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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21대 영조실록]
[1. 연잉군 금의 멀고도 험한 재위의 길]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를 맞이 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사람은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었다.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의 숙빈 최씨가 바로 그들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균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금이었다. 균은 1688년에
태어났고, 금은 1694년에 태어났으니 그들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다.
왕자 균은 14세가 되던 1701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다. 부왕 숙종에 의해 어머니가
사사되는 것을 본 그는 그 때부터 병을 얻었다. 또한 생모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균의
하초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 능력마저 상실했다. 왕자 균의 이같은 결점은 이복동생 금에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안겨 주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다.
왕자 균은 생후 2개월이 될 무렵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희빈 장씨가 사사된 14세 때부터 병을 얻어
세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자 균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1717년 노환으로
병약해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 금을 세자 균의 후사로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야 하겠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연잉군이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청정을 하라고 명했다.
연잉군의 세자 대리청정이 결정되자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 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에 의해 일대 당쟁에 휘말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720년 세자 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그가 경종이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금의 세제 책봉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조정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소론측의 대대적인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해 사간 유봉휘 등도 시기 상조론을 펴며 왕세제 책봉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측의 대세에 밀려 소론측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 때가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이었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노론은 실권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이번에는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론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자 경종은 일단 비망기를 내려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은 대리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간언했다. 이어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각 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대리청정 명령을
받은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청정 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청정을 베풀고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몰라 세제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하교를 내렸다.
시실 경종은 이 때 노론측 백관들이 한 번 더 대리청정의 회수를 청할 것을 기대했다.
관례상 세 번에 걸쳐 이같은 청이 왔을 때 왕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왕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론측은 대리청정이 왕의 확고한 의지라고 판단하고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의식을
파해버렸다. 그리고 곧장 왕명을 쫓는다는 명분을 내걸며 숙종 말년의 세자 대리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노론의 태도가 이같이 급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세자 대리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조처였지만 경종은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이같은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측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노론 대신들은
종전에 대리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또 다시 청정 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노론측은 이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소론측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처음에 대리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청을 하고, 다시 청정 명령의 하교가 내려지자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명분이
좁아지자 또 다시 청정 요구를 거둬들이고 청정 명령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노론의 이같은
행동은 결국 소론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 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 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 대비는 평소 노론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2.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
(1694-1776, 재위 기간 1724년 8월-1776년 3월, 51년 7개월)
노,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권 지향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쟁은 지속되고, 급기야 왕권에 도전하는 변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조는 이같은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개하며 지속적으로 조정을 탕평 정국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한편,
영조의 탕평 정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사회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수리 출신 화경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이후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한 바 있으며, 1721년
(경종 1년)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24년 8월 이복형 경종이 죽음에 따라 조선 제21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노론측의 이의연이 경종 집권 당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 처벌된 대신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을 펴다가 소론측의 탄핵을 받아
오히려 유배되고 말았다.
또한 노론의 송재후는 김일경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임인옥사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기록한
교문의 초고 중에서 3건의 문건을 들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했다. 3건의 문건이란 종무(노환공자가 자신의 형을 죽인 것), 사구(진시황제가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작은 아들 호해를 세운 것), 접혈(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 등으로 모두
영조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김일경의 이 같은 문건은 사실 세제 연잉군이 경종을 죽이려 한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몰고가는 것이어서 김동필 같은 소론 내부의 인물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송재후의 상소가 있자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 처에서
빗발쳤다. 그래서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하였으며, 김일경은 끝까지 불복하여
사형되었다. 또한 고변으로 임인옥사를 유발하여 공신이 된 목호룡의 문건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국문당하였고, 끝까지 불복하다가 처형되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정미환국으로 정권을 잡게 된 소론측은 다시 임인년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그들 4대신의 죄명은 씻어주고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측과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728년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급진 세력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 교체를 기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사건은 경종이 갑자기 죽자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들이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밀풍군 탄
(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한 모반이다.
군사 동원 계획까지 마련되었던 이 역모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밀려나고
온건 소론 세력이 기용되자 동조자가 줄어들고 모의가 노출되어 최규서, 양성인, 김중만 등의
고변으로 탄로나고 말았다.
모반 계획이 탄로나자 이인좌를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반군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각 읍에 격문을 띄워 병마를 모집하고,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앞세우고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안성, 죽산, 청주, 상당성 등에서 대패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이인좌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몽 등이 이에 호응하여 반군을
일으켰으나 안성, 죽산 싸움에서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됨에 따라 타격을 입어
관군에게 패하여 궤멸되었다.
이 난의 평정에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측 인사였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에서 소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 사건으로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29년에는 기유처분으로 노,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 때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였다. 즉,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그런데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세자 사건'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도세자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영조는 정치적 신념으로 이끌던 탕평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또,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이른바 '동색금혼패'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영조의 이같은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은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죄수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우선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슬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理正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같은 국방 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를,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외에 '경국대전'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 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4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세문답', '어제경세편',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중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했으며,
1776년 3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51년 7개월),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그는
83세를 사는 동안 정성왕후 서씨를 비롯한 6명의 아내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3. 영조의 가족들]
영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2남 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은 아이를 낳지 못해 적출이 없었고,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를 비롯 1남 1녀(화순옹주)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비롯 1남 3녀(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를, 귀인 조씨가 1녀
(화유옹주), 숙의 문씨가 2녀(화령옹주, 화길옹주)를 낳았다.(이들 중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등의 왕후와 효장세자, 사도세자 등의 아들들을 살펴보고 참고로 사도세자의 빈 혜빈
홍씨의 삶을 약술한다).
정성왕후 서씨(1692-1757)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다. 1704년 13세의 나이로 숙종의 둘째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왕비에 봉해졌다.
1740년 혜경이라는 존호가 올려졌으며, 1757년 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 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년 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효장세자(1719-1728)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년 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사도세자(1735-1762)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1749년 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 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말에 비추어 볼 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종된 뒤 융릉으로 정해졌다.
혜빈 홍씨(1735-1815)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4.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년 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측은 그의 탁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에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은 숙종 대의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 그들의 이같은 계획은 당을
결속시키고, 모반을 정당화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해 1725년부터 박필현 등은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들을 선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성 내부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가담하였고,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도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 심씨의 동생 심유현의 말과
결부시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이같은 내용이
흉서나 괴서로 돌아다녔고, 이들은 이를 근거로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였다.
그러나 모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 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양성 사람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이에 영조는 모반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모반 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반란은 1728년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접수했다.
청주를 장악한 이인좌는 군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민심을 동요시켰다. 이들은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조석으로 곡배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웠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중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
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했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였다. 또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청주성에서 밀려나와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이로써 이인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었다.
한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났다.
영남 지방은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장례를 구실로 모병하여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더불어
3월 20일 안음의 고현차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하여 쉽게
이 두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친척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사태가 이렇듯 심각한 양상을 띠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하여 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 지역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는 무장에
유배중이던 박필몽 등과 내통이 되었으나, 전라감사와의 연결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진압에 성공한 관군은 그해 4월 19일 도성으로 환군하였다. 이 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진압군을 영접하였다.
이인좌의 반란은 이후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론측은 비록 진압에 앞장섰으나 반란군
주모자가 대부분 소론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왕권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이인좌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 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5. 실학의 선구자들]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1712-1791)
안정복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안극의 아들로 성화 이익의 문인이다. 그는 171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717년에 외조모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의 월산에 갔다가
그 곳 농장에서 2년간 생활한다. 그리고 1717년 조부 안서우가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으로 이사와서 10세가 되던 1721년부터 학문을 시작한다.
그는 그 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년 25세 때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남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휘말려 벼슬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26세 때 '치통', '도통' 등의 책을 엮었다. 전자는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며, 후자는 유교 사상의 계승 계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그 동안 연구해온 고전에 관한 연구서로 '하학지남'이라는 저서를, 31세 때에는 여성의
행동 규범에 관한 책인 '여범'을 저술하였다.
이같은 저서를 만든 이후에 그는 자신의 학문이 미진함을 깨닫고 35세에 스스로 남인 집안
출신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심취하였던 학문은 이황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황의 보수적 경향이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던 이익을 찾게 되었다.
안정복은 비록 늦깎이로 이익을 찾았지만 그의 학자적 기풍과 사상의 위대성을 흠모하였기에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배움에 임했다. 그가 이익의 문하로 찾아들었을 때 이익은 이미 66세의
고령이었지만 학구적 열정만은 대단했다. 그리고 성실한 자세로 자신에게 학문의 진리를 구하는
제자에게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익은 그의 질문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했으며 혹 대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여지없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익의 이러한 세밀하고 성의 있는 가르침 덕분으로 학문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고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실천적
행동의 범위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비록 재야에 묻힌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전반에 대해 당시의 어떤 학자보다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익혔던 사학, 천문, 지리, 의약, 종교 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주 교류하는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학구적 능력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한성에까지 퍼져 그는 1749년 38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이 때 그가 받은 직책은 강화도에 있는 영조의 별장인
만령전의 참봉이었으며, 이어 내직으로 들어가 조정의 식량 창고의 참사, 중종의 묘를 지키는
직장, 사헌부 감찰, 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와 65세 때 목천현감이 되었다.
관리 생활 중 특히 한직에 속했던 중종의 묘지기(직장) 시절에 그는 왕릉이 있던 경기도
광주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자료를 모아 '광주지' 두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집필한 최초의 실학적 성과로서, 상세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었기에 전국 각 부와 군, 현의
지방지 편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이 기간에 그는 또한 역사학에 심취하여 '임관정요'를 완성했다. 이 책은 지방 행정에 관한
위대한 정치가와 학자들의 교훈을 담은 정어, 지방 행정의 모범적인 실례를 기록한 정적, 그리고
현실 속에서 지방 행정의 이상형을 묘사한 시조 등 세 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실학자
들의 정책론을 집약하는 한편, 부패한 지방 관리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복의 획기적 성과는 '동사강목'의 집필이었다. 1756년 45세에 집필에 들어간 이
본격적인 역사서에는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이익의 사상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여러 번에 걸쳐 스승 이익과 역사 문제에 대해 토론했으며, 스승의 호응 속에 집필을
진행하였다.
집필 도중 그는 종이값이 모자라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스승 이익의 격려를 구했다. 물론 이익 역시 엄청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제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목차를 만들어 결점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마다
않고 이에 응해 주었고, 초고를 보내 잘못된 곳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역시 정성을 다하여 이에
응해 주었다.
스승의 극진한 애정과 격려로 가까스로 집필을 이어가던 안정복은 작업을 시작한지 3년 만인
1759년 드디어 20권의 '동사강목'을 완성하게 된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서술 내용이 과거의
것과는 판이하다. 우선 이전의 역사서들이 한결같이 '삼국사기'나 '고려사', '동국통감' 같은 정사를
베끼거나 추려낸 것인데 비해 '동사강목'은 이 정사에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찾아내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그 때까지 일개 스님의 저작으로 사서 편찬에 전혀 참조조차 하지 않았던
일연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고대사에 관련된 야사들을 과감하게 인용하였다. 그리고 각 책들을
대조하며 그 문헌의 출처를 명확히 하고 내용에 관한 비판을 곁들였다. 한 예로 전라도에 사는
기씨가 기자의 자손으로 기술되어 있는 역사서를 통렬히 비판하며, 전라도의 기씨와 기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이는 기씨 자손들이 스스로 기자의 자손인 것처럼 꾸며 역사를 위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한 후 다시 한 번 대단히 위험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당시 일체
금지되어 있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책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기존의 역사 학자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당시로 보면 현대사의 기술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열조통기'
였다. 조선 태조부터 영조까지의 조선사에 해당하는 이 책의 편찬을 위해 그는 9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그 사료들을 기초로 1767년 56세 때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역대의 각종 저술에 있는
논설을 발췌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전혀 첨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철저한 객관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는 이미 이익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를 격려할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의 고독한 작업은 계속되어 마침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위대한
저서가 세상에 유포되지도 못한 채 초고 상태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의 독특한 편찬
방법은 세간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역사서 편찬 방법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밖에 야사적인 측면이 강한 '잡동산이', '성호사설유선'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작들이다. 또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 '천학문답' 등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 박해와 그와 비슷한 전통적 조선 학자의 서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살면서 사상적으로 무던히도 고민하였던 그는 이같은 많은 저서들을 남겨놓고
1791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의 전통적 봉건 체제가 위협받고 중국으로부터 서학이 밀려들어 가치관이 혼재되고
세계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그는 유교적 견지에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에 아주
민첩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유학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자체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실학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민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 하늘을 연 홍대용(1731-1783)
홍대용은 서인 노론파로서 목사를 지낸 바 있는 홍역의 아들로 1731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덕보, 호는 담헌, 홍지이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였으며, 이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다를 바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으로부터 배웠으며, 그의 사상은 북학파의 실질적 모체인
박지원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몇 번에 걸쳐 과거에 응시한 바 있으나 그 때마다 실패하였다. 1774년 43세 때 음보로 종
9품의 선공감 및 세손익위사시직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이어 1777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그 뒤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1783년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가 이른바 북학론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은 1765년 겨울에 북경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던
덕분이다. 성인이 된 뒤 천문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는 선진의 학문과 서학을 접하고
싶은 욕구에 가득 차 있었고, 이 때문에 평소 청나라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조정이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청나라 사절단에 그의 숙부인 홍억이 서장관으로 지명되자 그는
홍억의 비서역으로 북경을 방문한다. 12월에 북경에 도착한 사절단 일행은 이듬해 2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곳의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대용과
교류를 나눈 사람은 육비, 엄성,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이었다. 그는 이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유학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 종교, 풍속 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는
이 필담을 정리하여 '건정필답'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편 그는 북경에 체류하면서 청나라의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그 책임 부성에
있는 두 사람의 독일인에게서 서양의 지식을 직접 전해듣고, 자신이 홀로 연구해온 천문학에
관한 의견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북경의 천주교 교회에 있던 많은 천문학
전문서와 천체 관측 시설을 돌아본다.
흠천감에서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관상대였다. 그 내부는 외부인에게 공개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우며 그곳 관리에게 부탁해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중국 역대의 천제 관측 기구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들여온 것들도 많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그는 그 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후 북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청에서 사귄 친구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학문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경험담에 감동을 받아 북경 방문을 염원하던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때 북경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안내를
부탁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북경의 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모아 '항전척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그리고 북경 방문의 내용을 집약시켜 '연기'를 편찬했는데, 이는 박지원에게 영향을 미쳐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또 그의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담' 역시 북경 방문에서 얻은 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모든 저서들은 60여 일 동안 머물렀던 북경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그에게는 북경 방문이 새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고, 새땅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문집이 '담헌서'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했고, 인간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생명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상대주의적 자연관에 근거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중국과 서양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상대화하여 서구에 대한 오랑캐 개념을
부정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든 더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래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상대화하여 평등한 존재로 보았다. 또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면서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직업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회 정치 이론을 펼쳤다.
그의 사상과 과학관은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서양 과학과 도교 사상의 영향이
컸겠지만 양반 가문에 태어난 학자가 계급 철폐를 주장하고, 균등한 교육과 능력에 다른 관리
등용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은 비록
그 감상주의적 일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과학 발전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6. '영조실록' 편찬 경위]
'영조실록'은 총 127권 8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24년 8월부터 1776년 3월까지 영조 재위
51년 7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78년 2월에 시작되어 1781년 8월에 완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 등 5인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17인, 도청낭청 19인, 각방당상 27인,
각방낭청 58인, 등록낭청 37인, 분판낭청 30인을 합해 총 183인이었다.
영조 시대의 세계 약사
영조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서서히 유럽과의 무역을 허락하고, 인도는
영국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간다. 한편 유럽에서는 영국의 힘이 강성해지고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힘이 약화된다. 그리고 많은 근대 사상가들이 나타나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속화되어 마침내 대륙회의가
조성된다.
문화면을 살펴보면 문학적으로는 독일의 괴테와 레씽이 부상하고, 음악적으로는 모짜르트,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대가들이 활동한다. 한편 증기기관, 방적기 등의 산업 관련 발명품들이
쏟아지고, 화학적 원소들을 발견하는 등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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