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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0일 오후 6시 32분에 저장한 글입니다. 영남알프스 등산로(저서) 소개
2017. 8. 10. 18:28
http://blog.naver.com/gajisan99/221071240744
어곡산(710m)·새미고개·신불산공원묘지·스토리텔링
새미고개에서 기암괴석의 바위산 어곡산을 오르는 급경사가 다소 힘드나, 어곡산 정상의 절경이 장관인데다 신불산공원묘지 하단부의 진성여왕 무덤이라는 것이 흥미를 불러일으킴. 여름철에 가려면 새벽에 가서 어곡산 정상까지 속히 올라감이 좋을 것임. |
□ 찾아가는 길
○ 시외버스로 가는 경우 :
울산시내에서 언양행버스를 타고 가서 언양버스터미널에서 언양-통도사-부산까지 운행되는 버스를 타야함. 언양에서 양산시내 북부시장 앞이나 그 전에 하차하여, 택시(삽량콜택시 : 055-365-1000)를 타고 서쪽 양산천 위의 양산교다리를 지나 어곡산업단지를 거쳐, 원동면 화제리로 넘어가다가 새미고개에 내려야 함. 언양에서 북부시장까지는 1시간이 소요되고, 북부시장에서 새미고개까지는 택시비가 약 8천원 나옴.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신복로타리에서 고속도로를 타고가다가 언양을 경유, 양산시내로 들어가 시내 서쪽의 양산교다리를 지나 어곡산업단지로 올라가야 함. 산업단지의 대동(大東)마을에서 좌측(남쪽)의 공장지대로 4km 정도 올라가면 원동면 화제리로 내려가는 새미고개가 나옴.
매바위산 정상과 그 앞의 동서방향 바위능선 : 그 뒤(북쪽)에 신불산고개가 보임
□ 등산 코스 · 거리 · 시간
새미기고개(1.8km,1시간10분)매봉(어곡산)(0.9km,23분)용선마을하산로(1.1km,36분)신선봉(1.1km,25분)화제리하산로(0.3km,11분)철탑·임도(2km,35분)용선하산산판도로입구(0.3km,12분)명전고개(0.8km,28분)널밭마을하산로(0.3km,10분)널밭고개(0.6km,20분)영성의집(0.5km,15분)신불산공원묘지표지석⇒9.7km, 4시간 45분
□ 약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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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로 설명
새미기고개~어곡산 정상까지
새미기고개의 북쪽 어곡산(매바위봉) 정상의 동쪽봉 : 처음 등산에 가팔라 잠시 고생됨
새미고개는 양산시 어곡동에서 남서쪽의 원동면 화제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임. 이곳에서 북쪽을 올려다보면 높은 어곡산이 불쑥 솟아있음. 도로 서편에 서 있는 이정표에는 북쪽의 선암산(매바위) 1.8km, 남쪽의 작은 오봉산이 3.7km, 춘추공원 3.9km라고 표시되어 있음. 이정표 맞은편의 동쪽에 보면 오봉산과 춘추공원으로 가는 등산로가 소나무숲 속에 리번이 달려 표시되어 있음. 그 등산로는 ‘양산 오봉산’ 코스에서 설명하겠음.
상기 이정표에서 서쪽으로 접어들자마자 길은 정북 방향으로 바뀜. 송림 속을 얼마 동안 올라가면 무덤 1기가 있음. 남쪽의 낙동강 바람이 불어 시원한 가운데 송림 그늘로 경사길을 오르게 됨. 고개에서 40분 남짓 올라가면 이정표에 동쪽 샛길로 1.9km 하산하면 어곡공단이라 되어 있음. 다시 북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바위전망대가 나오고 남쪽의 오봉산과 그 서쪽의 화제리 벌판과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며, 서쪽에 토곡산과 그 남쪽의 용굴산(함박산)이 멀리 건너다보임. 고개에서 50분 뒤에 매봉산 동쪽에 오르고 서쪽으로 약 20분 가면 정상에 오름.
어곡산(매바위산) 정상에서 본 북쪽의 능걸산(上右), 능선 뒤에는 멀리 영취산, 아래 흰 부분이 신불산공원묘지
위 바위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매바위산의 제일 동쪽부분인 바위봉에 올라섬. 고개에서 50분 뒤에 매봉산 동쪽에 오르고 서쪽으로 약 20분 가면 정상에 오름. 바위봉으로 나아가는 것은 위험하고 힘이 드니 바위봉 좌측의 우회로로 가야 할 것임. 동쪽 끝에서 서쪽으로 1분 정도 나아가면 우측(북쪽)에 어곡공단으로 하산하는 능선길이 열려있음. 여기에서 서쪽의 매바위봉 정상까지는 바위봉 200m 정도가 동서방향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짐. 이 바위봉의 제일 서쪽 끝봉에 매바위산(봉)의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음. 이 산을 어곡산(魚谷山,710m) 또는 매바위봉, 선암산이라고도 부름.
서쪽의 신선봉에서 건너다 본 어곡산 매봉과 어곡산 능선
정상의 동쪽과 서쪽에 철재사다리가 놓여서 올라갈 수 있게 해두었음. 정상에는 10여 명이 앉을 수 있게 넓은 공간이 있음. 높이가 50m도 너머 보이는 이 장대한 바위봉은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아도 우뚝 솟아 우람차 보임.
이곳의 동쪽에는 양산시내와 그 건너 원효산이 보이고, 북쪽에는 능걸산 정상과 기차바위 및 에덴벨리리조트의 흰색 풍력발전시설이 보임.
어곡산 정상~신선봉까지
어곡산 정상에서 서쪽의 철재계단을 타고 내려와 정서 방향의 능선을 타고 계속 올라가야 함. 정상에서 3분 뒤와 8분 뒤에 북쪽 어곡공단으로 하산길이 희미하게 나 있고 리번도 달려있으나 많이 다니지 않는 험로인 것 같았음. 정상에서 15분 뒤에 낮은 첫 번째 봉우리에 오르고 23분 뒤에 이정표가 있는 하산로에 다다름. 이정표에는 동쪽 선암산 0.9km, 서쪽 토곡산 4.4km, 북쪽 어곡용선마을 2.7km라고 가리키고 있음.
계속 서쪽으로 올라가는데, 그 이정표에서 15분간 완만한 등산로를 오르면 좌측에 전망대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니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공간이 있었음. 그 전망대에서 다시 13분 동안을 오르니 둘째 봉우리에 올랐으며, 다시 8분간을 더 올라가니 세 번째 봉우리인 신선봉(785m)이라 쓴 돌무더기에 올라서게 되었음.
매바위산 서쪽의 신선봉 표지석과 돌무더기 : 본 등산로의 중간지점으로 주요한 봉우리임 . 동,서, 북쪽에 하산로가 나있음.
신선봉이란 곳이 이번 등산로에서 아주 주요한 갈림길인데 여기에서 시간과 체력을 안배해야 할 것임. 힘이 부치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은 여기에서 우측(북쪽)을 내려다 보면 송림 속의 임도가 북쪽과 동쪽으로 나뉜 곳을 보게 됨. 또 신선봉 북편 임도와의 사이에 높이가 100m 정도 되어 보이는 철탑이 보임.
신선봉 북쪽의 등산로상의 몇 개의 작은 봉우리 : 그 서쪽(좌측)에는 임도 등산로가 있음.
그 철탑을 보고 임도로 10~15분간 억새밭을 거쳐서 하산하면 임도삼거리에 내려섬. 이 삼거리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가면 신불산고개이고 동쪽의 산판도로로 약 1.5km(약 20~30분) 내려가면 어곡동 용선마을(내화룡)이 나옴.
신선봉~토곡산 동쪽 임도(철탑)까지
신선봉에서 임도로 가지 말고 서쪽의 광등능선길로 계속 감. 20분 나아가면 폐표지 같은 잔디밭이 나오고, 얼마 뒤 길이 좌우로 나뉘나 우측의 리번이 달린 서쪽길로 가야함. 곧 이정표가 서 있는 삼거리에 올라섬. 북쪽 화제리 2.8km, 서쪽 토곡산 정상 2.3km, 동쪽 매바위산 3.1km라고 안내되어 있음. 남쪽의 바위절벽에서는 서쪽의 토곡산과 용굴산 능선이 올려다보이고 남쪽은 넓은 화제벌판과 낙동강이 내려다보임. 8분과 11분 뒤 각각 송전철탑이 나타남. 철탑 아래는 임도가 동서 방향으로 나 있는데, 철탑 서편 50m 거리의 능선에 보면 등산로가 이어지고 리번도 있음.
신선봉(동쪽)에서 토곡산 정상(서쪽)으로 가는 광등능선에서 내려다본 남쪽의 화제들판과 낙동강
여기에서 서쪽의 토곡산 정상까지는 1시간15분 정도가 소요되며 거리는 약 2km임. 여기에서 서쪽으로 26분 정도 올라가면 토곡산 동쪽 삼거리로 남쪽의 복천암으로 하산하는 길이 열려 있음. 복천암에서 토곡산에 올라 원동면 수청(水淸)마을로 하산하는 길은 다른 ‘토곡산’코스에서 설명하겠음.
토곡산의 동쪽면 그 아래에 복천암이란 작은 절집이 있음
용굴산(함박산)의 동쪽면 , 토곡산의 남쪽산인데 남쪽면의 급경사 등산로를 하산하면 원동면 수청마을임
토곡산 동쪽 임도(철탑)~널밭고개(신불산고개갈림길)까지
이곳 철탑에서 동쪽 임도로 가기로 함. 거의 평지인 임도로 가는데 사람과 차가 없고 길 양옆에 숲이 우거져 산책코스로는 좋은 편임. 동쪽으로 35분간 열심히 걷다보면 임도가 동향에서 북향으로 바뀌는 곳에 우측(동쪽)으로 임도가 나뉨. 우측으로 조금 들어가보면 임도 좌측과 우측에 리번이 나붙어 있음. 우측(남쪽)으로 0.6km 정도 올라가면 앞에 언급한 신선봉이란 돌무더기가 있는 봉우리에 올라섬. 그 등산로 중간의 억새밭에 높은 전신주 같은 것이 세워져 있음.
다시 북쪽의 임도로 계속 12분 정도 나아가면 우측(동쪽)에 좁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 임도에 옛날 서쪽의 명전마을과 동쪽의 용선(내화룡)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명전고개가 있었던 곳임. 다시 북쪽으로 약 28분을 가면 임도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그 이전에는 비포장도로임), 좌측(서쪽)으로 원동면 내포리 널밭마을로 내려가는 임도가 나옴. 여기에서 동쪽으로 10분 올라가면 임도 방향이 다시 북쪽으로 바뀌는데, 우측(동쪽)을 보면 임도가 나 있고 그 하단부에 여러 색깔이 칠해진 전신주가 있음.
널밭고개에서 북쪽으로 2km 정도 올라가면 서북쪽의 배내골(에덴벨리리조트)에서 동쪽의 양산 어곡단지로 넘어서는 신불산고개에 올라섬. 토곡산에서 신불산고개까지 약 6km의 임도 남쪽과 동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여럿 계속됨. 동쪽의 봉우리에 등산로가 있긴 하나 등산할 멋이 별로 없는 봉우리이고 임도를 걷는 것이 오히려 좋은 편임.
널밭고개(신불산고개갈림길)~용선버스종점까지
위 임도 삼거리가 바로 널밭고개로 이전에 동서 교통로로 유명한 요지였음. 색깔이 있는 전신주의 대각선 방향, 즉 동북 방향의 풀밭 아래를 보면 하산로가 있음. 임도에서 처음의 하산로가 좁고 수풀이 가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지점이니 주의를 요함. 그 하산로에 들어서면 곧 아주 넓은 임도로 변함. 전에는 오솔길이었는데 최근 영성의집에서 공사를 하여 길을 확장한 것 같았음. 경사길을 얼마 동안 내려가면 목재정자가 나오고, 그 앞의 계곡 다리를 지나서 동쪽으로 가면 ‘천주교 영성의집’이 엄청난 규모로 세워져 있음.
영성의 집과 그 아래 동북쪽 능걸산 기슭의 신불산공원묘지
영성의집 정문에서 저 앞의 높은 다리 위로 올라갈 것이 아니라 다리 아래의 옛길로 하산해야 함. 계곡 위의 작은 다리를 지나 신불산공원묘지 사이의 도로로 동쪽으로 계속 내려감. 다리를 지나서 수백 미터 가면 도로 아래에도 공원묘지가 있고 묘지 동편에 노송나무가 한 그루 서 있음. 그 노송나무에서 남쪽으로 100m 정도 내려가면 제일 하단부에 ‘진성여왕 묘’라고 소문 난 특이한 산소가 있으니 꼭 둘러봄이 좋을 것임.
신불산공원묘지 제일 하단부분에 있는 신라 진성여왕의 무덤 : 『동경잡기』와 『양산시지』등에 기록이 남아있지만 정확한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음
공원묘지의 표지석에서 남동쪽으로 24분 정도 내려가면 용선버스종점에 내려섬. 그곳에는 양산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운행됨. 위의 삽량콜택시로 상북면 소토리 앞의 효충교다리를 건너 소토정류장까지는 약 6천원의 요금이 나옴. 이 정류장에서 언양행 버스를 타면 됨.
□ 역사유적지 · 명승지 등
○ 진성여왕(眞成女王) 무덤
양산시 어곡동 용선마을 북쪽 부처골에 능걸산이 있는데, 그 산의 기슭에 1994년에 조성된 신불산공원묘원이 있음. 어곡지방산업단지에서 용선버스종점을 지나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군부대 앞을 지나고, 얼마 뒤 ‘솔바람쉼터’라는 표지석 앞에서 도로가 좌우로 나뉨. 좌측(서쪽)의 새로 난 넓은 도로로 3km를 올라가면 신불산고개 넘어 에덴벨리리조트가 나오나, 우측(북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신불산공원묘지’가 나옴. 그 입구의 커다란 표지석 앞에서도 도로가 서쪽과 북서쪽의 두 갈래로 나뉨. 북서쪽의 공원묘지 사이의 도로로 가면 역시 신불산고개로 가게 되나, 여왕무덤은 서쪽 도로로 가야함. 앞 삼거리에서 서쪽 도로로 200m 정도 가면 도로 아래에 묘소 수십 기가 있고 도로가에 노송 한 그루가 서 있음. 그 노송 아래의 남쪽으로 60~70m 정도 내려가면 전주이씨 묘와 비석이 있고 그 아래에 여왕묘가 있음. 그 묘 아래에 계곡물이 흐르고 남쪽에는 새 도로가 나 있음. 노송이 있는 도로로 서쪽으로 계속 가면 ‘천주교 영성의집’을 거쳐 널밭고개로 올라감.
진성여왕릉 앞의 여인상인 듯 : 여왕을 모시던 궁녀인가?
이 주변의 사람들은 진성여왕이 이곳에 귀양을 왔다가 죽어 이곳에 묻혔다고 알고 있음. 양산시지(梁山市誌)에도 이런 사실을 적고 있는데, 이것이 진실로 통일신라시대 진성여왕의 무덤인가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은 실정임. 1669년(현종 19)에 경주부사 민주면과 진사 이채 및 김건준이 쓴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진성여왕릉이 황산(黃山)에 있다고 해두었음. 황산은 조선 현종 때의 양산군 황산역이라니 이 무덤일 가능성이 높음.
진성여왕릉 앞의 남자상인 듯? : 얼굴이 오랜 세월간 많이 훼손되었음
『삼국유사』에는 진성여왕을 ‘화장하여 모량서악(牟梁西岳)에 뼈를 뿌렸는데, 미황산(未黃山)이라고 된 곳도 있다.’라고 표기되어 있음.
산소 앞의 상석(床石)이 네모 반듯한 큰 바위로 되어 있으며, 봉분 둘레에 반듯한 돌을 수십 개 깔아둔 것과, 문·무인석(文·武人石)이 서야 할 자리에 두 손을 공손히 맞잡고 시립(侍立)하는 듯 마주보고 서 있는 두 인물상 등이 평민들의 묘와는 달랐음.
○ 널밭고개
양산 어곡리 용선마을에서 개울을 건너 비스듬이 산등선을 넘으면, 원동면 내포리 널밭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임. 조선시대 황산역(黃山驛, 지금의 오봉산이 황산이었음)에서 유산역(由山驛, 지금의 유산지방공단이 양산교다리 서쪽에 있음)을 경유, 내포원(內浦院)으로 가던 고개인데, 내포에서는 다시 밀양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었음. 1960년대만 하여도 원동면 영포 · 내포 · 배내 사람들이 양산으로 넘어가던 유일한 길로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음.
널밭고개에서 동쪽의 영성의 집으로 하산하는 넓은 임도
□ OUTSIDESTORY : 인류의 조상, 우리 한민족의 조상, 중국 신화상의 중국인 조상
우리 역사상 고대사의 쌍벽을 이룬다는 책으로 최근에 국민들에게 많이 익히고 있는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의 『부도지(符都誌』와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묶은 『한단고기(桓檀古記)』에서 인류의 조상, 우리 한민족의 조상, 중국 신화상의 중국인 조상을 알아봄. 물론 여기서 그 조상이란 두 책에서 설명하는 조상에 한함.
앞의 두 책은 한자로 된 책을 중학교 교사 김은수가 1980년대에 한글로 번역하고 주해한 책임. 강단사학계에서는 두 책의 역사적 사실이 증명이 안 된다고 위서(僞書)라지만 재야사학계에서는 그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음. 필자가 보기에 두 책의 논리가 분명하고 단군조선 때부터 계속 전해오는 역사적 사실이라 위서로 보기엔 문제가 있음.
1) 인류의 조상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에서는 인류의 조상을 나반(那般)이라 하였는데, 그가 아만(阿曼)을 만난 곳은 아이사타(阿伊斯它)라고 하였다. 그 둘은 꿈에 천신의 가르침을 얻어 혼례를 이루니 구한족(九桓族)은 모두 그 후예들이다. '나반'은 '나바이', '아바이'로 읽으며 즉, 아버지다. 아만은 '아마이'로 읽는다. 즉, 어머니다. 아이사타는 태양광선이 잘 비추는 곳이란 의미다. 동이족(東夷族)이 9개 민족으로 이루어졌기에 구한족이라 했다.
2) 우리 한민족의 조상
『부도지』에 의하면 중앙아시아 파미르고원의 마고대성에서 마고의 후손중 가장 종가인 황궁씨가 마고대성 북쪽의 천산주(天山洲)로 이주해 천산에서 그의 장남인 유인씨와 살게 됨. 황궁씨와 유인씨가 모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돌 혹은 산신이 되었음.
유인씨의 아들이 한인(桓因)씨로 한인씨가 한국(桓國)이란 나라를 개국하여 7한인이 3,301년간 다스림. 이 한국이란 나라가 우리 한족(桓族)의 시작이 되는 셈인데, 한인은 아직 인간세상이 아닌 천제(天帝)로 하늘사람이었음.
한인이 저 아래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며 삼위태백(三危太白)은 백성들을 홍익인간(弘益人間)할만하다 해, 한웅(桓雄)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주어 내려보냈음. 한웅이 중국 서안(西安) 근처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 내려와 신시(神市)를 베풀고 '배달나라(倍達國)'를 건국했음.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5,900년 전이었음. 그 건국 날짜가 음력 10월 3일이었는데, 이 날이 우리가 기념하는 개천절이라 함. 이후 한웅이18대까지 통치를 하는데, 그 기간이 1,565년간이었음. 한인이나 한웅은 한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 교황과 같은 최고 통치자였는데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제사장이었음. 한웅은 천왕이라 부르는데 이가 진정한 우리 한족의 조상이라고 함.
배달나라 기간 중 태백산 일원이 사막화되어가자, 동이족의 일원인 제14대 자오지(慈烏支) 천왕(한웅)이 산동성 태산 부근 청구(靑丘, 동방이란 의미)에 구례(句麗)라는 나라를 건국했음. 그러자, 기존에 살던 황제(黃帝族) 헌원(軒轅)이 군사를 동원해 치우 한웅과 현재 북경 서북쪽 120km 지점의 탁록에서 대전을 벌였음. 70여회 싸웠으나 치우가 백전백승했음. 치우의 용맹한 군사들은 도깨비 탈을 쓰고 갑옷을 입고 싸우자 갑옷의 존재를 모르던 중국인들은 치우의 군사를 괴물이라 했음. 사마천의 『사기(史記)』란 역사서에는 이 탁록대전이 책 서두에 소개가 되는데, 그래서 중국의 한족(漢族)과 우리 동이족 한족(桓族)은 비슷하지도 않고 그 종류가 다름. 60여 민족으로 나뉜 지리멸렬했던 중국 민족들이 동이족에게 복속되어 조공을 바치다가 동일민족 의식을 갖게 된 것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라는 책 때문이었다고 함. 역사서의 위력이 어떠한지 이 대목에서 절감할 수가 있음. 한웅이 웅족(雄族) 여자인 웅녀와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고 함.
우리 배달나라 한웅들이 중국의 60여 개로 나뉜 민족들을 문자와 제도 등으로 문명화시켰음. 『한단고기』의 여러 기록에서는 강대한 동이족이 중국의 지리멸렬한 족속들을 제후국 혹은 속국으로 다스렸다고 함. 배달국도 중국의 수많은 민족들이 뭉쳐서 힘을 강화하자 중국의 전국시대가 오면서 배달국 힘이 약화되어, 나침반이 가르치는 방향을 따라 동북부의 현재 만주 하얼빈으로 밀려와 단군이 조선을 건국했음. 이때가 B.C 2333년이었음. 이 나라를 단군조선이라 하는데 이 날도 역시 음력 10월 3일이 개국날인데 이 날이 우리의 개천절이라 함. 한웅의 개국과 단군의 개국의 날짜가 다 개천절이라는데 양설로 나뉨.
만주 하얼빈의 단군조선이 일본과 중국 동북부를 통치하면서 대국으로 성장하다가 47세 단군까지 2,096년까지 지속되어 B.C 238년 중국 한나라에게 패망하게 됨.
그 뒤 북부여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로 나뉘어 쟁투를 벌이게 되었음.
3) 중국인들이 전설상의 조상으로 보는 반고(가한)
반고[盤古, 반호(盤瓠)]는 한웅이 태백산에서 배달국을 건국할 때, 그는 한인에게 따로 부탁하여 허락을 받고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의 신장(神將)과 공공(共工),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를 거느리고 돈황(敦煌) 삼위산 납목동굴(拉木洞窟, 라림동굴)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음. 그를 가리켜 제견(諸畎) 또는 반고가한(盤古可汗)이라 하였음. 그가 동이족에서 처음으로 중국 민족으로 화했던 사람인데, 무릉만(武陵蠻), 묘족(苗族), 요족(猺族)의 시조가 되었음. 그는 치우씨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함.
반고는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달걀 모양과 같은 혼돈 속에서 태어났는데, 그가 죽자 머리는 중국의 다섯 진산인 오악(五岳)이 되었고 기름은 바다가 되었으며, 두 눈은 해와 달이 되었다고 함. 반고가 죽은 후에는 천황(天皇)씨와 지황(地皇)씨와 인황(人皇)씨가 차례로 다스렸다고 『삼오력기(三五曆記)』와 『통감외기(通鑑外記)』에 전하고 있음.
중국 역사는 반고신화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한민족의 후손임. 중국은 삼국시대부터 그들의 공동조상으로 반고를 받아들임.
반고 다음으로 B,C 2177년 3세 단군 가륵 6년에 열양(列陽), 욕살(褥薩), 색정(索靖)을 고비사막의 약수(弱水)에 옮겨 종신형에 처한 후 사면하여 그 땅에 봉했음. 그들이 흉노(匈奴)의 시조가 되었음. 이들이 두 번째로 동이족에서 갈려나간 자들임.
이와 같이 한족(桓族)은 중국, 흉노, 일본, 몽고, 선비족의 시조가 되었음. 이외에 『고구려국본기』와 『대진국본기』 에는 한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한 사실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있음.
⇒김은수는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우리민족의 태생지를 드넓은 중국에서 한반도 안으로 옮겨놓았다고 비판함.
※ 우리나라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언제 생겼을까? 우리 민족의 형성은 통일된 신라를 계기로 해, 고려와 조선 시대를 통해 숙성기를 거쳐 오늘날의 한국민족이란 동일감을 형성하게 되었음(KBS 역사물 방송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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