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명징한 자연인데, 어째서 갈등의 장소로 기억되어야 하나
-충북 괴산군 화양구곡 및 선유구곡 인문산행
글 : 이수인(한국산서회) 사진 : 류백현(한국산서회)
화양구곡과 우암 송시열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충청북도 괴산군 청전면의 낙영산과 도명산 발치를 감고 흐르는 화양천 위에 설정된 경관 명소다. 1곡에서 9곡까지 약 5Km 구간 안에 펼쳐져 있다.
조선 인조-숙종 연간에 청나라와의 전쟁(정묘·병자호란) 이후 북벌론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사상적 정치적 흐름을 이끌었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에 의해서 조성되기 시작한 명소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우암 송시열 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 이상 이름이 등장하고, “송자”라는 극존칭을 받았는데, 사후에 간행된 문집 “송자대전”은 왕명에 의해서 국가가 직접 간행한 것이기도 했었다. 성균관 문묘와 종묘에도 위패가 배향되었으니, 그 존숭의 정도를 비교할 대상이 아예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대립세력들은 그를 극단적으로 혐오하였다. 예컨대 그 집에서 기르는 개를 “시열이”라 이름 붙여 조롱했다고 전해오는 정도다.
젊은 시절 파락호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우연히 화양서원에 들렀다가, 무소불위의 횡포를 일삼던 화양서원 재생들에게 망신을 당했고, 그것이 연고가 되어 나중에 대원군이 대대적인 서원철폐령을 내리는 동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쨌든 이렇게 조선 전 시기를 통틀어 우암보다 영향력이 더 컸던 인물은 찾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어쨌든 그런 당사자와 제자들에 의해서 화양구곡이 조성되어 지금껏 보존되어 온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이 없다.
화양구곡의 자연미와 장소성
화양구곡이 그냥 우암 송시열과의 연결에만 의지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자체로 뛰어난 자연미를 갖추고 있다. 빼어난 산세와 맑은 물길이 조화롭고, 하늘로 솟구친 암괴가 벽이나 바닥으로, 또는 덩어리로, 적당한 장소에 딱 맞는 자세를 취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거기에 풀과 나무와 모래가 가세하고, 위로 푸른 하늘과 구름들이 흐르는 물과 조화를 맞추어 주니, 가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이를 만하다. 조선 후기의 혼란스런 정치사적 갈등 속에서, 단호한 권위와 영향력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존재해왔다는 점에서 “장소성” 개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화양구곡과 인접한 선유구곡
화양구곡 1곡인 경천벽(擎天壁)에서 9곡인 파천(巴串)까지는 물길을 따라 직선상으로 이어지는데, 그 거리가 5Km 남짓하다. 그리고 그 파천으로부터 그만한 거리를 띄운 위치-즉 괴산군 송면 쪽에는 선유구곡(仙遊九曲)이 위치한다.
선유구곡의 총길이는 화양구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안내판도 부실한 편이다. 그러나 화양구곡에 비해 더 일찍 주목된 명소였으며, 한때 화양구곡과 선유구곡 일부가 겹칠 정도로 연관성이 존재했었다.
선유구곡은 원래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장시간 이곳에 머물며 자연을 즐겼다는 이야기로 시원이 설명되던 곳이다. 그러나 실상은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영(李寧 1514-1570)이 8경을 설정하여 즐긴 것이 기원이고, 최종적으로 영조 대에 김시찬, 이보상, 정술조, 이상간 등이 화양구곡과 절충하며 구곡으로 설정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이상주, 화양구곡·선유구곡의 완성과정과 화양구곡도(한문학보 18집) 참조).
“구곡”의 유래와 조선적 수용
오늘날 “명승”이란 개념을 이전 사람들은 통상 “팔경”이나 “구곡”으로 일컫곤 했다. 대략 “팔경”은 특정지역을 대표하는 여덟 가지 뛰어난 경관을 말하고, “구곡”도 역시 뛰어난 경치를 이루며 흘러가는 아홉 구비 물줄기를 가리켰다. 유구한 한자문화권 전통에서 일정한 함의를 가지고 쓰였던, 일종의 개념용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팔경”은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을 기원으로 한다. 처음에는 주로 회화적 관심을 통해서 그림으로 형상화 되다가, 나중에는 문학적 소재로도 수용되어 널리 애호되었다.
반면에 “구곡”은 남송의 주희(朱熹,1130-1200)가 복건성 무이산에 설정한 “무이구곡(武夷九曲)”에서 유래했다.
주지하다시피 주희는 금(金)나라의 압박으로 “송(宋)”이 “남송”으로 찌그러들었을 때, 고향인 복건성으로 들어가 무이산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침잠하였다. 그러면서 인근의 절경 아홉 구비를 선정하여 “무이구곡”을 경영하였다.
무이산은 복건성의 숭안현에서 남쪽으로 30여리, 그리고 건양현에서 서북쪽으로 40여리 떨어진 곳인데, 중국 동남부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곳이다. 36개의 봉우리가 어울려 있는데, 그중에서도 9개의 구비가 절대경관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주자는 이 지점에 무이정사를 세우고, 그곳에 머물며 후학을 모아 가르치고, 또 도학의 천착에 매진하였다.
주자가 이룬 이러한 활동의 총화는 나중에 조선의 건국에 이념적 기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름하여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다. 그러나 이 학문은 조선의 역사 전개와 더불어 다소 왜곡되기도 하였다. 즉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파당을 이루어 대립했던, 당쟁의 이데올로기로 되기도 했었다.
송시열이란 문제적 인물
이를 약술하자면, 임진왜란 이후 북인세력에 옹립되어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은 서인들의 추대로 세워진 인조 정권에 의해 퇴출되었다. 따라서 인조는 서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고, 서인들은 이른바 “산림”들을 대거 발탁하면서 왕권을 견제하였다.
우암은 이런 와중에 과거를 거쳐 조정에 들어가 왕자 봉림대군을 가르쳤다. 그러나 곧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였고, 인조가 청에 항복하면서 제자인 봉림대군이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에 인질로 가는 사태를 맞자,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꾸준히 학문에 몰두하여, 때로 왕에게 대의를 밝히는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조야의 신뢰를 받았다.
마침내 인질로 북경에 갔던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는 소현세자를 대신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물론 이 사건은 아버지 인조가 벌인 살인이었음이 충분히 유추된다.), 우암은 다시 출사하여 정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인조의 무덤 비문을 쓰면서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친청파 김자점의 탄핵을 받게 되면서 다시 낙향하게 된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에 대한 설분을 위해 우암에게 전폭적인 신임을 보냈고, 우암 또한 이러한 왕의 뜻을 받들어 다시 출사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 10년만 설분의 대의를 이루지 못하고 승하함으로써 그는 다시 낙향하게 된다.
이렇게 의리와 명분에 따라 출사를 반복하던 우암의 인생은, 그 다음 현종과 숙종 때 있었던 두 번의 예송 논쟁을 통해서 크게 굴절되는데, 최종적으로 숙종에게 제주도 유배형을 받았다가 소환 중 사약 처분을 받았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경종을 후사로 정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우암은 노론측 입장을 대표하여 이를 반대한다. 그러자 숙종은 이제껏 노론에게 주었던 정권을 빼앗아 남인에게 주면서, 노론들을 모두 조정에서 쫓아내버리고 만다. 이른바 기사환국이다.
우암의 묘소는 지금 화양구곡과 가까운 청전면 청천8길 19에 있고, 그를 기려 만든 화양동 서원은 화양구곡 내 제4곡인 금사담 가에 만동묘와 더불어 자리하고 있다.
1곡 경천벽에서 9곡 파천까지의 절경
1곡에서 9곡까지의 절경을 글로 풀어 묘사하는 일은 한마디로 지난한 일이다. 대략 3시간 정도 걸리는 구간의 9개 경관을 하나씩 촘촘히 묘사하는 일은 정해진 지면의 서너 배로도 불가할 것이다. 차라리 한 장의 사진이 느낌을 전달하는데 더 유리할 것이니, 거기로 넘긴다.
히말라야를 품었던 임일진 감독의 마음을 좇아서
오후 내내 화양구곡을 둘러본 일행들은 인근 원탑캠핑장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삼삼오오 여장을 풀어 텐트를 치고 만찬준비를 했다.
오늘 참여자들의 구성은 대단하다. 원로 회원들이 많이 참여해 주셨고, 또 지방에 계신 회원분들도 여러 분 참여해주셨다. 간간히 인문산행에 참여했던 낯익은 단골 참여자들도 있다. 1박 2일 일정이라서 그런 것 같다.
삼삼오오 그룹별로 끼니를 만들어서 즐거운 만찬을 나누었다. 숲과 시내가 조화된 야영장 환경이 매우 쾌적하다. 그런데 인문산행팀은 여기에 보너스 한 뭉치를 더 얹었다.
작년에 히말라야에서 안타깝게 산화한, 우리 산서회 회원이기도 했던 임일진 감독의 작품 “알피니스트”를, 유족의 협조를 받아 참가자들에게 상영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2016년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 공개했던 영화로, 2013년 무산소로 해발 8848m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가 캠프4(8000m)에 내려와 숨을 거둔 서성호 씨의 마지막 모습을 비롯해서, 산에서 생을 마감한 산악인들의 안타까운 최후를 기록한 작품이었다.
대학시절 산악부에서 알피니스트의 꿈을 꾸었던 임 감독은,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으로 가서 스포츠 클라이밍을 영상에 담는 일을 시작으로,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히말라야 고산에만 9번을 등정해 네팔 촐라체, 에베레스트, 파키스탄 스탠픽과 가셔브룸 등의 봉우리를 화면에 담았었다. 김창호와 함께 떠나던 마지막 원정 때, 우리 산서회 월례회에 나와 인사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원형 보존과 안내판 정비 등에서 아쉬움이 많았던 선유구곡
다음날 아침을 먹고 우리는 영지를 정리했다. 그리고 선유구곡으로 이동하였다.
선유구곡은 1곡 선유동문에서 경천벽, 학소대, 연단로, 와룡폭포, 난가대, 구암, 기국대, 은선암으로 이어지는 구성이었다. 화양계곡에 비해 종심은 다소 짧으나, 아기자기한 형상이나 신선적 아취가 좀 더 짙은 모습이었다.
((공지)) 제5차 남한산성 인문산행 예고
주제 : 비극적 역사 현장인 남한산성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의 교훈을 탐색하자.
일시 : 2019년 7월 6일(토)
회비 : 1만원
출발 : 7. 6. 09:40에 전철 8호선 산성역 집결, 2번 출구로 나가서 대중교통편으로 남한산성 내 행궁 앞에 10:10까지 집결
준비물 : 간단한 답사 복장. 중식 및 간식, 음료수. 날씨에 따라 우산이나 우의.
참가문의 및 신청 : 다음 카페 한국산서회(http://cafe.daum.net/peakbook)의 <인문산행 공지> 란에 댓글로 신청하며, 문의는 010-2725-0026(조장빈)
첫댓글 글 감사합니다 .
이수인 선생님, 애 쓰셨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달 후기-너무 쫓기며, 어렵게, 부실하게 썼습니다. 엄청 반성하고, 다음에는 좀 제대로 써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ㅡ내용이 저에겐 너무 좋아 몇번 읽어습니다
후기 읽으며
화약구곡 놓친 이야기
다시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중도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쓰신 글 즐감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