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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진화 심리학의 이론적 기초』에 포함될 것입니다.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과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 3
Robert Wright는 『도덕적 동물』에서 사회생물학에 쏟아진 온갖 비난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진화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에게는 한 때 그런 이름 – Wilson의 적절하고 유용한 용어인 “사회생물학(sociobiology)” – 이 있었다. 그러나 Wilson의 책이 너무나 많은 공격을 초래했고, 악의적인 정치적 의도를 품고 있다는 비난을 너무나 많이 초래했으며, 사회생물학의 내용에 대한 너무나 많은 희화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 단어는 오염되었다. 그가 정의했던 이 분야의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제는 그가 붙인 이름표를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간결하고 일관된(compact and coherent) 일련의 교의들에 대한 충성으로 묶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름들 – 행동 생태학자들(behavioral ecologists), 다윈주의적 인류학자들(Darwinian anthropologists), 진화 심리학자들(evolutionary psychologists), 진화론적 의학자들(evolutionary psychiatrists) – 로 통한다. (『The Moral Animal』, 6쪽)
이런 생각은 널리 퍼진 것 같다. Richard Dawkins는 『The Handbook of Evolutionary Psychology(David Buss 편집)』에 부친 후기에서(975쪽) 자신도 진화 심리학이 사회생물학의 완곡한 변형(euphemistic mutation)이라고 잘못 알았던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고백했다.
John Tooby와 Leda Cosmides는 이런 오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가끔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이 그냥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이며 사회생물학이 받았던 나쁜 정치적 압박을 피하려고 이름을 바꾼 것이라는 이야기를 읽는다. (기록을 볼 때) 논쟁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웃기는(amusing) 일이긴 하지만 이런 주장은 역사적으로나 내용적으로 틀렸다. 첫째, 보통 진화 심리학자들은 사회생물학(또는 행동 생태학behavioral ecology, 또는 진화 생태학evolutionary ecology)을 존중해왔으며 방어해왔다. 그것은 현대 진화 생물학의 매우 유용하고 매우 정교한 분과이며 몇몇 [진화 심리학자들]은 그 문헌[사회생물학을 표방한 잡지 등]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진화를 행동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길고 강렬한 논쟁들 때문에 이론적, 경험적 기획이 명확히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서로 눈에 띄게 대립하는 견해들에 서로 다른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1980년대에 Martin Daly, Margo Wilson, Don Symons, John Tooby, Leda Cosmides, 그리고 David Buss는 이 새로운 분야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 때로는 Palm Desert에 있는 Daly와 Wilson의 캥거루쥐(kangaroo rat) 야외 연구지(field site)에서, 때로는 Santa Barbara[University of California, Santa Barbara를 말하는 듯]에서 그리고 행동 과학 고등 연구 센터(Center for Advanced Study in the Behavioral Sciences)에서 많은 토의를 했다. 이 논의에서 정치나 압박은 끼여 들지 않았다. 우리는 똑 같은, 내용 없는 인신공격성 공격들이 우리의 경력을 따라다닐 것이라고 (올바르게) 예측했다. 우리가 논의 했던 것은 이 새로운 분야가 심리학(psychology, 심리적인 것) – 심리적 구조(architecture)를 구성하는 적응들의 특징을 기술하는 것 – 에 초점을 두고 있지만 사회생물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회생물학은 계산적(computational) 수준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며, 심리적 메커니즘들을 지도화(mapping)하는 것에 거의 관심이 없으며, 선택 이론들(selectionist theories)에 대부분 초점을 맞춘다. 진화 심리학은 그 주제와 이론적 입장 모두에서 – 사회 생물학이 그것에 선행했던 행태학(ethology)과 다르고, 인지 심리학이 행동주의 심리학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 사회생물학과 단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각각의 경우에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던 것이다. (「Conceptual Foundations of Evolutionary Psychology」, 『The Handbook of Evolutionary Psychology(David Buss 편집)』, 15쪽의 주3)
Tooby와 Cosmides는 「Conceptual Foundations of Evolutionary Psychology」라는 글(6쪽)에서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in the narrow sense)과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in the broad sense)을 구분한다.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은 “인간의 진화한 심리적 메커니즘들을 지도화(mapping)하려는 과학적 기획”으로 정의되며,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은 “인간 종의 진화한 [심리] 구조에 대한 점점 나아지는 지도화에 비추어 사회 과학(그리고 의학)을 재구성하려는 기획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것은 이들의 구분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소개하려는 것은 David Sloan Wilson이 「Evolution, Morality and Human Potential」(『Evolutionary Psychology: Alternative Approaches(Steven J. Scher & Frederick Rauscher 편집)』, 58쪽)에서 narrow evolutionary psychology와 broad evolutionary psychology라고 구분한 것, Matteo Mameli가 「Evolution and psychology in philosophical perspective」(『The Oxford Handbook of Evolutionary Psychology(R. I. M. Dunbar, Louise Barrett 편집)』, 25쪽)에서 narrow-sense evolutionary psychology와 broad-sense evolutionary psychology라고 구분한 것, David Buller가 『Adapting Minds: Evolutionary psychology and the Persistent Quest for Human Nature』에서 evolutionary psychology와 Evolutionary Psychology(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을 대문자로 썼다)를 구분한 것이다.
여기에서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은 심리적 현상을 진화론을 도입하여 설명하려는 경향 전체를 일컫는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은 이중 유전 이론(Dual Inheritance Theory) 또는 유전자-문화 공진화(Gene-Culture Coevolution), 진화 인류학(Evolutionary Anthropology),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Evolutionary Psychology), 인간 행동 생태학(Human Behavioral Ecology), 인간 행태학(Human Ethology), 사회생물학(Sociobiology) 등을 포괄한다. 반면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은 Jerome Barkow, David Buss, Leda Cosmides, Martin Daly, Steven Pinker, Donald Symons, John Tooby, Margo Wilson 등이 주도하는 한 학파를 말한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Tooby와 Cosmides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이 진화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진화 심리학이란 용어를 누군가 썼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용어를 대대적으로 퍼뜨린 사람들은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이다.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의 핵심 명제들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학파를 가리키기 위해 행동 생태학 등의 용어를 썼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들 중 일부가 진화 심리학자로 불리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혼동이 생겼다.
아마도 진화론자들 사이에 있는 심각한 이견들이 상당 부분 해소될까지는 진화 심리학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혼란이 계속될 것 같다. 그 때까지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좁은 의미의”, “넓은 의미의”라는 딱지를 붙여야 할 것 같다. 나는 조만간 이견이 해소될 것이라고 믿는다.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 어떤 논쟁들이 있으며 그 논쟁에서 나의 입장이 어떤지는 다른 곳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나는 대체로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의 입장을 지지한다.
또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도 이견은 있다는 점이다.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과 행동 생태학자들 사이의 이견은 떠들썩한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의 이견은 적어도 떠들썩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Cosmides와 Tooby는 여러 논문들에서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의 핵심 명제들을 매우 명쾌하게 서술했으며 그들의 논문들은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의 구심을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라고 불리는 여러 학자들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어떤 때에는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의 명제보다는 행동 생태학의 명제에 더 충실한 것 같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과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 사이의 경계가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다.
진화 심리학 연구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미국에서도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을 믿는다. 하지만 학자 공동체에서는 특히 심리학계에서는 창조론이 사실상 추방되었다. 사실상 모든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이 진화의 산물임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심리학자들이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라고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진화의 산물임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진화론을 심리학에 도입하고자 하는 의도에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저명한 진화론자인 Richard Lewontin이나 Steven Jay Gould가 심리학에 대한 글을 썼다 하더라도 (그들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도 그들은 진화 심리학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들, 일부 페미니스트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 전통적 인지 심리학자들, 여러 사회 과학자들 모두가 진화론을 인정하지만 그들과 넓은 의미의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심연이 존재한다.
자세한 차이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진화 심리학에 적대적인 학자들은 진화론이 심리학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인간의 경우 진화 과정에서 매우 독특한 특성 즉 일반적 학습 메커니즘을 만들어졌으며 거의 모든 것이 학습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 과학자들이 진화론을 무시한 채 어떻게 문화가 인간을 주조하는지를 연구한다. 또한 인지 심리학자들은 일반적 학습 메커니즘의 규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는 이들이 진화론을 무시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들은 진화론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진화 심리학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20세기 후반의 진화 생물학의 발전(William Hamilton, George Williams, John Maynard Smith, Robert Trivers, Richard Dawkins 등)과 Noam Chomsky의 언어학 혁명 등은 여전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둘째, 진화 심리학은 기존의 사회 과학과 심리학의 명제들을 하나하나 뒤집고 있다. 진화론자는 동시에 기독교식 창조론자일 수 없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진화론을 증오하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진화론자는 프로이트주의자일 수 없으며 마르크스주의자일 수 없다. 이것이 프로이트주의자와 마르크스주의자가 말로는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진화론이 심리 현상이나 사회 현상에 적용될 때에는 발끈하는 이유다. 그들의 태도는 육체의 진화는 인정해도 정신의 진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교황의 태도와 비슷하다. Lewontin과 Gould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진화론자라고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정신을 다룰 때 그들이 사실상 진화론을 포기하기 때문이다. 교황의 말을 보자.
인간의 몸은 그 이전에 존재했던 생명체에서 생겨났다 하더라도(If the human body take its origin from pre-existent living matter), 영혼은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셨다. ...... 결과적으로, 영혼이 생명체의 힘에서 출현한다고 또는 생명체의 부수적 현상에 불과하다고 간주하는 – 이것은 진화론을 부추기는 철학과 부합한다 - 진화론은 인간에 대한 진리와 양립하지 못한다. 또한 개인의 존엄을 뒷받침할 수도 없다. (『빈 서판』, 332쪽, page 186, 교황이 1996년에 했던 연설)
셋째, 진화 심리학이 악을 정당화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곳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말도 안 된다. “진화 심리학이 악을 정당화한다”는 명제의 근거가 너무나 희박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이 의식적, 무의식적 핑계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성직자들이 진화론을 거부할 때 내세우는 이유는 “사람이 동물이라고 가르치면 아이들이 동물처럼 사악해질 것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성직자들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으면서 십일조가 줄어드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진화 심리학에 적대적인 학자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의 학설이 무너져서 고객들이 줄어드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