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참 생명의 회복
누가 9:24-25
22. 예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4.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오늘은 부활절 2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이기신 예수 부활에 참여하여 참 생명을 회복하고 새 세상을 열어가는 시기입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생명의 봄이 되었습니다. 개나리와 진달래, 벚꽃과 조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안양천과 한내천이 꽃으로 가득찼습니다. 생명의 신비가 새삼 다가오는 시간입니다.
하지만 길고 긴 겨울의 추위를 뚫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4월을 누군가는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4월을 잔인한 달이라 표현한 사람은 미국 출신의 영국 작가 T.S.엘리엇입니다. 엘리엇은 1992년에 발표한 서사시 " 황무지" 중 제1부 "죽은 자의 매장" 편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씁니다. 그 대목을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겨울은 따뜻했었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어주고
가냘픈 목숨을 마른 구근으로 먹여 살려주었다.“
황무지는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인데, 엘리엇은 생명이 깃들 수 없는 20세기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1914-1918)으로 900만 명 이상이 죽는 참혹한 전쟁을 체험한 엘리엇은 죽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한 그런 깊은 절망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끔찍한 현실보다 그를 더욱 괴롭게 한 것은 그 절망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냉정하고도 황폐한 모습이었습니다. 참된 삶의 의미를 망각한 채 형제와 동료의 죽음 속에서도 자신의 욕망을 꽃피우려는 인간들의 잔인함을 보며, 꽃 피는 4월이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보다 못한 기억과 욕망의 덩어리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4월! 그러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시나요?
저에게는 4.19가 가장 먼저 생각나고, 뒤이어 세월호, 제주 4.3사건 등의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 세 단어는 모두 죽음과 연관이 있는 단어들입니다.
4,19는 이승만의 종신 집권 야욕에 대항하여 청년과 대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혁명입니다. 186명이 희생되었으며 이중 대학생 22명 고교생 36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월호참사는 권력의 잘못으로 귀중한 생명 304명의 목숨을 빼앗은 사건으로 이중 수학여행 가던 단원고 학생들 250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참사는 박근혜 탄핵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은 그동안 우리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4.3사건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현기영 선생에 의해 공론화되기 시작합니다. 현 선생은 1978년 《창작과 비평》에 ‘순이 삼촌’이라는 4.3 사건을 다룬 중편 소설을 발합니다.
그분과는 오래전 잠깐의 인연이 있었습니다. 1979년 속칭 서울 YW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불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 반대 집회 때문입니다. 그 집회로 124명이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는데 그곳에서 현기영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주 4.3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4.3 사건으로 희생된 이들은 2만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학살극을 진두지휘한 인물은 당시 경무부장이었던 조병옥인데 부끄럽게도 우리 감리교 출신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군경 지휘부에 무장 폭도들을 진압하라고 재촉한 이승만 대통령 역시 감리교 장로였습니다. 4.3 사건때 군경과 함께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는 데 앞장선 서북청년회 또한 대부분이 영락교회 등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죠. 이들은 신앙을 빙자한 반공주의로 무장되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을 독려하고 정당화한 곳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1946년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보면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이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냐?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합니다. 4.3사건을 꾸준히 연구해 온 최태욱 목사는 "설교를 들은 영락교회 청년들이 공산주의자를 붉은 용, 말세에 나타나는 사단으로 보았을 것"이며 그의 설교는 서북청년단의 행동을 적극화하고, 그들의 학살행위를 붉은 용을 제거하는 행위로 정당화했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제주 4·3 사건 77주년이 오늘날 한국 교회에 주는 교훈은 신앙을 자신들의 신념으로 둔갑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개인 혹은 집단, 종교, 문화에 대한 적대감을 신앙으로 위장해서는 안 됩니다. 신념화된 신앙은 상대편을 매도하고 증오하며 더 나아가 사람을 살해하는 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권력의 수호자가 되고, 반공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되고, 타 종교나 신념을 악마화하는 체질이 된 것도 다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수 있는 것이죠.
요즘 역사학자 출신 김준혁 민주당 후보의 예전 발언을 문제 삼아 국민의힘이 공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김 후보가 2022년 8월 '김용민 TV'에서 "전쟁에 임해서 나라에 보답한다며 종군위안부를 보내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김활란"이라며 "미군정 시기에 이화여대 학생들을 미 장교에게 성상납시키고 그랬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이대 동문회와 여성단체들은 역사 왜곡이고, 여성비하라며 후보사퇴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를 계기로 이승만이 지시하여 만든 ‘낙랑클럽’이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낙랑클럽’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록된 김활란과 모윤숙이 주도해 만든 고급 사교클럽이었습니다. 낙랑 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국내 주둔하던 미군의 정보기관인 CIC가 작성한 비밀문서에는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하였습니다.
<중앙일보>는995년 1월 18일 자 기사에서 비밀문서의 폭로를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 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 있는 호스티스였다. (중략)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 노릇을 했다.“
이승만 정부의 흑역사를 역사학자가 소개한 것이 잘못이며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를 되돌리려는 너무도 어이없는 추태일 뿐입니다.
본일 수구주의자들로부터 건국의 아버지, 장로 대통령으로 불리는 이승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볼까요.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신채호 선생님은 이승만에 대해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지만 이승만은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었기 때문에 그보다 더 나쁜 역적놈”이라고 평가 한 바 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 유학 초기에 친일 발언과 글을 많이 썼던 인물입니다. 1919년 국제연합에 한국을 위임통치해달라고 청원했던 사람이며, 1946년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군정청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던 사람입니다. 그 공로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죠. 김구 선생의 암살을 지시하였고,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고 해체 시킨 자입니다. 1948년 제주항쟁 때 어린이와 노약자를 포함한 3만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였고, 1950년 6.25가 터지자 국민보도연맹 조직원 30여만 명을 학살하였습니다. 전세가 밀리자 서울 시민들에게 거짓말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한 후 혼자 도망친 자입니다. 심지어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아군 5만여 명을 죽게 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1·4후퇴 시기 방위군 예산과 물자를 군 간부들이 부정 착복함으로써 식량 및 피복 등 보급품을 지급하지 못하여 야기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귀한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누누나 다 그렇겠지만 저는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 말이죠.
예수님도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6:26에 보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는 말씀이 있습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 목숨입니다. 내가 없는 세상의 영화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의 생명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먹이사슬이라는 우주의 질서입니다. 생명을 가진 것들은 생명이 다하기까지는 이 먹이사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 먹이사슬이 제대로 잘 작동한다면 생태계는 균형을 이뤄 지속 가능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환경에 맞게 개채 수도 조절되어 조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거죠. 이 먹이사슬이 유지되는 것은 생산자와 포식자, 그 위의 상위 포식자가 적절한 수효와 관계를 유지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단계의 포식자가 급격히 늘어나거나 줄어든다면 생태계의 균형은 깨지고 심각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농사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모택동이 벌였던 참새박멸 운동이 결국 3,000만 명의 백성들을 굶겨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위하여 생태계의 균형을 깬다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더 엄청난 재앙으로 우리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이사슬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만 남의 생명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죠. 과한 욕심을 부려 먹이사슬을 흔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취미 생활로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범죄입니다. 더욱이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의 생명을 가로채는 행위는 더 큰 끔찍한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그런 집단에 의해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고 비극들이 연출되는 것이죠. 4.19나, 세월호, 4.3사건 등이 그래서 생겨난 비극들입니다.
온 세상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에 대해 예수님은 좀 더 깊은 신앙의 차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찾고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려 하는 사람들은 그 생명을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잃는 사람들은 그 생명을 찾고 구하며 보존하게 될 것’이라는 것(눅 9:24)입니다.
이 말씀이 모순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생명을 잃거나 빼앗겨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자신의 생명을 무엇으로 맞바꿀 수 있겠는가?’하고 반문하신 말씀과 서로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심오한 생명의 신비가 들어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그 목숨을 지키려고 남의 목숨을 취하는 먹이사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빼앗는 자의 입장에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기는 피식자의 입장에서 생명의 신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빼앗는 자의 입장에서 보는 생명의 신비는 목숨의 보존일 뿐입니다. 남의 생명이 자신의 생명만큼 귀중하다는 성찰에 도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빼앗기는 입장에서 본다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남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내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다른 생명이 숨결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죠. 내어주는 사람만이 참 생명의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에 관한 태도에 있어서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생명을 찾고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 자신의 생명을 안전하게 지키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은 자신들이 지키려는 생명을 잃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언젠가는 죽을 목숨인데 온갖 욕심과 추태를 부림으로 지옥을 예약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잃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은 생명을 드림으로 오게 되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없이 부활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남의 생명을 먹으며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를 위해 바쳐지는 생명의 거룩함을 알아야 합니다. 동시에 참 생명의 회복을 위해, 진정한 부활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꿈꿔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나라와 민족, 민중들을 배반하고 미국과 일본에 나라의 운명을 다시 팔아넘긴 파렴치한들이 아직도 이 나라를 죄지우지하는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틀어쥔 이들은 2년 만에 나라를 총체적 누란의 위기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4.10 국회의원 총선거로 이들을 꼭 응징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넘어 생명의 신비와 영생을 가져다주신 주님의 첫 부활에 동참하여 새 세상을 열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