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은 예배드릴 때의 격식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많이 받는 부분입니다.
우선 11장 1절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 문장은 10장 끝에 붙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장을 나눈 13세기의 신학자 스테판 랑튼 경이 잘못 나누어서 11장의 첫 절이 됐습니다. 이런 경우가 많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11장은 2절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11장의 첫 본문은, 여자가 예배 때 머리에 너울을 써야 되느냐 안 써도 되느냐는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논리 전개가 평소의 바울답지 않습니다.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랍니다. 그래서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고,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면 그것도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거든 차라리 머리를 깎는 게 낫답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랍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고,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답니다.
바울의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녀가 따로 없고, 자유인과 노예가 따로 없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따로 없다고 했던 평소의 바울과는 매우 다른 모습입니다. 심지어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그 머리에 권위의 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근거도 없는 엉뚱한 말까지 합니다.
여자를 변호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는 남자 없이 여자가 있을 수 없고, 여자 없이 남자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도 여자의 몸에서 났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에게서 생겨났답니다. 이 말만 했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어투가 바뀝니다. 13~16절을 보겠습니다.
13 여러분은 스스로 판단하여 보십시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습니까?
14 자연 그 자체가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불명예가 되지만,
15 여자가 머리를 길게 하는 것은 그에게 영광이 되지 않습니까? 긴 머리카락은 그의 머리를 가려 주는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16 이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나, 그런 풍습은 우리에게도 없고, 하나님의 교회에도 없습니다.
정말 바울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채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겠냐고 스스로 판단해 보라는데, 제 판단으로는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건 안 쓰건 그게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평소의 바울이라면 그런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 임하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글은 차라리 쓰지 않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신학자들도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여자는 예배 때 머리에 너울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알겠지만 근거로 제시하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성만찬의 오용에 대해 바울이 책망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21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22 여러분에게는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성만찬에 대한 말씀인데,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음식을 먼저 먹는답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교회 상황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일정한 건물을 확보한 교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교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가정예배 형태로 드렸습니다. 성찬식도 지금처럼 교회가 음식을 준비하고 교인들은 참여만 하는 형식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먹을 양 만큼의 음식을 준비해 와서 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양도 상징적인 의미의 매우 작은 빵조각 하나와 한 모금의 포도주가 아니라 완전한 저녁식사를 하는 만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찬을 교우들과 같이 나누지 않고 자기 음식을 먼저 먹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했답니다. 이렇게 되면 성만찬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성만찬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함께 먹고 마신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해석했는데,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대 신학자들은 예수님 사후에 교회에서 확립된 제도를 예수님의 말씀으로 생각한 결과라고 해석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무질서하게 먹고 마시려면 차라리 집에서 먹으라고 나무라면서 성만찬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23~26절을 보겠습니다.
23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드시어서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5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26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에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으므로 합당하지 않게 그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니 각자 자기를 살핀 후에 그 빵을 먹고 잔을 마셔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처방을 제시해줍니다. 33~34절을 보겠습니다.
33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34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내가 가서 처리하겠다’는 말은 곧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해서 교회가 고민하는 문제들에 대해 도와주겠다는 뜻을 밝힌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