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한창인 날 순흥으로 가는 길엔 벚꽃이며 복숭아 꽃, 진달래가 산천(山川)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새롭게 잘 조성된 봉서루(鳳棲樓)의 마당에 들어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낙락장송(落落長松) 소나무며, 백옥 같은 목련꽃, 그리고 푸른 하늘과 봉서루 추녀 끝에 걸린 흰구름이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같다.
앞에 소복히 쌓인 봉황(鳳凰)의 알 같은 둥근 자연석 돌무더기 또한 누각과 조화롭게 자리를 잡았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던 봉서루도 이제 정든 고향에 터전을 잡아 우뚝하게 서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봄 햇살에 여유로워 보인다.
봉서루(鳳棲樓)는 영남의 3대 루인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보다 앞서 건축된 누각으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순흥 사람들의 심성이 녹아있는 누각이다.
《재향지》의 <고적조>에는 “고을 남쪽 3리 쯤에 있었다. 지금에 옛 터가 있는데 주춧돌 잔해가 완연히 남아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 내용으로 보아 1800년대 중반에는 이미 봉서루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의 봉서루는 그 이후에 옛터에 새롭게 건립되어 그 자리를 지키다가 순흥소학교의 화재로 지금의 면사무소 자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옛 위치에 건립되었다.
정재(鄭載)의 봉서루 시에서 “넘실 넘실 흐르는 남쪽 시냇물, 널찍하게 펼쳐진 뽕나무 밭” 이라 했다.
당시 봉서루에 올라 바라본 순흥의 모양이었다. 참으로 묵가적이고 토속적인 자연의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새롭게 순흥면 지동리 옛 터에 들어 선 봉서루의 평면구성은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굴도리 중층건물이다.
혁명(革命)을 꿈꾼 선비 고을 순흥
순흥은 혁명(革命)의 고을이다. 수양대군의 정권 탈취에 맞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순흥 사람들이 일으킨 정축지변이 그러했고, 모순된 통치권력을 쓸어 버리겠다고 야망을 불태운 정희량(鄭希亮)이 그러했다. 조선시대엔 역향(逆鄕)의 고을이라는 오명을 안고 살아왔지만 실상은 충절과 의리의 고을로 시대를 이끌어 왔던 올곧은 고을이었다. 굴절된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순흥 사람들의 기개 만큼이나 그에 수반된 희생의 폭은 길고도 넓고 깊었다.
광주 민주화 항쟁이 채 20년도 안되어 신원복권이 된 것에 비한다면 순흥의 정축지변은 220년이 넘어서야 겨우 폐부의 고통을 씻을 수가 있었다. 순흥은 혁명의 아픔을 아는 혁명의 성지이다.
봉서루(鳳棲樓)는 그런 순흥의 혁명의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 보았다. 봉서루는 영주의 대표적인 누각이며 순흥을 상징하는 누각이다. 봉서루가 들어 선 순흥은 소백산에 둘러 싸여 있고 죽계를 품고 있어 옛부터 사대부(士大夫)들이 살만한 곳이라고 했다.
《죽계지(竹溪志)》에서 순흥을 “죽계의 냇물이 동쪽을 감돌아 흐르고 소백산이 오른쪽에 솟았으며, 산은 높고 물은 맑아 봉황이 날고 용이 서린 형국”이라 했다. 《여지도서》 순흥부 ‘산천조’에는 ‘비봉산은 순흥부의 진산이며 소백산으로부터 파출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봉산(飛鳳山)은 소백산에서 떨어진 지맥(支脈)이 기복(起伏)을 반복하며 뻗어내리다가 순흥의 뒤에 다다라, 도사려 솟은 형세가 봉황이 날아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비봉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순흥은 고을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박물관이다.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의 현장인 금성단과 압각수 그리고 순흥향교, 벽화고분, 서낭당, 어숙묘, 죽계구곡, 사현정, 세연지 등 수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 순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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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만남의 장소
봉서루는 순흥이라는 이름과 함께 수 백년을 동고동락했다. 수 백년 동안 순흥 사람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 온 이웃이자 동료였다. 봉서루는 이별의 아쉬움과 만남의 기쁨이 눈물이 되던 곳이었다. 당시 순흥을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이 봉서루를 지나야했다. 영주 출신이었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도 이 곳 봉서루에서 당시 영주 군수였던 하륜(河崙)과 이별하며 그 아쉬움을 2편의 시로 남겼다.
옥경으로 돌아가는 임 보내나니 구름 끝의 저 달을 임께 주노라 구름끝이 멀다고 말하지 마오 술 잔속에 곧장 비추나니 바라노니 임이여 이 잔을 마시오 내 마음이 달과 함께 조촐하다오 구름떼 날아들어 그늘이 지니 맑은 빛이 중도에 먹히고 마네 걸음을 같이하는 사람없으면 묻힌들 뉘라서 아깝다하리 이별에 다다르니 다시 값져라 달을 보며 행여 서로 생각하세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보내다.-
타향이라 송별을 나누는 곳은 장정이라 해 저물 무렵이로세 뜬 구름과 함께 멀어만지니 나그네는 어디로 향해가는지 말이 고되어 시도 짓기 어렵고 술떨어져 좌석을 자주 옮기네 추워지기 쉬운건 가을날이라 좋이가서 내마음을 위안해 주게 -순흥의 남정에서 하 대사성 윤을 송별하여 서울로 보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가끔 순흥을 찾아 이 곳 봉서루에 올라 휴식을 취하곤 했던 모양이다. 퇴계의 ‘봉서루’ 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필마로 봄 바람에 옛 성을 조상(弔喪)하니 성의 먼 못에 오직 야인(野人) 밭가는 것 보았노라 당일의 번화한 일 알고자해서 안후(근재, 안축)의 이별곡조 소리 들었네.
봉서루, 다시 옛 터에 우뚝 서다
봉서루는 처음에 고을 남쪽 5리(구, 순흥초등학교 터)쯤 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1934년 쯤 봉서루 곁에 있던 소학교(순흥초등 전신)가 불타면서 봉서루는 지금의 순흥면 사무소 마당으로 옮겨 지게 되었다. 그 곳으로 옮겨진 봉서루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벽을 막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지난 날 웅장한 루의 모습은 사라지고 말았다.
봉서루는 전설에 의하면 순흥의 진산 비봉산에 사는 봉황이 날아가면 고을이 쇠퇴해 진다하여 고을 남쪽에 누각을 지어 그것을 방지하고자 세웠다 한다. ‘봉서루’ 라는 현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지 못하고 ‘흥주도호부아문’이라는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순흥 사람들은 누각의 앞쪽에‘봉서루’라는 현판을 걸어 봉황을 맞이하여 깃들게 하였다. 또한 뒤쪽에는 봉황을 맞이한다는 영봉루(迎鳳樓)의 현판을 걸었다. 봉서루는 여말선초 흥주(興州, 순흥)의 남정(南亭)으로 한양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의 배웅장소로 널리 이용되었다.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던 봉서루가 신축 면사무소가 건립된 후 옛 모습을 찾았으나 누각의 노후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지동리 옛 터)로 옮겨 짓게 되었다. 봉서루는 비봉산 봉황의 보금자리로 순흥 사람들에게 널리 인식되어 왔었다. 지금 봉서루가 들어선 주변에는 알봉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데 이 또한 봉황의 알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봉서루와 알봉
순흥의 진산(鎭山)은 봉황이 날으는 모습을 하고 있는 비봉산(飛鳳山)이다. 봉서루와 알봉(卵峰)에 대한 전설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 지리와 풍수에 능한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순흥 고을의 산천을 둘러보고 “지형으로 보아서는 매우 번성할 수 있는 고을인데, 비봉산 봉황은 날아가려 하고, 고을의 남쪽이 허술함이 흠이로군.”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순흥 사람들이 그 흠이란 것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을 나그네에게 물었다. 나그네는 “남쪽 5리 쯤에 누각(樓)을 세우고 둘레에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고 그 가까이에 알 모양의 봉우리를 세군데 쯤 만들어 두면, 봉황이 날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고, 지형의 허술함도 메워지리니, 그렇게만 하면 이 고을에 운이 열려 큰 인물이 이어날 것이라.”고 일렀다.
이에 고을 사람들은 그 말을 따라 남쪽 5리 지점(지금 지동리)에 누각을 세워 봉서루(鳳棲樓)라 이름하고 둘레에 많은 오동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으며, 누각 가까이에 흙을 둥그렇게 쌓아올려 세군데의 알봉을 만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 봉황의 알인 것이다.
용·거북·기린과 함께 상서로운 새로 상징되는 봉황은 본래 오동이 아니면 깃들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샘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고 알려져 오고 있으며 ‘봉황이 깃든다’는 뜻으로 누각의 이름을 봉서루(鳳棲樓)라 했다. 순흥 사람들은 봉황이 깃들도록 오동나무 숲을 가꾸고 봉황의 알까지 만들어 봉황이 다른 곳에 마음두지 않고 이곳 순흥에 안주(安住)하게 하였다.
봉서루는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누각으로 이 곳 순흥이 낳은 고려 후기의 명현(明賢) 근재(謹齋) 안축(安軸)이 그 중영기(重營記)를 지었으니, 창건년대는 그 보다 훨씬 이전일 것으로 추측된다. 봉서루를 짓고 나니 고려 후기에 들어 순흥에서는 역사에 빛을 남긴 우뚝우뚝한 인물들이 무리로 이어 났다.
봉서루 오동나무 숲이 있던 자리엔 1720년 초 이후로 허허벌판으로 변하였고 다만 흙을 쌓아 만들었다는 알봉들만이 밭 사이에 옛 모습대로 남아 있을 뿐 오동나무 숲마저 간 곳 없고 부근 논두렁 군데군데에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옛 사연을 지니고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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