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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매화 스크랩 임진탐매 Ⅵ - 일본 야마구찌현(山口?)①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의 매화
눌인 추천 0 조회 133 12.04.03 20:31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탐매 Ⅵ - 일본 야마구찌현(山口?)①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의 매화

 

 

 

2012년 3월 29일 일본 야마구찌현(山口縣) 동남부를 둘러보았다. 야마구치현은 일본 츄우고쿠지방(中國地方:岡山, 廣島, 島根, 鳥取, 山口)의 5현 중의 하나로 혼슈(本州) 끝에 위치하며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현 중 하나다. 부산에서 부관(釜關) 훼리를 타고 시모노세키(下關)로 가는 물길은 고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을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루터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관(釜關) 훼리 성희호에서 바라본 부산항 야경 - 영도다리가 아름답다.

부관(釜關) 훼리 성희호에서 바라본 부산항 야경 - 용두산 공원

모노세키 항에 들어서면 주변을 압도하는 높이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가이쿄 유메타워(海?ゆめタワ?)인데, 해협의 꿈이란 뜻이다.

가이쿄 유메타워- 서일본 자립형 타워 중에서 최고 높이를 자랑한다.1996년 8월 1일에 오픈. 높이는 153 m, 전망실의 높이는 지상 143m.

 

가이쿄 유메타워 - 전면을 거울로 덮은 구형의 전망실에서는 360도의 경관을 즐길 수 있다.

간몬대교의 새벽 - 간몬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폭이 700m에 불과하다.

 

간몬대교의 새벽 - 간몬해협의 가장 좁은 곳은 폭이 700m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신석기유적인 동삼동패총에서는 일본의 신석기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 조몬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일본의 야요이문화를 꽃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청동기문화가 이 물길을 따라 일본으로 전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신라인들은 동해 남부 해역을 횡단하여 물길을 타고 바람을 잡아가면서 혼슈 남부의 해안 지방인 돗도리현(鳥取?), 시마네현(島根?), 야마구치현(山口?), 그리고 후쿠이현(福井?)에 도착하였다. 백제계와 가야의 문화도 이 뱃길을 따라 흘러들어갔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모노세키는 조선시대 통신사가 밀물이나 바람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여러 날 묵었던 곳이다. 지금의 아카마신궁(赤間神宮)이 있는 아미다지(本彌伊伊) 경내에는 화려한 통신사 영빈관이 있었다. 15세기 중엽 신숙주(申叔舟)와 도쿠가와 막부와의 국교회복 교섭차 왔던 유정(松雲大師)도 여기서 묵었으며 에도시대 11차례의 통신사들도 모두 여기서 묵고 갔다.

 

야마구치현의 역사를 이야기 할 때 모리(毛利) 집안을 빼 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때 함께 우리나라를 침략한 집안이다. 모리집안은 야마구치 현의 옛 이름인 조슈 한[長州藩]의 번주(藩主)였다. 전국시대 초기 모리 모타나리(毛利元就)가 두각을 나타내어 히로시마 일대를 장악했고,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는 모타나리의 손자 테루모타가 번주였다. 테루모타는 노부나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노부나가가 죽은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뜻이 맞아 도요토미 때는 120만석을 지배하는 서 일본 최대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려 3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조선으로 왔다. 더욱이 그의 숙부 고바야키와 다카가게는 1593년 일어난 백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거느린 명군을 대파했다.

 

도요토미가 병석에 누운 후 아들 히데요리의 장래를 부탁하였고, 5명의 원로로부터 히데요리를 돕겠다는 서약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테루모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도요토미가 숨을 거둔 후 모리가(毛利家)는 기울기 시작했다. 석고(石高)가 120만석에서 36만석으로 삭감되었고 세력권도 크게 줄어들었다. 이 후 모리 집안 후손들은 하기에 사는 동안 도쿠가와 집안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살아 왔다. 19세기 도쿠가와 후손들의 막부가 흔들릴 때 이곳의 젊은이들이 활화산처럼 일어나 막부를 무너뜨리게 된 것은 이런 배경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야마구치현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도한 사상가, 정치가를 다수 배출하며 근대 일본 탄생의 원동력이 된 지역 중 한 곳이 된다. 이 현에서는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8명의 수상이 나왔다. 행정단위로 보면 야마구치현은 일본에서 가장 많은 수상을 배출한 지역이 되었다. 내각 구성 후 지금까지 30여명의 수상이 일본을 다스린 것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대단히 많다.

 

특히 오늘날 일본 사람들은 교육자로 서양의 페스탈로치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하는 요시다 쇼인[Yoshida Shoin, 吉田松陰;1830. 8. 4 ~ 1859. 10. 27]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의 야마구치 현[山口縣] 하기[萩]에서 태어난 그는 조슈 한[長州藩]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5세 때 숙부의 양자가 되어 요시다 가문을 계승했다. 11세 때 한슈[藩主] 앞에서 〈무교전서(武敎全書)〉를 강의하여 재능을 인정받았다. 1850년 한슈의 허가를 받아 규슈[九州]로 유학을 갔으며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의 저서 〈신론(新論)〉을 읽고 아편전쟁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되면서 시야를 넓혔다. 이듬해에는 에도로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서 서양학문을 배웠다. 같은 해 그는 한의 허가를 받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 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으나 결국 그의 재능을 아낀 한슈의 도움으로 다시 에도 유학길에 올랐다.

 

1853년 페리 함대가 내항했을 때 요시다는 사쿠마와 함께 미국함대의 정세를 탐색한 뒤 무조건적인 주전론의 무모함을 깨닫게 되었다. 외국사정을 널리 알 필요성을 통감하고 외국 유학을 결심한 그는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의 체결을 위해 다시 내항한 미국함대에 타고 해외 밀항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자수하여 투옥되었다. 칩거를 조건으로 출옥한 뒤 고향에 내려가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열고 하급무사들을 가르쳤다. 그의 제자들은 점차 조슈 한의 중심인물로 성장했고 이후 바쿠후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실현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1858년 바쿠후가 칙허를 얻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열렬한 존왕(尊王)론자였던 쇼인은 반(反)바쿠후[幕府]적 언동을 취했다. 이어 로주[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안세이[安政]의 대옥을 강행한 바쿠후는 쇼인을 수상히 여겨 1859년 에도로 호송하여 투옥했다. 심문 중에 로주[老中] 암살계획이 드러나 사형에 처해졌다.

 

요시다 쇼인은 기존의 교육자들과 달리 신분이나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았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이노우에 분타(후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聞多)로 개명),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존왕양이(尊王攘夷) 지도자들을 배출시켜 이후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2006년 9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중 소오카손쥬쿠(松下村塾)에서 공부한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우리 역사와 떼려야 땔 수 없는 인물이다. 토막(討幕)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유신(維新) 후 헌법제정의 중심이 되었던 그는 수상(首相), 추밀원의장(樞密院議長), 귀족원의장(貴族院議長) 등의 초대의장을 역임하였으며 재임 중 청일전쟁(淸日戰爭) 등을 치렀다. 1905년 조선통감에 취임하였으며, 1909년 하르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된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곳에 오면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을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1895년 4월 이곳에서 중국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인한 강화 조약이다. 청은 조선의 독립을 확인하고, 군비 2억 냥을 배상하며,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와 대만, 펑후 도(澎湖島)를 일본에 할양하는 따위를 내용으로 하는 조약이다. 이에 따라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했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할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으며, 랴오둥 반도의 뤼순[旅順], 다롄[大連]뿐 아니라 타이완까지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열렸던 건물. 내부만 리모델링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이 있다.

 

이처럼 야마구찌현(山口縣)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와 일본 관계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과거 몇 번 들렸을 때는 규슈로 가기 위해 스쳐만 간 지역이었다. 이번에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둘러 볼 수밖에 없었다. 늦게나마 찾았지만 역사기행이 아니라 탐매를 주목적으로 시모노세키에 발을 들인 것이다.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의 매화

 

배를 내려 먼저 들린 곳이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이다. 일본의 81번째 천황 안토쿠 천황(安?天皇, あんとくてんのう)을 배향하기 위하여 건립된 곳이다. 안토쿠 천황은 지쇼 2년(1178년) 11월 12일 출생, 약 한 달 뒤인 12월 15일 태자가 되었다. 지쇼 4년(1180년) 4월 22일 3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하였으나, 정치적 실권은 외조부인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쥐고 있었다.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배치도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 입구 토리이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 입구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입구 용신출현도

 

1183년 겐파이 전쟁 당시 나가노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가 교토로 진격해오자 삼종신기를 지니고 외조부 다이라 씨 일족과 함께 교토를 떠나 피신했다. 그 후 다자이후(太宰府)에 갔다가 야시마(屋島)에 이르렀고, 여기에 행궁을 설치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파견한 미나모토 씨 군대가 다이라 씨를 야시마 전투에서 격파하자, 또 한 차례 해상으로 도주하였다. 결국 1185년 3월 24일, 칸몬해협에서 펼친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い ,だんのうらのたたかい)에서 다이라 씨가 패전하면서 일족은 멸망하였고, 당시 8세였던 안토쿠 천황도 이때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은 겐지(源氏)와의 전투에 패한 헤이케(平家)와 어린나이에 희생된 안토쿠 천황을 모시고 있는데, 매년 5월에는 센테이사이 축제가 거행된다고 한다.

단노우라 전투도

안토쿠 천황 연기 회도”(安?天皇?起??) 아카마 신궁 소장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보물전 전시 병풍-하얗게 분칠한 여인의 얼굴이 유난히 크다. 당시 미인상.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보물전 내부 모습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석등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 석탑

 

이곳에도 매화가 있었다. 신궁 본전과 석등 사이에 있는 수양매였다. 대부분 꽃은 져버렸고 몇 남아 있는 것으로 복엽 홍매임을 알 수 있었다. 고매(古梅)는 아니었지만 위치로 보아 이곳 신궁에서 중요시하는 나무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의 매화 

아카마 신궁(赤間 神宮)의 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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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4.04 09:44

    첫댓글 사진이 제대로 안보입니다. 저에게는 .............^_^

  • 작성자 12.04.04 10:02

    나의 컴퓨터에서는 잘 보이는데요!

  • 작성자 12.04.04 10:02

    나의 컴퓨터에서는 잘 보이는데요!

  • 12.04.04 20:37

    이제는 잘 보이네요~~

  • 12.04.04 18:08

    아카마 신궁의 매화는 만첩수양매화인가 보네요?

  • 작성자 12.04.04 18:33

    예 그런 것 같습니다.

  • 12.04.04 21:34

    넘 많은 것을 봐서 멍합니다..차근차근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작성자 12.04.05 09:15

    미안합니다. 평생 글만 쓰고 살아온 놈이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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