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의 탈을 쓰고 저들이 주창하는 '참교육'은 외면한 채 거리로 뛰쳐나와 정치집회에 올인하는 민주노총의 전위대들.
이들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소년원을 거쳐 관심병사가 되어 전우에게 총기를 난사하고 스스로 목을 매단다.>
-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2013년 교육부와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내건 363개 항목의 조건 가운데
62%인 228개 항목이 불법적이거나 교육부 권한 밖의 무리한 요구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5가지를 소개한다.
1. 전교조가 제시한 조건이 법령에 위배될 경우 전교조에 유리한 조건을 채택해줄 것.
2. 영등포 전교조 사무실(교육부 예산 6억 원으로 얻어줌)보다 2배 이상 넓은 장소를 제공해줄 것.
3. 전교조 교사의 2014년 기본급을 일률적으로 10% 인상해줄 것.
4. 13세 이하 자녀를 둔 전교조 교사에게는 별도로 월 10만 원의 교육수당을 지급해줄 것.
5. 전교조 교사가 국내외 대학원에 진학할 경우 그 기간을 유급 연수기간으로 지정하고 학비 전액을 지원해줄 것.
이것이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실천하겠다고 표방한 전교조 교사들의 민낯이다.
전교조 출신 한 교육감은 개망나니 짓을 하여 사립고가 파면한 교사 2명을 편법으로 공립고 교사로 특채하기도 했다. -
미8군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분기마다 시행하는 엄격한 심사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미국인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곡 해석, 가창력, 영어발음, 표정, 동작, 의상, 화장, 무대 구성, 진행 스피드 등은 물론
쇼의 소비자인 미군들의 반응까지 세밀하게 분석하여 심사평을 해주고는 그 자리에서 당락을 결정했다.
심사에서 탈락한다는 것은 곧 3개월 동안 일자리가 없어진다는 뜻이었으니 쇼단마다 사활을 걸고 준비했다.
당시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미8군 쇼를 통해 벌어들인 총수입이 연간 100~120만 달러였다니
심사를 통과하기만 하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앉는다는 얘기였다.
실제 이백천의 한 달 출연료는 등록금의 4배인 100달러를 넘어 ‘학생 귀족’이란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넉넉한 생활을 했다.
이백천은 심사위원들의 심사평 내용을 상세히 체크하여 자사(自社) 연예인 관리에 적용함으로써 점차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됐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미8군 쇼에서도 간접적으로 증명된다.
미국 국방부※는 매달 ‘Stock Arrangement’라는 뮤직 폴리오를 발간하여 심사에 참가할 각 쇼단에 보내주었다.
‘Stock Arrangement’는 미국에서 유행하는 최신곡을 일류 음악가들이 연주용으로 편곡한 악보였다.
수백 개의 쇼단이 여기 매달려 각고의 연습 끝에 오디션을 받아 흥망이 결정되었으니,
미8군 쇼는 우리나라 초기 대중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셈이다.
이백천은 당시 미8군 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연주인들의 이름도 나열해놨다.
<이봉조 최창권 김강섭 엄토미 송민영 여대영 이인재 정서봉 김희갑 박성원>
이후 우리나라에도 TV방송국이 속속 문을 열고 오비스 캐빈 같은 대형 업소도 생겨나 무대가 넓어지자
이들은 미8군 무대에서 익힌 음악적 기본 위에 우리 정서를 가미하여 다양한 경로로 활동하면서 대중음악 발전을 선도했다.
그 무렵 이백천이 이끄는 악단 <Knight of Melody>는 을지로 6가에 있는 한 클럽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미국 국무부※에서 위문공연단을 보내면 주한미군 연예 담당자가 그들을 그 클럽으로 데려와 첫날을 보내도록 했다.
한국에도 이 정도 수준의 악단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을지로 6가의 클럽은 미 공병단이 주한미군의 여흥을 위해 만든 공연장이었는데,
공병단장은 교체될 때마다 <Knight of Melody> 악단과의 전속계약 유지를 인수인계 사항에 포함시켰다.
※ 이백천은 미국 국방부를 국방성, 국무부를 국무성이라고 써놨다.
성(省)은 일본의 정부부처 이름으로, 왜정시대 때 서구문물이 도입되면서 정부부처 이름도 왜식으로 표기되어 들어왔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어언 70년, 상굿도 일부 신문기자를 포함한 몰지각한 식자들이 왜식을 좇고 있어 안타깝다.
이백천은 뛰어난 기억력으로 미8군 무대에서 함께 활동하던 가수들의 이름도 열거해놨다.
그 가운데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우리 젊은날에 큰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한명숙은
79세인 올해 새 앨범을 내고 신인가수의 자세로 무대에 복귀했다.
참으로 존경스럽고 고마운 열정이다.
<Knight of Melody> 악단의 전속가수로 활동한 손시향도 반가운 이름이다.
<황성옛터><이별의 종착역><검은 장갑> 등 주옥같은 명곡을 남긴 손시향은 경북고와 서울대 농대를 나온 재원으로
준수한 외모에 솜사탕 같은 달콤한 음색이 아쉽게도, 196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팬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다.
경북고 후배 신성일은 손시향의 가수 진출에 자극을 받아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5‧16혁명은 연예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혁명정부는 1961년 8월 15일 국제극장에서 <혁명기념예술제>를 개최하여 대중문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이 무대를 통해 <블루벨스4중창단>이 데뷔하여 단박에 대중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질풍노도의 과정을 탈피하지 못하여 아내로부터 ‘죽기 전에는 철들기 글렀다’고 핀잔을 듣곤 하는데,
그나마 <블루벨스4중창단><봉봉4중창단> 등의 격조 높은 노래를 들으며 큰 탈 없이 젊은 시절을 건너왔다.
혁명정부의 국어순화 정책에 따라 이백천도 악단 <Knight of Melody>의 이름을 <민들레>로 고쳐 활동을 이어갔다.
<민들레>는 1956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영 방송사인 HLKZ TV에도 출연했는데,
이때 이백천은 사회자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방송활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이백천은 <민들레>를 이끌고 고복수 선생의 은퇴기념 전국 순회공연에도 참가했다.
그는 고복수의 부인 황금심 여사를 비롯하여 남인수 이난영 등과 함께 이 고별무대에 올랐다니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다.
이백천은 음악계의 후배로서 하늘같은 선배들을 모시고 전국을 순회한 소회를
‘마치 저승에서 이승으로 낭랑한 목소리를 들려주러 내려온 가수들 같았다’고 회고했다.
황금심 여사의 <알뜰한 당신>은 지금도 후배가수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우리 시대 최고의 절창이 아니었나 싶다.
고별공연이라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청중들이 숙연했다니
전설의 예술인을 존중하는 당시 청중들의 성숙한 마음가짐이 부럽기만 하다.
1961년 11월 KBS TV가, 12월 MBC TV가 개국되면서 연예인들의 활동무대도 점차 확장되기 시작했다.
KBS가 민영방송에 뒤질세라 무리하게 한 달 앞당겨 TV방송을 시작했다는 얘기는 몇 년 전 최창봉 편에서 기술한 바 있다.
이어 1963년 DBS 라디오가, 1964년 TBC TV가 문을 열면서 본격적으로 방송채널의 다양화시대가 열렸다.
이백천은 1963년 워커힐호텔 개관기념공연을 위해 내한한 루이 암스트롱과의 공연을 매우 자랑스럽게 회상하고 있다.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은 워커힐호텔은 휴가 때마다 해외로 빠져나가는 미군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6‧25 때 전사한 워커힐 장군의 이름을 따서 지은 호텔이다.
6‧25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월턴 워커힐 중장은 아들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기 위해 의정부로 가던 중
타고 가던 짚차의 전복사고로 순직했다.
워커힐 중장은 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당시 대위였던 아들 샘 워커힐도 훗날 미군 최연소 대장으로 진급하게 된다.
1962년, 향년 45세의 참으로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뜬 남인수의 얘기에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라디오를 통해 그의 노래를 수없이 들은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내가 의탁해 살던 큰집에는 금성라디오가 있어서 저녁마다 이웃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듣곤 했는데,
라디오를 틀기만 하면 아무 때나 귀에 착착 감기는 남인수의 노래가 흘러나와 둘러앉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애수의 소야곡><가거라 삼팔선><이별의 부산정거장><산유화><청춘고백> …
연예인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이백천의 <민들레> 악단은 상여행렬을 이끌었다.
필동-종로3가-화신백화점-조계사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눈물을 흘리며 세기의 연인을 애도했다.
가수의 장례행렬에 경찰이 나와 교통을 통제하고 시가행진을 허락해준 시절,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우리 생애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로맨틱한 이별장면이었을 터이다.
<만인의 연인으로 불렸던 남인수>
첫댓글 점입가경...
참 고맙네.
아들의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길이 그 마지막 길이었던 워커힐,
가슴 저린 그 사연,
오늘에야 듣네.
잘 읽고 해박한 지식에 문장의 배열하는 순서를 일목요연하개 전개를 하니 우리같은 사람 이해하기 좋으네
우리 고향친구고 동창생이란게 자랑스럽다네
연예계의 역사 잘 읽었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