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장애인들의 큰누나로 살다간
성공회 한용걸 신부 사모 조정일(클라라)원장 이야기
MC: 다양한 유형의 장애인들의 실제 삶을 통해
장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시간입니다.
정창교기자의 차별 없는 세상!.
국민일보 정창교기자 나오셨습니다.
♠ 정창교기자 인터뷰 ♠
1) 오늘은 어떤 사연입니까.
지적장애인들의 큰누나로 불려온 사단법인 함께걷는길벗회 소속 강원도 화천그룹홈의 마흔여덟살 조정일 원장이 최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지적장애인들의 고교 졸업 이후의 삶이 새삼 관심사항으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2)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셨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장애자녀와 살고 있는 부모들은 “흙빚는화천총각들 4명이 강원도 화천 산촌에 귀농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흙빚는인천총각들을 모아 지적장애 청년들의 자립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보를 접해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습니다.
며칠전 강원도 춘천장례식장 101호에서 만난 지적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11일 0시쯤 강원도 속초에서 교통사고로 숨진 ㈔함께걷는길벗회 소속 화천그룹홈의 조정일원장의 죽음에 대해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3) 부모님들의 충격이 큰 것을 보니 생전의 조정일원장은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
앞서 지적장애인들의 큰누나라고 하셨는데, 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많이 하셨나봐요.
조씨는 2000년 당시 인천시 예산을 지원받아 우리나라 최초로 장애학생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필요한 유급보조원을 교실에 배치한 인물로 이 제도가 특수교육보조원 제도로 정착되는데 일조했습니다.
이후 이 제도는 장애학생들과 일반학생들의 한 교실 수업을 지원하면서 장애학생들의 통합교육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조씨는 이후 자신의 손길을 거쳐 자라난 장애학생들이 학교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지적장애인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위해 도시의 삶을 접고 2007년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아리 낭천산 중턱에 한옥을 짓고 정착해 매실원액과 된장 등을 생산해왔습니다.
조씨는 이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산촌 인근에 인천에서 고교를 졸업한 지적장애인 4명이 살 수 있는 농촌형 그룹홈을 지어 귀농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최근까지도 남편 쉰살 한용걸 성공회 신부와 함께 그룹홈 2호, 3호 한옥을 짓는 일을 하는 등 장애인부모 20여가정이 귀농해 살 수 있는 공동체 마을을 추진해왔습니다.
4) 공동체마을을 짓는게 쉽지는 않았을텐데, 2호 , 3호 까지 지었다니, 하시는 일에 본인도 신바람이 나셨었나봐요.
그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기 직전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처음엔 흙이 손에 닿는 느낌이 생소해서 한번 만지고 손씻고 한번하고 손씻고 하는 시간들이 한달가고 나니 예쁘고 작은 컵들이 만들어졌다”며 지적장애 청년들과 생활도자기를 빗는 즐거움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남편 한용걸 신부는 “‘자연 속에서 함께 걷는 장애인 생활공동체’를 만들기위해 화천 산골마을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다간 아내의 뜻을 이어가겠다”며 “그룹홈 원생들은 모두 21∼23세까지의 총각들로 자폐성장애와 지적장애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강원도에서는 그룹홈을 운영하는 귀농인으로 더 알려져 있었습니다.
장애인 원생들과 함께 만든 도자기를 화천 용화축전에 출품해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고 조정일 원장은 화천 용화축전 문화전 기간에 그룹홈 원생들이 취미로 틈틈이 만들어낸 120여점의 도자기를 출품해 원생들의 자긍심을 길러줌은 물론 관람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습니다.
고인이 된 조 원장은 6년 전 ‘자연 속에서 함께 걷는 장애인 생활공동체’라는 계획을 수립해 강원도 화천읍으로 이주해 장애인들의 자활과 삶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화천으로 귀농 후 ‘청인정방’이라는 간판을 걸고 된장도 담그고 매실을 이용한 식품도 개발해 성공한 귀농인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자신이 살만하니까 장애청년들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5) 지적장애인과 부모들에겐 조원장의 빈자리가 너무 클 것 같네요.
그렇다해도 조원장의 뜻을 기려 더 열심히 살아야겠죠.
조 원장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같이한 그룹홈 원생들은 부모들과 떨어져 독립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조 원장의 빈 자리가 너무 크지만 그 숭고한 뜻만은 남은 사람들이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룹홈 원생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기상과 동시에 가벼운 체조, 역할분담 학습, 농사체험, 도자기 만들기, 인라인타기, 수영배우기, 노래방에서 노래하기 등 다양합니다.
장애인 부모들의 힘을 모아 재정을 확보하면서 2호 그룹홈과 3호 그룹홈 한옥을 짓는 과정에서 이 일이 발생해 앞으로 의 일도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현재 그룹홈에는 국비로 지원되는 교사인건비가 전부입니다.
다행히 화천군에서 운영 중인 한옥학교에서 도움을 주고 있어 이 일이 잘 마무리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지금은 우리곁을 떠난 고 조 원장이 생전에 “공기 맑고 인심 좋은 지역에서 장애인들의 삶을 돕기 위해 시작한 만큼 힘닿는데 까지 함께 걷는 길벗회 그룹홈을 운영해 나가겠다”고 한 그 약속을 남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장애인들의 산촌 생활공동체를 완성할 수 있도록 뜻있는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정창교기자의 차별없는 세상 <장애없는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
첫댓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신부님 너무 오랜만에 들어 오셨어요.
안녕하시지요?
글 좀 올려 주세요...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어렵게 장애인 사회복지사업을 반석위에 올려놓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