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문가의 묘역을 찾아
◇ 효간공(孝簡公) 이정영(李正英) 묘역 : 동작구 상도동 산 32-79, 산 44-7(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94호)
- 조선 후기에 명필로 형조판서를 지낸 이정영(李正英)의 묘
조선 후기의 문신인 형조판서 서곡(西谷) 이정영(1616∼1686)의 묘이다. 이정영은 본관은 전주(全州)로, 정종의 10남 덕천군의 7대손이자 형조판서를 역임한 이경직의 아들이다.
이정영은 1636년(인조 14) 별시문과에 병과로 합격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소현세자가 볼모로 중국 선양시(심양)에 갈 때 따라갔으며, 귀국해서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이정영은 1651년(효종 2) 교리로서 술에 취하여 경연에 나갔다가 탄핵을 받아 파직하였으며, 그 후 1660(현종 1) 대사간이 되었고, 이듬해 진위 겸 진향 부서로 중국 청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674년에 현종이 죽자 산릉도감 당상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고, 1677년(숙종 3)에는 형조판서로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부정을 저지른 죄목으로 철원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이어 판돈녕부사가 되었고, 1685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소 앞에는 묘비·상석이 있고, 좌우로는 망주석(望柱石: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돌기둥)· 문인석이 있다.
그는 명필로 유명했으며, 특히 전서와 주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신도비와 비의 글씨를 썼다. 대표적으로는 이순신 명량대첩비, 호판 이경직비, 영안위 홍주원비, 정여창비 등이 있다.
◇ 동래 정씨 임당공파 묘역(東萊鄭氏林塘公派墓域) : 동작구 사당동 산 32번지 83호 (서울시 유형문화유산 제61호~ 제63호)
- 조선 전기의 동래 정씨 좌의정 정유길, 좌의정 정창연, 형조판서 정광성의 묘소가 조성된 곳
총신대학교 못미처 지하철 남성역 남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관악산 줄기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동래 정씨 임당공파(林塘公派)의 가족묘지가 있다.
이 묘역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된 임당 정공 신도비(林塘鄭公 神道碑), 제62호로 지정된 수죽 정공 신도비(水竹鄭公 神道碑), 제63호로 지정된 제곡 정공 신도비(濟谷鄭公 神道碑) 외에 묘소가 각각 자리하고 있다.
동래 정씨 임당공파는 조선초 중종 때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鄭光弼)을 위시하여 그의 손자로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임당 정유길(鄭惟吉: 1515~588)과 그의 아들인 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수죽 정창연(鄭昌衍: 1552~636), 현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제곡 정광성(鄭廣成: 1576~655)의 아들 효종~현종 때 정태화(鄭太和) · 정치화(鄭致和) 형제가 영의정을 지냈던 집안이다.
이곳 가장 높은 지대에는 임당 정유길의 묘소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대리석으로 된 신도비의 총 높이는 247㎝로서 밑받침인 대석(臺石)과 머리 부분의 이수(螭首)의 조각은 매우 정교한 편이다. 이 비의 비문은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글씨는 죽남 오준(吳竣)이 썼다.
정유길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선조 때 좌의정을 지냈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으며 글씨는 송설체(松雪體)로 유명하였다.
묘소 가장 아래쪽에는 수죽 정창연의 묘소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55년(효종 6)에 건립된 이 비석의 재료는 백과 석으로 총 높이가 303㎝가 되며, 특징은 역시 받침돌과 이수의 조각이 매우 정교한 편이다. 이 비의 비문은 이경여(李敬輿)가 짓고, 글씨는 심지원(沈之源)이 썼다.
정유길의 묘소에서 조금 오른쪽으로는 제곡 정광성의 묘소와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1657년(효종 8)에 건립된 이 비의 재료도 백과 석으로 총 높이가 235㎝로서 앞의 정유길 · 정창연의 신도비와 같이 받침돌과 이수의 조각이 매우 정교한 편이다. 이 비의 비문과 글씨는 이경석(李景奭)의 솜씨이다.
그리고 정창연 묘소의 바로 위쪽에는 정광성의 아들인 양파 정태화(鄭太和)의 묘소가 있는데 신도비는 세워져 있지 않다. 정태화는 사가독서(賜暇讀書) 하는 호당(湖堂)에는 뽑히지 않았으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동래 정씨 임당공파는 ‘회동(會洞) 정씨’로 불린다. 그 까닭은 영의정 정광필 때부터 현재 중구 회현동 1가 14번지에 대대로 거주하였기 때문이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보면
「정광필이 살던 집이 회현방(會賢坊)에 있는데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일찍이 귀신이 말하기를 정승이 두르는 ‘12 서대(犀帶)’가 이 나무에 걸려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씨 문중에서 정승이 된 사람이 많지만, 아직도 남은 띠가 있는 셈이라고 말한다.
현재도 이 동네에 정씨의 후손이 많이 살아서 사람들이 ‘회동 정씨’라고 하는데, 양파 정태화 정승의 옛집도 이 동네에 있다. 그 당시 사랑채가 한 채의 두옥(斗屋)으로 형제가 나란히 정승이 되어서 같이 살았지만 좁은 줄을 몰랐다고 전한다.
또 그 안채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친을 거부한 청음 김상헌(金尙憲) · 선원 김상용(金尙容)이 태어난 방이므로 사람들은 ‘12 서대’란 말이 들어맞는다고 하였다」
고 소개하였다.
현재 이곳(사당동 229번지 6호)에는 동래 정씨 임당공파에서 1967년에 건립한 재실(齋室)이 있다.
◇ 지덕사(至德祠) : 동작구 상도동 217번지 1호 일대(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1호)
- 조선 초 태종 때 폐세자(廢世子)가 된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
장승배기에서 상도 제2동주민센터를 지나 남쪽의 국사봉(國思峰)쪽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약수아파트 부근에 지덕사(至德祠)와 양녕대군의 묘소가 나타난다.
지덕사라는 현판이 붙은 소슬 3문을 들어서면 건평 9평의 사당이 있고, 그 좌우에 서고(書庫)와 제기고(祭器庫)가 꾸며져 있다. 사당 후면에는 묘소가 있는데 그 경역은 11,888평이 된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장남으로 열 살 때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덕망이 없다 하여 15년 뒤에 폐위되었다. 충녕대군(세종)이 세자에 책봉되자 경기도 여주로 쫓겨나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양녕대군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하면서 풍류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는데, 동생 세종과는 우애가 지극하였다. 양녕대군은 시를 잘 짓고 글씨가 명필이어서 남대문의 본 이름인 ‘숭례문’이라는 현판 글씨도 그가 쓴 것이다.
그는 세조 때에야 겨우 사면(赦免)을 받아 현재 안암동 고려대학교 부근인 ‘안암골 궁터’에 거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이곳 국사봉 아래 강적골에 안장하였는데 이 당시 세조는 양녕대군의 인격이 덕의 극치를 이루었다는 뜻으로 ‘지덕사’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강적골(康迪谷)이란 마을 이름은 양녕대군의 묘소가 들어서면서 불린 이름인데 양녕대군의 시호(諡號)가 강정공(剛靖公)이므로 강정골로 불리다가 강적골로 변한 것이라 한다.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숙종 때 우의정 허목(許穆)이 국왕에게 아뢰어 양녕대군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니 숙종이 그 후손을 불러 벼슬을 내리고, 사당을 남대문 밖 남관왕묘 부근(현재 대우빌딩 옆)에 건립하도록 하였다.
<<한경지략>>에 보면 영조 때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지광(李趾光)이 사당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고 있었는데 집안 형편이 빈한하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사당 안에는 큰 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관상쟁이가 “이 홰나무를 베면 운이 트일 것이니 베어버리시오”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이지광은 그의 말대로 홰나무를 베어버렸는데 1757년(영조 33)에 국왕이 남관왕묘에 행차하였다가 맞은 편에 있는 사당을 보고 누구의 집인가를 물었다. 그 집이 양녕대군의 사당임을 알게 된 영조는 그 자리에서 후손인 이지광을 불러 관직을 내리는 동시에 퇴락한 사당을 보수하게 하고, 환궁한 뒤에는 친히 지덕사의 제문(祭文)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서울역 앞, 중구 도동 1가 9번지에 위치하였던 지덕사는 일제가 1912년 1월에 묘소가 있는 이곳 상도동으로 이전시켰다.
양녕대군은 돌아가기 전에 후손들에게 묘비(墓碑) · 상석(床石) 등을 만들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를 지내라고 하여 훗날 7대손과 8대손이 묘소 앞에 석물(石物)들을 세웠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 전날인 28일에 벼락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으므로 비석을 묘소 옆에 놓아두고, 1915년에 다시 비석을 세웠다.
지덕사의 남쪽 산을 국사봉(國思峰 또는 國師峰: 179.4m)이라고 하는데 이 산 이름은 양녕대군이 국가와 세종대왕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불렸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