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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아홉 험준한 고개를 오르내리며 대굴대굴 굴러 대굴 령이라 하였으나 음절 되어 대관령이라, 또한 영서-영동 영동-영서를 넘나드는 큰관문이라 대관령이라 불리게 되었단다. 고개정상에는 대형 석비 대관령 현판, 신사임당 시비, 영동고속도로 완공 기념 조형물이 있다. 1) 석비에는 신사임당이 친정을 그리는思親詩가 오고가는 길손에 감동을 주고 있으니“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을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2) 영동고속도로 준공비: 박정희대통령영단으로 경인, 경부, 호남, 남해 노선을 완공하였고 오늘로서 영동 및 동해노선을 완공하여(중략).. 197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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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관령국사성황사(大關嶺國師城隍祠)
푯돌의 뒷면에는 '강릉단오제'에서 세웠다고 적혀 있다. 해마다 봄날이면 무려 한달 보름이나 이어진다는 강릉단오제. 일찍이 강릉의 소설가 허균(1569~1618)은 "해마다 오월이면 대령의 신을 모셔다가 갖은 놀이로 기쁘게 해드린다"[허균, 「성소부부고(惺所覆 藁)]고 단오제를 글로 남겼다.
강릉은 본래 무천이라는 제사를 지내던 동예의 땅이다. 무천이 시월 상달에 올리는 추수감사제라면 단오제는 모내기를 끝낸 뒤에 곡식의 파종과 성장을 기원하는 잔치다. 온갖 씨앗을 잉태한 대지의 신들에게 바치는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는 그 연원을 모를 정도로 내력이 오래 되었다고 한다. 제사의 쉰은 대관령의 국사서낭신(범일국사[810~889년. 신라의 고승으로, 15세에 중이 되어 당나라에 유학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강릉 굴산사에서 40여년을 주석하며 사굴산파의 개조가 되었다. 처녀가 표주박에 담긴 해를 마시고 낳았다는 탄생설화, 왜구가 침략할 적마다 대관령에 올라 술법으로 물리치는 등 강릉 지방에는 그에 관한 많은 전설이 구전된다.
대관령국사성황사는 죽은 뒤에 강릉과 영동 지방의 수호신이 되었다는 범일국사를 서낭신으로 모신다.]과 산신(김유신[허균의 「성소부부고」에 "그는 어려서 이곳에 와 수련하였는데 산신이 검술을 가르쳤고, 그의 칼은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완성되어 광채가 달빛을 능가했다. 장군이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평정했으며 죽어 대관령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강릉 시내에 있는 국사여서낭신(강릉의 처녀[옛날 강릉 남문동의 정씨 집안에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정씨의 꿈에 대관령 서낭신이 나타나 그 집의 사위가 되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정씨는 사람이 아닌 귀신을 사위로 삼을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얼마 후 정씨의 딸은 대관령 서낭신의 시자인 호랑이에게 물려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서낭당에 가보니 정시의 딸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아 대관령 여서낭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그녀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4월 15일이면 서낭신을 여서낭사에 모셔가 합위시키고 제사를 올렸다. 이 행사는 지금도 강릉단오제 기간중에 이루어진다.]이다. 음력 삼월 스무날이면 신주(神酒)를 빚는 일로 시작하여 단오가 지난 음력 오월 초이래까지 계속된다. 한편에선 왁자지껄 난장을 치고 단오굿과 풍어굿을 올린 뒤 관노가면극 같은 탈놀음도 곁들인다.
- 생명의 축제, 강릉단오제
가시머리에서 산굽이 하나를 돌아서면 이내 대관령 고갯마루다.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는 대관령 고갯마루는 널찍한 휴게소가 아래위로 자리잡아 늘 인파로 북적대는 곳이다. 본래 대령(大嶺)[『증보문헌비고』 「여지고」의 관방 편에, "지지(地誌)에 이르기를, '대관령은 강릉부 서쪽 40리에 있다. 산맥이 함경도의 검산(劍山)과 분수령에서부터 본도(本道)로 들어와서 철령, 추지령, 금강산이 되고, 또 금강산에서부터 미시파령, 설악산, 소동라령, 오대산을 거쳐 이 고개가 되는데 천여 리에 가로 뻗치었다. 『한지(漢志』에서 이른바 단단대령(單單大嶺)이라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 고개는 모두 산등성이가 길이 열린 곳과 서로 이어졌는데 이 고개가 더욱 험준하여 그 높이가 30리나 된다. 옛날에는 관방(關防)을 두고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강릉의 여러 고을을 관동이라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개 아래에서부터 산 허리로 구불구불 이어져 모두 50여 구비를 거쳐 관방에 도달한다'하여싸."고 실려 있다.]이라 하여 아흔아홉 구비[정확한 헤아림이 아니라 다만 옛날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이다.]가 세상을 영동과 영서로 갈랐다. 내륙과 해안이 서로 만나 발길을 멈추는 곳이다.
- 대관령 개척의 선구자, 고형산
강릉대 교수 장정룡이 쓴 『대관령문화사』(동해안발전연구회, 1996)는 대관령의 역사와 개척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책이다. 그의 글에 따르면, '중종 6년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고형산(高荊山 1453~1528)이 민력을 동원하지 않고 몇 달만에 대관령을 개척하여 병자호란 때 주문진으로 상륙한 청군이 이 길로 한양을 쉽게 침범하였으므로 인조가 대노하여 고형산의 묘를 파고 이른바 부관참시했다'는 종래의 전설은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고형산은 기묘사화로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훗날 그의 부관참시는 어찌 되었든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뿌리를 둔 사건일 뿐, 대관령 개척과는 무관하다는 이야기다. 병자호란의 공간적 배경과 대관령 역시 거리가 너무 멀고, 교통이 어려웠던 시절에 도로를 개척한 공로를 일관되게 부정적 측면으로 폄하한 이유 또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고형산이 대관령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뚜렷한 사실로 보인다. 장정룡의 글은, 고형산을 대관령 개척으로 동서 교류의 새 역사를 이룩한 인물로 결론짓는다.
◆[선자령] 仙子嶺 1157m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아 있다. 산 이름을 '산'이나 '봉'이 아닌 선자령으로 부르게 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옛날 기록에 의하면 여러 가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다. 〈산경표(山經表)〉에는 '대관산(大關山)'이라 하고.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에는 그 아래 보현사의 이름에 따라 '보현산(普賢山)'이라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太古寺法)〉에는 '만월산(滿月山)'으로 적혀 있다.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선자령은 해발 840m인 대관령의 북쪽에 솟아 있는 산으로, 대관령에서 약 6km밖에 되지 않아 산행이 힘들지 않고 겨울철 적설 등반지로 적합하다. 대관령 고갯길은 옛날에는 오솔길이었으나, 이 고갯길을 조선조 중종때 이 지방 사람인 고형산이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 따라서 거의 평지길이나 다름없는 능선을 따라 오르게 되므로 산길은 매우 완만하다. 이 능선길은 적설기와 신록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적설기에는 많은 눈에 덮여 은세계를 이루어 황홀하고, 신록기에는 새로 자라난 연녹색의 초원에 야생화가 만발하여 화원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산의 봉우리는 "산","봉","대"로 불리고 고개는 "령","재","치","현"으로 불린다. 그런대 선자령은 산의 봉우리인데 "령"으로 이름지어져 있다. 이 지역의 지형이 완만하고 다른 길과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정상석의 뒷쪽을 보면 선자령은 옛날부터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을 있는 고갯길이었고, 대관산(산경표), 보현산(동국여지지도와 사탑고적고 기록), 만월산(보현사에 관한 기록을 전하는 태고사법 기록으로, 보현사에서 보면 선자령이 떠오르는 달로 보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됨)이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선자령에는 한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계곡이 너무 아름다워 선녀들이 자식들을 데리고 와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하여 선자령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나즈목이]
‘낮은 목’. 강릉 사투리로 ‘안부’라는 뜻이다.
◆[곤신봉] 1127m
곤신봉은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와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있는 산. 등산로 주변에는 문화재 자료 제 37호인 보현사 대웅전이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544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공산성은 지방기념물 제 28호로 1979. 5. 30 지정되었다.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산544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일명 보현산성, 대궁산성으로 불린다. 태백산맥에서 동쪽으로 돌출한 보현산(해발 944m)에 쌓았다.
언제 처음 쌓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이 곳을 도읍지로 정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축조하였다고도 하고, 발해의 왕인 대씨(大氏) 성(姓)을 가진 사람이 쌓았다고 하여 대공산성이라 불린다고도 하나 명확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한말 을미의병 때에는 민용호가 이끄는 의병이 이 곳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산성의 총 길이는 약 4㎞ 정도이며, 성벽은 크기가 다양한 성 돌을 불규칙하게 쌓았는데, 높이 2.3m~2.5m 정도 된다. 동 벽의 일부는 순수한 토성이며 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해 밖으로 돌출해 쌓는 치성(雉城)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성안에는 건물 터와 우물터, 성문터 등이 남아 있고, 토기 조각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매봉] 1173m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경계에 있는 높이 1,173m의 사천면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옛날 미데기(바닷물)가 이곳까지 올라왔을 때 매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자리만 남기고 이 봉 꼭대기까지 바닷물이 가득찼다고 해서 이 봉우리를 매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대간 능선을 경계로 하는 드넓은 목장은 매봉을 지나면서도 계속된다. 정상 부근에는 기상관측 시설이 있다. 독수리의 둥지가 있었거나 봉우리가 독수리의 형상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데, 어찌된 일인지 지금은 모양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런 새도 눈에 띄지 않는다. 목초지 개발과정에서 평탄 작업을 하고 주변에 키 큰 나무도 모두 뽑혀나가는 등 이름 붙여진 때와는 주변 환경이 크게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소황병산]
정상은 대관령목장의 초지가 조성되어 있으며 표지석과 함께 안내판이 서 있다. 황병산 정상은 대간에 위치하지 않는다. 황병산은 ‘누른(黃) 자루(柄)’처럼 길다랗게 생긴 산이라 붙여졌다. 소황병산은 황병산과 산허리를 맞대고 있어 같은 산이지만 높이가 조금 낮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청학동 소금강 쪽으로는 절벽에 가까운 급경사를 이루지만 내륙방향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고산 구릉지대다. 지난 1960년대 초반부터 완만한 구릉지를 모두 목장용 초지로 개발하여 지금은 수천 두의 소를 방목하는 국내 최대의 종합목장이 되었다. 삼양식품 대관령목장과 한일목장, 그리고 농촌진흥청의 고랭지 시험장의 경작지도 이 지역에 있다. 소황병산 산에 서면 이후에 밟아야 할 매봉과 곤신봉, 선자령 등 대간 봉우리들이 시계방향으로 펼쳐지고 그 안에 드넓은 목초지가 그 주변 횡계리의 시골풍경도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노인봉] 老人峰 1338m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 및 평창군 도암면에 걸쳐 있는 산. 오대산국립공원권에 속하는 산으로 황병산과 오대산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산자락에 소금강 계곡을 거느리고 있다. 소금강은 1970년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되었다. 일부에서는 연곡 소금강, 오대산 소금강, 청학동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금강산의 축소판이라 일컫는 '소금강'이란 이름은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탐방하고 쓴 《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으며 무릉계곡 바위에 아직 '소금강'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다.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하류로 내려가면서 낙영폭포·만물상·구룡폭포·무릉계로 이어진다. 산의 정상에는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 그 모습이 사계절을 두고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과 같이 보인다 하여 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에서 발원한 청학천이 13km를 흘러내리며 이룬 소금강은 기암괴석과 층암절벽, 소와 담, 폭포 등 30여 개가 넘는 경관지를 빚어냈는데 특히 금강산의 그것과 흡사한 만물상·구룡연·상팔담 등이 볼 만하다.
(일설에는 노인봉이 높아 정상에 오르면, 그 일대의 모든 것이 어리게 보인다 하여 노인봉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심마니 선잠에 노인이 나타나 부근에 무밭에서 무를 캐라 하기에 일러준 대로 가보니 무 대신 산삼 밭이라 이 곳 봉우리를 노인봉이라 불렀다 한다)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서 산삼이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는 전설이 있어 노인봉이라 하였다.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마음이 착한 심마니가 산삼을 캐러 노인봉에 왔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머리가 흰 노인이 나타나더니 ‘이 근처에 무밭이 있으니 거기 가서 무를 캐거라.’ 하고 일러 주었다. 꿈에서 깬 심마니는 꿈이 하도 생생하고 신기하여 노인이 알려준 곳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정말로 그 곳에는 오래된 산삼 수십 뿌리가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진고개]
주문진과 하진부의 경계다. 2차선 포장도로인 6번 국도가 고갯마루 끊고 넘어간다. 대관령의 보조역으로 개설된 도로이며, 강릉 이북의 해안지역에서는 이 길을 이용해 내륙으로 접근하는 것이 거리가 가깝다. 정상에는 국립공원 매표소가 있고, 산장과 휴게소도 운영된다. ‘긴(長) 고개’가 소리 변형되어 ‘진고개’가 되었다. ‘장현’ 또는 ‘이현’이라고도 불렀다. 이 도로의 해안 쪽은 연곡천을 따라 내려가는데 주변경관이 뛰어나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로 소개한 책도 많다. 도로 주변에 토속음식점이 여럿이다.
◆[동대산] 東臺山 1434m
강원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산으로, 북쪽의 두로봉(頭老峰),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 ·상왕봉(象王峰), 서쪽의 서대산(西臺山) ·호령봉(虎嶺峰), 동쪽의 노인봉(老人峰) 등과 함께 태백산령의 줄기를 이루는 오대산령 안에 솟아 있다. 이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평창강(平昌江)의 발원지를 이루고 있다.
계곡과 짙은 수림에 유서 깊은 월정사(月精寺)를 비롯하여 상원사(上院寺)·관음암(觀音庵) 등이 있으며, 1975년 2월에 지정된 오대산국립공원 구역에 포함된 데 힘입어 관광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또 최근 관광·등산객이 늘어나면서 오대산과 노인봉을 잇는 등산로가 있다
◆[신선목이]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의하면, 자장 이후 그 신앙사상을 계승하여 오대산 신성굴(神聖窟)과 울진국(경북 울진군) 장천굴(掌天窟=聖留窟)에서 수도하여 성도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의 태자 보천은 신성으로 일컬어질 만큼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보천태자가 신통력을 발휘해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기 보다는 그의 도력이 높아지고 수차력(水借力)에 의한 경신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축지법도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 경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굴은 송광연(1638-1695), 김창흡(金昌翕·1653-1722),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현 두로봉 남쪽 골짜기인 신선골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가 왼쪽 산기슭에 있었던 굴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상원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다른 시내가 흘러와 모이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제법 맑고 그윽하였다. 그 골짜기를 뚫고 가면 양양의 부연동 계곡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곁에 신성굴이 있는데, 옛날 명승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신성굴이 있는 계곡은 곧 오늘날의 신선골로서, 이 계곡으로 들어가 백두대간 주능선 상의 신선목을 넘어 양양(현재는 강릉시 연곡면)의 부연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선골은 곧 신성골이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선골 입구에는 현재도 보천태자의 수행정신을 계승하고자 신성암(神聖庵)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수도처로 삼고 있다.
신선목이는 이 신선골에서 따온 지명으로 보인다.
◆[두로봉] 頭老峰 1422m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珍富面)과 홍천군 내면(內面) 및 강릉시 연곡면(連谷面) 사이에 있는 산. 높이 1,422m. 북서쪽의 비로봉(毘盧峰)·상왕봉(象王峰), 서쪽의 호령봉(虎嶺峰), 남동쪽의 동대산(東臺山) 등과 함께 오대산령 중에 솟아 있는 고봉이다. 산은 동사면을 흐르는 연곡천(連谷川)과 서사면을 흐르는 홍천강의 발원지를 이룬다. 상원사(上院寺)와 미륵암은 계곡과 더불어 명승지를 이루는데, 오대산국립공원에 포함되었다. 산봉우리가 노인의 머리처럼 생겼다 함.
- 頭(두)관련 이름에 관하여...
두류산, 두루봉, 두리봉, 두로봉, 두량산, 두룡봉 등..
이 산의 특징을 보면 산봉우리가 둥그렇고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아니면 어느 터를 둥글게 울타리 치듯 둘러싸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두렵고’는 ‘둥글고’의 옛말이고, 이 말에서 ‘두리’(둘레)라는 말이 나왔다. 두리목(둥근 제목) 두리반(두레상) 두리새암(우물의 사투리) 두리 함지박(둥근 함지박) 돌려가며 돕는다는 뜻의 두레도 생겨났다.
[두로령] 1310m
홍천군 내면과 평창군 진부면의 경계. 비포장도로이지만 명색이 446번 지방도.
◆[신배령] 新梨嶺 1173m
신배령은 연곡면 삼산 3리와 홍천군 내면 조개리를 넘나드는 고개로 예부터 맛이 신 돌배가 많이 자생하여 신배령이라 불리운다.
이 지역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갑오농민항쟁의 피어린 역사가 되새겨진다.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였던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써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차기석은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함께 1893년의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고,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홍천군 서석지방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한강기맥의 구간 구분지점인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쪽으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다. 토벌군은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을 넘어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을 장악하고 협공했고,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결국 생포 당하고 강릉으로 압송되어 효수 당했다.
농민군 수천명 조직 '反봉건·침략' 항쟁
1894년 갑오농민항쟁은 봉건제도와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으로, 봉건제를 타도하여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인 동시에 반식민지 사회로의 길에서 이탈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즉, 그 이전까지 진행되어가던 봉건제 해체의 과정이 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에 의해 가속화되고 이에 따라 봉건지배층의 수탈이 강화되자 봉건지배층과 피지배농민층 사이의 모순이 첨예화됨으로써 폭발한 농민항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민족의 자주와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을 열고자 한 내재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갑오농민항쟁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894년 농민항쟁에서 보여준 농민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영웅적인 반침략 반봉건투쟁은 봉건지배층과 일본침략자에게 큰 타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애국적 기개와 민족적 단결을 유감없이 드러내었다. 특히 군사적으로 우세한 일본 침략자에게 맞서 총알이 비 오듯이 퍼붓는데도 불구하고 공격을 계속했던 농민군들의 용감성과 희생정신은 그 후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갑오농민항쟁에서 차기석(車基錫)은 홍천 서석을 중심으로 수천명의 농민군을 모아 활동한 강원지역의 뛰어난 동학지도자였다. 특히 그는 풍암리 전투에서 8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굴하지 않고 내면쪽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함으로서 이 지역은 강원도 농민항쟁의 최후의 전투지로서 주목되고 있다.
강원도 지역에도 일찍이 동학이 포교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제우에 의해서 홍천 북방면 지역에서 포교활동이 있었고,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 곧은골 지역에도 동학당이 설치되어 몰래 동학이 포교되고 있었다. 또 최제우가 체포되고 동학이 국가로부터 탄압을 받으면서 강원도로 피해 온 많은 동학교도들에 의하여 강원도 각지에도 널리 동학이 포교되었다. 이후 강원도 지역에서 동학의 조직과 활동이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지 않으나 홍천대접주 차기석이 관동대접주 이원팔, 인제대접주 김치운 등과 1893년 3월 보은 장내리에서 열린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강릉·양양·원주·횡성·홍천 등 5읍의 대접주로 불리워지던 차기석은 내면(당시는 강릉부에 속해있었음)을 중심으로 1,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여 1894년 농민항쟁에서 세를 떨쳤다. 그는 9월 말경에 군대를 일으켜 창고를 불지르고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모아, 포목·어곽·화우(貨羽) 등 상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아 물자를 충당하는 등 세력을 모았다.
한편 내면에서 가까운 봉평면에서도 차기석의 영향아래 윤태열·정창해·조원중·정헌심 등이 백성을 결집하여 군대를 이루어 창사 곁에 목책을 세우고 각 촌락의 집집마다 좁쌀 6말과 미투리 1쌍씩을 거두어들이는 등 농민항쟁을 준비하였다.
이렇게 농민항쟁을 준비한 차기석은 박종백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10월13일 밤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동창(東倉)을 들이쳐서 건물을 불태웠다. 동창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중요한 사창으로, 세곡을 거둬 보관해 두었다가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어나면 뗏목에 실어 한강을 통해 서울로 보내던 곳이었다.
동창을 치고 보은 장내로 향하던 차기석은 동창이 농민군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경기도에서 홍천으로 들어온 농민군 토벌대 지평현감 맹영재와 10월 21일 장야평에서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농민군은 장비의 열세로 30여명의 희생자를 내고 서석으로 후퇴하였다.
서석은 동으로는 뱃재를 넘어 내면, 남으로는 먼드래재를 넘어 횡성, 서로는 솔치재를 넘어 홍천과 통하며 북서로는 동창을 지나 내촌으로, 서남으로는 부목재를 넘어 홍천 동면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10월 22일 홍천 서석 풍암리 진등위에 진을 친 차기석은 농민군을 이끌고 맹영재의 토벌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농민군은 총이 모자라 버드나무를 깎아 먹칠을 해서 무기가 많은 것처럼 위장을 하기도 했고, 주문을 외우면 토벌군의 총에서 총탄이 아니라 빨간 물이 흘러나온다고 하면서 사기를 북돋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식무기로 무장을 하고 경기도 일대에서 농민군 토벌에 맹위를 떨치고 있던 맹영재와 접전을 벌인 차기석의 농민군은 많은 희생은 치르었다. 이 날 희생당한 농민군과 동네사람들의 수는 800여명에서 1,000여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있는 `자작고개’라는 이름도 농민군들이 흘린 피가 고갯마루를 자작자작 적실 정도로 흥건했다고 해서, 또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농민군들을 묻은 시체가 썩어 땅이 내려앉으면서 잦아진 고개라 하여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자작고개를 중심으로 진퇴를 거듭하며 토벌대에 맞섰던 차기석은 홍천군 내면으로 퇴각하여 다시 세를 모으기 위해 기린·양양·간성의 농민군에게 봉평을 치자는 통 문을 보내었다. 그러자 봉평의 농민군을 토벌한 포군대장 강위서가 11월 6일 토벌군을 이끌고 내면 1리로 들어왔다. 토벌대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차기석은 산위에 매복해 있다가 밤중에 강위서 토벌대를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강위서의 포군 부대는 8명의 부상자를 이끌고 패배한 채 내면에서 쫓겨났고, 그 후 전열을 정비한 토벌군은 각 지역의 관군과 연합작전을 펴면서 사방에서 농민군을 조여들었다.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계방산과 오대산 기슭의 자운리, 흥정리와 계방천이 흐르는 협곡에 자리잡은 원당리·청두리·약수포 등지에서 차기석은 강원도 내륙지방의 농민군을 이끌고 토벌군을 맞아 치열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청두리에서 약수포까지는 토벌군도 70리를 벽을 기어오르며 전진하였다고 할 정도로 험난한 곳이다. 이 계곡은 구룡령에서 오대산 두루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이루어 양양·강릉의 영동과의 경계선이 되며, 그 사이에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신배령·응복산·응복령·약수산 등 험산준령이 놓여있다. 잎이 무성한 계절이라면 험난한 이곳 지형이 유격투쟁을 벌이기 적합할 것이나 활엽수의 잎이 모두 지고 눈이 쌓이기 시작한 11월 중순이어서 사방에서 협공하는 토벌군을 맞아 농민군이 싸우기에는 매우 불리하였다. 봉평에서 내면에 이르는 보래령·운두령과, 양양, 강릉에서 내면으로 통하는 신배령·응복령이 토벌군에게 장악된 상태에서 협공을 당한 농민군은 토벌군 뿐 아니라 지형에도 포위당한 꼴이 되었다. 11월 11일, 내면 자운의 농민군은 보래령을 넘어온 봉평 포군대장 강위서와 60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합세한 홍천의 허경의 공격을 받아 접주 위승국 형제와 접사 심성숙, 박군오, 정창호 등 17명이 포살 되었다.
차기석은 내면 원당리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저항하였으나 12일, 운두령을 넘어온 강릉의 박동의와 양양의 이석범이 이끄는 토벌군의 협공을 받아 생포되었다. 이때 성찰 오덕현, 집강 박성원, 지덕화 3인은 포살 당했다.
13일에는 내면 청두리에서 홍천의 농민군 지도자 권성오, 권수청 등 12명이 포살 당하였다. 약수포 쪽으로 쫓겨간 500여 명의 농민군은 청두리 쪽에서 추격한 토벌대와 신배령을 넘어온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 응봉령을 넘어 온 이석범의 부종 김익제의 토벌군에게 세 방향에서 협공을 당하여 접주 김치실 등 11명이 포살 당하고 접사 박학조는 생포되었다. 농민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3처의 별당과 37채의 집도 불태워졌다. 자운·흥정·신흥 등의 농민군도 강위서가 이끄는 토벌군에 밀리면서 임정호 등 38명이 포살 당했다.
차기석은 생포된 뒤 강릉으로 압송되어 11월 22일 박학조와 함께 강릉 교장에서 효수 당하므로 일생을 마쳤다. 강원동학군의 지도자인 차기석이 이끌던 동학혁명군의 전투는 강원동학혁명군 전투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엄찬호(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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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1봉]
강릉시, 양양군, 홍천군이 함께하는 경계지점이다.
◆[만월봉] 滿月峰 1280.9m
약200년전 조선조 말 어느 시인이 이 봉을 바라보고 시를 읊었는데 시중에 바다에 솟은 달이 온산에 비침으로 만월이 가득하다 하여 만월봉이라 한다.
- 소양강, 강원도 인제군과 춘천시를 남서류하는 강
길이 169.75㎞. 한강의 제2지류이며, 북한강의 제1지류이다. 홍천군 내면 명개리 만월봉 남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서쪽으로 흐르며 계방천이라 불리다가 척천천·자운천·방대천 등을 합류하고 내린천이라 불린다.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화천이 흘러들며, 소양호를 이룬 뒤 춘천시 우두동에서 북한강으로 흘러든다. 춘천시 신북읍 천전리에 건설된 소양강 댐은 다목적 댐이며,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인제읍까지 배가 운항하여 강원도 내륙산간지역의 교통로뿐만 아니라 설악산국립공원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유역 내에는 대승폭포·12선녀탕계곡·구성폭포·용소폭포·쌍룡폭포·황장폭포 등의 폭포와 백담사·청평사·봉정암·오세암·영시암 등의 명승 사찰이 있다. 유역의 연평균강수량은 1,100~1,200㎜이며, 강에는 어름치·열목이 등의 냉수성 어종을 비롯하여 쏘가리·뱀장어·메기·붕어·잉어 등이 서식하고 있다. 인제읍 합강리에서 뗏목을 타고 소양강, 북한강, 한강 본류를 따라 서울의 노량진까지 내려오면서 부른 〈합강리 뗏목아리랑〉이 전한다.
[통마름]
겨울이면 계곡을 따라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통바람’이라고 했던 것이 ‘통마름’이란 이름으로 굳어졌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통바람’이라고 부른다.
통바람골 : 대한민국 행정구역상 붙여진 이름은 홍천군 내면 명개리 3반. 자연부락명은 통바람골이다. 명개리 본마을과는 숲으로 격리된 상태로 무려 10리 길이나 떨어져 있어 전혀 다른 마을같다. 원래는 양양군 서면에 포함됐으나 1916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현재의 행정구역이 됐다. 3년전에 전기가 들어와 산속이 갑자기 대명천지의 혜택을 누리고는 있지만 아직 전화는 들어오지 않았다. 지천의 나무때문인지 땔나무가 주연료며 여름에도 추워서 불을 때고 자야할만큼 하늘이 손끝에 닿을듯 깊은 산속 높은 마을이다. 해발로는 900m이다. 오대산 후문쪽으로 이어지는 명개리 마을의 포장도로 중간쯤에서 마을 진입로는 시작된다. 옛날 임도를 조금 넓혀 작은 차량들이 간신히 드나들게 닦아 놓은 비탈 비포장길이 있다. 이 마을은 이런 오지를 입증하듯 슬픈 사연도 안고 있다. 이 계곡이 바로 남한으로 침투한 무장공비의 주요 퇴로라는 것이다. 1968년 김신조사건때 마을 주민들이 모두 소개됐다가 몇년후 다시 들어와 사는 고난도 겪었다. 또 지난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때도 무장 군인들이 들어와 마을 지켰다. (2004년 7월 29일 강원일보 김대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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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복산] 鷹伏山 1369.8m
산의 모양이 매가 엎드린 형국이라 하여 매복산 또는 응복산이라고 함. 강원도 양양군 서면과 현북면, 홍천군 내면에 걸쳐 있는 산. 설악산과 오대산을 잇는 중간 지점에 있는 산으로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들머리에 해당한다. 이 산에서 오대산 두로봉까지는 약 10km 정도로, 두로봉과 약수산·구룡령을 잇는 구간을 산행코스로 잡을 수도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 있는 한계령과 대관령의 중간에 있어 미천골·통마람골·약수골·합실골 등 사방에 골짜기가 발달해 있다. 산행은 명개리에서 구룡령을 넘어 갈천으로 이어지는 56번 국도가 포장됨에 따라 구룡령을 기점으로 하는 당일 산행이 가능해졌으나, 미천골을 따라 불바라기약수까지 다녀오려면 하루 정도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 산행 시간은 구룡령에서 정상에 오른 뒤 통마람골을 따라 약수동까지 가는 데 7시간 정도 걸린다.
정상에는 주목 한 그루만이 있어 전망이 좋다. 주변에 708년(신라 성덕왕 7)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水墮寺)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불소·칼슘 등이 들어 있어 만성위장병과 고혈압·빈혈·당뇨 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
'708년(신라 선덕왕 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수타사와 철분을 비롯한 유리탄산, 불소, 칼슘 등이 들어있어 만성 위장병과 고혈압과 빈혈,당뇨등에 효과가 있다는 삼봉약수터가 있다하며...'
◆[마늘봉]
약수산과 응복산의 한가운데 독립적인 하나의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다. 마늘처럼 동그랗게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대간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 몇 안되는 우리말 이름이다. 규모가 작은 봉우리인데도 별도의 이름을 가진 것이 의외다. 남쪽으로 오대산의 비로봉과 상왕봉, 호령봉, 계방산 등이 건너다보인다. 북쪽계곡 1.5Km 지점에 유명한 불바라기약수가 있지만 내려서는 길은 마땅치 않다. 응복산 방향으로 10분 거리에 평평한 야영장과 샘터가 있다.
◆[약수산] 1306m
약수산이란 이름은 흔히 명개리 약수라 불리는 이 산 남쪽 골짜기의 약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약수산의 이름이 비롯되었다는 淵源을 좇으니, 약수산에서 발원하는 미천골에는 불바라기약수(미천약수)가, 약수산과 갈전곡봉 사이 구룡령 계곡에는 갈천약수가 있다. 갈천이라는 이름은 칡뿌리로 허기를 달랠 때 냇가에 칡물이 떠날 날이 없다는 데서 유래했다. 「양양군지」에 함께 실린 오색약수에 눌려 늦게 알려졌지만, 양양 주민들은 이 약수를 더 쳐주는 편이란다. 예부터 내려온 갈천의 4가지 보물(葛川四寶)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치는 약수인데 약수가 솟는 너럭바위 주변은 용출되는 철분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어 쇳물 맛이 많이 나는 편이며 톡 쏘는 맛이 강하단다. 성분은 철분, 나트륨, 칼슘, 마그네슘, 칼륨, 망간 등으로 빈혈,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는데 주민들은 위장병과 피부병에 좋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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