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첨사 정발은 칼을 휘두르며 적군을 쫓아 고루(북을 달아둔 누각) 앞까지 나갔다. 부하들도 용감하게 추격해 수백의 적을 죽였지만 마침내 정발은 조총의 탄환에 10여군데를 맞아 죽었다. 엎어진 정발을 일으키 세우던 비장 이정헌도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부산진의 3000장사는 최후 1인까지 싸우다 모두 죽었다. 부산첨사 정발은 부산진에 들어온 일본군을 보고 부하들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일본이 아무리 강하기로니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이웃나라를 침범하면 천벌을 받지 않을까. 설령 일본이 도전한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것이 무엇 있나. 내 칼 한번이면 만군이 온대도 무슨 걱정이 있나.” 정발은 만부지용萬夫之勇이 있는 장수였다. 그 자부심으로 칼쓰기를 자랑했지만 정발이 큰소리친 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부산성 내에는 3000명이 되는 정예한 군사가 있었다. 성 바깥에는 깊은 못을 박아놨고, 못 주위에는 기마병이 말을 달리지 못하도록 철질려(일종의 마름쇠)를 깔아놨다. 이만한 병력과 설비가 있으면 웬만한 적병은 근심할 게 없어 보였다.
이때에 일본 제1군 사령관 소서행장이 부산첨사 정발에게 사자를 보내 통지문을 올렸다. “ 풍신수길이 대군을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하니 길을 빌려주어 무사히 들어가게 해달라.” 이 통지문을 보고 분노한 정발은 사자를 성 밖으로 몰아 내쳤다. 정발은 그제야 이 배들이 교역선이 아니라 병선이라는 걸 알았다. 성문을 굳이 닫고 군기를 배급해 적을 방어할 계획을 세웠다. 한편으로는 군사에게 밀령을 내려 부산진에 들어온 병선을 침몰시키라 했다. 성 위에는 무사를 벌여놓아 활로를 막게 했다. 아울러 파발을 보내 다대포(부산시 다대동) 첨사 윤흥신尹興信, 좌수사 박홍, 동래東萊부사 송상현宋象賢, 좌병사 이각, 경상감사 김수 등에게 적정을 통고하고 구원을 청하였다.
| | | ▲ 동래읍성역사축제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결사항전했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더스쿠프 포토] |
정발은 검은 갑옷에 황금 투구를 쓰고 ‘일검보국(한자루의 칼로 나라에 보답한다)’이라고 새긴 칼을 차고 말에 올라 군사를 지휘했다. 군관들도 군위를 갖추고 독약을 바른 화살을 전통에 가득 넣어 메었다. 일본군이 풍진을 날리며 부산산성을 향해 소낙비처럼 몰려왔다. 장수가 말을 타고 앞을 섰다. 중간쯤에는 순금 갑옷에 금광이 찬란한 뿔이 달린 투구를 쓴 대장이 여러 장수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오는 것이 보였다. 일본 선봉 소서행장이었다. 일본군은 한바탕 맹렬히 싸운 뒤 물러갔다. 정발은 적군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얕보는 마음이 생겨 술을 먹고 질탕하게 즐겼다. 마치 승전이나 한 듯이 즐거워하였다. 하지만 소서행장이 물러간 이유는 일종 계획이었다.
부산성의 방비가 견고하고 군사가 용감한 것을 보고 거짓 퇴병해 정발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하자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정발은 그날밤 술에 취해 단잠에 빠졌다. 정발과 함께 술을 먹은 부하들도 자는 사람이 늘어났다. 밤 축시쯤 해서 소서행장은 부산의 지리를 잘 아는 왜호(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를 앞잡이를 세워 부산성을 에워쌌다.
철옹성 ‘부산성’ 전투의 결과는…
그리곤 참호의 얕은 데를 쫓아 건너가 사다리를 놓고 잠이 든 부산성을 넘어 들어갔다. 첨사의 상하 장졸이 불의의 습격에 놀라 깨었지만 상황은 아비규환 자체였다. 장졸들은 총에 맞아 죽거나 밟혀 죽었다. 쌓인 주검이 산더미를 방불케 했다. 나중에는 조선 장졸들도 정신을 차려 응전했지만 무너진 형세를 만회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도 싸우기 벅찬 상대였다. 일본군의 조총은 활의 위력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먼 거리에서 싸운다면 활도 나은 점이 있었지만 이번 같은 근거리 싸움에선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본군이 마침내 첨사의 아문(관청)을 포위하고 항복하기를 권했다. 아문 안에 남은 군사가 아직 1000명은 있었다. 늦게 응전했지만 정발은 용맹하게 힘껏 싸웠다.
일본군은 정발의 검은 갑옷이 번쩍하면 무서워하였다. 그의 검술은 참으로 귀신 같아 검광이 빛나는 곳에 주검이 삼대 쓰러지듯 무너졌다. 그러나 과부적중寡不敵衆(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없음)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라 정발은 남은 군사를 끌고 물러났다. 최후 1인까지 싸우기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은 군사도 차차로 총알에 맞아 거꾸러지고 한정이 있는 화살도 다 떨어졌다. 비장(지방 장관이나 파견 사신을 주행하던 관원) 이정헌李庭憲, 황운黃雲 등이 “사또 이제는 화살도 다 하였으니 피신을 하였다가 다음 기회를 기다림이 어떨지요”라며 정발에게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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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발은 웃으며 칼을 들고 나섰다. “왕명을 받고 장수가 되어 내 땅을 버리고 도망을 간단 말이냐. 나는 이 성에서 죽어 이 성을 지키는 귀신이 될 터다.” 적을 하나라도 더 죽이고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결의였다. 정발의 비장한 말에 남은 군사들은 감동을 받아 피곤한 것도 잊어버리고 용기를 냈다. “우리도 사또를 따라 이 성의 귀신이 될 테요”라며 칼과 창을 들고 정발의 뒤를 따른 것이다. 관청의 문을 열고 보니 소서행장의 군사는 안에서 화살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고함을 치고 달려들었다. 정발의 칼에 수십명이 죽는 것을 보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정발은 칼을 휘두르며 적군을 쫓아 고루(북을 달아둔 누각) 앞까지 나갔다. 부하들도 용감하게 추격해 수백의 적을 죽였지만 마침내 정발은 조총의 탄환에 10여군데를 맞아 죽었다. 엎어진 정발을 일으키 세우던 비장 이정헌도 탄환에 맞아 장렬하게 전사했다. 정발이 죽은 뒤 정발의 첩 애향愛香은 남편을 따라 절사節死했고, 비장 황운과 가노家奴 용월龍月까지도 최후까지 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부산진의 3000장사는 최후 1인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일본 군사의 사상자도 수천명에 달했지만 부산성은 결국 일본군에 점령됐다. 정발은 충의남아忠義男兒였다. 그 빼어난 용기와 기개는 가히 이순신, 신립과 이름을 함께 할 만했지만 고립된 성을 구하는덴 실패했다. 이때 경상좌수사 박홍은 그 가족을 피난시키고 산에 올라 20리쯤 되는 부산성의 위급한 형세를 바라만 봤다. 경상좌수사가 관망만 하고 구하지 아니한 셈이다. 우후와 군관들이 출병하여 구원하자고 청했지만 박홍은 군사를 경솔히 움직일 수 없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부산첨사 정발의 애석한 전사
약한 장수 밑에 강한 군사가 있을 순 없다. 부산진에서 위급하다는 보고가 와도 수군대장인 박홍이 겁내는 것을 보고 제하 장수들은 “에라, 아서라. 가자”라며 모두 도망을 쳤다. 용렬한 박홍은 그런 와중에도 후일의 책임을 두려워해 장계를 올리고 병선 수십척과 군기 군량이 들어 있는 창고에 불을 놓고 말을 타고 달아났다. 박홍의 군관이던 오억년吳億年은 주장이 황급히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분을 참지 못했다. 그만 활을 당겨 박홍의 등을 향해 쐈다. 박홍은 수하 군관이 쏜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오억년이 동지 몇사람과 함께 모여 좌수영의 빈성을 지키고 있던 중 소서군이 또 좌수영을 침범했다. 오억년도 격렬히 항거하다가 전사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