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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배(流配)란
형벌의 한 가지로 처음에는 멀리 내쫓는다는 뜻으로 쓰다가, 후에 먼 섬이나 시골 등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된 지역 안에서만 살게 함을 이르는 말로 도배(徒配), 정배(定配), 안치(安置) 등의 용어로도 쓰였다.
우리말로는 ‘귀양’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 형법지(刑法志)에는 관리로서 재물을 받아 법을 어긴 사람은 그 직전(職田)을 회수하고 ‘귀향(歸鄕, 고향으로 돌려보냄)’ 보낸다고 했다. ‘귀향’이 ‘귀양’으로 변한 것은 초성의 ‘ㅎ’이 탈락되었기 때문인데, 죄를 지어 관직에서 쫓겨난 사람을 고향으로 보냈던 것에서 유래한다.
우암송시열과 다산정약용의 유배지인 장기 마현리(현 장기초등학교 자리)
□ 조선의 형벌제도
조선의 형벌제도는 중국 명나라의 대명률(大明律)을 따라 태형(笞刑), 장형(杖刑), 도형(徒刑), 유형(流刑), 사형(死刑)의 5가지로 나눠 시행했다. 대명률은 1397년 반포되어 명·청 5백여 년을 통해 형률의 근본이 된 중국의 법전이다.
* 태형(笞刑)
태형은 가벼운 죄를 지은 죄인에게 물푸레나무로 만든 매를 사용해 10∼5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눠 둔부를 치는 벌이다.
* 장형(杖刑)
장형은 태형보다 무거운 죄를 지은 경우로, 60∼100대까지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둔부를 치는 벌이다. 흔히 곤장이라고 말하는 형벌이다. 리델 주교 옥중기 중에는 "곤장 10대를 맞자 살점이 심하게 떨어져 나가고 그들이 회복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고 씌어 있을 정도이다.
* 도형(徒刑)
도형은 지금의 징역형과 유사하며, 중죄를 범한 자에게 노역을 시키는 형벌이다. 장 60대부터 최대 장 100대를 맞고 죄질에 따라 1년에서 최대 3년까지 노역 기간을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 유형(流刑)
멀리 떨어진 지방에 내쫓아 거주의 제한을 둔 벌이다. 2000리, 2500리, 3000리 세 등급의 유배 거리가 있었지만, 중국과 달리 국토가 좁아 유배지로 곧장 가지 않고 거리에 맞게끔 빙빙 돌아가기도 했다. 유배지는 함길도, 평안도를 비롯하여 경상도, 전라도도 자주 이용되었으며, 제주도, 거제도, 남해도, 진도, 추자도, 흑산도 등 섬 지방도 많이 활용되었다. 대명률은 국토가 좁은 조선에서 적용하는 데 문제가 많았다. 그래서 1430년(세종 12)에 배소(配所)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고친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을 제정하여 적용하였다
* 사형(死刑)
사형은 형벌 중에서 극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은 목을 매는 교형(絞刑), 목을 베는 참형(斬刑), 독약을 마시게 하는 사사(賜死), 죄인을 일단 처형한 뒤에 다시 그 시체를 머리, 왼팔, 오른팔, 왼다리, 오른다리, 몸통의 순서로 6부분으로 잘라 각지에 보내어 백성들에게 보이는 능치처참형(陵遲處斬刑) 등으로 나뉜다.
큰 역모를 범한 역적의 경우엔 참형으로 베어낸 머리를 만인에게 공개하는 효수(梟首)에 처해지기도 했다. 또한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는 대역죄가 아닌 이상 그들의 품위를 위해 사형이 아닌 사약(賜藥)을 내렸다. 사약은 왕이 내린 약이라는 뜻이며,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사배(四拜)하고 받아 마셨다. 사배란 한 번 엎드려 네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말한다.
우암송시열이 유배 중에 심었다고 하는 은행나무(장기초등학교 내). 우암이 심었다는 할아버지나무(앞쪽)는 고사했고, 고목이 된 아들나무(가운데 큰 줄기)을 중심으로 좌우에 손자나무가 돋아나 자라고 있다.
□ 안치(安置)
거주의 제한을 받는 유배를 달리 말하는 것르로 본향안치(本鄕安置), 절도안치(絶島安置), 위리안치(圍籬安置), 천극안치(栫棘安置) 4가지가 있다.
* 본향안치 : 본인의 고향에서만 유배생활을 하게 한 것으로 비교적 죄가 가벼운 죄인의 경우에 해당된다.
* 절도안치 : 홀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에 격리한 것이다.
* 위리안치 : 집 둘레를 탱자나무 가시덤불로 둘러싸 외인의 출입을 금했다. 10일에 한 번 음식을 넣어주는 것 외에는 대문은 항상 밖에서 자물쇠로 채웠으며, 담장 안에 우물을 파서 생활하게 했다.
* 천극안치 : 위리안치된 죄인이 기거하는 방 둘레에 탱자나무 가시를 둘러친 것으로 안치 중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이다.
□ 장기는 왜 유배지로 유명해졌을까
*배소상정법(配所詳定法)의 “경상·전라·평안·함길도 내 삼십식외빈해각관(三十息外濱海各官)” 이라는 규정에 부합
-거리 : 유3,000리(실제로는 860리)에 해당하는 거리인 30개 이상의 역[三十息]
-바닷가[濱海]에 위치
-관리할 관아[各官]인 장기현이 있는 곳
□ 장기까지 유배 오는 과정
*교통수단 : 말(관원의 경우)
*하루 이동거리 : 80∼90리
*장기까지의 거리 및 소요시간 : 890리(약 10일)
*인솔자 : 의금부의 관원
*보수주인(保受主人) : 죄인의 유배생활을 위탁받아 관리하는 집주인으로 고을 수령이 지방의 유지 중에서 임명하며, 매월 2회 장기현감의 점고(點考)를 함.
옛 장기현의 동헌인 근민당(近民堂, '백성을 가까이 하는 집'이란 뜻이다)(장기면사무소 내)
□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한 주요인물
*설장수(偰長壽, 1341-1399)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운재(芸齋). 부원후(富原侯) 설손(偰遜)의 아들이다. 본래 위구르 사람으로 1358년(공민왕 7) 아버지 설손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로 올 때 따라와 귀화(歸化)하였다.
1360년 경순부사인(慶順府舍人)으로 있던 중 부친상을 당했는데, 서역인(西域人)이므로 왕이 특별히 명해 상복(喪服)을 벗고 과거에 나아가게 하였다. 1362년 문과에 급제해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오르고, 왜구를 퇴치할 계책을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어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으며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에 녹권(錄券)되었다. 1387년(우왕 13)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389년(창왕 즉위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우왕(禑王) 손위(遜位)의 표문(表文)을 가지고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공양왕(恭讓王)을 세울 때 모의에 참여, 공이 있었으므로 1390년(공양왕 2)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받았고, 1392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겸하였다. 이 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일당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太祖)의 특명으로 1396년(태조 5)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되고, 계림(鷄林: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을 본관으로 받고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398년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계품사(啓禀使)로 명나라에 가던 도중 명나라 태조가 죽었으므로 진향사(進香使)로 사명(使命)이 바뀌어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전후 8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한, 조선 최초의 외교관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우암 송시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사람마다 호불호의 차이가 극명하다. 하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이름이 등장한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우암 송시열 초상
이렇듯 한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우암이 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에 밀려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것은 1675년 6월 10일이었다. 그는 약 4년간 이곳 마현리 오도전(吳道全)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그는 17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국노거유(國老巨儒)답게 장기사람에게 그의 사상과 철학들을 한 움큼 심어놓고 갔다.
우암 선생이 장기에 머물렀던 흔적은 지금은 터만 남은 죽림서원(竹林書院)과 ‘우암송시열선생적거실기(尤庵宋時烈先生謫居實記)’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유배생활에 동행한 가족 : 부실, 동생(시도, 시걸), 아들(기태), 손자(주석), 증손자(일원), 노비들
-집 주변에 우물을 파서 붕어를 기르고, 행단을 일구고, 양봉을 함
-뜰 앞에 채전밭을 만들어 약초와 생강을 가꿈
-집 안에서는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가 변소를 따로 쓰게 함
-유배지에서 부인을 사별한 뒤 제문을 보냄 : 부인에 대한 미안함 표현
-학질과 송대감(宋大監)
-설날 풍속(차례 지내는 시각)의 변화 : 자정→아침
-우암은 위리를 넘었을까 : 두일포, 석남사지
-보수주인 오도전의 개명 : 吳道傳→吳道全
-장기현감 손만웅과 암행어사 이야기
우암송시열선생사적비(장기초등학교 내)
*김수흥(金壽興, 1626-1690)
조선후기 도승지, 호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또는 동곽산인(東郭散人). 생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 양부는 동부승지(同副承旨) 김광혁(金光爀)이고, 양모는 광산김씨로 동지중추부사 김존경(金存敬)의 딸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 해 문과중시에 역시 병과로 급제한 뒤 부교리·대사간·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666년(현종 7)에 호조판서, 1673년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고 이듬 해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문제(服制問題)로 남인에게 몰려 부처될 뻔하였고, 그 해 8월 현종이 죽자 양사(兩司)의 탄핵으로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 해 풀려나와 양주로 물러가 살았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어 다시 영의정에 올랐으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 해 배소에서 죽었다.
퇴우당김수흥선생유적비(장기충효관 내)
*송 영(宋鍈, 1733-1812)
조선후기 사헌부지평, 장령, 사간원헌납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화숙(和叔). 아버지는 송양필(宋良弼)이며, 송광필(宋匡弼)에게 입양되었다. 1753년(영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의 지평(持平)·장령(掌令), 사간원의 헌납(獻納)·집의(執儀) 등을 역임하였다.
1772년 출숙(出肅, 관리로 임명되면 직접 왕에게 가서 인사를 하는 예)을 어긴 죄로, 1775년 패초(牌招, 왕이 필요한 신하의 입시를 명할 때 패를 사용하던 제도)를 어긴 죄로 2회에 걸쳐 장기현(長鬐縣)에 유배되었다.
1775년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며, 정조 초기에도 계속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793년(정조 17) 한성부좌윤으로 있을 때 관아에 늦게 이르렀다 하여 파직당하였다. 1796년 의금부당상으로 있다가 법관으로서 법을 잘 지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길주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4월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의 주청으로 풀려났다. 1812년 5월 대호군으로 있다가 죽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말기의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 사암(俟菴), 여유당(與猶堂), 자하도인(紫霞道人)이다.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책롱사건(冊籠事件)에서 비롯된 신유사옥 때 장기로 유배된 후 18년의 유배 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저서에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이 있다.
다산 정약용 초상
1795년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는데, 이때 천주교에 깊이 젖은 금정역 주민들을 회유하여 개종시킨 일 때문에 후일 배교자(背敎者)로 낙인찍혔다.
이후 1797년 황해도 곡산부사로 2년간 봉직하였다가 내직으로 돌아온 지 1년도 못 되어 정조가 죽고, 1801년 책롱사건(冊籠事件)으로 체포, 투옥되었으며, 1801년 출옥과 동시에 장리로 유배되어 마산리 성선봉(成善封)의 집에서 7개월 간 머물렀다. 다산 선생은 장기에 머무는 동안 장기 사람들의 생활과 정서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기성잡시(鬐城雜詩) 27수,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 등 수백 편의 시를 남겼다. 그의 싯구에서 외롭고 고달픈 그의 유배생활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온돌방 한 칸에다 시원한 마루 한 칸
-새벽에 일어날 때 머리통은 찧더라도
-밤에 누우면 무릎은 펼 수 있어
-울을 뚫고 물을 끌어 채마밭에 대었다네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
-마당을 절반 떼어 배추를 심었는데
-푹푹 찌는 비린내에 파리가 너무 많아
-모기떼가 괴롭게 침상에 덤비네
-살 깨무는 빈대 통에 잠을 잘 수가 없고
-담바고가 지금 새로 나와서 귀양살이 하는 자에게 제일이라네
다산정약용선생사적비(장기초등학교 내)
*기타(중요하지는 않아도 흥미유발을 위해 해설이 필요한 인물)
-06, 07번 사육신 박팽년의 친척 박용이(朴龍伊), 박사평(朴斯枰)
-13∼16번 조경치(曺敬治)의 가족들 : 노비
-20번 강처빈(姜處賓) : 충군(充軍, 강제로 군복무를 시킴)
-43번 홍상범의 처 희순(喜順) : 노비(좌의정 정존경의 딸, 장기도착 이튿날 자결)
-92, 95번 심의경(沈宜慶) : 2회에 걸쳐 장기에 귀향
-93번 김창순(金彰淳) : 과거시험 부정행위
□ 장기와 관련된 속담
* “장기도 나팔 있나?”
장기현은 경주부의 속현이었다. 어느 해 장기현감과 경주부윤이 마침 숙질간으로, 장기현감이 경주부윤의 숙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조카 되는 경주부윤의 지휘 감독을 받는 사이가 되었으니 서로간의 처신이 어려웠다 한다. 어느 날 당면한 사항이 있어 경주부에서 각 고을 수령을 소집하였는데, 하급자가 상급기관으로 등청할 때에는 나팔을 불면서 올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기현감은 나팔을 불면서 경주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시끄러운 나팔소리를 들은 경주부윤은 화가 나서 경주부의 관원에게 어느 고을 원인지 알아보라 하였다. 경주부의 관원이 사실을 확인해 보니 장기현감이었다. 경주부윤은 자기 숙부를 어찌할 수도 없고 해서 "장기도 나팔 있나?" 하면서 난처해했다 한다. 이후 장기 고을 사람이 외지로 나가면 외지인들이 농담 삼아 묻기를 "장기도 나팔 있나?" 하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 “장기 원님 밥상에는 국도 파래 장도 파래”
장기 원님의 밥상에는 국에도 파래가 들어가 있고, 된장국에도 파래가 들어가 있다는 말인데, 장기는 워낙 궁벽한 곳이라 원님 밥상의 반찬마다 고기는 없고 바닷가에 흔한 파래만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남쪽지방인 기장(機長)에 전하는 속담에 “기장 원님은 국도 파래 장도 파래”라는 게 있다. 어느 게 먼저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어느 한 곳에서 생겨나 이름이 비슷한 고을인 장기와 기장 양쪽에 통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기 원님은 울면서 오고, 울면서 간다.”
장기는 워낙 멀고 궁벽한 곳이라 장기현감으로 발령받은 사람은 장기현으로 부임하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막상 인심이 좋은 장기에서 근무하는 동안 백성들과 정이 들어 떠날 때는 너무나 아쉬워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
* “봄 샛바람에 장기 목장성 말 얼아 죽는다.”
동해안에는 2월이 되면 흔히 ‘샛바람’이라고 하는 차가운 북동풍이 바다쪽에서 불어온다. 봄이 왔지만 봄이 아닌 계절이 3월까지 이어지고, 사람들은 겨울 못지않은 추위를 느끼게 된다. 장기 목장성은 국가에서 운영하던 말목장으로 이곳에서 많은 말을 방목했는데, 겨울철에도 잘 견디던 말들이 봄 샛바람에 얼어 죽는다는 뜻이다. 장기의 봄 샛바람이 그 만큼 차다는 뜻을 과장해서 나타낸 말이다.
□ 장기읍성(長鬐邑城)
1011년(현종 2)에 여진족이 해안으로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흙으로 쌓았다. 그 뒤 1439년(세종 21)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돌로 다시 쌓았으며, 동해안의 주요 군사기지 및 관아로 사용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둘레는 2,980척(약 1,392m)이고, 높이는 10척인데, 성 안에는 우물 4곳과 연못 2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둘레는 약 1.3㎞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3.7∼4.2m이며, 두께는 아래부분이 약 7∼8m, 윗부분이 약 5m이다. 동쪽·서쪽·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고, 수구(水口) 1곳, 치성(雉城) 12곳이 있으며, 성 안에서는 우물 5곳과 연못 3곳이 확인된다.
이 읍성은 산 위에 위치하여 산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곧 읍성은 해발 252m 동악산(東岳山)에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은 해발 약 100m 산 정상의 평탄면에 축조되었는데, 동쪽과 서쪽이 긴 마름모꼴 모습이다. 산 위에 읍성이 자리한 것은 서쪽으로 연이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주변 고을이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농성하면서 시간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장기현의 진산인 동악산 기슭에 자리잡은 장기읍성. 사진 가운데 옹성(甕城)이 있고, 안쪽에 북문이 보인다.
사적 제 386호인 장기읍성 안에는 주거지(읍내리)가 있고, 장기향교와 동헌터가 있는데, 동헌인 근민당(近民堂)은 면사무소 안에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동문 근처에 ‘배일대(拜日臺)’를 새긴 장대석이 있는데, 장기현감이 해맞이를 할 때 해를 향해 절을 한 곳이라 전해진다.
다음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장기읍성 동문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지은 시인데, 첫머리에 장기일출의 장관이 잘 묘사돼 있다.
동문관일출(東門觀日出)
天孫織出紅錦帳 직녀성이 붉은 비단 장막을 짜 내어
掛之碧海靑天上 푸른 바다 푸른 하늘 위에 걸어 놨네
赤光照水魚龍盪 붉은빛 물에 비쳐 어룡이 동탕하고
萬族齊首盡東嚮 뭇 어족 일제히 동쪽으로 머리 돌리네.
金鉤一閃波細漾 황금 고리 번쩍 하자 잔물결 일어나고
銅鉦畢吐塵無障 구리 징 같은 태양이 오르자 먼지 장애 없구나
宛轉上天人共仰 두둥실 하늘로 솟아 사람들 모두 우러르고
碧霞漸散歸峯嶂 푸른 노을 점차 흩어져 산봉우리로 돌아가네.
初如御駕出宮輿衛壯 처음에는 어가 출궁 때 근위병이 장엄하게 호위하듯 하더니
終如御駕上殿收儀仗 마지막엔 어가가 전각에 오르자 의장대가 해산한 것아
小臣憶昔心惻愴 그 옛날을 생각하며 소신의 마음이 슬퍼진다
장기읍성 동문터에 있는 옛 장기현의 해맞이 명소인 배일대(拜日臺). 이곳에서 장기현감이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절을 했다 한다.
정약용은 1801년(순조 1) 2월 8일 신유옥사(辛酉獄事)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고 3월 9일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 5월 어느 날 동문에서 해돋이를 구경하면서 마치 군주가 거둥하던 때와 같은 장엄한 기분을 느껴 이 시를 짓고, 정조를 배종(陪從)하던 지난 날을 추억하며 눈물지었다.
첫댓글 제가 작성하여 13들과 함께 공부했던 장기유배체험촌 해설자료입니다. 많은 활용 바랍니다.
선생님 간만에 카페 들렀더니 13기님가입도 하시고. 장기유배촌자료
올려주셨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좋은자료들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