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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해이다.
나의 아버지의 할아버지,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증조부께서 이 세상과 이별하신지 50년이 되는 해이다.
증조부께서 1967년 12월4일 93세로 엄청 추운 겨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날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깔깔대며 뛰어 다니고 즐기고 있었다.
아니,우리집에서도 심지어 장구치고, 나의 고숙부님들은 노래도 불렸다.
큰 독에 막걸리 가득 채우고 주위에 왕겨 불 피워 놓고, 돼지 잡고, 상여 만들고..
심지어 걸인(노숙인)도 함께하는 그런 날들이었다.
증조부 가시는날 상여가 동네 들판을 지날때,
어느 분이 나를 "장손이 여기있네" 하면서 상여 앞머리에
나를 앉혀 주시고,
상여꾼들게 이야기 하여 상여를 태워주셨다.
흔들흔들~~~상여 머리에 앉은 나는 겁도났다.
그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서야 할아버지이하 모든 분들이 곡(애고애고..)을 하고 계시는 것을
상여 위에서 보았다.
잠시 상여를 타고 지금 문중묘원앞 용수산 들머리,
그러니까 우리 밭 입구에 도착할쯤
상여에서 내려 앞 산 장지까지 걸어서 갔다.
발은 무척 시려웠다....
그때 거기서 상여에서 내렸어야 하는 이유를 한참 후에 나의 아버지께서 알려주셨다.
그곳에는 우리문중 윗대의 할아버님이 계신다고..
지금은 알지만 20세조 휘 태흥 할아버지께서 계시는 자리였기에....
그때는 나의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보다 더 윗대의 할아버지,
더 윗대의 아버지를 항상 먼저 생각하고 계셨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나는 한참 동안 멍하니 생각한다..
현재는 내 아들,내 아버지,내 할아버지, 다음은 ???
2013년 문중묘원 조성시 휘 천헌 할아버지이하 스물한분 중 열다섯분을
내가 직접 뵙고 모시면서,
우리 선조님들은 대단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옛날 선조분들은 유체(遺體)도 잘 모셨지만, 유택(幽宅)도 잘 마련해 주셨다는 것을..
그렇지 않았더라면 위치도 찾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늦게나마 용수산(용머리) 좋은 자리에 해주오씨 행정공 동지공파
진주문중묘원을
조성하여 선조님들 모셨으니 ,
선대(先代),현대(現代),후대(後代) 모두 다 안녕하시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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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릴 적 기억은 반백년이 지나도 생경(生梗)서럽게 기억나는 것은
뇌 속 '해마'라는 기억서랍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 기억들
대부분은 무의식에 묻혀 있다가 때론 망각이나 왜곡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중요한 동력은 우리에게 감정이 있기 때문에 되살아나며,
그래서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끓임 없이 과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너무나 아련한 기억이고 어린시절본 상여와 애간장 녹이는 곡소리 들어 서리라 생각이 듭니다. 이젠 우리 후손들이 이러한 모습은 볼수 없을지 모르겠으나 천헌재실을 만들어 그곳에 모여 시제를 모시고 문중묘원를 조성해 함께 성묘하고 묘사를 치룰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뿌듯 합니다. 이런 토대를 만드신 회장님,부회장님,총무님, 그외 재실및 문중묘원을 만들어 주시기위해 노력하신 먼저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높은치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젠 우리가 해야할일이 분명한것 같네요.
공들여 일궈낸 재실과 문중묘원을 우리세대만이 아니라 먼후손까지 길이길이 보존되고 가꾸어 가야할 책무가 생김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