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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생태적 경제 기적
프란츠 알트
-추천사
문명의 경제 과정은 재화(그것이 상품이든 서비스든)의 생산과 분배, 그리고 소비와 이용에 봉사한다. 이때 일어나는 경제 질서를 둘러싼 논쟁은 항상 다음과 같은 물음에 관련된 것이다.
그것이 실제의 본질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배제하는가? 수익이 공정하고 적절하게 배분되는가? 희소한 재화를 얼마나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가? 위기와 수급 파탄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개별경제와 전체경제의 이해 사이의 모순이 어떻게 해소될 수 있는가?
그런데 근대 산업혁명이 개시된 이래 경제를 지배했던 사상과 실제 모델은 이 물음들을 다룰 때 ‘어떤 자원을 이용하는가“ 하는 핵심 물음을 무시했다. 자원, 즉 에너지와 원료는 모든 경제활동의 조건으로, 이것 없이는 아무 일도 안 된다. 자원의 접근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더 경제발전의 부침을 결정한다. 이를 위해서 약탈 전쟁이 일어났고, 민족들이 억압받고 착취당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전쟁과 억압과 착취가 자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점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모든 경제활동은 변환된 에너지를 이용해서 물질을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환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재화를 분매하고 소비하고 이용하며, 또한 변환된 에너지의 도움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많은 변화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도 언제나 변환손실이 발생한다. 효율적인 변환의 경우에는 적은 손실이, 비효율적인 경우에는 많은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부담을 주는 배출물이나 유해물질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변환손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배출물은 이용된 재료와 에너지가 변환되는 과정에서 유해한 물질이 손실로서 방출되는 때 발생한다. 인간이 초래한 모든 환경손상은 이로 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태’와 ‘경제’에서 핵심문제는 이 둘이 서로 다른 과정이 아니라 항상 하나의 동일한 정황에서 비롯된다. 생태적인 경제는 우리가 유해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자원의 투입을 급진적으로 끊어버릴 때만 가능하다. 삶을 파괴하는 유해물질이 포함되지 않은 에너지와 재료의 이용만이 미래를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이다. 이것이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재생 가능한 자원(햇빛, 바람, 물, 그리고 에너지와 인간의 영양과 산업 원료를 제공하는 바이오매스같이 모두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0과 화석자원의 원초적인 차이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화석자원 이용의 폐기를 인류의 절박한 중심과제로 삼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화석자원의 변환으로 인한 파국적인 손상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태양의 길’을 택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이미 핵심적이고 불가피한 경제적 기초이다.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또 다른 핵심 이유도 태양의 길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화석자원은 고갈되고 태양자원은 고갈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 고갈되는 자원에 의존한다면 감당할 수 없이 치솟는 가격상승, 사회위기, 경제위기, 자원전쟁이 닥칠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세계전쟁에 이어서 자원을 둘러싼 세계전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화석자원은 세계의 몇몇 장소에서만 생산되지만 세계 모든 곳에 투입된다. 태양자원은 사람들이 일하고 사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든 상관없이 이런저런 형태로 제공된다. 화석자원의 경우 수송과정이 기고, 부가적인 에너지가 소비되고, 생존이 종속되고, 교통에 부담을 주고, 자원경제가 집중화된다. 반면 태양자원의 경우는 수송과정이 짧고, 효율적으로 에너지가 제공되고, 독립적이고, 교통 부담이 없고, 지역에서 일자리가 창출되고, 경제형태가 좀 더 분산적이 되고, 경제의 해체와 위기에 더 강한 경제를 만들어낸다.
모든 정황이 재생 가능한 에너지와 자원을 통해서 경제과정을 쇄신할 것을 역설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서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는 복지가 지속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모든 대륙의 전 인류에게 실현 가능한 비전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다.
-노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1970년 이래 서독에서는 8퍼센트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지만, 캐나다에서는 80%, 미국에서는 75%, 그리고 일본에서는 27%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났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고전적인 사회 정책적 방법은 1995년 베를린의 사회학자들이 내놓은 보고서에 나와 있다. 이 연구는 여러 조치를 도입하면 독일에서 대략 3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들 조치는 다음과 같다.
*노동시간을 주당 32시간으로 줄인다.
*파트타임 노동을 더 많이 늘린다.
*초과 근무를 절반으로 줄인다.
*교대로 근무하는 경우 돈을 더 많이 주는 것보다 여가를 더 많이 준다.
*재교육을 더 많이 시킨다.
*보육 휴가를 더 많이 준다.
이러한 노동 분배의 재편에 대해서는 수년 전부터 논의되었다. 하지만 협상 당사자들을 통해서 실현되지도 못하고, 정당의 지지도 거의 얻지 못하고 있다. 때만 되면 정기적으로 약속이 발표되지만, 그 뒤를 이어서 정기적으로 무실천이 뒤따른다. 공평에는 그 대가가 있는 법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제도는 연방독일의 처음 40년간 ‘경제기적’을 일구기 위한 질서유지 틀이었다. 그러나 지금, 점점 부자가 되어가는 독일에서 빈곤이 극적으로 증가하면서 사회적, 윤리적 연계가 무너져가는 이 시기에 우리는 일자리 없는 자본주의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다. 이런 식의 발전이 보이는 가장 분명한 증상은 주가는 상승하지만 동시에 실업자도 증가하는 것이다. 백만장자의 수가 증가하고 빈곤층의 수도 증가한다. 환경보호라는 주제에 대한 설교가 늘어나지만, 그만큼 환경오염과 기후파괴도 증가한다.
독일과 서유럽에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이 아주 많은 것도 사실이다. 실행되지 않는 일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서비스 부문, 노약자 간호, 환경보호, 주택 건축, 외국어 교육 같은 부문에 그런 일이 많다. 우리에게 일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노동 자체를 위한 노동인 것이다.
우리는 위에서 제시된 물음과 충분히 씨름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엄청난 양의 실행되지 않은 일더미를 우리 앞에서 밀쳐내고 있다. 그 대신 특별히 현명한 것도 아닌데다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자리를 가진 사람들은 자꾸 늘어나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임금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 생산이 현재 수준에서 정체해 있는데도 여전히 ‘성장’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단어는 ‘제로 성장’이다. 더군다나 생산 수치가 전체적으로 감소할 때도 여전히 성장이란 말이 사용된다.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표현으로 말이다. 이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난센스다! 특별한 형태의 성장이라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항상 성장이다. 성장 없이는 아무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식의 경제적 몰이해를 우리는 아직도 현실 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착각 속에 빠진 베를린 정치인들의 언어 속에서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성장이 전부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성장 없이는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옛것을 관리할 능력도 거의 없고, 새로운 것을 꾸미기에는 상상력이 너무 부족한 것이다.
늙은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학문을 가지고 우리에게 해줄 일은 이제 없다. 경제성장이 3%가 되더라도 실업자 통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경제성장이 4%면 겨우 10만~15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난다. 그러나 어쨌든 이러한 낡은 성장률의 시대는 확실하게 가버렸다.
1970년대 초,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예측했다. 이때 비로소 영원한 경제 성장이 완전고용의 기초라는 낡은 경제학의 기본 가르침이 비판과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이들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낡은 경제학과 낡은 정치의 지지자들은 이 자연법칙을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인간, 동물, 식물은 외형상으로는 특정한 시간까지만 성장한다. 그런 다음에, 적어도 인간의 경우는 외적인 성장이 내적인 성숙으로 대치된다. 그런데 경제에서 성숙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인간의 내면적인 성숙과정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려운 것 같다. 이것이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이다. 지금까지 성장만 추구했던 경제에서도 성숙과정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세계의 유연화, 경제의 생태화, 순환경제의 발전, 전 지구적인 경제 대신 지역 경제의 창출, 완전히 새로운 경제적 가치기준의 창출,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한 노동‘가정을 위한 노동’가족을 위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 어린이와 병약자를 돌보는 일에 보수를 지급하는 것, 그리고 특히 환경을 보호하는 미래기술의 개발은 우리가 수십 년 전에 잃어버린 완전고용을 가져온다.
자유민주당은 자기를 위한 노동과 봉사로서의 명예직 노동에 대해서 500유로 정도의 시민급여를 지불하는 것이 오늘날의 대량실업을 지원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사회 전체적으로 비용이 덜 든다고 말했다. 옳은 말이다. 녹색당은 환경세를 도입해서 시민급여의 재정을 확충하자고 제안했다.
우리가 이러한 완전고용 정책을 실시하지 않으면, 곧 사회적으로 생태적으로 이중의 파국을 맞을 것이다. 낡은 에너지 정책과 교통정책은 우리 아이들이 마실 공기를 빼앗아갈 것이고, 일자리를 찾는 여성은 증가하는데 고용형태는 옛날 그대로면 실업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전통적인 임금노동만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족까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고 아내는 안에서 남편의 돈에 의존하는 고전적인 가족구조가 앞으로도 존속된다면, 양성 간의 싸움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앞으로 닥칠 위기를 제대로 나타낼 수 없게 될 것이다. 고전적인 노동형태 때문에 독일의 이혼율이 33%에 달하고, 이렇게 해서 가족이 깨지면 주로 아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슈냑과 게스터캄프는 “우리 남성이 바뀌지 않으면 가족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라고 말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이와 가정을 위한 여성의 노동을 이론적으로 다룬 연구를 미심쩍게 바라보는 여성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바이츠재커는 가정의 ‘자기노동’이 시간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자기 자신의 판단력, 자유의 권리, 그리고 창조 같은 장래의 가치를 위해서는 미래의 자동화된 무인 자동차공장에서 컴퓨터를 감시하는 일보다 훨씬 값어치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젠가는 남성들도 ‘자가노동’이나 아내와 아이들과 협동해서 일하는 기회를 더 인간적이고 해방을 가져오는 기회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지금도 직장인의 30~40%가 파트타임 직업에 고용되어서 이에 해당하는 임금을 받고 있다. 독일에서도 현재와 같은 고전적인 근무형태로 일하는 사람은 점점 감소할 것이다. 미래에는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반나절 직장이 일반적인 것이 될 것이다. 반나절 직장은 남자와 여자가 더 많이 해방될 수 있는 커다란 기회로 작용한다. 노동세계의 생태화는 노동형태의 여성화를 통해서 가능해질 것이다.
독일의 노동생활과 노동시간은 아직도 여전히 여성과 가족에게 적대적이다. 아이들 양육과 직업을 병행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저귀보따리 값으로 20유로를 더 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또는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시간의 유연화, 직장 어린이집의 증가, 어린이집에서 어린이 보육 시간 연장, 반나절 직장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 ‘경제’보다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생각해야 할 것이다. 경제가 사람과 삶 전체에 봉사해야지, 그 반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가 우리에게 필요한 재화를 공급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계가 사람을 부리고 있다.
200년간 지속된 경제 우위의 시기가 지나가버린 지금, 우리는 ‘환경의 세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기술적 지식과 정치적 대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풍요를 포기하지 않고도 우리의 에너지 소비를 1/4로 줄일 수 있고, 자원 소비를 1/10로 끌어내릴 수 있다. 태양에너지 혁명이 달성되면, 에너지 가격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건강한 식생활을 하게 되면 의료 분야에서만 매년 수백만 유로를 절약할 수 있다. 우리는 적은 돈으로 더 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발생하는 비용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고 해도, 오늘날 자동차라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생태적으로 산업의 역사에서 최대의 실패작이다. 오늘날 1유로를 주고 사는 휘발유 1리터는 1만 리터의 공기를 오염시킨다. 단지 1리터로 말이다. 그런데 그 전체 비용을 청구 받고 값을 지불하는 쪽은 아이들이다. 젊은 세대는 우리가 오늘날 저지르는 일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생태적, 사회적, 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윤리적인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수백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환경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독일의 정치는 이를 위해 사회 생태적 개혁으로 나아가려는 용기가 없다.
반면 일본은 지난 수년간 독일의 태양에너지 기술특허를 모두 사들여서 에너지 전환 기술을 전 세계에 수출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태양에너지를 지원하기 위한 10만 지붕 프로그램을 독일보다 6년 앞서서 시작했다. 일본에서 2000년 한해 동안 설치된 태양전지의 양은 독일에서 지난 20년 동안 설치된 양과 같다. 독일의 태양 미래는 연방의회가 2000년 4월 재생가능에너지법을 통과시키고 나서야 시작된 것이다.
고용 중심 사회의 위기 속에도 기회는 숨어 있다. 지금까지 성공적이었던 사회적 시장경제를 생태 사회적 시장경제로 개혁하는 것은 21세기를 위한 가장 인도적인 비전일 것이다.
-태양에너지 경제의 기적
<태양은 청구서를 보내지 않는다>에서 곧 전 지구가 그 어느 때보다 더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때가 1994년이었다. 그런데 1996년 초부터 우리는 지금이 16,000년 전의 마지막 빙하기 이래 가장 더운 때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도 전 지구적인 온난화는 빠르게 진행될 것이다.
1996년 8월, 국제연합 환경프로그램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엘리자베스 도즈웰은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국제 토양보호회의에서 “지구의 전체 농지 중에서 1/3이 이미 토양침식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바람과 물에 의한 침식으로만 현재 연간 2000만 톤의 곡물수확 감소가 일어나고 있다. 거대한 산업단지들, 6억 대의 승용차, 그리고 고농도의 농약잔류물로 인한 공기오염이 전 세계에서 토양침식을 초래하고 있다.
온실효과의 결과는 어떠한가? 열대우림의 파괴는 전 지구적인 온난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우림지역은 지구 전체에서 매년 1540만 헥타르씩 줄어들고 있다. 세계의 숲이 2초마다 축구장 크기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열대우림은 주요 온실가스인 이산화산소를 빨아들이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삼림을 벌채하는 것은 세계 기후에 추가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40년간 우리는 이미 열대우림의 절반 이상을 벌채했다. 이런 식으로 지속되면 지구는 2035년에 ‘열대우림 없는’ 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석유, 석탄, 가스를 가지고 지구를 덥히고 있다. 원자력발전소와 유조선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시한폭탄이다. 석유, 가스, 석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면서 우리는 바로 지금 제3세계 사람들의 미래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와 손자의 미래까지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지구온난화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정치가 에너지 생산과 공급 시스템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물론 바꿀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의 중앙 집중적인 에너지 독점으로부터 분산적인 에너지 수급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전력시장을 자유화했음에도 우리는 현재 사실상 그 전보다 더 큰 독점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태양은 지붕 위에는 어디든 상관없이 비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잠재적인 에너지 생산자이다. 그렇게 되려면 건축가와 도시계획자가 먼저 태양이 있는 남쪽이 어디인지를 배워야 할 뿐이다.
둘째, 우리 모두 약간의 지혜를 동원해서 많은 에너지를 절약해야 한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자동차, 건축물, 공장에서는 수십 년 안에 적어도 현재 에너지 소비의 2/3를 아무 문제없이 절약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질의 측면에서 볼 때 손실이 아니라 이득이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다. 우리는 더 적게 쓰는 것이 더 많은 것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낡은 낭비의 경제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미하엘 뮐러와 페터 헤니케가 말한 ‘회피의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또한 바이츠재커가 로마클럽에 낸 보고서인 <효율은 네 배로 높이자>라는 책에서 인상적으로 기술했듯이 ‘효율혁명’이 필요하다. 최초의 ‘제로에너지 하우스’는 이미 완공되었다. 그리고 100킬로미터를 달리는 데 휘발유를 1리터 이상 쓰지 않는 자동차도 제작될 수 있다.
셋째, 나머지 에너지는 다른 방식으로, 환경 친화적이고, 값싸고, 재생 가능한 방식으로 얻어야 한다. 이것도 가능하다. 미래의 새로운 에너지 믹스는 태양광, 바람, 물, 바이오매스로부터 얻는 에너지가 혼합된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식물은 세계 삼림보다 10배나 많은 바이오매스를 제공한다. 독일의 놀고 있는 농지에 갈대를 재배하면 독일의 원자력 발전소 19개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모두 합친 것만큼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연방 농업연구청에서 계산한 것이다. ‘원자력 대신 갈대’는 실현 가능한 비전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에너지 믹스에 대한 저항은 엄청나다. 원자력 로비, 석유 멀티, 석탄족 정치인, 그리고 천연가스 대표자들은 자동차 로비와 함께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최강의 산업- 에너지정책 복합체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는 이 복합체를 깨부숴야 한다. 정부는 아니지만 낡은 에너지 믹스의 대변자들은 대부분 그들과 우리 아이들의 미래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가져오는 산업을 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
오늘날 유럽연합 전체의 농민은 수십억 유로의 돈을 지원받는다. 이것은 그들이 생산하기는 했지만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고 게다가 많은 돈을 들여서 없애버려야만 하는 농작물에 대해서 지불되는 것이다. 유럽연합의 2000만 헥타르에 달하는 강제휴경지에다 그런 작물 대신, 우리 건강에 좋은 식품과 함께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환경 친화적이고 지속적으로 자라나는 에너지를 재배하고 수확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바이에른주에서만 매년 1만 개 이상의 농가가 도산한다. 우리가 이 사회의 가장 오래된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문화적인 수치이다. 농민이 미래의 에너지 생산자가 된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다시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빠르게 지속적으로 자라는 C4 식물은 간단한 기술을 적용해서 가공하면 전기, 자동차 연료, 난방열, 건축자재, 포장재, 그리고 종이를 값싸고 환경 친화적인 방식으로 얻을 수 있다.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주립식물재배연구소는 8년간의 에너지 식물연구를 통해서 10헥타르의 농지에 갈대를 재배하는 농민이 15명만 있으면 주민 1000명의 마을이 전기와 열을 완전히 자급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이 연구소에서는 10년 전부터 매년 2월 말이나 3월 초에 갈대를 수확한다. 겨울에는 갈대가 그대로 서 있고, 이때 잎이 떨어져서 새로운 부식토가 만들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첫해가 지난 다음부터는 비료를 주지 않아도 된다. 3.5미터까지 자라난 손가락 굵기의 강한 줄기 속에 있는 영양소는 겨울 동안 뿌리와 뿌리혹으로 모여든다. 이렇게 해서 수확 후에도 갈대는 다시 빨리 자랄 수 있다.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라인강 유역의 입지 좋은 곳에서는 헥타르당 연간 최대 30톤의 건조된 바이오매스가 수확되었다. 계속해서 자라나는 다년생 식물 갈대가 말이다 30톤의 건조된 바이오매스라면, 1헥타르의 면적에서 매년 14톤의 석탄이나 1만 2000리터의 석유가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생산되는 것이다.
바람, 물, 태양, 바이오매스 네 가지 태양에너지원의 잠재량은 전 세계 60억 인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보다 몇 배나 많은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자연 속의 에너지 흐름은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태양빛만 해도 현재 세계 에너지 소비의 15,000배나 되는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다.
*바람은 35배나 많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바이오매스로는 10배를 얻을 수 있다.
*수력은 현재 전 세계에서 소비하는 에너지의 절반을 공급할 수 있다.
국제연합의 ‘환경과 발전을 위한 태양에너지’라는 연구팀은 이미 1991년 3월에 로마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재생가능 에너지의 전체 잠재량이 현재 인류 전체가 소비하는 에너지의 약 1만 배에 달한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미래의 에너지 사업은 70개 이상의 원자력발전소를 가진 프랑스가 아니라, 태양에너지로의 전환을 처음으로 일관되게 추구해나가는 산업국가가 하게 될 것이다. 태양정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일 것, 태양전지, 태양반사경, 태양열발전기, 열병합발전기, 수력발전시설, 풍력발전기, 바이오가스 설비, 전기 저장능력이 좋은 축전지, 태양에너지를 이용한 해수담수시설, 태양지붕, 태양자동차, 태양보트, 태양기구, 수소로 움직이는 자동차와 비행기 등의 생산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도 바다의 파도와 해류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태양에너지로의 전환은 수백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대단히 큰 기회이며, 동시에 환경을 보호하기 때문에 우리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게 축복을 주는 기회이다. 그리고 생태적 경제기적의 커다란 기회이다!
에너지 전환은 가벼운 산책이 아니라 산업화 역사의 가장 큰 혁명이다. 물론 온실효과로부터 벗어날 다른 길은 없다. 지체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대가로 내놓아야 할 것이다.
-교통체계의 전환은 가능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적 빈국들의 인구 증가를 최대의 환경문제로 바라보고, 환경문제가 출산율 제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 무슨 천박한 논거인가. 우리 행성이 직면하고 있는 중심 문제는 가난한 나라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중심 문제는 부유한 나라들의 잘못된 에너지, 교통정책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은 자동차가 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현재 부유한 나라에 사는 한 사람이 소비하는 자원과 에너지의 양은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보다 평균 25배가 넘는다. 그렇다고 인구 과잉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전 지구적으로 우리 행성의 미래 앞에 가로놓인 핵심 문제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남쪽 나라들에서 목격되는 심각한 인구 증가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성공적이고, 또한 인간적인 해결책은 환경 친화적인 경제 발전이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에너지는 태양, 풍력, 수력, 바이오매스, 지열, 그리고 태양수소 등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경제적 발전과 교육은 자동적으로 아이를 더 적게 낳도록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사실은 경제적인 곤궁에 처하지 않는 사람이 아이를 더 적게 갖는다는 것이다.
독일의 교통정책에 관해 스위스 은행장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이들은 독일의 철도 개혁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하고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기만 했다. 1994년 단행된 ‘철도개혁’은 철도를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바라던 전환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유는 철도를 매각해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철도를 뺀 모든 교통로는 연방, 주정부, 군이나 읍이 관할하고 있다. 공공의 손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연방은 장거리 교통로와 수로의 건설과 유지를 담당하고, 주정부나 시군들에서는 주도로나 시군 교통로를 관할하고 있다. 연방, 주, 시군들은 공항을 관할하며, 간접적으로 공항과 주를 관통하는 철도의 건설, 확장, 유지 책임을 맡는다.
내륙의 수상운송 기관은 수로와 부두설비, 수문의 유지에 들어가는 비용의 10%도 부담하지 않는다. 항공사들이 받는 운임에도 역시 공항의 인프라에 들어가는 비용의 극히 일부만이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도로교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비용의 대부분이 ‘외부로 떠넘겨지고’ 있다. 이러한 외부비용에는 출퇴근 시 자동차로 달린 전체 거리에 따른 세금정산, 배기가스, 도로용지의 비용, 교통 소음 등의 환경비용이 포함된다. 이 모든 비용을 납세자들이 세금에서 의료보험료에 이르는 다양한 형태로 지불하고 있거나, 후손들에게 복구비용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게 계산하면 도로교통은 심하게 적자를 보고 있는 상태다.
철도 구간은 철도청 혼자서만 책임지도록 되어 있다. 철도에서 흑자를 내고 있었을 때 철도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진 전쟁 빚을 갚아야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철도청에서는 흑자로 생긴 돈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지원해야 했고, 그 후 동독에서는 소련에 지불하는 배상금을 철도에서 담당해야 했다. 수십 년에 걸친 이와 같은 탈취가 없었다면, 철도는 현재 재정적으로 아마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철도망은 계속 축소되었다. 1990년과 1999년 사이에만 철도망의 1/4 이 사라져버렸다. 반면 도로망은 크게 확대되었다.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말이다. 마찬가지로 항공 교통망도 확장되었다.
지난 10년 동안 독일 철도청에서는 300개의 역사를 매각하였다. 앞으로 5500개의 역사 중에서 1500개가 더 팔릴 예정이다. 철도역의 홈에 접속하는 철도차량의 수도 1990년 이래 반으로 줄어들었다.
현재의 자동차정책은 교통정책이 아니다. 이 정책은 철도교통에 적대적이다. 철도망을 총체적으로 뜯어 고치면, 고용인원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더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1990년 이후로 철도에서는 고용인원의 거의 절반을 줄여버렸다. 이로 인해 철도 서비스 질의 저하와 경제적 손실을 초래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건가? 미국에서처럼 사유화된 철도를 원하는 것인가? 미국에서는 철도가 마지막 하나까지 사유화되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큰 철도망이 모조리 파괴되어 버렸다.
영국의 철도망 민영화 정책 역시 그것을 따를 만큼 고무적이지가 않다. 영국철도는 민영화로 인해 질과 양 두 가지 면에서 악화되었다.
전국토를 포괄하면서도 장래성 있는 철도, 즉 구조적으로 취약한 지역과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철도를 확장하고 유지하는 것은, 스위스에서처럼 이 미래지향적 과제가 공공의 과제로 여겨질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당연히 이런 맥락에서만 철도노선을 민간에게 맡길 수 있다. 철도도 노선 구간에서는 경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독일 제1 공영방송에 나간 ‘시대를 뛰어넘어’ 시리즈의 철학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미래에 대한 공포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상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텔레비전 시리즈 가운데 하나의 주제이기도 했던 ‘자동차 없는 이동- 미래로 가는 새로운 길’의 비전을 대략 설명하겠다. 생태학적 교통 전환에 관한 물음은 어떻게 우리가 자동차의 덫에서 빠져나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네 가지 ‘시대 뛰어넘기’가 필요하다.
1.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개인 교통수단의 억제
환경 파괴를 계산에 넣는 현실적인 에너지 가격의 도임
앞으로 20년간 에너지 가격을 매년 5%씩 인상한다.
최고속도 제한의 도입
대중교통에 대한 투자 확대
철도에 유리하도록 도로를 점차적으로 폐쇄
주차장 부지 축소
독일 레겐스부르그와 같이 차 없는 도심 만들기
여름 스모그가 발생했을 때의 주행금지
대중교통으로서의 택시 이용
2.대중교통의 확충
철도와 버스에 더 많은 투자
시내 전차망의 확충
버스와 전철에 확고한 주행 우선권을 준다
자동차 차선을 버스와 택시 차선으로 변환
심야 교통시 버스 운행 시간 조절
버스와 전철에서 택시 호출 가능
차체의 품질을 높이고, 쾌적한 설비를 확충, 기차에 신문을 보급하고 승객 보호자의 배치, 전철이나 근거리 철도에서 아침 식사가 가능하도록 한다
장거리와 근거리 교통 사시의 연결망 개선
근거리에 더 많은 기차 배치
승객의 정보 이용 개선
3.자전거 도로의 확충
모든 도시의 차도를 자전거 도로로 바꾸어서 자전거망을 만든다
대중교통과 자전거의 환승
모든 일방 도로에서 자전거는 양방향 주행이 가능하도록 한다.
역사에 자전거 센터 설립
모든 기차, 버스, 전철에 자전거를 편안하게 싣고 갈 수 있도록 배려
4. 보행자 도로의 확충
모든 도시에 넓은 보행로 보장
인도에 주차 금지
주차장을 놀이 공간이나 휴식 공간으로 변경
아이들의 놀이가 허용되는 도로의 설치
신호 등을 보행자에 유리하도록 개선, 즉 녹색 신호등이 바로 들어오도록 한다.
도쿄에서는 이미 전체 교통의 90%가 대중교통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왜 그렇지 못할까? 경험은 이렇게 가르친다. ‘더 많은 도로를 건설하는 사람은 자동차를 수확하기 때문이다.’ 만약 더 많은 자전거 도로를 만들면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이다. 이는 모든 지역 정치가들의 기본 법칙이다.
새로운 교통정책은 긍정적인 소식들과 설득력 있는 대안을 필요로 한다. 자동차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긍정적인 모델이 미래에 대한 의욕을 북돋워준다.
지금까지 대략 묘사한 교통 전환과 이에 상응하는 에너지 전환, 태양에너지 혁명, 생태적인 노동구조, 그리고 숲, 물, 나무 전환 등은 회의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 입국 독일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다. 예를 들어 이 새로운 이동 관련 산업을 실현시키려면 과거에 철저하게 구조 개혁된 자동차 업계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하다.
경제와 생태, 그리고 정치적인 윤리 사이의 화해는 생태적으로, 그리고 후세에 대해서도 정당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윤리적인 측면은 아마 생태적 경제기적에 결정적일 것이다.
독일의 기본법에서 사형제도가 폐지된 이래, 즉 지난 50년 동안 서독 도로에서만 60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이는 하노버에 현재 살고 있는 인구보다 더 많은 숫자이다. 자동차 교통에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소용이 없다. 마치 전쟁터에서처럼! 같은 기간 동안 서독의 도로에서 2,200만 명이 부상을 입었거나 장애인 되었다. 이 숫자는 독일에서 가장 큰 주인 노르트자인-베스트팔렌주에 사는 인구보다 더 많은 수이다. 올해도 독일에서는 자동차로 인해 또다시 소도시 인구에 상당하는 수의 사람들이 장애인이 된다. 3만 명의 사람이 말이다! 오늘날의 자동차정책으로 인해 1만여 명의 이아들이 해마다 바퀴에 깔리고 있다.
우리는 지금의 자가용이 사회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생태적으로 산업 역사상 가장 잘못된 구조물이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될 것이다. 1.5톤의 금속판 도움을 빌어서 70킬로그램의 인간을 이동시키는 일은 현명한 행위가 아니다. 실제로는 서 있는 물건일 뿐인 차량을 이용하는 일 역시 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승용차는 평균적으로 전체 시간의 2.8%만 운행 상태이고, 나머지 97.2%는 차고에서 녹슬고 있을 뿐이다. 어떤 책임 있는 기업가가 2.8%만 가동되는 기계를 구입할 수 있겠는가! 이용기간 동안 승용차는 약 12억 리터의 공기를 오염시키고, 30여 그루의 나무를 병들게 하고, 세 그루의 나무를 죽여 버린다. 게다가 2만 유로나 되는 비용을 들여서 도심에서 중세 마차만큼의 속도로만 달릴 수 있다는 것도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자동차가 값싼 이동용 수단이라는 것은 자기기만일 뿐이다. 평균적인 임금생활자 가정이 자동차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순수입의 1/4에 해당한다. 대도시 중심에서 한 시간에 16.2킬로미터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교통 시스템에 이렇게 많은 돈이 지불되고 있는 것이다. 200년 전에 마차는 한 시간에 평균 17.2킬로미터를 주행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자가용을 ‘단념’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자동차를 포기해야 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카 셰어링, 그러니까 자가용 나누어 타기를 찬성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자가용 하나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40대에서 50대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에든 바로 이용할 수 잇는 그런 자가용을 말입니다.” 빈 시의회의 녹색당 대표가 독일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더 많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지, 풍요가 줄어든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앞으로 자가용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잘 조직되어 있고 서비스 설비도 잘 갖추어진 대중교통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은 편안한 제시간 여행, 호사로움, 그리고 기쁨을 만끽하고, 무엇보다 안전한 이동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제시되는 교통 전환은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 홀츠 아펠이 주장한 ‘자동차 대신 자립’을 얻어야 한다. 수준 높은 삶의 양식은 미래의 상이지 단념이나 포기의 윤리가 아닌 것이다. 진짜 움직임이라는 것은 지금의 체증사회(교통 정체 등)에서는 이미 거의 사치품이 되어버렸다.
현명한 교통정치가 시행되어서 2020년까지 다음과 같은 일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일을 집에서 처리할 수 있고, 노동시간도 지금보다 적어지고, 집과 직장사이의 거리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독일 전체가 지금의 도로와 같은 철도교통망으로 덮이는 상황을 말이다. 동시에 나는 정치가들이 한정된 예산 때문에 국가가 새로 자동차 도로를 내면서 동시에 공공 교통체계를 새롭게 확충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우리 공동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개인적인 교통보다 우위에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 2020년으로 시대를 뛰어남은 우리의 생활이 될 것이다.
1.일자리까지 가는 길이 줄어들게 된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혹은 자전거나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다닌다. 전자 데이터망은 종래의 자동차 고속도로망에 비해서 지능적이고 경제적이며, 환경 친화적이고 우호적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짧은 구간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라고들 말한다. 자전거 타기는 재미도 있고, 운동도 되고, 사람들 사이의 교류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훨씬 많은 것을 보며 길을 즐기기도 하고, 갑자기 멈춰 서서 다른 이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전에는 자전거가 교통정책이나 국가계획의 관심을 못 받고 억눌려 있었지만, 점차 넓은 자전거 도로들이 생겨 편안하게 무리지어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2001년에 이미 적녹 연방정부는 현재 6%를 차지하는 자전거 교통을 2010년까지 12%로 늘리겠다고 결정했다.
2.장거리 출장에는 철도가 자동차에 비해서 더 매력적이 된다. 값비싼 자가용은 더 이상 수지가 맞지 않는다. 작은 도시에서는 다음 역까지 택시의 도움을 받아서 이동할 수 있다. 국내 항공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국내 항공은 철도 여행에 비해서 시간이나 비용 측면에서 지출이 훨씬 더 많다.
게다가 1997년에 이미 88.8%의 시민들이 항공이 가장 환경파괴적인 여행방법이라고 대답했다. 항공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의 84.5%조차 이런 여행방식이 환경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84%는 700킬로미터 이하의 거리에서는 비행기를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답하였다. 비행기는 자동차보다 훨씬 환경 파괴적이다. 왜냐하면 제트엔진이 내뿜는 배기가스가 1만 미터 상공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높이에서는 1리터의 비행기 연료가 미치는 환경 파괴가 1리터의 자동차 휘발유보다 네 배 정도 더 심하다.
3.물건 구매는 보행자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즐거운 여흥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도심은 이제 넓은 구역까지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모두에게 사회적인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 노인, 가난한자와 장애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소매상은 아주 잘 작동하는 배달 서비스 덕분에 다시 활발해졌고, 기차는 제 시각에 도착하는 정확한 서비스를 보장해준다.
유연한 전차 시스템은 성공적인 근거리 교통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암스테르담 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기차의 대량 도입과 교통 설계자의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서 모범적이면서도 미래 보장적인 교통정책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해주었다.
4.더 많은 여가를 집에서 누릴 수 있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나 광장에서는 스포츠 행사나 문화 행사들이 열리고, 축제도 벌어진다. 자전거 타기는 이전의 휴가 때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건강에 좋고, 비용도 저렴하며 환경 친화적이다. 더 많은 자전거들이 왕래하도록 만드는 것이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 달성해야 할 중요한 목표이다. 도시에는 이제 소음도 줄어들고 분주함도 줄어들었다. 교통사고 사망이나 부상도 줄어들고, 대신 더 많은 광장과 깨끗해진 공기, 잘 구상된 도로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건물 전면의 시커먼 오염도 줄어들었다.
전문적인 자전거 마케팅은 통해서 자전거와 기차는 2020년에 긴밀한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프라이부르크에서는 이미 1984년에 29% 가량의 시민이 도심에서 걸어서 물건을 구입했고, 32%는 자전거를 이용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즉, 61%가 자가용이나 엔진이 달린 탈 것을 이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26%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였다. 자가용은 이미 당시에도 이용률이 14%로 교통수단으로서 세 번째 순위로 밀려나 있었다.
지금까지 독일의 교통정책은 주로 자동차정책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연방 교통로 계획에서는 처음으로 도로보다 철도에 더 많은 예산이 배정되었다. 현재의 자동차 생산자가 미래에 철로나 기관차, 지하철이나 전철을 생산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을까?
긴급하게 필요한 교통전환에서 중요한 것은 금욕이나 희생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질이다.
바이에른주의 어떤 역에서 열차 차창을 통해서 나의 시선이 닿은 곳은 한 플레카드였다. 거기에는 ‘카셰어링은 이산화탄소 절약행동’이라는 표어가 적혀 있었다. 이미 4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도시에서 5~10명이 자가용 한 대를 나누어서 이용하는 승용차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다.
플래카드를 보면서 갑자기 생각난 것은, 연방교통부 장관이 이제야 처음으로 카셰어링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생태적인 행위에 대해 그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마디 한 것은 ‘카셰어링은 한 달에 75유로’라는 것이었다. 이 액수만 가지고 차량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승용차를 유지하는 데 한 달 동안 들어가는 비용은 평균 300유로이다. 승용차를 나눈다는 것은 돈을 절약하는 것이다.
퀼른대학의 교통학 연구소에서 행한 한 연구에 따르면, 운전면허 소지자들 가운데 250만 명이 승용차 나누기에 적합한 기준을 충족시킨다고 한다. 즉 이들은 도시의 인구 밀집 지역에 살며, 연간 7000킬로미터 이하를 주행하는 것이다. 여러 카셰어링 단체에서는 그동안 아주 저렴한 요금으로 승용차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제는 연간 12,000킬로미터 이상을 주행해야만 자기 차 소유가 유리할 정도가 되었다.
장래성 있는 교통정책의 목표는, 버스나 철도가 자동차교통의 틈새를 보완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는 현재의 상황을 현대적인 대중교통체계의 틈새를 자가용이 보완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는 것이다. 여러 매력적인 대안들로 대중교통은 가치 있는 이동시스템을 제공할 수 있고 자동차와의 이동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매력적인 대중교통은 모든 현대 도시계획의 중추에 해당한다.
1950년대 중반 이래 자동차 생산은 독일 경제와 정치가 떠받들던 ‘신성한 소’였다. 독일인은 지난 수십 년간 일자리 5개 중 하나는 자동차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모든 지도적인 정치가, 경제인, 노동조합 대표들로부터 들어왔다. 독일 연방의회 녹색당 교통 전문가인 알베르트 슈미트는 “노동자들은 점점 줄어드는 반면, 이들이 생산하는 자동차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청업자나 도로 건설을 포함시킨다고 해도 기껏해야 일자리 15개 중에서 하나만이 자동차 산업과 연관되어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나는 일자리 5개 중에서 하나가 자동차에 달려 있다는 과거의 주장이 과학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 프로그램의 ‘자동차 없는 이동’ 방송을 위해서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독립 연구기관인 ‘환경 및 예측 연구소’에 이에 대한 해명을 부탁했다. 결과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21개의 일자리 중에서 하나가 자동차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생태적인 경제기적은 21세기 현대 교통정책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다. 중요한 것은 스위스의 예를 따라 전국토를 덮는 대중교통망을 확충하는 것이다. 그러면 거의 모든 시민이 대중교통 시스템 연결 지점에서 2킬로미터 이상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거주하며 일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운동은 단순히 자동차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 대중교통 시스템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편리하며, 환경 친화적인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미래에도 자가용은 존재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지금처럼 자동차를 몰아야 하도록 떠밀려지지는 않는다. 미래에는 지금보다 효율적이고 작아진, 조종하기도 쉬운 승용차가 조금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느린 자동차라도 결과적으로 다시 더 빨라진 속도로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