왜 근육이 안생기겠는가? 정신세계에 왜 근육이 안생기겠는가? 저는 ‘늘 정신에도 근육이 생긴다’는 말을 한다. 육체 운동만 해서 육체에 근육이 생길 뿐만 아니라 정신 운동도 육체처럼 똑같이 근육이 생긴다. 그것을 저도 경험을 많이 했다. 화두 드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지만 집중해서 한 철만, 한 철이 90일 아닌가, 90일을 그저 화두하고 씨름을 한다. 그냥 씨름이다. 화두가 순조롭게 착 들려지지가 않는다. 간혹 그렇게 순조롭게 들릴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씨름이다. 그래도 그 화두와 씨름하는 것을 한 철만, 90일만 잘 하고 나면 우리 정신에 아주 근육이 탄탄하게 생기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제가 그것을 많이 느껴봐서 이미 오래 전에 ‘정신의 근육’이라는 말을 썼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리 정신세계는 적멸이라고 하는 고요한 이 본바탕이 있는데 우리는 현상 경계에 자꾸 끄달리는 습관이 되어서 그것을 제대로 유지를 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그런 힘이 생긴다. 그런 마음으로 거기에서 열심히 무엇이든지 원력을 세우면 다음생으로까지 틀림없이 이어지고 그 능력을 발휘하게 되면 그 사람은 ‘환생한 사람이다’ 이런 표현들을 하게 된다.
삼세제불소유원(三世諸佛所有願)을 일체수치실령진(一切修治悉令盡)하고
즉이이익제중생(卽以利益諸衆生)하사 이위자행청정업(而爲自行淸淨業)이로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세우신 서원을
일체를 다 닦아 남김이 없고
모든 중생을 다 이익하게 하사
스스로 청정한 업을 행하시었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세우신 서원을
일체를 다 닦아 남김이 없고
모든 중생을 다 이익하게 하사
스스로 청정한 업을 행하시었네
3) 앞에 나타남이 자재함
일체제불중회중(一切諸佛衆會中)에 보변시방무불왕(普徧十方無不往)하사대
개이심심지혜해(皆以甚深智慧海)로 입피여래적멸법(入彼如來寂滅法)이로다
일체 모든 부처님의 대중 회상에
시방에 두루두루 다 가시되
모두 심히 깊은 지혜의 바다로서
저 여래의 적멸법에 들어갔도다.
저 여래의 적멸법에 들어갔도다. 여기 적멸이 또 나왔다. 저 여래의 적멸법에 들어갔도다. 우리 마음의 본바탕은 적멸한 자리다. 그것이 본바탕이다. 사실은 바다가 아무리 저렇게 크고 물이 많다 하더라도 본래는 적멸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바람이 불고, 배가 지나가고, 거기서 고기가 놀고 그렇게 하면서 바다가 움직이기 시각했지, 본래 바다는 적멸이 본모습이다. 아무리 커도 적멸한 것이 본모습이다. 그런데 거기서 바람이 불어서 자꾸 출렁거린다. 끊임없이 출렁거린다.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저 바다와 같이 본래는 적멸한 모습인데 거기에 온갖 안이비설신의 눈과 귀와 코와 혀 등등 수많은 세월 동안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업들이 쌓여서 그 업의 바람이, 업풍((業風)이라고 한다, 업의 바람이 계속 적멸한 본성을 흔들어대니까, 출렁거리는 것이다. 적멸한 본성이 출렁거리고 흔들린다. 바다를 생각해 보면 똑같은 원리다. 바다도 본래는 고요한데 바람이 불어와서 자꾸 흔들면 출렁거릴 수 밖에 없듯이, 우리 마음도 그렇다. 그래서 화두를 들고 공부를 한다든지 아니면 기도로써 한다든지, 경전공부를 한다든지 해서 마음이 잡념이 없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적멸의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
일일광명무유변(一一光明無有邊)하야 실입난사제국토(悉入難思諸國土)하며
청정지안보능견(淸淨智眼普能見)하시니 시제보살소행경(是諸菩薩所行境)이로다
낱낱 광명이 그지없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모든 국토에 다 들어가며
청정한 지혜 눈이 널리 보시니
이것은 모든 보살이 행한 경계로다.
낱낱 광명이 그지없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모든 국토에 다 들어가며
청정한 지혜 눈이 널리 보시니
이것은 모든 보살이 행한 경계로다
모든 보살의 경지에 제대로 이른 사람들은 전부 이와 같은 광명, 생각생각마다 그 광명으로 모든 국토에 두루 들어가고 청정한 지혜의 눈이 널리 그 사실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보살능주일모단(菩薩能住一毛端)하야 변동시방제국토(徧動十方諸國土)하사대
불영중생유포상(不令衆生有怖想)케하시니 시기청정방편지(是其淸淨方便地)로다
보살이 한 터럭 끝에 머물러서
시방의 모든 국토를 두루 진동하시되
중생에게는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시니
이것이 그 청정한 방편의 경지로다.
보살이 한 터럭 끝에 머물러서
한 터럭 끝에 계시면서
시방의 모든 국토를 두루 진동한다
당신은 한 터럭 끝에 있으면서 시방의 모든 국토를, 이 지구라고 하면 온 지구를 두루 진동시킨다. 그래도
중생에게는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시니
중생들은 그걸 진동시키는지 어쩐지, 진동을 느껴도 아무 두려운 것도 없고, 겁낼 것도 없고, 오히려 ‘재밌다, 즐겁다’ 이런 느낌 정도지 ‘아이구 웬 지진이 이렇게 일어났는가’ 하고 놀라는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불보살들은 정말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의 땅을 사정없이 흔들어야 된다. 진동시켜야 된다. 그래서 변화를 줘야 된다. 감동을 해야 된다.
그 감동이 무슨 두려워 하는 것이나 공포스러운 것과는 다르다. 중생에게는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시니
이것이 그 청정한 방편의 경지로다
훌륭한 방편의 경지다.
보살이 한 터럭 끝에 머물러서
시방의 모든 국토를 두루 진동하시되
중생에게는 두려운 생각이 나지 않게 하시니
보살이 진동시켜서 중생을 두렵게 한다, 중생에게 겁을 준다, 공포에 떨게 한다, 어떤 중생은 까무러치게 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살이 왜 그렇게 하겠는가?
이것이 그 청정한 방편의 경지로다
일일진중무량신(一一塵中無量身)이여 부현종종장엄찰(復現種種莊嚴刹)하사
일념몰생보령견(一念沒生普令見)케하시니 획무애혜장엄자(獲無礙慧莊嚴者)로다
낱낱 먼지 속의 한량없는 몸이여
가지가지 장엄한 세계에 다시 또 나타나네.
한 생각에 나고 죽음을 널리 보게 하시니
걸림 없는 지혜의 장엄을 얻은 이로다.
또 좋은 게송이다.
낱낱 먼지 속의 한량없는 몸이여
먼지 속에 한 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량없는 몸이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세포 속에 또 백 조의 세포가 있고, 그 백 조의 세포 하나하나 세포 속에 또 백 조의 세포가 있고, 그 또 하나하나의 세포속에 백 조의 세포가 있는 원리다. 낱낱 먼지 속의 한량없는 몸이여
가지가지 장엄한 세계에 다시 또 나타나네
가지가지 장엄한 세계에 다시 또 나타나네. 그것이 밖으로 발현할 인연이 되면 다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머지않아 봄이 올텐데 봄이 오면 이 자연 현상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는가? 저 앙상한 나목에 무엇이 날 것 같은가? 지금은 아무 것도, 도대체가 푸른 나뭇잎이 돋을 것 같은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무슨 새싹이 돋고 무슨 꽃이 피고 무슨 열매가 맺힐 것 같은가? 저 깡마른 길바닥에 무슨 새싹이 날 것 같이 보이는가? 전혀 그런 낌새도 없다. 그런데 웬걸, 봄이 되어 보라. 너도 나도 아무리 풀을 뽑아도 풀 뽑기가 바쁘다. 얼마나 새싹이 어디서 씨앗이 그렇게 떨어졌는지 전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무성한 숲을 이루고 그렇게 한다.
낱낱 먼지 속의 한량없는 몸이여
가지가지 장엄한 세계에 다시 또 나타나네
한 생각에 나고 죽음을 널리 보게 하시니
나고 죽음을 널리 보게 하시니
걸림 없는 지혜의 장엄을 얻은 이로다
우리 지혜가 툭 터져서 무장무애(無障無礙) 시간성이나 공간성이나 그 어떤 경우라도 걸림이 없는 정도의 지혜가 되면, 본래 사람사람마다 그런 소질을 갖추고 있다. 그렇게 되면 참 정말 걸림없는 지혜의 장엄이 되는 것이다.
삼세소유일체겁(三世所有一切劫)을 일찰나중실능현(一刹那中悉能現)하사
지신여환무체상(知身如幻無體相)하시니 증명법성무애자(證明法性無礙者)로다
삼세 일체 겁을
한 찰나에 나타내어
몸이 환영과 같아서 체상(體相)이 없는 줄 아시니
법의 성품이 걸림 없음을 증명한 이로다.
삼세 일체 겁을
한 찰나에 나타내어
이것은 시간적으로 삼세 일체 겁을 한 찰나에 나타내어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삼세일체겁(三世所有一切劫)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시간을 한찰나, 똑딱 하는 한찰나에 다 나타내어
몸이 환영과 같아서 체상(體相)이 없는 줄 아시니
몸이 환영과 같아서 체상(體相)이 없는 줄 아시니
법의 성품이 걸림 없음을 증명한 이로다
법의 성품이 걸림 없음을 증명한 이로다.
4) 불자의 주처(住處)
보현승행개능입(普賢勝行皆能入)이여 일체중생실락견(一切衆生悉樂見)이라
불자능주차법문(佛子能住此法門)일새 제광명중대음후(諸光明中大音吼)로다
보현의 수승한 행이 다 들어감이여
모든 중생이 다 즐겨 봄이라
불자가 능히 이 법문에 머물새
모든 광명 가운데서 큰 소리 부르짖네.
이것은 불자의 주처로서
보현의 수승한 행이 다 들어감이여
보현의 수승한 행, 보현은 모든 보살의 대표가 보현보살이다. 그래서 아주 훌륭한 행, 수승한 행이 그 속에 다 들어간다.
모든 중생이 다 즐겨 봄이라
그 보현의 행을 다 본다.
불자가 능히 이 법문에 머물새
우리 불자들 선불교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소승불교를 하든 비밀불교를 하든 어떤 불교를 하든간에 궁극적으로 우리가 도착하고 거기에 머물러야 할 장소는 보현보살의 행원이다. 보현보살의 행, 보현보살의 실천의 행 거기에 우리가 머물러야 한다.
일단 우리가 이런 화엄경 공부를 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 보현행을 하는 것이고, 또 이것이 확대되어서 안에 꽉 차면 저절로 밖으로 표출 되어서 그 보현행이 옆사람에게 이웃에게 다른 사람에게 다른 도반들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보현행이 전파되어야 하는 것 바로 이것이다. 불교의 결론을 이야기 하자면 바로 그것이다.
결국은 보현행이 결론이다. 불자가 능히 이 법문에 머물새 모든 광명 가운데서 큰 소리 부르짖네.
보현의 수승한 행이 다 들어감이여
모든 중생이 다 즐겨 봄이라
불자가 능히 이 법문에 머물새
모든 광명 가운데서 큰 소리 부르짖네
불자의 주처(住處)라고 했는데 바로 보현행이 우리 모든 불자들,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 불교와 인연 맺은 사람들의 주처다.
불교를 비방한 사람이 또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무심한 사람이 오히려 인연이 없다. 불교를 좋아하는 사람은 더 말할 나위 없고, 불교에 귀의하고, 부처님 하면 마음이 숙연해지고, 합장이 저절로 되고 이런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불교를 막 비방하는 사람들도 또 있다. 그 사람들도 사실은 불교와 인연을 깊이 맺는다. 무심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깊이 맺는 것이다.
옛날에 송나라 때인가 당나라때인가 어떤 유명한 학자가 ‘불교는 엉터리다’ 라고, ‘부처님은 없다’라고 하는 무불론(無佛論)을 지으려고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리고 잠을 안자고 있었다. 그 집 보살이 ‘당신 왜 잠을 안자냐’ 하니까 ‘내가 불교 보기 싫어서 무불론, 부처는 없다라고 하는 논문을 쓰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을 궁리중이어서 며칠 째 잠을 못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보살이 ‘아니 부처가 없으면 없었지, 없다고 하는 말은 왜 하려고 하느냐’ 없으면 됐지, 없다고 하는 말을 왜 굳이 하려고 하느냐, 이렇게 한마디 딱 던지고 ‘그러지 말고 무불론을 지으려면 진짜 부처님이 없는지 불교책이 저렇게 많으니까 대장경이라고 하는 불교경전이 많으니까 그거나 우선 사전에 한 번 읽어보라’고 하였다.
‘당신같이 총명한 대학자가 그것을 읽어보면 저절로 무불론에 대한 견해가 서질 것 아니냐? 그런데 뭘 그렇게 잠도 못자고 끙끙거리느냐’ 그렇게 보살이 이야기 하니까 이 선비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말도 맞긴 맞다.
부처가 없다면 없으면 됐지 없다는 소리를 굳이 할 것이 뭐 있느냐, 그리고 또 정말 불교를 비판하려고 아주 훌륭한 글을 지어서 세상에 퍼뜨리려고 하면, 먼저 그쪽 사정을 알아본 뒤에 짓는 것이 옳지 않느냐,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상대를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 전쟁터에서도 백전백승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말이 그럴 듯해서 그다음부터는 절에 가서 장경을 빌려서 막 읽기 시작했다. 읽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총명하고 영리하고 상식이 있는 사람이 불교 경전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어디로 가겠는가? 뻔하다. 그래서 결국은 유불론(有佛論)을 지었다는 것이다.
불교역사에는 그런 이야기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 이야기, 그런 이치도 우리가 잘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교에 무심한 사람보다도 불교를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불교와 인연이 깊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 불가에서는 늘 이야기 해오는 사실이다.
오늘 화엄경 공부 여기까지 하겠는데 2020년 참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힘든 해였다.
그래도 우리는 다행히 유튜브 방송을 9월달부터 개설해서 4개월째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불행중 다행이다.
화중생련(火中生蓮)이라. 불 가운데서 연꽃을 피우는 도리고 또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춥고 배고픈 때 도닦는 마음을 일으킨다,라는 그 원리다. 그대로 우리 불자들이 그 일을 실천해 오고 있다, 이렇게 보아진다.
여기에 동참하신 모든 불자님들 좋은 인연이 됐고, 또 이제 한 3일간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방학이니까 3일간 방학 푹 쉬시고, 내일은 1월 1일이니까 이런저런 핑계대고 쉬시고, 1월 4일날 화엄경 공부 이 시간에 하도록 하겠다.
보내는 해, 맞이하는 해, 이즈음에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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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모두들 동참해 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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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오.
저녁 7시에 임제록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첫댓글 _()()()_벚꽃 다 떨어진 철학의 길을 배회하다가 드디어 은각사로 들어갔는데, 동백이 물처럼, 베일처럼 늘어뜨려진 벽을 보고 찬탄찬탄했으나 사진은 보통으로 나왔네요^^~......큰스님께서 오늘부터는 오후7시 수업을 닫고, 매일 한차례씩 오후 2시에만 화엄경 법문을 하신다고 하셨어요. 장장 6개월간의 대장정에 하루 두 번씩의 강의를 하셨네요. 한 번 강의할 때마다 준비 시간이 기니까, 하루 한차례도 벅차다고 작년 여름에 말씀하신 적 있는데, 가을부터는 있는 힘을 다 내셨던 것 같아요. 정신 바짝 차리고 화엄경을 음미하며 매일매일 마음에 몸에 새기는 시간들 되겠습니다. 하루 한 번 이니까 더 소중할 것 같아요. 오늘 저녁부터 화엄경 7시 강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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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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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에 근육이 붙는 적멸한 상태에서의 기도.
火中生蓮의 경지가 되도록. 다음 생까지도 부처님과 함께하는 날들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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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녹취록 읽으면서 늘 하는 생각.
녹취록 읽기도 이리 바쁜데
혜명화님은 언제 이렇게 올려주실까?
강의하시는 스님은 언제 이렇게
다 하실까?
진도 맞추어 따라 오느라
그간 댓글조차 못 달고 허급지급...
얼마나 행복했는 지!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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