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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5일 토요일
[(녹)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녀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고 욥이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오자,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 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루카 10,17)하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이 복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러한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생각하고 교만해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 기쁨 때문에 자꾸 마귀를 쫓아내고 싶어집니다.
물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마귀 들린 사람에게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에게 그 일이 꼭 좋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능력 때문에 그가 “철부지”가 아닌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10,21)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은 철부지인 그들이 “아버지의 선하신 뜻”(10,21)에 따라 “아들이 누구인지”(10,22) 알게 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지혜와 능력에서 나온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였던 그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이 복종한다며 으쓱하고 심지어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게 될 때, 그들은 이미 어린이와 같은 이들이 아닙니다. 은총을 선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이들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은총의 선물을 주실 때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철부지들에게 베푸시는 선물에 감사하면서, 이 선물 때문에 내가 어린이와 같은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경계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그 아드님을 알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들이 얼마나 큰지 생각하며 감사드립시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철부지’라는 단어에서 ‘철’은 사리를 분별하는 능력, 곧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런 ‘철’자에 한자 말인 부지(不知)가 붙으니, 결국 ‘철부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지금이 어떤 순간인지를 판단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이들 가운데만 철부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에 상관하지 않고 철부지들이 있더군요. 예를 들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입니다.
큰 사고가 생겨 다들 심각한 상태인데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깔깔대고 있다면 그는 철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철부지는 이런 철부지와는 약간 다른 의미의 철부지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루카 10,21)
우리 인간은 나이 먹어가면서 대체로 자기만의 특별한 안경을 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선입견의 안경, 고정관념의 안경, 자기 잣대의 안경, 고집의 안경, 나만의 틀의 안경, 자기중심주의 안경...
특별히 유다 지도층 인사들은 전통의 안경, 선민의식의 안경, 율법주의의 안경을 즐겨 썼는 데, 그 결과 자신들의 코앞에 등장하신 하느님을 뵙지 못하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은 아직 영혼의 때가 묻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순수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 그래서 이웃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더욱 뚜렷이 당신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이런 맑은 영혼의 철부지들은 세파에 찌든 영혼들보다 훨씬 쉽게 세상만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합니다.
박학다식하다는 것, 참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한 분야에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기념비를 남기는 것, 그래서 후학들의 등불이 되어주는 것, 참으로 보람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겸손의 덕을 쌓는 일입니다. 겸손의 덕이 배제된 지혜나 학문은 은총에로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겸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태도입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미약함, 태생적 결핍을 잘 아는 사람만이 신비의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무로 끝나고 맙니다. 자만, 오만의 끝은 허무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인간이 날고 긴다 할지라도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 그래서 크신 하느님 자비 안에 늘 자신의 전 존재를 기쁘게 내어 맡기는 철부지들을 하느님께서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십니다.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보여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트에 가면 특별 사은 행사로 하나 사면 하나를 덤으로 주는 때도 있습니다. 2달 전에 교통사고로 크게 다친 아이를 위한 방문이 있었습니다. 구역장님이 이왕 가는 길에 97세 어르신이 입원했는데 시간 되면 방문해 주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간도 되고, 당연히 가겠다고 했습니다. 성당에서 성체를 모시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의식이 없던 아이였습니다. 혼자서 호흡도 어려웠던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눈을 떴고, 며칠 전에는 휠체어를 타고 병원 밖으로 산책도 다녀왔다고 합니다.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이의 아버지는 퇴원해서 통원 치료를 받는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아이의 엄마도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97세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진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습니다. 어르신의 돌봄으로 손녀는 결혼했고, 그 손녀가 또 아이를 6명 낳았다고 합니다. 어르신께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아이들이 모두 세례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증손자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아이와 어르신을 위해 기도하면서 요즘 독서에서 읽었던 욥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느님께 충실했던 욥은 큰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재물을 잃어버렸고, 자식들도 잃어버렸고, 몸도 병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원망할 수도 있지만 욥은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욥의 굳센 믿음을 보시고, 다시 재물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욥은 하느님의 축복 속에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큰 시련을 겪었던 아이의 엄마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없었다면 감당하기에 너무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구역에서 기도하고 있고, 정성을 모아 전달하였습니다. 2주 후에는 아이도 퇴원하여 집에서 돌 볼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아이가 하품하고, 용변을 보는 것도 큰 축복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로 아이와 아이 아빠가 건강을 회복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97세 어르신처럼 모두 건강하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군자화이부동, 소인동이불화(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소인은 지배하려 하나 공정하지 못합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는 각 악기의 소리를 존중합니다. 각 악기가 똑같은 소리를 낸다면 아름다운 음악이 되지 못합니다. 각 악기는 저마다의 소리를 연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의 악기는 지휘자의 뜻을 따라 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나침판은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릴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화이부동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청하지만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욥은 화이부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주셨을 때도 감사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거두어 가실 때도 감사했습니다. 재물이 많았을 때는 기꺼이 이웃과 나누었고, 재물을 다 잃었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바라보고 살았던 욥을 고통과 시련에서 구해 주셨습니다. 욥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동이불화의 삶을 사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병자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능력과 업적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교회가 세속화 된다고 합니다. 교구는 성직자의 부족으로 본당의 숫자를 줄인다고 합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를 지망하는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다고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성공과 권력, 명예와 재물이라는 먹이를 찾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신앙인이 거룩함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화이부동의 삶을 사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내님 닮아가는 기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루카 10,20)
내님 따라
내님과 함께
걷고 또 걸으며
누리고픈
오직 하나의
기쁨은
내님 닮아가는 것
오늘의 성인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Mary Faustina Kowalska)
신분 : 수녀, 환시자
활동연도 : 1905-1938년
같은이름 : 메리, 미리암, 파우스띠나
성녀 코발스카는 1905년 8월 25일 폴란드 우지의 서쪽에 있는 글로고비에츠(Glogowiec)라는 마을에서 농부인 에스타니슬라오 코발스카(Estanisla Kowalska)와 마리아나(Mariana) 사이에서 10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스비니체 바르키에(Swinice Warckie) 본당에서 엘라나(Helena)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하고 배운 것은 없었지만 신심이 깊고 올곧은 사람들로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순명, 부지런함에서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9세 때 첫영성체를 한 후 어려운 가정환경 등으로 3년 정도 교육을 받은 후 12세 때 고향을 떠나 부유한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하며 동생들과 부모님의 생계를 도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수도성소를 느꼈고, 더 이상 학교 수업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수녀원 입회를 원했지만 부모의 반대로 일단 성소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환시를 체험한 후 1925년 8월 1일 자비의 성모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1928년 마리아 파우스티나(Maria Faustina)라는 수도명으로 첫 서약을 하였다.
그 후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는 수도원의 여러 공동체에서 조리사, 정원사, 문지기 등의 소임을 담당하면서 수녀회의 모든 규칙을 성실히 지키고 동료들과 따뜻한 우애를 나누었다. 그녀의 일상적인 삶은 단조롭고 두드러진 특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룬 삶이었다.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많은 환시와 예언, 그 외에 영적 은총을 받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조롱과 박해를 받았다. 그녀가 체험한 가장 강렬한 환시는 1931년 2월 22일에 일어났다. 이 환시에서 예수님은 한 손으로는 자신의 성심 근처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내밀어 강복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예수 성심에서는 붉은 색과 흰 색의 두 갈래 빛이 나왔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자신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이 신심의 이름은 ‘하느님 자비’이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그 환시를 그림으로 그려서 체험을 기념하고 아울러 그 그림을 보고 공경하는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녀의 일생을 통해 여러 번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영적인 지도와 기도의 은총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은 성녀 파우스티나가 직접 기록한 일기에 담겨 있으며, 그 일기는 오늘날 “내 영혼 속 하느님의 자비”(Divine Mercy in My Soul)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기에 기록된 성녀의 사명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해 성서가 전하는 신앙의 진리를 세상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 둘째, 특히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자비’ 신심 실천을 통해, 온 세상과 특히 죄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해야 한다. 셋째, 하느님 자비의 사도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심 운동의 목표는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고 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 완덕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폐결핵을 비롯한 수많은 고통들을,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 받아들이던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수녀는 크라쿠프(Krakow)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녀의 시신은 크라쿠프 라기에프니키(Krakow-Lagiewniki)의 하느님의 자비 묘지(Shrine of Divine Mercy)에 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일 같은 교황에 의해 새 천년기를 맞아 처음으로 시성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성 플라치도 (Placid)
활동년도 ; +6세기경
신분 ; 수도승, 순교자
지역 ; 메시나(Messina)
같은 이름 ; 플라치두스, 플라키도, 플라키두스, 플래시드
성 플라키두스(Placidus, 또는 플라치도)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의 부모는 그를 이탈리아 수비아코(Subiaco)에 있던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에게 맡겼다고 전해온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의 저서를 통해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확실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성 플라키두스가 어느 날 물을 뜨려고 호수로 몸을 구부리다가 빠지고 말았는데, 그때 자신의 방에 있던 성 베네딕투스가 영적인 눈으로 이 사실을 알고, 그를 구하라고 성 마우루스(Maurus, 1월 15일)에게 지시하였다. 그래서 성 마우루스는 물 위를 걸어 이미 물살에 휩쓸린 성 플라키두스를 구해 수비아코로 데려왔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그 후 성 플라키두스는 거룩한 수도승이 되어 시칠리아(Sicilia)로 갔다가 메시나에서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사라센 해적들에게 붙잡혀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이야기를 불확실한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그는 메시나의 순교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성녀 플로라 (Flora)
활동년도 : 1309-1347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볼리외(Beaulieu)
같은 이름 :
성녀 플로라는 누구나 칭찬하는 착한 어린이로 성장하여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장성하여 부모의 결혼 강요를 완강히 거부하고 하느님께 일생을 봉헌하기로 결심하여 볼리외에 있던 성 요한의 구호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한 번은 자신의 삶이 너무나 평탄하다는 그릇된 생각에 빠진 적이 있고, 동시에 세속의 쾌락을 탐하려는 불같은 유혹으로 깊은 실망감을 맛보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동료들은 그녀가 위선적이라고 혹평하였으나 자신의 영혼상태를 잘 알아본 어느 고해신부의 도움으로 놀라울 정도로 성장하였다.
어느 해 모든 성인의 날에 그녀는 탈혼에 빠졌는데 성녀 체칠리아(Caecilia) 축일까지 약 3주간이나 계속되었다. 또 한 번은 8마일 밖의 어느 성당에서 사제가 미사 도중에 축성한 성체 조각을 떨어뜨린 사실을 알게 되어 경건하게 모신 일이 있었다. 이때부터 그녀의 초자연적 식별력이 돋보이게 되었다. 또 성령을 묵상할 때에는 땅에서 4피트나 떠오른 사실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신비스런 영적 체험은 구세주의 몸에 받으신 상처를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38세의 일기로 운명하였다.
성녀 갈라 (Galla)
활동년도 : +550년경
신분 : 과부
지역 : 로마(Roma)
같은 이름 : 깔라
485년, 이탈리아 로마의 집정관이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의 딸인 성녀 갈라는 결혼 일 년 만에 과부가 되었으므로, 그 당시 바티칸 언덕에 있던 수녀들의 공동체에 들어갔다. 그녀는 암으로 죽을 때까지 병자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여 큰 덕을 쌓았다. 교황 성 대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9월 3일)는 자신의 대화집에서 그녀를 언급하고 있으며, 루스페(Ruspe)의 성 풀겐티우스(Fulgentius, 1월 1일)가 기록한 “과부 신분에 관하여”라는 저서는 그녀를 모델로 기술한 책이라고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