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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운명은 경제와 직결되어 있다. 독일 경제가 실패한다면, 독일 민주주의도 실패할 것이다.“
- 발터 라테나우
14. 실향민 의회(Kongress der Heimatlosen)
루돌프 로지만 폰 아우엔이라는 기이한 인물이 “재외독일인들의 권익 보장을 위해” 창설했다던 실향민의회(KH)는 독일어권 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룬 문자와 프락투르(Fraktur) 폰트가 범독연맹 등 극우단체의 냄새가 난다며 터부시하는 SPD 등 진보주의자들에 대항한 “건전한 민족주의 우파”가 등장했다는 사설이 여기저기서 발표되는 등, 심지어 공화국을 지지하는 일부 우익세력까지 이들에게 깜빡 속고 있었으니 말이죠. 이것은 상당히 큰 문제였는데, 이미 샤이데만 선언과 생제르망앙레 조약으로 독일어권 지역과의 통합을 단념하겠노라고 세계 만방에 공표한 독일 정부는 이 KH를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끌어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때마침 이탈리아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해 달마티아를 점령하는 일명 “달마티아 위기”가 터진지라, 공화국은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었습니다. 세계의 눈초리가 아드리아 해로 돌려진 사이 일행들은 KH의 본회의가 열린다는 비엔나로 즉각 파견되었죠.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 회의를 ‘도청’하던 일행들은 매우 의외의 인물을 목격, 아니 청취하게 됩니다. 바로 [카를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즉 이제 사라진 이중제국의 황제였던 인물이 의장 로지만의 열렬한 찬양과 함께 입장하고 있었던 것이죠.
독일측의 도청을 묵인하며 역시 이 회의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오스트리아 정부도 난리가 났습니다. ‘반합스부르크법’으로 황가를 쫓아내고 도나우 전쟁(1919년에 체코와 싸운 그 전쟁)에서 패해 대독일 통일까지 포기한 채 어떻게든 이 악물고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유지하던 오스트리아는 [이중제국 재건]이라는 새로운 마약이 유입되는 즉시 엄청난 위기를 맞을 것이었습니다. 이 음모가 세계에 공개된다면 무솔리니의 달마티아 침공 ‘따위’는 장난으로 보일만큼 독일이 대단한 외교적 타격을 받을 것도 명약관화했죠.
오스트리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과 라테나우 부총리의 빠른 교통정리로, 일행들은 전광석화처럼 움직였습니다. 빌헬름, 카를, 막시밀리안 등은 전 황제 카를이 무려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입국했다는 사실, 그리고 공화국 체제에 불만을 가진 구 제정 시기의 오스트리아군 장성들이 이를 사실상 방조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오히려 대독일인민당을 비롯한 진짜 극우파는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더더욱 충격적이었던 사실은 프랑스에 “틸지트 그룹”이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일을 몰락시킬 방법을 기획 및 실행하는 소수 실무장교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황상 틸지트 그룹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이중제국 복원 음모와 연관시켜 체코와 공수동맹을 체결, 독일이 경제적으로 회복하기 전에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려 했던 셈이었습니다.
비엔나 시경찰 및 헌병대와 함께 KH 회의가 열리는 국립오페라극장을 봉쇄하며 작전을 짜던 도리나, 구스타프, 게오르크 등에게도 위의 소식이 전달되었습니다. 당장이라도 군경을 진입시켜 내란수괴 카를 합스부르크와 그 추종자들을 수거하고 싶던 오스트리아 정부였지만, 지금도 막무가내인 프랑스에 더 미치광이 정권이 들어서면 어쩌냐, 재외독일인 권익을 아무튼 챙기긴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우려가 제기되자 이들도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결국 만들어진 ‘충격방지안’은 1) 체코와 불가침조약 체결, 2) 구 이중제국 전범혐의자에 대한 국제재판소 설치, 3) KH를 실향민협회로 재조직해 지속 관리 등 내용을 담았죠.
그렇게 10월 16일 비르트 총리와 슈트레제만 외무장관이 프라하에서 상호 불가침과 국경선 신성을 명문화한 ‘프라하 조약’을 맺고, 영국 등의 전폭적 지지로 11월말 이중제국 전범재판소가 설치되는 등 독일의 외교적 입지는 파괴되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프랑스의 공작에 극히 분노했던 오스트리아의 폭로로 페탱-리요테 정권이 붕괴하고 [악시옹 프랑세즈]가 이끄는 오를레앙 왕당파 정부가 들어섰다는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말이죠..
14-1. 전환기의 끝
1925년 1월 로마에서 열린 영국-이탈리아 정상회담에서 모종의 비밀스러운 논의가 있은 뒤 무솔리니는 ‘자진해서’ 차라(자다르)를 제외한 달마티아 전역에서 철수하고 교황과 화해하는 전향적 제스쳐를 보였습니다. 프랑스에서 극좌 파시스트가 집권하든 극우 왕당파가 집권하든 상관없이, 독일도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에베르트 대통령이 지병 악화로 사망하자 공화국 거국내각은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치르기로 합의, 대선에서는 CVP의 아담 슈테거발트가 선출되었습니다. 다만 실향민의회 사건에 휘말려 정계은퇴한 힌덴부르크가 우파진영에 심대한 타격을 남긴 탓에, 총선에서는 SPD가 의석을 크게 늘리며 또 다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SPD는 CSP, CVP, WP(이후 CVP와 합당하여 기독교민주연합CDU을 구성)와 함께 이른바 [관치경제연합]을 구성했죠. 경제적으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FDP, 그리고 비슷한 경제정책을 주장하는 자유보수주의 정당 FKP는 그 세력이 쪼그라든 채 위기를 맞이한 셈이었습니다.
15. 황금광 시대
소수내각으로서 태생적으로 보수당-자유당으로부터 갖은 압박과 색깔론 공세를 감당해야 했던 J.R.클라인스 노동당 내각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무려 1797년에 제정된 선상반란법으로 좌익 논설가가 공안사범이 된 것도 모자라 우파 양당이 전전 비율(1파운드 = 4.86달러)의 금본위제로 복귀하자는 법안을 제출한 것이었죠. 노동당 집권 이후 영국과 급격히 가까워진 독일 정부는 “노동당 정부를 돕는 것이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는 판단 하에 구스타프, 게오르크, 막시밀리안을 파견했습니다. 물론 영국의 금본위제 복귀는 유럽 전반적으로 경기침체를 불러올 것이 명백하다는 이유도 있었죠.
통화가치를 금과 연동해 일단 경제를 안정화시키고 나면 시장의 자동조율기능으로 경제 역시 안정을 찾는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반박이 나온 상태였지만, 게오르크가 경제학자 칼 폴라니를 만나 자세히 들었듯 중요한 것은 금본위제의 비과학성이 아니라 그러한 정책이 예고할 민생파탄과 유럽 경제에의 파급력이었습니다. 일행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영국 노동당과 일부 보수당 좌파(오스왈드 모슬리의 계파) 의원들은 오히려 공세적으로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금본위제법 강행통과를 정부에 대한 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서민원을 해산, 이 문제를 핵심의제로 하여 보수당-자유당과 선거전을 벌인다는 것이었죠. 여태까지 힘없이 맞고만 있던 노동당이 회심의 펀치를 날리려 하자, 모슬리는 매우 좋아하며 개입경제-민생경제 노선에 “영국 사회주의(English Socialism, EngSoc)”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타고난 선전선동가이자 카리스마적 정치인인 29세의 모슬리는 아예 보수당 당적을 정리하고 ”국민당“을 창당한 뒤 보수당의 간판인 윈스턴 처칠을 맹공했습니다. 상대측에서 코민테른이 노동당을 조종한다는 식의 흑색선전을 뿌리는 것 역시 처절한 네거티브 공작과 ”노동당은 실제로 서민의 생활을 살린다“는 효과적인 선전으로 무력화되었죠. 결국 1925년 서민원 총선에서 노동당은 단독 과반, 국민당과 진보파 자유당을 합치면 2/3을 넘는 의석을 점유하며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영국은 독일과 확실히 가까워졌으나, 소련과 미국의 생각은 조금 달랐습니다. 사실상 국가자본주의 체제에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부르주아 체제를 연장하려는 기만에 분노한 소련은 영국과 독일을 대놓고 비난했고, 금본위제 복귀 포기로 파운드화가 대거 평가절하되자 금융의 중심지가 된 미국은 금력을 이용한 패권주의 행보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심지어 유럽 국가들이 의도적으로 환율을 조작해 부당한 무역이익을 챙기고 있다며 “특별한 조치”를 시사하기도 했죠.
16. 대공 업무
중부유럽에서, 영국에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던 독일 공화국은 이제야 동쪽을 둘러볼 여유를 가졌습니다. 나쁜 소식은, 소련의 소위 “전환기 경제정책”이 가위 위기라는 부작용을 불러와 통제경제 강화를 외치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일파가 사실상 정국을 장악해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쁜 소식으로 여겨진 이유는 당연히 이들이 주적으로 상정한 체제가 극우 반동주의가 아닌 기만적 부르주아 체제였기 때문이었죠. 많은 교류를 통해 지지할 세력을 이미 정해놓고 적극적으로 도왔던 영국 사안과 달리, 소련의 경우 무엇을 해야 하는지조차 불확실했습니다. 결국 파견된 인원들이 직접 발로 뛰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죠.
선전영화계의 거장 에이젠시테인과 일군의 ‘초좌익파’를 만나고 온 도리나는 “친독파”를 자처하지만 실은 냉혹한 현실주의자인 스탈린을 돕는 것보단 차라리 어느 정도 몽상가적 면모가 있는 범-트로츠키계 연합과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스탈린의 심복인 체슬라프를 만나고 온 빌헬름이 받은 제안과는 상반된 것이었는데, 체슬라프는 마치 자신들이 정권을 잡고 나면 독일과 동맹이라도 맺을 것처럼 아주 달콤한 제안을 건넸습니다. 조건은 이번 독소회담을 “노딜”로 끝내버리는 것이었죠. 자신의 반대파들을 몽땅 독일과의 전쟁을 꾀하는 호전광들로 몰아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스탈린의 야심은 무서우리만치 대단했습니다.
트로츠키의 측근 라데크를 만난 카를은 도리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결론은 상이했습니다. 카를의 입장에서 냉혹한 현실주의자는 “이익을 매개로 협력할 수 있는” 존재였고, 따라서 오히려 안정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스탈린을 돕는 방안이었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으나, 모두의 의견을 청취한 헤르만 뮐러 총리는 [스탈린의 정변이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는 우리도 큰 손실을 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던졌습니다. 이는 끝까지 고민하던 빌헬름이 결국 도리나의 의견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죠.
결국 독일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범-트로츠키파와 일단 가깝게 지내보기로 했습니다. 레닌과 공동선언을 발표한 뮐러는 소련과의 제한적 무역협정과 문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말했죠. 극히 당황한 스탈린이 쿠데타를 시도하다 자신의 지지세력이라고 ‘착각’한 OGPU(전 ‘체카’)에게 체포되는 동안, 소련은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약진(민주약진)]이라는 거대한 민주주의 실험의 첫 삽을 떴습니다. 사실상 레닌의 후계자 자리를 공인받은 트로츠키는 소련 내 거주중인 독일계와 독일 비정부기구(실향민협회)가 교류하는 것을 별달리 문제삼지 않았는데, 이는 극히 부족하던 소련 내 정보망을 건설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었습니다.
17. 국민협동경제
관치경제연합이 결성된 지 거의 1년이 되어가도록 그 ‘관치경제’를 어떤 방식으로 입안할 지에 대한 논의는 마무리되지 못했습니다. 노동자의 복리증진을 법으로 강력히 규정하는 대신 노조의 총파업과 동조파업을 금지해버리자는 CDU의 우파적 의견, 그리고 생산과정 전반에서 노조의 참여를 강화해 경제민주주의를 실천하자는 SPD의 좌파적 의견은 너무나도 달랐죠. 1926년 4월, 뮐러 총리는 어떻게든 합의를 보거나 서로 갈라지거나 하자는 최종 제안을 던졌습니다.
우파 자유주의자였던 게오르크가 SPD의 경제민주화 안을 “노동자의 임금 급등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반문하고, CDU의 빌헬름과 CSU의 카를이 농민정책 문제를 새로 제기하는 동안, SPD 내에서 그나마 우파와 타협 가능한 방안을 강구하던 구스타프는 독일노조총연맹(ADGB)의 노동이론가 지크프리트 아우프호이저의 독특한 이론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국가가 자본시장에서 자본가의 권리를 존중하되 노동시장에는 적극 개입하여 노동자 간 임금격차를 줄이고, 대기업의 고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상승을 억제하는 대신 영세기업의 저임금 노동자 임금은 높여주는 세심한 방안이었죠.
아예 연정을 깨버리고 야당과 손잡겠다는 극단적 의견이 성공적으로 배제되자, 논의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SPD 내 주류파의 강한 불만 표출에도 불구하고 상기 아이디어는 진지하게 타협안으로 올라섰고, 탄력받은 카를과 CSP가 토지개혁 때보다 약간은 완화된 농업협동화 안을 추가제안하면서 본격적인 정책이 현실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확정된 [국민경제체제]는 사실상 기업들 간의 자본주의적 경쟁을 인정해주어 대기업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대신 그 초과이익분을 환수해 복지에 사용하고, 노동조합과 농업협동조합이 정부의 중재 하에 식량가격을 협상하게 하며 소작제도를 완전히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했습니다.
“경제정책으로 나뉘어졌으니 이 부분에서 타협한 지금은 다시 합쳐보자”는 CDU와 CSP가 당대당 연합체인 우니온(CDU/CSU)를 구성하자 “결국 기독교밖에 공통분모가 없는 두 세력이 명분없는 통합을 추구하는 게 아니냐”는 게오르크는 탈당을 선언하고 FDP에 입당했습니다. 관치진영의 최고 정책가 중 하나에서 자유주의 진영의 핵심이 된 그는 발터 오이켄 등과 함께 소위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 노선을 다듬기 시작했죠. SPD에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 노선에서 약간은 벗어난 “노동파”가 고개를 들었고, 극우 민족주의 진영은 수상하게도 공화국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독일 인민국가당(VStP)”이라는 보다 온건한 간판 아래 모였습니다.
국민경제체제의 도입으로 독일 경제가 1930년대 이내에 세계 2위에 올라선다는 장밋빛 예측이 줄을 이었습니다. 물론 정말로 그럴지는, 앞으로 두고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18. 위대한 개츠비
1926년 7월 18일, 미 상원은 “유럽의 ‘사회주의화’로 인한 집단적 통화평가절하 및 무역수지 조작행위에 대항한다”는 명목으로 관세법을 개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사실상 대통령 행정명령만으로 무제한적 관세보복을 가능하게 한 이 법안이 통과되자 미국의 투자금으로 경제를 굴리는 독일 정부는 대단히 당황했고, 이에 미국 내 친독로비와 정보수집을 담당할 조직을 세우라는 특명 하에 도리나와 막시밀리안이 파견되었습니다. 군 방첩국 등에만 대외첩보를 맡겼다가 소련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정부의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죠.
미국 내에서 이미 주류로 올라서는 데 성공해 굳이 “독일 공화국”의 이익에 복무할 필요가 없었던 독일계 미국인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대신, 두 사람은 도리나의 전문분야인 영화업계를 이용해 목표를 달성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모든 자본이 모인다는 월가에 투자기업을 세우지 않고 과감하게 캘리포니아로 향한 그들은 유니버설 픽쳐스 사장이자 독일계 유대인인 칼 렘리를 만나 미-독 친선영화 제작을 논의했습니다. 제작비를 아주 많이 들여 유성영화를 만들어 대박을 쳐보자는 렘리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이었고, 외주제작사를 자처한 워너 형제의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 역시 아주 의욕적이었죠. 막시밀리안은 여러 논의를 거쳐 미국 영화를 유럽에 배급하는 회사를 설립해 첩보조직으로 써먹기로 결심, 렘리와 함께 “트랜스아틀란틱 영화사(TAMPA)”를 만들었습니다.
당대 미국의 인기배우였던 버스터 키튼과 독일의 매력적인 여배우 마리 디트리히를 공동주연으로 하는 유성 서부영화 “심판의 날”이 개봉하자, 무성영화는 그 날로 모두 종언을 고했습니다.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세계에서 흥행한 이 영화로 인해 TAMPA는 국제 배급사 중에서는 독보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고, 이는 사업 측면으로나 정보 측면으로나 큰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에서는 대외첩보업무만을 담당하는 독립기관인 첩보본부(RIHA)가 설립되었죠.
18-1. 막간
달러화의 유일기축통화 지위는 뉴욕 월가를 금융 중심지이자 불야성으로 만들었습니다. 수년간 계속된 활황세는 금융불패 신화를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달러 강세로 인한 무역수지 악화를 충분히 상쇄할 만큼의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나 열강 중 가장 경제적 펀더멘탈이 부실한 축에 들었던 일본에서 요코하마 정금은행(YSB)이 도산하는 공황사태가 발생하는 등 세계 경제는 끊임없이 위험신호를 보내왔습니다. 물론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미국이 일본이랑 같냐”는 반응과 함께 계속 미국 증권거래소를 신뢰했지만 말입니다.
중국의 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하는 데 그리 열의가 없던 트로츠키의 개인적 신념에도 불구하고, 장쭤린을 관내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는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동부의 쑨촨팡, 북부의 펑위샹과 연합한 우한 정부는 봉천군벌을 황하 이북으로 몰아냈고, 거기에 일본 식민지주둔군 급진주의자들이 만주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우기 위해 장쭤린을 암살하고 양위팅을 봉천에 옹립하면서 우한 국민정부는 가장 큰 적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1. 대의제 민주주의 공화국을 건설하고 수호할 것.
2. 공화국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유지할 것.
주요 정파 설명
공산당(KPD) - 평의회 인민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철저히 사회주의 실현의 전단계로만 생각하는 혁명정당입니다. 트로츠키의 소비에트 민주주의 노선을 적극 지지합니다. (주요 인물 : 에른스트 텔만, 빌헬름 피크, 파울 레비)
사회민주당(SPD) - 사회주의 빅텐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전통의 좌파정당입니다. 무산계급의 세상을 궁극적 목표로 하지만 혁명을 일으키자는 급진적 주장에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화국을 철저히 수호하자는 입장이며, 더 나아가 공화국이 노동자의 권익에 복무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준군사조직은 더 이상 운용하지 않습니다. (주요 인물 : 헤르만 뮐러, 루돌프 힐퍼딩, 후고 하세, 루돌프 브라이트샤이트 등)
기독교민주연합/기독교사회연합(CDU/CSU) - 일국보수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가톨릭중앙당의 후신으로서 문화적으로는 보수적 경향을 보이나 경제적으로는 때로 좌파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는 정당입니다.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노동조합의 역할도 긍정하는 편입니다. (주요 인물 : 아담 슈테거발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빌헬름 마르크스, 요제프 비르트)
자유민주당(FDP) - 질서자유주의, 문화적 진보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인 진보인민당과 우파 자유주의 세력인 민족자유당이 합당해 만든 정당입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문화적으로나 자유주의를 추종하는 알기 쉬운 자유주의 세력입니다. (주요 인물 : 후고 프로이스, 테오도어 호이스, 발터 라테나우, 루돌프 외저)
자유보수당(FKP) - 질서자유주의, 자유보수주의
옛 비스마르크의 지지자들을 모태로 한 정당입니다. 입헌군주제를 이상으로 삼았으나 공화국 지지 입장으로 돌아섰으며, 경제적으로는 자유민주당, 사회문화적으로는 기독인민당과 유사한 성향을 보입니다. (주요 인물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얄마르 샤흐트, 테오도어 볼프, 에른스트 숄츠)
인민국가당(DStP) - 국민보수주의, 국가협동조합주의
일명 “온순해진 극우”입니다. 공화국의 좌경화와 각종 민족주의 세력의 파멸에 따라 합법적인 틀 내에서 각종 우익적인 요소들을 주장하는 정당입니다. (주요 인물 : 에른스트 니키슈, 하인리히 라우펜베르크,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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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역시 다시 생각해도, npc로 바꾸는 쪽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자의로 결정하는 역대 최단기 플레이(...)기는 한데, 위의 총리 다이스의 의미를 보면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저다이스일수록 고전적으로 긴축재정을 중시하는 인물들이고, 고다이스로 갈수록 질서자유주의라는 중도적인 입장으로 가는 기분인데, 제가 총리 캐릭을 플레이 할 경우 캐해나 이론 이해를 못하면 더 참사가 일어날 것 같네요.
라인란트에서 (플레이) 최단기간으로 총리까지 올라간 풍운아이자, 공화정에서 최고 순위를 다투는 자리까지 가서 공화정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았으니 커리어상으로도 정점인 셈이고, 플레이 상으로도 이번 슈티네스 스캔들을 통해 완벽하게 슈티네스와의 결별을 이뤘으니 예전 예상한 '성장 후 독립'이라는 목표도 달성, 플레이어도 플레이 중 상당히 만족스럽게 능력을 쓰며 딴지도 많이 걸어봤으니(..) 만족합니다. 개인적인 플레이로는 이정도로 원하는대로 잘풀린 케이스가 있나 싶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네요.
@통장 치머만 조종. 믿고 있겠습니다(??)
@통장 그럼 신캐로 참여하실건가요?
@통장 아니 진짜 라이징썬이 되네 ㅋㅋ
@차들어 홍차야 오.. 사실 치머만 만들때도 상당히 고민해서 만들어서, 우선 오늘 자고나서 생각해봐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끼고 싶을만한 자리가 있는지도 생각을 해봐야되겠고..
@통장 홍홍홍 치머만이 NPC가 되었으니 이제 플레이어에 대한 죄책감도 없겠다. 본격적으로 태업해서 자민당 내각에 타격을 줘야지~
@차들어 홍차야 마음껏 하시죠.
@차들어 홍차야 NPC 치머만은 좀더 이론적으로, 실전적으로 강할 수도 있습니다. 고수가 운영하기 때문이죠(??)
@차들어 홍차야 하고싶으면 해야죠.
@통장 맞습니다 ㅋㅋ 그래서 제 캐릭터가 npc로 온다 그러면 바로 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