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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은혜와 실재가 충만
2020. 8. 7. 이현래 목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말씀을 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핵심이고, 총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왜 부족하고 갈등인가? 가져도 가져도 부족하고, 아무리 소통해도 갈등이다. 왜 그런가? 이런 말을 하면 좀 이상하지만 우리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지금 시대의 사람들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 우리는 너무 가난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런 풍부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오신 분들도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은 아무리 옥탑 방에 살아도 신문지 발라 놓고 기름을 발라서 장판으로 만들어 잠자는 사람은 없다. 옛날에는 장판이 없어서 비료 포대를 뜯어서 기름을 발라 그렇게 장판을 만들어서 썼다. 요즘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비닐 장판을 깔고 사니까 너무 세상이 다르다. 그때는 별로 빈부격차라는 것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이 비슷하게 살기도 하지만 그런 줄 알고 살았다. 요즘에는 돈이 조금 생기니까 왜 이렇게 빈부격차가 심하냐고 난리다. 사실은 가난한 사람들이 직접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다. 다 서울에 아파트가 두 채 있고 세 채 있는 그런 사람들이 떠든다. 세상은 정말 우스운 곳이다.
아담은 왜 부족하고 갈등인가? 분열이 되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부족하다. 여자가 시집을 안 가고 집에 있으면 영원히 부족이다. 돈이 없어서 부족이 아니라 자기의 생리 자체가 부족하다는 말이다. 만물이 다 마찬가지다.
흙이 그냥 있으면 아무리 좋은 흙이라도 부족하다. 아무 것도 아니니까. 만날 잡초만 나면 ‘나는 왜 있는가? 나는 왜 잡초만 나는가?’ 이러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 같은 흙을 왜 만들어 놓았는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연합이 없기 때문이다. 씨와 연합하면 흙이 엄청나게 귀중한 것인데 연합이 깨지니까 흙은 흙대로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고, 씨는 씨대로 ‘나는 왜 이렇게 팔자가 험한가? 나는 왜 갈 데가 없는가?’ 이렇게 한탄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겠는가?
이것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인간의 부족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어거스틴은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한 번도 안식을 얻지 못했습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 참 방황하고 다닐 때 이야기다. 뭔가 만날 것을 못 만나면 항상 해도 부족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흙은 씨를 받아서 밭이 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씨를 받기 전까지는 항상 부족한 것이다. 흙이 많고 적고 좋고 나쁘고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왜 대립하는가? 그것도 역시 분열하기 때문에 대립할 수밖에 없다. 둘이 딱 만나면 풍부해질 것인데, 분열되고 나니까 서로 원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도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원수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살 수가 있다. 잘못되면 원망할 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저 원수들!’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지면에 사람 지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누구를 보고 그랬는가? 위대한 사람들을 보고 그랬다고 한다. 찌질하게 못난 사람들을 보고 그런 게 아니고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유명한) 사람들이었더라.”(창6:4)고 했다. 유명한 사람들을 보고 한 말이 내가 지면에 사람 지은 것을 후회했다고 하였다.
어느 한 쪽만 좋은 것도 아니고, 대립이라는 게 끝없이 가는데 해결책이 없다. 이것이 우리 인간 사회에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더 배우면 더 배운 대로 더 부족하고, 더 대립된다. 차라리 무식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대로 사는데, 배우고 알면 그럴수록 더 갈등이다. 사람은 자기가 더 노력할수록 더 갈등이 되고 더 부족해진다.
이것이 연합을 이탈한 결과다. 하나님과 사람도 연합을 이탈했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고, 흙과 씨도 연합을 이탈했기 때문에 원수가 되었고, 남자와 여자도 연합을 이탈하면 원수가 된다.
서양 사람들은 아주 편리하게 산다. 너무 그러니까 그것을 편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대립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고 한다. 이혼하고서도 친구처럼 산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산다. 우리는 아직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이혼하고 나면 완전히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만다. 미국을 갈 때, 비행기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대 여섯 명이 놀았다. 왜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가 해서 물어 보니까 다 한 형제간이라고 한다. 엄마인지 아버지인지 셋이나 된다고 한다. 아이들이 아주 재미있게 논다. 세상이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훈련시키는 모양이다. 우리나라는 그런 게 안 되어 있어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만다.
연합을 이탈했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고 복잡하게 되었다.
세상을 구분해 보면 희랍사람들, 지금 소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아리안 족속들이다. 유럽에서 인도까지 전부 같은 족속이라고 한다. 언어적으로는 인도 유럽피안 족속이고, 혈통으로는 아리안 족속이다. 사고방식이 비슷하다. 희랍의 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한다. 그런데 그 진선미가 있는가? 없다. 현실에 없는 것을 추구한다. 유토피아라는 것도 현실에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것은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희랍 사람들의 생각이다. 거기서 철학이 나오게 된다. 철학에서는 진실을 추구한다. 뭐가 진짜인가? 이것을 추구한다. 진실을 찾다가 보니까 더욱 분열된다.
기독교도 그렇다. 더 완전하게 믿으려고 하면 더욱 분열된다. 참 이상하다. 종교도 그렇고 뭐든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은 모든 것이 그렇다. 잘 하려고 하면 더 분열된다. 잘 하려고 하면 더욱 싸우게 된다. 우리 사회도 굉장히 시끄럽다. 공연한 일로 시끄럽다. 돈 한 푼도 안 나오는 일로 괜히 시끄럽기만 하다. 뭔가를 옳게 하려니까 더욱 시끄럽다. 집값을 안정시키려고 하니까 더욱 올라간다.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정부에서 24번째 집값 정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내려갔는가 하면 안 내려가고 점점 더 올라가서 서울의 아파트 한 채 값이 45억이나 된다고 한다. 상상이 되는가? 가만히 있으면 차라리 괜찮은 데 뭔가를 더 잘하려고 할수록 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다.
정신대 문제를 해결한다고 3년 동안 했는데 이번에 일본에서 역공이 들어왔다. 일제 강점기 때 놓아두고 간 재산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것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노무자로 잡혀간 사람들의 임금을 보상해라고 요구한 것인데, 그쪽에서는 우리 재산 다 내 놓으라고 한다. 그 사람들의 재산이 엄청나다. 그게 한국 돈으로 만든 게 아니다. 전부 그 사람들의 돈으로 만든 것이다. 서울의 명동, 대구의 동성로, 광주의 금남로, 이것이 다 일본 사람들의 것이다. 원래 없던 곳이었다. 서울에 우리 한국에서 만든 것은 종로뿐이었다. 그것을 다 내놓으려면 대한민국을 다 팔아야 한다. 이게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지난 일로 시끄럽기만 하다. 이것은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옛날 같으면 싸움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전쟁해서 해결하는데 요즘에는 전쟁도 못한다. 옛날 같으면 이런 일로 전쟁이 일어난다. 그때는 왕들이 자존심이 상해서 말을 잘못해서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저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국제 재판소에 갈 수밖에 없다. 국제 재판소에 가면 일본이 이기지 우리가 이기겠는가? 가만히 있으면 될 일을 가지고 너무 잘하려고 하니까 시끄럽게 된 것 같다.
진선미를 추구하는데 진선미가 어디에 있는가? 없으니까 맨날 갈등을 빚게 된다. 철학에서는 진실을 추구한다. 그래서 다 분열이 되어서 지금은 철학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서로 찾는 것이 너무 멀리 벌어져서 알아듣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에는 융합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고 한다. 융합이 되겠는가? 융합이 되려면 하늘과 땅이 융합될 것이다. 그러니 융합이 되겠는가?
종교나 철학에서는 순수성에 기대를 한다. 순수성을 기대하다 보니까 신성이 사람 속에 내재 하느냐, 아니면 밖에 있느냐로 싸운다. 한 편에서는 신성이 사람 속에 내재 한다고 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사람 속에 신성이 없다고 한다. 내재와 외재의 싸움이다. 더 순수성을 기대할수록 더 분열되는 것이다.
기독교도 지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철학적으로는 내재한다는 쪽과 밖에 있다는 쪽이 있다.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다. 기독교도 한 쪽에서는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밖에 계신 분이라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사람 속에도 신성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와 비슷해진다. 이것이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냐, 아래로부터 올라온 것이냐? 이런 논쟁을 하고 있다. 위로부터 내려왔다는 것은 계시 중심이고, 아래로부터 올라갔다는 것은 인문중심이다. 보수와 진보가 갈라져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복음은 전적으로 계시다.’라고 말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아니다. 사람 속에 신성이 내재하고 있는데, 현실 속에서 어떤 상황에 부딪칠 때 그것이 솟아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누구라고 이야기는 못 하겠다. 여러분은 다 공부하셔서 알 것이라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지혜를 찾는다. 지혜의 마지막은 공이라고 한다. 빌 공(空)이다. 이것을 기대하고 있다. 사람이 완전히 비어진 상태가 되는 것이 불교철학이다. 찾는 것이 수행이다. 불교는 공을 기대하고 찾는 것이다. 우리말로 하면 사람의 원형인데, 그 원형을 모르고 그냥 찾아보는 것이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모든 잡된 생각을 다 버리고, 아닌 것은 다 버리고, 실재를 찾아보자는 게 불교다.
그래서 공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그냥 비어 있는 개념이 아니고 자기들 말로는 이게 심오하다고 한다. 사람이 인식도 하기 전의 어떤 상태다. 인식하면 이미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가령 돌을 보고도 돌이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이미 실재가 아니라고 한다. 내가 돌이라고 하기 전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눈에 보고도 모르는데, 눈에 안 보이는 것을 찾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어렵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논쟁도 마찬가지다. 안 보이는 분을 두고 이러니저러니 하려니까 이 논쟁이 끝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오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제쳐 놓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가지고 논의를 하니까 논의가 끝이 나겠는가.
내가 처음 미국에 가서 안 먹어 본 과일을 하나 먹었다. 망고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있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없던 과일이었다. 귀한 과일이라고 사와서 먹어 봤는데 그 맛이 향기롭고 좋았다. 여러 번 사 주어서 먹어 보았다. 한국에 와서 이런 것을 먹어 봤다고 자랑을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는 것이다. 망고가 뭔지 아무리 말을 해도 모른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비슷한 것들로 설명을 해보았다. 복숭아 같다고 해도 말이 안 되고, 사과 같다고 해도 역시 안 되고, 뭘 빗댈만한 게 없었다. 천도복숭아 같다고 해도 안 된다. 설명을 한다고 했는데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안다는 게 별게 아니구나. 다 어디서 보고 듣고 만지고 먹어보고 이래서 아는 것이지 그냥 아는 게 아니구나.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안에 내주하니 안 하니 어떻게 알겠는가? 또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지 어떻게 알겠는가? 모른다. 그러니까 모세를 불러다가 백성에게 이것을 만들어주라고 한 것이 성막이다. 내가 거기에 있을 테니까 나를 만나고 싶은 사람은 거기로 오너라고 했다. 율법을 주면서 이게 내 마음이니까 이것을 백성에게 선포하라고 했다. 그것은 사람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겠는가?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 가운데 모세 한 사람 밖에는 못 봤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아무도 못 올라온다고 한다. 오면 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산 아래에 있고 절대로 올라오지 마라. 올라오면 다 죽을 것이다. 그 말은 누구도 볼 수 없다,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모세도 하나님을 직접 본 게 아니고 그 어떤 영향력을 본 것이다. 시커먼 구름에다 나팔 소리에다 뇌성벽력이 치는 그 속에서 뭔가를 느낀 것이다. 하나님을 본 게 아니다.
바울도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큰 소리가 났는데 거기서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핍박)하느냐.”(행9:4), 이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모두 우레가 울었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뇌성이 친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바울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아는데, 이것을 빙자해서 기도원에 가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이게 참 딱한 일이다. 기도하다가 뭘 봤다는 사람, 들었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있다. 자기는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하나님이 전파된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믿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각자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기 때문에 그 사건들을 통해서 나는 이런 하나님이라고 말을 해 준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것을 아무 것도 모르고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를 때문에 고민할 때,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는 이런 말을 몰랐다. 알았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겠지만 몰랐을 때 막연하게 내가 스스로 있지 않구나. 내 위에 누가 있구나. 나보다 먼저 누가 있구나. 이렇게 그냥 알았다.
그런데 그것만 알아도 그냥 복잡하던 머리가 싹 가시었다. 하나님 만남은 각자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 나처럼 그렇게 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나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논쟁인 내 속에서 담론이 싹 사라졌다. 내일 일도 모르는 내가 무슨 하나님을 알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니까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것을 가지고 몇 년 동안 이 머릿속의 것을 굴리고 있었으니 뭐가 되겠는가? 누구에게 물어봐도 안 되었고 책을 좀 봐도 안 됐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이 굉장한 것으로 알지만 굉장한 게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못 봤으면 아무 것도 없다. 나면서 소경이 되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전부 자기 상상으로 아는 것일 뿐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눈을 뜨고 있다가 실명이 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조금 기억이 있다고 한다. 모양이 기억되고 색깔도 기억이 있는데 시간이 오래 가면 그것도 없어진다고 한다. 모양도 색깔도 다 잊어버린다고 한다.
사람이 뭘 안다고 하겠는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언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기억을 하는 것이다. 언어가 없으면 기억이 안 된다. 언어 때문에 기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아닌데 굉장한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불교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래서 찾아보자고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도 사람들은 다신교니까 엄청나게 신이 많은 것이다. 우리도 알고 보면 원래 다신교였다. 부엌에 가면 부엌 신이 있고, 안방에 가면 안방 신이 있고, 변소에 가면 변소 신이 있고 그랬다. 그래서 정월달에 농악대들이 와서 농악을 하면서 악귀를 없애준다고 구석구석 밟아주고 간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서 쓰러지면 못 산다고 했다. 칙 신이 있어서 그렇다고 한다. 요즘에 생각하니까 그게 뇌출혈이다.
인간이라는 게 아는 것 같지만 모르는 게 너무 많다. 그래서 자기 머리를 신뢰해서는 안 되고, 자기 생각을 신뢰해도 안 된다. 그래서 계시에 의존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는 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변명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이유가 그것이다.
동양, 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세계를 보면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요즘 도올이 중용을 강의하고 있다. 벌써 많이 진행되었다. 그래서 들여다봤더니 원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어서 배울 게 많다. 중국에 있는 문헌들을 엄청나게 많이 봐서 아는 게 엄청나게 많다.
동양에서는 성이라는 게 말씀 언(言) 변에 이룰 성(成) 자인 성을 최종적인 어떤 결론 같이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용이 쓰이기 전까지는 이 글자가 쓰인 곳이 아무 데도 없다고 한다. 얼마나 책을 많이 봐서 그것을 알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정성 성(誠)자라고 한다. 성실하다는 성(誠)자다. 공자, 맹자, 노자, 다 있는데 이런 모든 사상이 있는데 나타나려면 결국 이 성(誠)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이게 예기인데 예라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무슨 말을 했든지 무슨 생각을 했든지 무슨 사상이 왔든지 마지막에는 예가 아니겠는가? 그 사람의 행동, 행동거지, 그게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기라는 것 속에 중용이라는 게 들어있는데 예가 동양 사상의 초점이다.
기독교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지막에 성육신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다 공이다. 다 쓸데없는 소리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성은 무엇인가? 보통 성실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조화, 만물의 조화, 그 다음에 중화, 중화사상이 들어 있다. 그리고 예, 이런 것들로 표현되는 인간 최고의 덕성이라고 한다. 말씀 언(言)이 이루어졌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참 묘하다. 글자를 풀이 하면 말이 이루어졌다. 말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말을 이루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말 대로 한 사람이니까. 자기 말 대로 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고, 성실한 사람이다. 말에 흠이 없으면 완전하다. 잠언인가 어디에 그런 말이 있다. 말에 흠이 없으면 완전하다는 말이 있다.
우리는 못 할 말을 많이 하니까 거짓말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다. 통합당 비대 위원장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다. ‘될 것 안 될 것을 모르고 나댄다.’고 하였다. 나이 든 분이라 훨씬 낫다. 이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나내니까 시끄럽다. 될 것도 있고 안 될 것도 있는데 무엇이든지 유토피아면 다 된다. 이상적이면 다 된다. 이런 생각은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다.
어린 아이가 커 간다는 것은 이것은 안 되는 것이네, 저것은 되는 것이네,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집에서는 아이들을 그냥 아이들 중심으로 키우니까 자기가 천하에 제일인줄 알고 산다. 그런데 유치원에 가면 자기를 괴롭히는 놈도 있고, 때리는 놈도 있고, 이런 일이 생긴다. 거기서 인생을 배우는 것이다. 이거 우리 집과 다르네, 밖에 나와 보니까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네, 이런 것을 배우는 데다. 얻어맞아 보기도 하고 이래야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오랜 생활의 경험을 통해서 조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중화사상이라는 게 그것이다. 가운데 중(中)자에 화합할 화(和), 화합이라는 화자다. 이것을 이루려고 하다 보니까 결국에는 도덕주의, 도덕지상주의가 되는 것이다. 『논어』, 『맹자』, 『대학』 이런 것들이 전부 다 도덕이 위주다. 심지어 임금도 도덕적인 임금이라야 된다. 이번에 들었는데 공부를 하려면 『대학』부터 해야 된다고 한다. 『대학』은 임금이 어떻게 백성을 다스리는데 실천해야 될 것인가? 그 실천 항목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나서 『논어』, 『맹자』를 읽어야 이런 말을 하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을 먼저 읽어야 한다.
공부를 하는 모든 것이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공자를 왜 배우는가?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올바른 사람이 되려고 하면 율법이 필요하다. 기독교, 유대교로 말한다면 율법이 필요한 것이다. 법이 없이 사람이 저절로 올바르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법이 있는 것이다.
교통법을 만들어놓지 않으면 길에 차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된다. 거꾸로 가는 놈, 바로 가는 놈, 들어가는 놈이 서로 충돌되어서 난리가 날 것이 아니겠는가? 최고의 목표인 성(誠) 이것을 이루려면 도덕이나 율법이 꼭 필요한 것이다.
우리도 여호와를 말할 때 여호와의 성실성을 말한다. 여호와는 성실하시다. 왜 상실한가? 약속을 꼭 지키시는 분이다. 말씀을 이루는 분이니까 여호와는 성실하시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여호와는 성실하신 분이다. 내게 성실했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시편에 가면 성실이라는 말이 제일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전부 다 신앙고백이다.
우리가 일생을 살고 나서 내 하나님은 성실했다고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그분은 정말 나에게 성실했다면 나에게 성실한 분이 있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내가 지금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나에게 성실했다고 말을 하겠다. 내가 처음에 질문하기를 ‘당신은 나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것 밖에는 질문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어떤 역경이 오든지 문제가 오든지 그것을 어떻게 나는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다 해결해주었다. 여호와는 나에게 성실하시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분인지는 모르는데 하여간 나에게는 성실하신 분이었다. 나에게 성실하신 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다 없다고 할 필요도 없다.
이 성(誠)이라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에 도달하려면 도덕주의나 율법주의가 필요하다. 유학을 하는 사람들의 목표도 도덕이고 율법이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면 도덕주의나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맛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가 도덕이나 율법을 표준으로 놓고 보면 도달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성취할 사람이 없다. 결국은 다 이상이다. 이상을 놓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성실, 성을 기대하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참 고상하다. 고상한데 항상 미달이다. 기도를 해보니 그렇다. 조금만 더할 수 있으면 좋은데, 조금만 더하면 되는데, 항상 그렇게 아쉽다. 금식 기도를 한번 해보면 좋겠는데 ,금식을 할 몸이 안 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무엇을 해도 만족이 안 된다. 내 탓이로다, 내 탓이로다, 하게 된다. 내가 좀 더 열심히 했으면 좀 더 간절했으면 이런 생각이 늘 드니까 누구한테 할 말도 없고 원망도 없게 되고 만다.
어떤 사람은 반대로 기도하다가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한다든지, 또 잘 믿는다고 믿었는데 자기 집에 재앙이 오면 원망을 하는 사람이 생긴다. 나는 잘 믿지 못했기 때문에 재앙이 와도 하나님을 원망할 일은 없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 바친 일도 없기 때문에 잘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원망할 근거가 없다. 그런데 열심히 한 사람들은 실망하는 사람들은 엄청 원망한다. 자기는 자기대로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한다.
그리고 교회에서 뭘 하다가 망했다든지 액운이 왔다든지 하면 위로하기는 많이 해주는데, 속으로는 뭐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했는데 안 된 것을 보면 뭐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장로교에서 많이 하는 생각이다. 사업도 잘하고 헌금도 잘하고 이러던 장로들이 어쩌다 망하면 교회를 못 간다. 왜? 창피해서 못 간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무엇인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나? 욥기에 나온다.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1:9,10) 공연히 까닭 없이 섬기겠는가, 하나님이 잘해주니까 섬긴다는 그 생각이 사람 속에 다 있다.
내가 옛날에 산 동네와 일반 동네의 경계선에서 목회를 했는데, 모르는 부부가 새벽기도를 나온다. 그러다가 교회를 나왔다. 들어보니까 사업을 하다가 망했다고 한다. 장로라고 한다. 우리 교회에 와서 위로를 받고 했으면 계속 있으면 좋은데 잘됐는지 어디 가버리고 없다. 장로교 장로가 보통이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위임을 받은 것이 보통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돈을 벌면 다시 그 교회로 간다. 돈을 벌지 못하면 부끄러워서 교회를 못 온다. 얼마나 율법주의인지 생각해보라.
성(誠)을 기대하다 보면 도덕주의가 되고 율법주의가 된다. 성실한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면,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려고 하면, 자연히 이렇게 하지 않고는 안 된다. 기도만 하고 있으면 옆에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뭐 하냐, 올바로 살아야지 한다. 이 사람은 기도밖에 할 줄 몰라서 기도하고 있는데, 옆에서 보기는 기도는 해도 사는 것을 보니 개차반이네 하면 다 공이다.
대부분 세상에서 성실한 사람은 교회에 와도 성실하다. 정직한 사람은 교회에 와도 정직하다. 그런데 회심해서 다른 사람이 된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교회 다녀도 똑 같은 사람이 많다. 교회는 열심인데 생활이 안 바꿔지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참 딱하다.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데 아직도 저런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이 참 묘하다.
그런데 이 성(誠) 자 말고 다른 성(性) 자가 있다. 마음 심(心) 날 생(生)자에 성(性)인데, 성리학 할 때 성(性)이다. 이것은 어떤 근본을 이야기한다. 아까 말한 성(誠)자는 결과를 이야기하고, 이 마음 심(心) 옆에 날 생(生)자는 근본을 이야기한다. 마음이 난 곳이니까 근본이다.
아직도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생각은 머릿속에서 하는데 마음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 마음은 신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과 생각은 다른 경우가 많다. 생각은 이렇게 하는데 마음은 다르다. 그래서 마음과 나는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불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생각해보라. 마음과 생각이 같은가? 같지 않다. 왜 생각도 나에게서 나오고, 마음도 나에게서 나오는가? 생각과 마음은 다르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한다거나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거나 이것은 영으로부터 온 것이라거나 영혼육을 분리할 때 영 속에는 마음이 들어 있다. 직관 마음을 영이라고 한다. 그런데 혼 할 때는 생각이다. 전적으로 머리가 뇌가 돌아가서 나오는 생각을 이야기한다.
기독교는 이런 것에 혼란이 되어 있다. 마음, 자기가 진실한 마음으로 정말로 했으면 부끄러움이 없어지는데, 마음이 좀 그러면 부끄러워진다. 불교에서는 팔만법장(八萬法藏)이 심지일자라 하더라. 합천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그 모든 말씀이 마음 심(心)자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승려들은 불경을 많이 읽지 않는다. 마음 심(心)자 하나인데 그것을 이렇게 많이 말해 놓은 것이다. 마음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이라고 할 때도 그 나는 마음이다. 참 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나오는 데가 있다.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 것을 알 수 없다. 이 성(性)자는 아주 근원중의 근원을 말한다. 그런데 자기들은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과연 이 성(性)을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른다. 어디서 나오는 줄 알면 조정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정이 안 된다.
중용 1장에 있는 말이라고 하는데, 성은 천명이라고 한다. 하늘의 명령을 성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한다면, 내가 잘 쓰는 말로 하면 성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하늘이 정해준 것이 성이다. 그러면 간단하다. 하늘이 정해준 것이 무엇인가? 격이다. 내가 설명한데로 하면 격이다. 사람으로서 의 격이 성이라고 한다. 이 성을 따르는 것 이것을 도라 한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하는데, 이 도를 닦는 것이 교 가르칠 교(敎)이다. 이것이 중용 맨 첫 장에 나오는 문구라고 한다.
천명(天命)은 성(性)이고 하늘이 정한 것이고, 이 성(性)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고, 도를 수양하는 것이 교(敎)라고 한다. 얼마나 정확한가! 우리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내 위치를 내가 지키면 그것이 도(道)다. 그 길로 가면 도(道)로 가는 것이다. 우리말로 해석을 하면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는 이 말이 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성(性)을 따르는 것이 천명을 따른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천명을 따르는 길이고 예수님의 인생자체가 천명을 따르는 것이니까 도(道)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도(道)를 닦는 것을 교(敎)라고 한다. 가르침이라고 한다. 설교는 교(敎)이다. 가르치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는 위로부터 온 것과 아래로부터 온 것을 구별해서 서로 아니라고 싸운다. 위로부터 왔다는 것은 계시이다. 우리 속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내려 보내 주신 것이다. 계시 중심적인 신학은 보수적인 정통적인 신학이라고 불린다. 그것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설명하겠느냐, 무엇이 꼭 계시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느냐, 그것을 설명하기 옹색하다.
아래로부터의 성취, 사람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데, 어떤 극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되면 사람 속에서 뭐가 튀어나온다. 사람이 그렇게 된다. 예수가 그렇게 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 반덴베르크라는 사람은 반대하는데 사람 속에 원래 신성이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을 만나면 그것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 모른다.
성육신이 없으면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만다. 성육신이 없으면 이 사람들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고 맞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맞다. 이것이 둘이 조화가 안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받는 것은 나이기 때문에 나의 어떠함과 무관하지 않다. 모세가 산에서 계시를 받을 때 왜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참여를 못했겠는가? 아무리 계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받는 사람에 달린 것이다. 이 둘이 조화만 되면 되는데, 이것이 조화가 되지 않으니까 정통이니 이단이니 자유주의니 한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놓은 것이 성육신이다.
성육신이 없으면 대립과 갈등은 영원히 끝날 수 없다. 기독교는 희랍 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원론적이다. 대립적인 각도이다. 이것이 성육신이 없으면 통일이 될 수 없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 에베소서 맨 처음에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고후1:20) 여기 이것이 해답이다. 이 해답이 없는 한 대립과 갈등은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중국 사람들은 이렇게 갈라놓고 생각하지 않아도 마지막에 가면 결국 도덕주의에 빠지니까 또 역시 안 된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대립각을 세워 놓고 생각한다. 같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계속 싸운다.
성육신! 이것이 답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결국 말씀은 계시고, 육신은 사람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하면 완전히 해결된 것이다.
씨는 하늘로부터 오고 밭은 땅으로부터 왔다. 씨와 땅이 연합을 하면 밭이 된다. 씨는 하늘에서 온 것이고, 밭은 땅에서 온 것이다. 둘이 합해져야 완전한 것이 된다. 정자는 남자에게서 나오고, 난자는 여자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이 둘이 갈라져 있으면 이것은 생명체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이 아니고,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이다.
정자가 없어도 사람이 안 되고, 난자가 없어도 사람이 안 된다. 정자는 난자를 만나면 사람이 되어 80살이나 90살을 살고 난자를 못 만나면 그냥 죽어버린다.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그리고 난자 역시 마찬가지로 난자가 여자에게서 분비되지만 정자를 못 만나면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참 놀라운 일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 하나님, 아무리 해도 사람이 만일 없다면, 그를 받아들이고 형상화 할 수 있는 인간이 없다면, 속된 말인지만 정자와 똑 같은 것이다. 생명은 생명인데 나타날 데가 없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은 숨어있는 분이 될 수밖에 없고, 모르는 분이 될 수밖에 없다. Unknown God이다. 모르는 하나님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생명을 받아서 연합하지 못하면 인간과 동물이 뭐가 틀린가? 똑같다. 아무것도 틀린 것이 없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이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똑같다. 이 성육신, 연합, 이 속에 모든 비밀이 들어있다. 이 속에 모든 대립과 갈등이 소멸되고 없다.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누가 완성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로 완성했다. 성육신이 요한복음 1장에 나오고, 맨 끝에 가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나온다. 그런데 거꾸로 다시 생각하면 십자가로 성육신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런 세계는 앞뒤가 따로 없고, 시작이 답이고, 답이 시작이다. 시간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誠), 말씀 언(言)변에 이룰 성(成), 이것이 유교이다. 공(空)은 빌 공(空)으로 불교이다. 빌 공(空)은 그냥 텅 비었다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 말로 텅 빈 충만이라고 한다.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원래 근본이라는 말이다. 철학은 순수성을 찾는다.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채워졌기 때문에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다고 한다.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다. 은혜는 위로부터 온 것이고, 실재는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계시가 아무리 계시라 하더라도 이것이 사람에게 와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충만이 안 된다. 사람에게 와서 이루어지니까 그것이 충만이다.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예수 안에서 이것이 하나로 연합되기 때문에 은혜와 실재가 충만해진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그냥 공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와서 인격화 되면 그것이 실재가 되는 것이다. 공기처럼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고, 실재가 될 때 우리가 충만해지게 된다.
옛날에 이 충만을 방언하는 것이 충만인 줄 알았다. 방언을 좀 해야 되겠는데 도저히 안 되어서 고민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은 저렇게 충만한데 나는 왜 충만하지 못 한가? 그런 사람들하고 살아보면 확실히 열심이 있다.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항상 흥분된 상태이다. 냉랭하게 옆에 앉아 있으면 부끄럽다. 나도 항상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젊었을 때 했다. 도저히 안 되어서 내가 못한 것이지 지금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 사람을 좋기 좋은데 그것이 더 이상 발전이 안 되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이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생명이라면 성장을 했을 것이고 뭔가 열매가 있을 것인데, 그대로 기도하면 충만해지고, 기도하지 않고 있으면 타이어에 공기 빠지듯이 빠져버리는 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명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 이것이 십자가로 완성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 예수와 내가 연합이 된다면 충만이다. 은혜와 실재가 충만해진다.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려고 한때는 불가능한 것이다. 예수를 어떻게 따라 가는가? 물위로 걸어가신 분을 따라가려고 했으니 얼마나 안 되는 일을 했는가? 되지 않을 일을 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분을 우리가 흉내 내려고 했으니 될 일인가? 안 될 일이다.
지금 생각하니 안 된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안된 게 맞구나. 그때는 내가 뭐가 부족해서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안 되는 게 맞구나. 됐으면 나는 미친놈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잘된 사람도 있지만 잘못되면 미치는 것이다. 그것이 맞구나. 내가 정상이라고 지금은 생각된다. 그때 내가 만일에 방언이라도 했으면 내가 갈 데가 없었으니까 나는 그 길로 평생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지금 내가 뭐가 되었겠는가? 안 된 것이 너무 다행이다. 그것을 하나님이 일부러 못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감사하다. 만일 하나님이 내가 애걸복걸한다고 주었으면 뭐가 되었겠는가.
예수 안에 있는 성육신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그날 후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말,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더라.”(요1:14)는 이 말이다.
중(中)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1/2이냐? 그것이 아니다. 중야자, 천하지대본야(中也者, 天下之大本也)라는 것이다. 중(中)이라는 것은 천하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1/2이 아니고 근본이다. 중야자, 천하지대본야(中也者, 天下之大本也)다.
그 다음에 화(和)는 화야자 천하지달도야(和也者, 天下之達道也)이다. 이 화(和)라는 것은 도가 이른 것, 성취된 것이다. 그래서 취중화 천지위언(致中和 天地位焉)인데, 중화에 이른 사람은 천지의 위치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하늘과 땅의 위치에 이르렀다. 우리말로 하면 정상 위치의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간이 정상위치로 회복되었다는 말이다. 취중화(致中和), 중화에 이른 것은 천지위언(天地位焉)이다. 하늘과 땅의 격이다. 위가 본래의 위치로 왔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것이 사람은 뭐가 잘못되었는가? 위치가 이탈되었다. 위치가 이탈된 것을 그것을 놔두고, 선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그 정성 성(誠)을 이루려고 하니까 위치를 바꾸지 않고 위치가 달라지지 않고 이런 것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다시 또 율법이 된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누가 봐도 이 성(誠)에 이른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 앞에 오니까 예수님이 대번에 아시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해버린다. 니고데모 같은 사람을 보고 무엇을 보았겠는가? 너는 가짜 성(誠)이다. 그 사람은 성실하다. 예수님이 죽은 다음에도 향품을 가지고 와서 시체에 넣어주고 정말 성실한 사람이다. 유대인의 관원이고, 70인의 공회원이다. 카톨릭으로 말하면 추기경에 속하는 사람이다.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니까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돌았다. 그래서 시체까지라도 돌봐 준 사람이다. 대단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말을 들었으면 기분이 나빠서 이 촌놈, 네가 뭔 데 나한테 이러냐고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봐라. 지금 추기경 같은 사람 앞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면 살아남겠는가?
사람들은 사람은 그대로 놔두고 성실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나님 같은 성실에 이르려고 노력을 한다. 이것이 예수님 눈에 보인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세상으로 본다면 굉장히 훌륭한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거듭나야 한다고 하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옛날 같으면 사약을 받아야 한다. 취중화 천지위언(致中和 天地位焉)이라. 중화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위치, 정 위치이다. 변치 않는 위치라는 것이니까 변치 않는 그 위치에 왔다는 것이다.
만물육언(萬物育焉), 만물이 기를 육(育) 생육한다는 말이다. 우리말로 하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더라.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형상으로 지어놓았다. 축복이 그것이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생육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나님의 생명의 생육이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이 자리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 생명이 생육한다.
땅에서 씨가 열매가 되듯이 형상인 사람에게서,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서, 하나님 생명이 인격화되기 때문에 사람이 위치만 바르면 농부는 씨를 뿌릴 데가 없어 찾아다닌다. 그런데 위치가 바르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무리 씨를 뿌려도 길바닥에 씨를 뿌린다고 나겠는가? 설교하는 것을 들어보니 참 좋은 말씀을 하는데, 그렇게 되겠는가?
만물육언(萬物育焉)이라. 생육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죽으신 그 자리가 만물이 다시 생육하는 자리다. 우리가 거듭날 수 있는 자리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자리이다. 거기가 생육하는 자리이다. 사람은 사람이어야 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어야 된다. 이것은 완전히 대립적 존재이다. 그런데 연합하면 생육한다.
서양철학은 이 대립을 해결할 수 없다. 기독교 신학도 마찬가지로 이 대립을 해결을 못한다. 왜 그런가? 위치를 놔두고 어떻게 해결을 하겠는가? 갈라진 위치에서 연합의 위치에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것이 조화가 되겠는가? 남자 여자를 만나게 해놓으면 무식하고 유식하고 소용이 없다. 그냥 만나면 애기 낳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연구할 필요도 없다. 학위 논문 쓰고 아기를 낳겠는가? 그냥 만나면 아기를 낳게 된다. 저절로는 아니지만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그렇다. 이것이 은혜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은혜이다. 어디 가서 인생에 대해서 이렇다는 것을 듣겠는가? 인생은 계속 짐을 져야 한다. 도덕이나 율법이나 이런 짐을 져야 한다. 신앙도 짐이다. 교회에 가지 않았더라면 짐이 없을 사람이 교회 와서 짐이 훨씬 더 많아진 사람도 있다. 세상 짐도 있고, 교회 짐도 있어서 짐이 한없이 많은 사람이 더 많다. 교회 가면 짐이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 짐은 없어지고, 짐을 지려면 새로운 짐을 져야 할 텐데, 가는 데마다 짐이다. 가는데 마다 짐을 져야 하면 복음이 아니다.
저절로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되게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해라,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이렇게 해라, 이것은 율법이다. 이렇게 해야 된다, 이것은 율법이다. 그렇게 되게 해주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되는 것을 주어야 되는 것이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마지막 판 교(敎) 가르치는 것이다.
내가 가르치려면 마지막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했으니 마지막이 가르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가르치려니까 안 되는 것이다. 천명이 있고 솔성이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가르치려 하면 되겠는가? 안 되는 것이다. 설교는 마지막 가르치는 것이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고 솔성위지도(率性之謂道)라고 너무 좋은 말이다.
우리말로 해석을 하니까 너무 재미가 있다. 강의하는 사람도 이것을 쩔쩔맨다. 강의하는 것을 들어보면 온 힘을 다해서 말을 한다. 꼭 연극하는 사람이 대사 하듯이 강의를 한다. 특이하다. 온 힘을 다해서 강의를 한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이 안 된다. 그렇게 애를 써서 해도 결론이 안 된다. 듣고 있으니 내가 예수를 아는 것이 이렇게 큰 것이구나. 저 사람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가. 그 사람처럼 공부를 하라고 하면 죽었다 깨어나도 못한다. 그런데 듣고 있으니 나는 답이 나오는데 강의하는 사람은 답을 몰라서 쩔쩔맨다.
여러분도 들어보라. 아주 재미있다. 강의를 아주 재미있게 한다. 자기는 완전히 몰입해서 하는데 논어 강의할 때는 논어가 최고라고 한다. 이번에 중용하니까 중용이 최고라고 한다. 자기가 완전히 도취되어 있다. 그런 사람도 필요하다. 그렇게 연구하는 사람도 필요할 것 같다.
세계의 모든 가르침이 다 말단이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말단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 했으니까 마지막이고 말단이다. 말단만 가지고 이러지 저리니 하니까 될 리가 없다. 우리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육신의 세계로, 원래 하나님이 만들 때 성육신 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은혜고 실재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