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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사대 국어교육과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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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설기/김광협 겨울눈 나무숲/기형도 *겨울 사랑/문정희 그해 겨울의 눈/이형기 눈/조운 눈/윤동주 눈/김수영 눈/박용래 눈길/박남준 눈길 속의 카츄샤/ 박봉우 눈꽃/윤상운 눈꽃/도종환 눈 내리는 벌판에서/도종환 눈보라/황지우 눈 오는 날/이제하 눈 오는 날엔/서정윤 *눈오는 산사에서/김종목 눈오는 지도/윤동주 大雪注意報/최승호 삼남에 내리는 눈/황동규 소나무에 대한 예배/황지우 12월의 숲/황지우 오시는 눈/김소월 우리가 눈발이라면/안도현 저녁눈/박용래 전방에 내리는 눈/최명조 첫눈/이정하 첫눈 오는 날 만나자/정호승 폭설/오탁번 폭설 도시/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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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설기(降雪期)
김광협(1941-1993)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프로스트 씨도 이제는 말을 몰고 돌아가버리었다
밤은 숲의 어린 가지에 내리는 흰 깁을 빨아먹는다
흰 깁은 밤의 머리를 싸맨다
살레이던 바람도 잠을 청하던 시간
나는 엿듣는다
눈이 숲의 어린 손목을 잡아 흔드는 것을
숲의 깡마른 볼에 입을 맞추는 것을
저 잔잔하게 흐르는 애정의 日月을
캄캄한 오밤의 푸른 박명(薄明)을
내 아가의 무량(無量)의 목숨을 엿듣는다
뭇 영아(孀兒)들이 등을 키어 들어 바자니는 소리를
씩씩거리며 어디엔가 매달려 젖빠는 소리를
나는 엿듣는다
숲가에서 난 너의 두 개의 유치(乳齒)를 기억한다
너의 영혼이 지상에 잠시에 잠시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따스운 입김이 아침의 이슬로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너의 발을 디뎌 지구를 느끼었음을 기억한다
너의 언어는 무에 가까웠을지라도 체득(體得)의 언어였으며
너의 사색은 허(虛)에 이웃했을지라도 혈육을 감지하는 높은 지혜였음을 기억한다
잃어버린 모든 기억들을 나는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숲가에서 나는 너의 두 개의 유치(乳齒)를 기억한다
눈은 숲의 어린 가지에 흰 깁을 내린다
내리어라, 내리어라, 내리어라
밤의 눈이 흰 깁을 빨아먹더라도
그의 이마에서 발끝까지 와서 덮이어라
온유의 성품으로 사풋사풋 내려오는 숲의 모성이여
숲은 내 아이의
곁에 서면 세월이 머리를 쓰다듬는 소리
역사가 장신구를 푸는 소리들
시름에 젖은 음절들이
꽃잎처럼 흩어져 기어다닌다
괴괴한 이 밤의 얼어붙은 지류에서
서성이는 나의 체읍(涕泣), 나의 기쁨
내가 내 자신과 내 아가와 인류에게 가까이 돌아가는
청징(淸澄)하고 힘있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상기할 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상기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내 숲이여, 내 아가여, 내 자신이여, 내 인류여
나는 참으로 단 한 가지 죄의 의미를 모른다
▷ <동아일보> 1965년 신춘문예 당선작, 시집 <강설기>(현대문학사, 1970)
겨울눈 나무숲
기형도(1960-1989)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 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沈默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假面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向하여
불을 지피었다.
窓너머 숲 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淸潔한 죽음을 確認할 때까지
나는 不在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距離를 두고
그래, 心臟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完璧한 自然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後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겨울 사랑
문정희(1947-)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 시선집 <어린 사랑에게>(미래사, 1991)
그해 겨울의 눈
이형기(1933-2005)
그해 겨울의 눈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렸다
희부옇게 한밤중 어둠을 밝히듯
죽은 여름의 반디벌레들이 일제히
싸늘한 불빛으로 어지럽게 흩날렸다
눈송이는 바다에 녹지 않았다
녹기 전에 또 다른 송이가 떨어졌다
사라짐과 나타남
나타남과 사라짐이 함께 돌아가는
무성영화 시대의 환상의 필름
덧없는 목숨을
혼신의 힘으로 확인하는 드라마
클라이막스밖에 없는 화면들이
관객 없는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눈
조운(1900-?)
뺨에는 이슬이오
가지에는 꽃이로다
곱게 쌓여노니 미인의 살결일다
비단이 밟히는 양 하여
소리조차 희고나
▷ <조운시조집>(작가, 2000)
눈
윤동주(1917-1945)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눈
김수영(1921-1968)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자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문학예술』 1957년 4월호
눈
박용래(1925-1980)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묻혀
있는 하루 하루 낡어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가는 한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워 지는
하얀 斷層.
▷ 시선집 <강아지풀>(민음사, 1995)
눈 길
박남준(1957-)
그 눈길을 걸어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풀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편으로만 젖어 가던 날이 있었다
눈길 속의 카츄샤
박봉우(1934-1990)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눈 꽃
윤상운(1947-)
땅에는
작은 것들의
작은 외로움
하늘에는
반짝이는 것들의
반짝이는 외로움
하늘과 땅 사이에
외로움
뼈마디마다 아스라이 피어나다
▷ 시집 <행복한 나뭇잎>(시학, 2008)
눈 꽃
도종환(1954-)
잔가지 솜털 하나까지 파르르 떨며
눈꽃을 피워들고 서 있는 달밤의 숲은
그대로가 은빛 빛나는 암유의 궁전입니다
보름 지나면서 달의 몸 한쪽이
녹아 없어진 이유를 알겠습니다
몸을 납처럼 녹여 이 숲에 부어버린 것입니다
달빛에 찍어낸 듯 나무들이 반짝이며 서 있습니다
나무들은 저마다 한 개씩의 공안입니다
다보여래가 증명하는 화려한 은유의 몸짓입니다
체온이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갔을 때
거기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깊고 외롭고 처절한 시간 속에서
고요하게 빛나는 적멸의 언어를 만나는 것입니다
생의 가장 헐벗은 시간을 견디는 자에게 내린
혹독한 시련을 찬란한 의상으로
바꾸어 입을 줄 아는 게 나무말고 또 있으니
돌아가 찾아보라고 말합니다
돌아가는 동안 부디 침묵하고
돌아가 알게 되어도 겨울나무들의
소리 없는 배경으로 있어 달라고
▷2005.2.2 작
눈 내리는 벌판에서
도종환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 그루 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 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다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터져오르는 이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 있어 달려가고 싶다
눈보라
황지우(1952-)
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와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 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눈 오는 날
이제하(1937-)
어릴 때 보던 산들은
다 그냥 있다
그때 놀던 들녘
뚝에서 싸우던 황소
어릴 때 보던 강들은
다 그냥 있다
그 물살치던 여울
은빛 고기떼
아주 하늘만치 큰큰
포구나무 숲을 아니?
그 숲 우으로
저녁이면 처덮이던
갈가마귀떼
어릴 때 놀던 친구들
다 그냥 있다
그 술래 찾던 골목
서녘에 비끼던 노을
어릴 때 보던 하늘은
다 그냥 있다
천지에 내리던 눈
먼 기적소리
(생각나니? 생각나니?
오래오래 길러오던
네 몫의 송아지
잔칫집에다 팔고 그 날
발버둥쳐 울던 일이
생각나니? 다 생각나니?)
눈 오는 날엔
서정윤(1957-)
눈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밝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옥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나>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그 누구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나에게 <나> 이상을 요구하는
사람이 부담스러운 것만큼
그도 나를 아쉬워할 것이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않으며 살아야 하고
분노하여야 할 곳에서는
눈물로 흥분하여야겠지만
나조차 용서할 수 없는 알량한
양면성이 더욱 비참해진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나>조차
허상일 수 있고
눈물로 녹아 없어질 수 있는
진실일 수 있다.
누구나 쓰고 있는 자신의 탈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서서히 깨달아 갈 즈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뿐이다.
하늘 가득 흩어지는 얼굴.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마지막을 조용히 보낼 수 있는 용기와
웃으며 이길 수 있는 가슴 아픔을
품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눈오는 날엔.
헤어짐도 만남처럼 가상이라면
내 속의 그 누구라도 불러보고 싶다.
눈이 내리면 만나보리라
눈이 그치면,
눈이 그치면 만나보리라.
▷ 시선집 <소망의 시>(미래사, 1991)
눈오는 산사(山寺)에서
김종목
개울물 소리도 멎은 밤, 눈 오는 소리는 산란(山蘭) 피는 소리보다 곱다.
이따금 순백(純白)의 선율로 내리는 눈이 법당 앞 댓돌 위로 소복소복 쌓이고, 스산히 씻기는 바람소리는 귀를 더욱 맑게 한다.
극락전을 돌아 동백 터지는 소리가 맑게 들리고 심중(心中)에 구겨 넣은 번뇌가 저절로 터져 한 장의 백지로 흘러내린다.
가벼워진 마음에도 눈이 내린다. 그지없이 평온한 반야(般若)경이 빛나고 가슴 속 하나의 길이 뚫리는 지금, 내가 가 닿아야 할 견성의 불꽃은 손가락 끝마다 숯불처럼 뜨겁다.
오욕(五慾)이 후둑후둑 떨어져간 저 산 아래로 내가 버린 발자국 소리가 하얗게 빛나고,
깊이 잠 든 중생의 꿈이 서역(西域)을 돌아 저마다 부처님의 얼굴로 내려온다.
곱게 단 동정 끝에 떠오르는 미소는 마음속을 스쳐 어디로 가는가.
놋주전자에서 밤새 설설 끓는 솔잎차는 그대로 공양으로 올라가고, 이따금 떨어지는 적막은 정일품(正一品)이다.
뜰 아래로 내려 와 한 모금 축이는 입술에 스르르 감전되는 오도(悟道).
아 이 순간, 마음에 남은 한 장의 백지마저 날아가버리고 빈 공간으로 차오르는 법열(法悅)의 눈만이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리는구나.
▷ 시집 <모닥불>(1990)
눈오는 지도
윤동주(1917-1945)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窓)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地圖) 위에 덮힌다. 방(房)안을 돌아다 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壁)이나 천정(天井)이 하얗다. 방(房) 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前)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 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년(一年) 열두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大雪注意報
최승호(1954-)
해일처럼 굽이치던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쪼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 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시집 <대설주의보>(민음사, 1995)
三南에 내리는 눈
황동규(1938-)
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 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시선집 <삼남에 내리는 눈>(1975, 민음사)
나무소나무에 대한 예배에 대한 예배
황지우(1952-)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지표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12월의 숲
황지우(1952-)
눈맞는 겨울나무 숲에 가보았다
더 들어오지 말라는 듯
벗은 몸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목숨들로 連帶해 있었다
눈 맞는 겨울나무 숲은
木炭畵 가루 희뿌연 겨울나무 숲은
聖者의 길을 잠시 보여주며
이 길은 없는 길이라고
사랑은 이렇게 대책 없는 것이라고
다만 서로 버티는 것이라고 말하듯
형식적 경계가 안 보이게 눈내리고
겨울나무 숲은 내가 돌아갈 길을
온통 감추어 버리고
인근 산의 積雪量을 엿보는 겨울나무 숲
나는 내내, 어떤 전달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 포스트를..
오시는 눈
김소월(1902-1934)
땅 위에 쌔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는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 온 날 오시는 눈.
저녁불 켤 때마다 오시는 눈.
우리가 눈발이라면
안도현(1961-)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 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 살이 되자
◁ 시집 <그대에게 가고 싶다>(푸른 숲, 1991)
*<중학국어> 1-2(2003)
저녁눈
박용래(1925-1980)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시집 <싸락눈>(삼애사, 1969)
전방에 내리는 눈(雪)
최명조
아버지 이곳 전방에는 눈(雪)이 나립니다
내 그리움만큼 부푼 하얀 눈이
온 산야에
아버지의 미소만큼 가득 쌓였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아버지께서 절 지켜주셨는데
아버지께 배운 그 정신으로
이제 제가 이 나라를 지키고 있답니다
오늘 아침엔 흰눈을 치우다 마른 풀잎아래
뿌리가 숨 쉬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 고향 그리운 희망만큼
저 뿌리도 봄을 그리며 희망으로 살고 있음을요
이 겨울이 가고
저 뿌리가 세상을 향해 미소 지을때
저도 웃으며 찾아 갈게요
그리운 고향
아버지 그 품에
첫 눈
이정하
아무도 없는 뒤를
자꾸만 쳐다보는 것은
혹시나 네가 거기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러나 너는 아무데도 없었다.
낙엽이 질 때쯤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색 바랜 사진처럼
까맣게 너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첫눈이 내리는 지금,
소복소복 내리는 눈처럼
너의 생각이 싸아하니
떠오르는 것은 어쩐 일일까.
그토록 못 잊어 하다가
거짓말처럼 너를 잊고 있었는데
첫눈이 내린 지금,
자꾸만 휑하니 비어 오는
내 마음에 함박눈이 쌓이듯
네가 쌓이고 있었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정호승(1950-)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폭 설
오탁번(1943-)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폭설 도시
문정희(1947-)
폭설이 도시를 점령했다
사람들은 일제히 첫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되었다
반짝이는 시간을 밟을 때마다
뽀드득! 발밑에서 새의 깃털 소리가 났다
하얀 손을 가진 이 통치자는 누구인가
그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건 적도 없지만
역사상 어떤 만장일치로 세운 정부보다 빠르게
눈부신 풍요를 온 도시에 선물했다
그러나 이 꿈의 도시는
짧은 생몰 연대를 기록하고
미완의 혁명으로 곧 사라질 거라는
댓글이 인터넷에 나돌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도 전에
화려한 몽상은 벌써 실체를 드러냈다
이 도시의 율법은 백지, 그러므로
누구도 법을 어길 일이 없어 좋았다고
아쉬워하는 젊은이도 있었다
보기 좋게 나자빠져도 법이 없으므로
죄도 벌도 없었다
제 길을 제가 만들어 가면 그뿐인
이 설국을 구상한 이는
정치가가 아니라
분명 시인이었을 것이다
조급증처럼 자동차들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유언비어 사이를 질주하는가 싶더니
하얀 풍요의 도시를 순식간에 파괴해 버렸다
◁웹진『문장』2009년 2월호
<웹진 시인광장> 선정 2009년 올해의 좋은 시(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