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八 十 三 歲 翁 蒼 波 萬 里 中
팔 십 삼 세 옹 창 파 만 리 중
一 言 胡 大 罪 三 黜 亦 云 窮
일 언 호 대 죄 삼 출 역 운 궁
北 極 空 瞻 日 南 溟 但 信 風
북 극 공 첨 일 남 명 단 신 풍
貂 裘 舊 恩 在 感 激 泣 孤 衷
초 구 구 은 재 감 격 읍 호 충
여든 셋 늙은 몸이 푸른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일까 세번이나 쫓겨난 이도 또한 힘들었을 것인데
대궐에 계신 님을 부질없이 우러르며 다만 남녘 바다의 훈풍만 믿을 수밖에
담비 갖옷 내리신 옛 은혜 잊으니 감격하여 외로운 충정으로 흐느끼네
송시열 글씐바위는 보길도의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에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말한다.
이곳은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 송시열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1689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이곳에 상륙했을 때 임금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마음을 한 시로 바위에 새겨놓은 곳이다.
보길도의 글씐바위를 답사하면서 비문에 새겨진 번역된 글을 되 새기면서 그시절을 잠시 생각해본다.
옛날도 오랜 옛날 당시는 사람의 수명이 짧아 회갑만 넘겨도 상 노인으로 대접받던 시절이다.
그당시 80이 넘는 일생을 살며 항상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삼천 번 이상 나온다는 분이지만 우암의 삶은 참 파란만장 하기만 했다.
숙종 15년에 경종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83세의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를 간다.
유배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누릴 것 다 누렸지만 80세가 넘어 또 귀양을 가는데 어찌 신세를 한탄하지 않겠는가?
글씐바위 앞에 가면 바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우암의 서글픈 모습이 떠오른다
보길대교를 건너면 삼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좌회전을 하면 곧바로 보이는 보길면 소재지가 보인다.
이곳을 지나서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면 보길도 중리해수욕장이 보이며,
이곳을 지나 4km쯤 가다보면 보길도의 동쪽 끝 마을에 도달하게 된다.
이곳에 도착해서 나름대로 생각하기는 어느쪽으로 길을 들어서도 해안도로를 따라서 보길도를 한바퀴
일주할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보길대교를 건너서 우회전하면 보죽산 아래에서 도로가 끊어지고,
좌회전을 하면 중리해수욕장을 지나면 길이 끊어져서 더이상 갈수가 없었다.
이곳은 중리해수욕장의 바로 동쪽 끝 마을이며 산길을 따라서 해안가로 나가면 막다른 절벽이 나타난다.
해안 절벽 암석을 따라 우측으로 30m 가면 깍아지른듯 서있는 커다란 암벽에 우암 송시열의 글이 새겨져 있다.
0 우암 송시열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아명은 성뢰(聖賚).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49년 효종의 즉위로 다시 벼슬에 나와 장령(掌令)·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집의(執義)를 지내면서 13개 조항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攻西派)의 김자점(金子點)이 영의정에 오르자 낙향,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김자점 몰락 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우며 집의·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윤휴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장대로 1년설을 관철하여 남인이 실각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정쟁(政爭)의 빌미가 되었다(제1차 禮訟論爭).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어 숭록대부(崇錄大夫)·좌참찬 등을 지냈으나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재직 중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다. 1668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1671년 다시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재차 논의되자, 예론(禮論)에 따라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이 채택됨과 함께 예(禮)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하였다(제2차 禮訟論爭). 그 뒤 덕원(德源)·웅천(熊川)·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1684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그 뒤 제자인 윤증(尹拯)이 윤선거(尹宣擧)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의 관계로 인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제간의 의가 깨졌다. 이로써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났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다가 1689년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뒤 신원되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예론에도 밝아 복제(服制)와 중요한 국가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2차례의 예송논쟁을 겪기도 하였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강직하여 교우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그것이 붕당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서 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을 이끌어갔다. 지은책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이 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에 배향되고, 화양(華陽)·매곡(梅谷)·구봉(龜峰)서원 등 전국 7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전남 완도군 보길도에 있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유배생활중 자신의 회포를 담은 시를 지어 새겨놓은 바위 -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는 효종과 현종때 좌의정까지 지낸 대학자로 사색당파중 서인(노론)의 원로급으로 당파싸움에 휘몰려 유배생활을 많이 한 경력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숙종이 장희빈 소생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반대하였다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가 국문을 위해 서울로 소환되던중 도중에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곳에 있는 암각시문을 보아서는 최종 유배지가 제주도가 아니라 보길도가 아닌었는지 모를 일이다. 훗날 숙종은 우암에게 사사형벌을 내린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고 우암의 몰후 수십년에 걸쳐 우암의 덕을 크게 칭송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게 되어 나라에서 문정이란 시호를 내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시문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말 한마디가 무슨 큰 죄인지...." 유배를 보내 사약까지 받게 되었으니 이게 당시의 당파싸움에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남인과 서인의 격렬한 싸음은 실권을 어느 파가 쥐는냐에 따라 대옥사와 사사 아니면 유배형벌이 떨어진다. 충신과 역적은 종이 한장 차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유능한 관료치고 유배형벌을 안받아 본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시기와 중상모략이 얼마나 난무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게 우리 조상들의 권력다툼의 모습이었다. 군주는 힘이 있어도 힘을 쓸 수 없고 주위의 실권자들의 주장에 쫓아 정치를 해야 했던 암울한 정치사였다고 할 것이다. 대역죄인인지 충신인지를 분별 못하는 무능한 군주가 한 둘이 아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