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뒷골목 풍경
-잊혀진 조선사람들의 역사를 위하여
들어가는 글
- 수만 백성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
2007년도 네티즌 검색 순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유명 정치가나 잘 나가는 연예인도 아니고 어느 돌팔이 한의사 할아버지라고 한다. 신문 기사에 난 제목은 “무면허 의술로 생명을 구한 할아버지가 죄인일까, 신의(神醫)일까.”로 “면허 없이 환자들을 진료해 13억9800만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기소된 장병두(91) 할아버지를 두고 탄원운동이 전개되면서 26일 실시간검색 1위를 순식간에 탈환했다.”는 내용이다.
한의사 자격면허증이 없는 사람이지만 제도권 의료체계 내에서 불치로 판정받은 환자들 말끔하게 치료해주었으니 명의가 틀림이 없다고 혜택을 본 많은 사람들이 법의 처벌에서 면제를 해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탄원을 하는 모양인데, 탄원서를 내는 사람들의 면면이 대학 교수 등 이른바 식자 층이 많은 것도 사건의 내용과 이후 전개를 흥미롭게 한다.
사건의 진위를 떠나 자격이라는 것과 자격이 없음에 대해 그 차이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장구한 세월을 민족이란 이름으로 뭉뚱그려 추상화시켜 버린다면 양반/남성의 목소리에 가려 있던 상놈과 노비와 여성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 줄 것이며, 서북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은 어디서 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것처럼 소위 자격증이라는 제도틀에 가려져 실제 실력을 발휘하고도 묻혀지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까. 이 사건도 어쩌면 시중의 제도권 의사들 보다도 실제 더 실력이 있고 명실상부한 명의로 추앙받을 사람이 욕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어떤 교훈적, 목적의식적, 기념비적 역사관을 믿지 않는다’는 강명관 지음의 <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존재했던 다양성과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오로지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대상을 왜곡시킴으로써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권력”에 의해 지워져 간 많은 뒷골목 인생들, 소위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에 대한 글이다. 그 중에 수많은 백성을 살린 이름없는 명의들에 대한 대목이 있어 오늘날 명의 사건과 더불어 교감할 수 있어 옮긴다.
오늘날 자본주의 그것도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돈이 없으면 제대로 의료 혜택도 받지 못하고 죽어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약은 사람의 병을 고치자고 만든 것이고 의사는 아픈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공부를 했건만 돈이 없으면 약이고 의사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더군다나 한미FTA가 발효가 되면 감기의 약값으로 10여만 원에 이른다고 하니 한숨만 나온다. 이런 현실에 사람의 목숨이 먼저인가, 돈이 먼저인가를 묻는 질문자체가 쑥스러울 뿐이다.
조선의 이름 없는 명의들
이는 옛날 조선 시대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반 민중들은 의료혜택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내의원 기관은 임금의 약을 조제하는 기관으로, 일반 백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전의감이라 하여 대궐 내에 필요한 약재를 공급하거나 약재의 하사를 관장하는 곳도 있었으나 이 역시 왕실에 속한 의약기관이다.”
그렇다면 일반 백성은 어디에서 어떻게 치료를 받았을까? “혜민서와 활인서란 곳이 있다... 혜민서는 ”백성에서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고 활인서는 사람을 살리는 관청이다.” 이렇게 민중을 위해 대표적인 의료기관이 있었지만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이런 기관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지방에는 이런 기관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있던 의료기관을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을 것이고 지방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민중들은 의료혜택에서 제외되어 있었을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암담한 상황에서 민중을 위해 의료 활동을 벌였던 민중의들이 있었다고 한다. “양반 중심의 조선 사회는 의원을 천시하였다.” 의원들이 아무리 학식이 높고 똑똑해서 조선시대 신분 질서상 의원은 양반 아래였다.
조선 후기 지식인인 이규상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대저 역학이나 의학에 모두 학이란 말이 붙는 것은 글을 알아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글을 알면 지식이 생기는 법이니, 사역원이나 내의원에 속하는 사람 중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많다.(중략) 의학과 역학은 참으로 인재의 큰 창고인데, 사대부들은 역관 벼슬을 멀리하기 때문에 그 방면의 사람을 들을 수 없으니, 매우 한탄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개탄스럽게도 의관과 역관은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권력의 정상부에 오르지 못하고, 장병두 할아버지처럼 제도권 의료계에서 포기한 불치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말끔히 낫게 하고서도 법정에 서는 일이 있다니 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답답한 현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사실 드라마 <허준>에 등장하는 허준도 조선시대의 기록은 한 줌도 되지 않고 “상상력에 근거할 뿐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중에 이 책의 저자는 토막 토막의 자료를 찾아내어 진정한 의료행위를 행했지만 묻혀 있었던 이름 없는 명의들을 찾아 기술하고 있다.
의원 가문도 아니지만 의업의 정도를 실천한 민중의, 조광일. 그는 즉시 효험을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고 할 정도의 명의였지만 돈을 밝히지 않고 궁박한 백성들의 병을 고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말을 고치던 마의에서 종기치료의 신기원을 연 박광현은 나중에 임금의 병을 고치는 어의가 되었지만 “병자를 보면 귀천과 친소를 가리지 않았다. 부르는 이가 있으면 즉시 달려 갔고,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기량을 다 쏟아 환자의 상태가 나아진 것을 보고서야 그쳤다”고 한다.
이렇게 백광현이 종기의 외과적 치료술을 개발했다면, 고약으로 유명한 피재길이 있다. 피재길은 정조의 작은 종기를 고쳐 주고 일약 벼락 출세를 했는데 정조실록에는 “상의 병환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지방의원인 피재길이 단방의 고약을 올렸는데 즉시 신기한 효력을 내었기 때문이다. 재길을 약원의 침의에 임명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17년 7월 16일”라고 적혀 있다.
종기로도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시절에 전염병은 그야말로 홀로코스트였다. “전염병은 조선 후기 민간인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와중에 정부가 아닌 민간인이 전염병 구제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조실록 16년 2월 28일 기록에 의하면 정조 대에 황해도 재령의 김경업이 전염병을 걸린 사람을 거의 1천 명이나 주었다고 하여 특별 표창을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영조 대에 활약했던 이헌길은 의원 가문 출신이 아니지만 나름대로 공부를 하여 의술을 깨우친 사람이다. 이헌길은 “서울에 갔다가 천연두가 돌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이헌길은 그들이 불쌍하였으나 상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묵묵히 돌아섰다. 상중에 이런 궂은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다 홀연 깨달았다. ‘나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을 가지고 있는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모른 체하고 떠나간다는 것은 불인(不仁)한 것이다”라고 하고 예를 중시하는 유교사회 속에서 상중인데도 불구하고 어려운 민중들에게 의술을 배풀었던 것이다.
의술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일부 하위 계층에게 그런 면이 없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공식 의료기관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백성들이 질병을 이겨내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민중의 의료 혜택에서 거의 제외돼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를 보완하여 가여운 민중들의 병을 치료해 준 이들이 바로 위에 기술한 민중의들이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소위 자격증이 없는 의사들이었다. 요즘에도 의료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그림의 떡으로 무력하게 죽어 가는 이들이 많다. 우리나라는 덜하겠지만 제3세계 국민들은 오염된 물로 인해 죽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한다. “제3세계 국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다면 사망률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이렇듯 21세기에는 의술이 모든 사람들에게 질병이나 그러한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의료시스템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사람의 목숨이 돈보다 더 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슈바이처 박사 같은 이, 테레사 수녀 같은 분들이 그리워지게 만드는 독서였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많은 좋은 의사들이 있을 거란 믿음도 가져 본다.
참고자료
<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푸른 역사,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