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5대 왕궁 풍수지리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고 가장 풍수적으로 뛰어난 곳에 경복궁 터를 잡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왕권의 찬탈이 일어나자 2 대왕 정조는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3 대왕 태종은 한양에 창덕궁을 지어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 태종이 세종에게 왕권을 물려주면서 창덕궁 동쪽에 수강궁을 지어 나갔다. 그 후 수강궁을 창경궁으로 확장했고 인왕산 아래 경희궁과 덕수궁을 지어 조선의 왕궁은 5개 궁으로 늘어났다, 어떤 곳에 왕궁을 지었고, 조선의 왕들은 어떤 궁을 선호했을까 매우 궁금해진다.
한글을 창제한 조선의 정궁 경복궁,
큰 복이 오래 간다.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은 경복궁은 임금은 남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도전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악산 아래 터를 잡았다. 궁궐의 이름도 큰 복이 오래 간다는 의미를 담아 경복궁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두어 한글을 창제하였고, 궁궐에 대한 명당 논쟁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신하들과 직접 현장을 돌아보면서 명당 논쟁을 잠재웠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200여 년간 방치되어 잠자던 중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여 조선의 정궁 자리를 되찾았다.
경복궁 터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태조와 세종 그리고 대원군이었다. 태종은 세종에게 창덕궁을 내주고 수강궁(창경궁)을 지어 물러났지만, 세종은 큰 정치를 펴자면 경복궁이 넓어서 더 좋다고 하며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다.
경복궁 터는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으로 배산으로 한 평평한 땅의 남향판의 지세이다. 주산이 우뚝하고 좌우로는 낙산과 인왕산의 청룡 백호가 감싸준다. 인왕산이 크게 솟아 남산으로 이어지며 산태극 수태극을 형성하여 청계천이 서출동류 후 중랑천과 합수되어 한강과 합류되는 역세의 국이다. 밖으로는 북한산, 덕양산, 관악산, 용마산 등 외사신사가 잘 환포하는 최고의 입지이다.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공간, 경회루
경회루는 태조 때는 사신을 접대하는 아주 작은 누각이었으나, 태종 때 이곳을 크게 확장하고 경회루라 이름하였다. 경회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난다는 의미가 담겼으며, 이곳에서 사신 접대, 궁중 연회, 기우제, 무과 시험을 치루기도 하였다. 성종 때는 돌기둥에 용의 모습을 새기는 등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후 고종이 중건하였다.
경회루가 있는 곳은 매우 습하여 비보 차원에서 연못을 팠고, 경회루에는 음양오행, 삼재, 팔괘, 12 지상, 24 방위, 24 계절 등 동양 사상이 깊숙이 반영되었다,
한글을 창제한 집현전이 이곳 부근에 있었고, 단종이 세조에게 옥새를 양위한 곳이 경회루다. 연산군은 이곳에서 ‘흥청’이란 기생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흥청망청’ 이란 고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경회루는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뛰어난 자연환경과 연못이 어우러져 조선조 5대 왕궁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히는 곳 중 하나다.
가장 오래 궁궐의 역할을 한 조선의 이궁 창덕궁(昌德宮),
궁궐의 이름이 "덕으로 널리 창성한다. 이롭게 한다." 의미로 그 뜻이 매우 창대하였다.
창덕궁은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 하기 위하여 1404년에 지은 궁궐이다. 조선 전기에는 정궁 경복궁의 제2 궁궐 역할을 하였고, 경복궁이 화재로 소실된 조선 후기에는 조선의 법궁 겸 정궁 역할을 했다. 전기에는 경복궁과 양 궐 체제, 후기에는 경희궁과 양 궐 체제로 운영되었다. 경복궁은 태조 이성계가 시작하였고 세종대왕은 창덕궁보다 경복궁을 선호했다. 그러나 창덕궁은 지형·지세에 따라 자유롭게 건물을 지어 구조, 입지, 심미안 적으로 안정감을 주어 조선 대부분의 왕은 창덕궁에서 거주했다. 특히 창덕궁은 후원이 있어 왕과 왕족들이 휴식하기에도 아주 좋은 공간이었다.
창덕궁 인정전, 인자한 정치를 펼친다는 의미를 가진 창덕궁의 정전으로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수행하였다.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선조와 순조 때 2 차례나 다시 건립되었다. 인정전의 앞마당에는 박석을 깔았고 품계석을 설치하여 조선왕조의 법전으로 역할 했다. 건물의 방향은 남향이고 바로 앞에 나지막한 안산이 있고. 그 뒤로는 다시 남산이 있어 조 안산이 잘 갖추어졌다.
선정전은 창덕궁의 편전으로 조선 시대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며 신하들과 국사를 의논하고 행하던 곳이다. 선정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편전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와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한다.
대조전은 창덕궁의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이 있는 공간이다. 성종, 인조, 효종이 이곳에서 죽었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 된 익종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대조전은 왕과 왕비가 되어야 사용하는 공간으로 대부분의 왕자는 궁궐의 부속 건물에서 태어났다. 어느 건물에서 왕자가 가장 많이 태어났는지도 조사해보면 재미날 것 같다.
조선의 27대 왕 중 왕궁에서 태어난 왕은 15명이다. 경복궁이 단종, 성종, 연산군, 인종, 명종, 광해군 등 6명으로 가장 많고, 그다음으로 후궁들의 거처였던 창경궁에서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현종 등 5명의 왕이 태어났다. 창덕궁에서는 중종, 순종이 태어났고, 경희궁에서는 숙종, 덕수궁의 전신인 정릉에서 선조가 태어났다. 왕의 출생지로 보면 경복궁과 창경궁이 주목을 받는다.
대비와 후궁들을 위해 만든 궁궐, 창경궁
태종이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면서 본인의 거처로 창덕궁 동쪽에 궁을 짓고, 수강궁이라 이름 하였다. 강건하게 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았다. 성종 대에 와서 왕실의 세 대비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비 인순왕후)를 모시기 위하여 폐허처럼 남아있던 수강궁을 확장하면서 창경궁이라 이름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바위 맥으로 형성된 이곳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하여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고 시민들에게 놀이공원으로 개방하면서 기운을 분산시키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창덕궁에서 춘궁지 가는 산책길에서 계단을 내려가니 큰 바윗돌이 있다. 이곳에 대비와 후궁들의 산실이 있었다고 한다. 바위맥은 그 기운이 아주 세다. 터가 센 곳, 기운이 세지 않은 사람은 버티기가 어렵다. 대비와 후굼들의 시샘과 질투, 창경궁의 터를 보면서 파란만장한 당시의 상황을 상상한다. 뒤주에 갇혀 죽어간 사도세자도 생각난다.
창경궁이 철저히 훼손된 것은 일제 강점기다. 광복 후 일본식 건물은 헐어 버리고 벚나무도 제거하고 동물원도 옮겼다. 연못도 한국식으로 바꾸었다. 장경궁은 동물원이 있어 초등학교 시절 시골에서 서울로 수학여행 오던 곳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이다.
조선 후기 왕들이 가장 선호했던 경희궁
경희궁은 광해군이 정원군의 옛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은 새 궁궐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왕위에서 물러나고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남인 인조에게 왕권은 넘어 갔다.
경희궁 태령전 뒤에 가면 기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암천으로 불리는 바위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 본래는 왕암으로 불렸는데, 숙종(숙종 34년)이 이 바위를 상서로울 서자를 붙혀 서암이라고 개명하였다.
바위는 권력의 상징, 힘이 솟아난다. 그래서인가 조선의 후기 왕들은 경희궁을 좋아했다. 조선 후기 10명이나 되는 왕이 이곳에 머물렀다. 바위맥에 전각을 지은 곳이 창경궁에도 있다. 3명의 대비를 위하여 성종이 지었는데, 이곳에서 대비와 후궁들이 거주했다. 바위맥이 있는 창경궁에서 5명이나 되는 왕들이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5대 궁궐중 바위맥이 있는 창경궁과 경희궁은 철저히 파괴 되었다. 권력의 근원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보여진다.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개방하여 바위의 기운을 흐트렸고, 경희궁에는 학교를 지어 바위의 기운을 분산시켰다.
인왕산 아래 경희궁은 바위산 아래 바위맥을 타고 입지하였다.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루기 위해 광해군이 궁궐을 건립하여 경덕궁이라 하였다. 숙종대에 와서 경덕궁을 경희궁으로 개명하였다.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 고종이 경복궁을 복구하면서 경희궁의 전각을 대부분 철거되었다. 승정전은 동국대로 옮겨갔다. 왕기가 서렸다는 서암, 왕암으로 불려오던 이 바위를 숙종 34년 상서로울 서자를 써서 상서로운 바위, 서암으로 개명하였다. 빛과 조망점에 따라 사람 얼굴 모습도 보이고, 사자와 용의 모습도 나타난다, 경희궁 바위샘, 서암 바위 속에 바위샘이 솟아난다. 영조의 어머니는 항상 이곳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를 마감한 덕수궁
을미사변으로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살해되자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을 갔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협상으로 1년만에 고종은 경복궁으로 가지 못하고 비상시 임시 궁궐로 사용하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덕수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 임진왜란으로 불 타자 선조가 임시로 와서 머물렀던 월산대군의 옛 사저였다.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자 전각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동향의 터에 남향으로 궁전을 지었다. 그래서 중화전, 석조전 모두 남향으로 건축하였는데, 궁전 뒤가 허하게 비어 있다. 뒤에는 작은 동산이 있었으나 그마저 다 헐어버렸다. 주산이 무너졌으니 근본이 무너진 것이고, 배경이 없는 것이니 어디로부터 힘을 받을 것인가? 고종이 순종에게 왕권을 양위하고 순종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나,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조선왕조는 518년으로 이곳에서 막을 내렸다.
조선의 5대 궁은 모두 한양 도성 안 명당지역에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 518년 동안 조선 왕궁의 정궁은 개성이 8년, 창덕궁이 273년, 경복궁이 237년간 사용되었고,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은 이궁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시대마다 왕들의 입장에 따라 궁궐의 선호도가 달랐지만, 궁궐의 입지는 당시 최고의 풍수사들이 동원되어 자리 잡았다.
조선조 이후에도 이곳 지역은 명문 학교와 명문가들이 자리 잡았다. 경복궁 지역에는 청와대가 들어섰고, 경기고, 경복고, 창덕여고 등 명문 학교에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창덕궁 지역은 중앙고, 휘문고, 서울대, 성균관대가 있었고, 현대그룹은 이곳에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였다. 경희궁 지역은 서울고가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덕수궁 지역은 서울시청, 국회의사당이 있었고, 경기여고, 이화여고 등 명문 학교가 들어섰고, 태평로에 자리 잡은 삼성그룹은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왕궁의 기운을 분산시키고자 경복궁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었고,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두어 지기를 억누르려고 하였다. 경희궁에는 학교를 세워 기운을 분산시켰다. 덕수궁은 생기가 응집되는 봉우리를 허물어 버리고, 신작로를 내어 규모를 축소하고 기운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명당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고 온전히 보존된다. 사대문 안 궁궐 지역에 대한민국의 주요 기관과 기업들이 위치하여 계속하여 대한민국의 부를 창출하는 터전이 되기를 바란다.
첫댓글 김정인 교수님 사인암에 살고있는 관봉(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늘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사인암은 고향(올산) 입구라 자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