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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이제 무법가득분인데요. 거의 앞에 했던 내용과 중복되는 얘기라 빨리 읽고 넘어가겠습니다. 금강경 22분 무법가득분 433쪽이구요. 본래 얻을 법이 없다,라는, 앞에 있는 것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셨다는 것은 곧 얻으신 바가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수보이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작은 법도 얻은 것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 했던 내용과 같은 얘기지요 거지요? 부처님은 무상정등정각을 얻으셨느냐? 그런 것을 따로 얻은 바가 없다. 얻은 바가 있다면 뭔가 한 법을 내세우는 게 되어서, 육조 스님이 말씀하신 한 물건도 없다,라는 ‘본래무일물’이라는 말과도 맞지 않게 되겠지요. 앞의 분에서 이 두 개의 분을 같이 설명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어요.
다음은 이제 23분 정심행선분이구요. 정심행선은 이제 마음을 청정히 해서 선을 행한다, 이런 개념인데. 여기서 선은 앞에서도 나왔듯이 이제 ‘깨어있음’ 이런 것을 표현한다고 할 수도 있구요. 또 다르게는 이 부처님 마음공부, 불법, 이것을 좋은 법이다. 그냥 선법이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뭐 특별히 어떻게 얘기할 만한 뭔가가 없잖아요. 이것이다.라고 할 만한 법이 없다고 하다 보니까, 그런데 또 뭐라고 얘기하지 않으면 안 되다 보니까, 이제 선법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또 선을 행한다. 착한 법.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이 법 이 공부는 차별이 없는 것이지요. 차별이 없는 것 분별하지 않는 것 차별이 없음으로 분별이 없음으로 이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그냥 이름 한 것뿐이지요.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차별이 없는 법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이것이 맞고 저거 틀리고 이건 좋고 나쁘고 하는 차별심이 있으면 분별심이 있으면 그것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법과 법 아닌 것을 차별하고 둘로 나누고 이렇게 분별법이 아니다,라는 그런 소리지요. 그래서 나다,라는 아상. 모든 차별, 분별의 첫 번째가 나와 너를 분별하는 거잖아요. 나다,라는 그런 아상 분별심 그런 게 생기게 되면 곧장 분별이 시작되고. 그런데 나다 너다 하는 이런 분별심,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이 일체 선법을 닦으면,
선법이라는 것은 앞에 제가 얘기한 것처럼 선근이라는 말과도 이어지지요. 뭐 지혜로움, 깨어있음, 쉽게 말해서 선법하면 좋은 법. 선법이다 이래서 좋은 법이다 이러는데, 쉽게 말하면 그거지요. 분별하는 것은 선법이 아니고 분별하지 않는 자리. 내가 분별을 일으키는데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그 이전 자리. 그 자리를 이제 분별하지 않는 자리.
그것은 뭐 깨어있음이라 할 수도 있고. 무분별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혜로운 마음집중이라고 할 수도 있고. 뭐 알아차림이라고도 할 수 있고. 있는 그대로 보는 자리. 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또 아무 일 없는 자리. 또 실상의 자리. 뭐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을 여기에서는 선법이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래서 선법하면은 그냥 좀 쉽게 말하면, 모든 부처님의 말씀, 실천할 수 있는 모든 부처님의 실천행, 뭐 이런 것도 포함한다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것을 따로 이름 지어서 법이다 법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없다 보니까, 여기선 그냥 뭉뚱그려서 선법 이렇게 얘기한 것이지요.
그래서 나다,라는 나다, 너다를 둘로 나누지 않는, 나누는 그런 분별심이 없이 선법을 행한다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런데 선법은 선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법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선법이라고 말하는 데에 더 집착해서는 안 된다,라는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불교가 참 헷갈리게 해놓지요. 불교 경전에서 보면. 교회에 가면은 그냥 오로지 하느님. 간단하고 심플해요. 그냥 오로지 하느님만 믿으면 다 끝나고. 하느님에게 모든 것이 딱 돼있으니까 어느 교회를 가도 다 똑같은 얘기를 하고. 거지요. 방편이 다 하느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미국에 가든, 프랑스에 가도 어느 나라를 가도 어느 교회를 가도 다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을 확률이 높지요. 그런데 불교는 참, 이 부처 열반 해탈을 설명하는 단어부터가 열반 해탈 참나 진아 대아 뭐 본래면목 주인공 불성 뭐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서 또 ‘본래무일물’ 그런 거 없다. 무아 같은 거 없다. 본래면목 같은 거 없다.
그게 또 없다,라는 식으로 또 얘기를 하고. 법을 또 설해서 법을 약간 감을 잡으려 그러면 네가 감 잡을 수 있는 그런 법은 없다.(웃음) 어디에도 이렇게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불교가 참 너무 어렵다, 어렵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우리가 이거를 쥐려고 하니까 어려워요. 쥘 수 있는 게 아닌데 쥐려고 하니까 어렵습니다.
쥐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일어나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그 소리에 내가 개입할 필요 없잖아요. 분별하거나 취사간택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나는 건 그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거기 끌려가지 않으면 되지요.
TV에서 홈쇼핑에서 뭐라고 아무리 꼬드겨도 나는 그냥 그 소리를 그냥 보는 자리. 듣는 자리. 거기 끌려가지 않는 자리에 있으면 거기 끌려가지 않겠지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사 모든 것들에 끌려가지 않기만 하면 분별하지만 않으면 아무 일이 없지요, 거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아무 일이 없다. 한 법도 일어난 바가 없다.
어떤 일도 일어난 바가 없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예요. 모든 일이 다 일어나면서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실제 내가 생각으로 개입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그게 진실이에요. ‘공성(空性)’ 텅 비어서 아무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일어나는데 아무 일이 없어요. 마음대로 일어나라고 하세요.
여러분 인생에 무슨 일이 일어나라고, 마음대로 일어나라고 하세요. 왜냐하면,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냥 이 우주법계가 알아서 움직이는데. 내가 세상을, 태양을 뜨지 않게 하고 내가 비 오는 날, 비가 오지 않게 하려고 애쓰고 그런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비 오는 날은 그냥 비 오는 날입니다. 비는 제가 알아서 제 법칙 따라서 오거든요.
똑같이 남들이 나한테 욕하는 것은 그냥 제 법칙에 따라서 제 입의 법칙에 따라서 욕을 하는 거예요.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하늘의 새는 짹짹거리지요. 구름은 비를 쏟아내지요. 고양이는 야옹 야옹 합니다. 사람은 욕을 합니다.(웃음) 똑같다는 것이지요. 아무 문제 없어요. 그냥 그렇게 그냥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내가 그 욕에 반응하고 ‘욕 한 놈’ 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가지고 화를 내고 이랬을 때만, 그 욕이 그 사람이 나를 공격하는 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깥에는 죄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죄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거예요. 전부다. 이걸 또 뭐 세상의 뭐 정치적인 논리로 막 해석하고, 아우, 제발 좀 이러지 마세요! 이거 진짜 분별심이거든요.
이런 얘기를 하면은 또 어떤 사람들은 그래요. 옛날에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지몽매한 중생들에게 내가 어떻게 해도 다 따라와라. 그냥 받아들여라. 뭐 이런 말로써 이런 거를 막 만들어냈다는 둥하면서 뭐 이런 식의 참, 듣도 보도 못하는 논리를 또 만들어가지고 이러는 또. 우리 머리는 우리 분별심은 정말 무수하게 돌아갑니다. 실제로 그렇잖아요.
실제 여러분 인생에는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아무 일이 없잖아요. 내가 일이 있으려고 마음먹었을 때만 일이 있지. 실제로 아무 일이 없습니다. 맞지요. 거지요. 무수한 소리가 일어나도 내가 해석하지 않고 판단 분별하지 않으면 아무 일이 없습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어요. 원래 사람은 공부를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 있는 게 당연한 진리예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이 없어요. 텅 비어서 공합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거지요. 그게 진리예요. 내가 애쓸 게 없지요. 본래 아무 일이 없으니까 내가 시비를 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과 싸울 필요도 없고 맞다,라고 생각하는 걸 쥐려고 할 필요도 없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걸 버리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내버려 두면 아무 일이 없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그 모든 일에 내가 반응할 건 다하면서도 아무 일이 없는 겁니다. 아들이 “엄마 밥 줘.” 이러는데, 아무 일이 없다.(웃음) 네가 밥을 먹으나 안 먹으나 아무 일이 없다 이러고.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배고픈 아들에게 밥을 주면서, 밥해줄 건 밥해주고 남편에게 반응해주고 말도 해주고 대화도 나누고 다 합니다. 다하지만, 거기 깊이 개입되지 않는 거예요. 아들에게 밥을 해줬는데 내가 정성껏 아이에게 정말 맛있는 거를 어렵게, 어렵게 해줬는데, 그 아이가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어요. 그거는 그 아이에게 달린 문제예요.
내가 그거 가지고 판단할 수는 없어요. 나는 그냥 내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걸 해줬어요. 그런데 아이가 뭐 잔뜩 군것질을 하고 와가지고 “안 먹어” 이러고 “맛도 없네.” 이래놓고서 힘들게 만들어놓은 거를 그냥 며칠을 고왔는데 안 먹는단 말이지요. 그러면 그거는 그 아이가 그렇게 하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그걸 허용해주는 것이지요. 그걸 내가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내가 한 음식은 자식이 맛있게 먹어야 된다. 엄마에게 칭찬도 좀 해줘야 된다. 아, 당신은 참 훌륭한 아내야! 이런 말도 좀 해야 된다. 이걸 기대하면 그때부터 이제 자꾸 거기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일을 만드는 거예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이 자리에는 애쓸 게 없어요.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저절로 일어납니다. 무위법이에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곧 자연 그대로다. 자연 그대로 애쓰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 모든 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애써야지만 삶을 잘 산다? 그렇지 않아요. 아무 일이 없잖아요. 아무 일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진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왜? 아무것도 없는데,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만 할 수 있느냐? 묘유(妙有). 진공 모유(眞空妙有). 참으로 공한 가운데 묘하게 뭐가 있어요? 무위법이 있습니다. 무위법의 진실이 있습니다. 이 자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고. 이것이라고도 하는 이 참된 진실의 자리. 이 묘유가 뭐가 묘유겠어요? 내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게 묘유입니다.
도는 자연 그대로가 도다. 아무 일이 없어요. 아무 일이 없는데 진짜 완전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그냥 ‘공(空)’ 그걸로 끝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냐? 그게 아니지요. 이렇게 새가 짹짹하니까 그 소리를 듣고 있어요. 배가 고프면 저절로 부엌에 가서 뭔가 찾아 먹어요. 배가 부르면 저절로 내가 애쓰지 않아도,
배가 부른데 똥오줌이 나와야 되는데 그걸 애써야지만 그냥 찾아가나요? 그냥 자연스럽게 화장실 가야 되겠으면 그냥 저절로 가게 돼있어요, 우리 몸은. 저절로 가게 돼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뭘 먹을지를 가지고 내가 분별하면 내가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걸 외식하면서 야, 나는 그래도 참 잘 사는 것 같애. 나는 부자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분별을 따라가는 거구요.
또 나는 뭔가가 막 먹고 싶은데 그게 비싸서 못 먹겠어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밥과 김치만 먹을 때 야, 나는 비참해. 이렇게 생각하면 그건 분별을 따라가는 거예요. 그런데 분별을 따라가지 않으면 배고프면 그냥 뭔가를 먹으면 되고. 뭔가를 먹고 나면 그게 충족이 돼요. 충족되고 나면 그냥 그걸로 끝나버립니다. 그건 자연 그대로예요. 자연 그대로의 그대로 내맡기면 됩니다. 그러니까 배고픈 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배고프면 그냥 먹으면 되니까. 무엇이라도 먹으면 되니까.
그런데 더 좋은 걸 먹어야지 하고 분별하기 시작하면 그때 괴로움이 만들어져요. 옷이 필요하면 그냥 옷을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더 예쁜 옷을 입어야지. 남들에게 더 예쁘게 보여야지. 이 생각을 좇아가게 되면 거기서 문제가 생겨요. 그런데 무위법으로서 그냥 자연스럽게 진리로서 살면 입어야 되면 그냥 입으면 됩니다. 입을 게 별로 없으면 그냥 사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살 만한 형편이 안 되면 그냥 안사면 됩니다. 그냥 애쓰지 않고 살아가면 돼요. 배고프면 그냥 먹으면 되고. 뭐 더 좋은 거 찾아가고 나쁜 거를 미워하고 이럴 필요도 없고. 자식이 성적을 나쁘게 받아왔으면 그냥 나쁘게 받아오면 됩니다. 누가 나한테 욕을 하면 그냥 그 욕을 들으면 됩니다. 욕을 듣는 것이고.
그런데 얘가,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으면 같이 맞받아쳐서 싸우면 되는 것이고. 왜냐면, 누가 나를 푹 찔렀는데 내가 반응도 안 하는 게 그게 부처냐? 반응도 안 하는 게 부처가 아닙니다. 그냥 자연 반응이에요. 자연 반응. 누가 나한테 한 대 때리면은 나도 모르게 그냥 확 나가는 게 자연 반응 아니겠어요?
화도 안 내는 게 부처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냥 저절로, 저절로 일어나고 있어요. 무위법으로서. 그러니까 이걸 내가 나라는 아상이 있으면 그게 나오지 않습니다. 나라는 아상을 일으키지 않고, 나다 너다 하는 분별을 일으키지 않아도, 더 좋은 것 더 나쁜 거를 분별해서 좋은 건 취하고 싫은 건 버리려고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삶은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삶은 저절로, 저절로. 절로, 절로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저절로 이어지고 있는 이 삶에다가 내가 나다,라는 생각을 넣어서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 내가 저렇게 살고 있어. 내가 성공했어. 너희들보다 내가 더 잘 살았지. 이런 식의 해석을 붙이고 있는 거예요. 그냥 잘 살고 있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주인공을, 갑자기 내가 그 주인공을 나와 동일시해가지고 그 영화 주인공을 나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영화 속 주인공은 제 시나리오대로 가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사는 것처럼 착각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거예요. 그것처럼 이것은 내가 아닙니다. 이 몸뚱아리도 내가 아니고, 이 마음도 내가 아니고,
생각 느낌 감정도 내가 아니고, 남들이 욕했을 때 반응하는 이게 내가 아니고, 이 몸뚱이를 왔다 갔다 따라가는 그것이 내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삼라만상 모든 것이 일어나는 그 바탕이랄까요? 아무 일 없는 자리. 그냥 텅 빈 아무 일 없는 자리. 그러나 활활 발발하게 이 소리가 들리면 소리를 듣고. 눈이 있으니까 눈앞에 뭔가가 있으면 보고.
어떤 인연이 부딪치면 인연 따라 반응하고. 감정도 일으키고 생각도 일으키고 숨도 쉬고. 방에 오면 잠도 자고. 들숨과 날숨을 쉬는 것이, 밤 되면 자고 아침 되면 일어나는 것이, 봄여름 가을 겨울과 뭐가 다르지요? 이건 나고 봄여름 가을 겨울은 세상인데요? 분별하지 않으면 봄여름 가을 겨울이 왔다 가는 것과 내 인생이 왔다 가는 것, 내 들숨과 날숨이 왔다 가는 것 똑같습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예요. 그냥.
내 거다 네 거다 이런 분별을 하니까 거기서 나다,라는 게 창조되는 것일 뿐이지. 생각으로 우리는 무수히 많은 세상을 만들어내고. 자기가 생각하는 세상, 자기가 창조하는 순간 분별로써 만들어낸 생각, 그 생각의 세계가 진짜라고 느껴요. 생각너머의 진실을 얘기하면, 그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을 손가락질하고 욕합니다. 자기가 분별로는 이해가 안 되니까.
이 세상이라는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는 한국사를 배웠잖아요. 세계사도 배웠습니다. 그 세계가 이렇게 딱 정해져 있는 세계가 있어서 그 세계 속에 내가 아빠 엄마 태속에서 물러 받아서 그 세계에 갑자기 딱 태어난 내가 생겼다. 그래서 이렇게 한 몇 십 년 살다가 내가 죽는다. 내가 죽더라도 세상은 계속된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게 내 생각입니다. 그게. 그러한 생각을, 그런 역사를 진짜 살아봤습니까? 내 생생한 내 경험으로 봤을 때 내 체험으로 봤을 때 그런 역사가 진짜 있었습니까? 여러분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무수히 많은 그 역사가 진짜 있었습니까? 일제시대가 진짜 있었고. 조선시대가 진짜 있었느냐? 내가 진짜 경험해 봤느냐?
그런 생생한 세상이라는 실존이 진짜 있고, 내가 거기 들어갔다 나오는 게 아닙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내가 분별할 때 세상이 창조되는 거예요. 분별할 때 눈을 뜰 때 세상이 창조되는 것이고. 내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거지, 그런 세상 속에 내가 들어갔다 나오는 게 아닙니다. 더 진실하게 말한다면,
참나라는 말을 굳이 한번 써본다면 이 자리를 참나라고 써본다면 여러분의 진정한 나, 진정한 자아, 진정한 참나는 이 몸뚱이가 아니고, 이 몸뚱이가 나라고 생각하니까 이 세상이라는 곳에 몸뚱이가 들어가서 살다가 죽었다. 세상을 살다가 간다. 이러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이지. 진짜 나는, 참나는 몸뚱이가 아닙니다. 몸뚱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바탕입니다.
몸뚱이가 온 자리. 몸뚱이가 갈 자리. 그런데 이 몸뚱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을 때는 이 몸뚱아리만 몸뚱아리가 아니에요. 이 몸뚱이는 그저 인연 따라 생기고 사라지는 생멸법입니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 내가 나고 내 바깥에 있는 건 세상이야,라고 분별했으니까 그게 둘로 나뉘는 것이지. 이 몸의 생사와 이 우주의 생사가 똑같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달과 별과 구름이 모든 것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들이 그냥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거예요. 어디서 생겨나고 사라집니까? 어디에서 왔다 어디로 가나요? 모든 파도는 바다에서 하나의 바다에서 생겨난 파도에 불과해요. 특정한 파도 하나를 이건 나야. 저 파도는 우주고 저 파도는 빌딩이고 저 파도는 세상이고 저 파도는 미국이고 이쪽 파도는 한국이야. 이건 내 생각입니다.
우리는 무수히 많은 파도가 일어나도 오로지 하나의 바다에서, 바다에서 왔다가 바다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스스로 “너는 바다야”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너의 참나는 바다지 물결이 아니야”라고 얘기해도 “무슨 소리냐? 나는 물결이야” “나는 바다가 되고 싶은 물결이야” “나는 부처가 되고 싶은 중생이야” “나는 부처가 되기 위해서 애써야 돼” 애쓸 필요 없이 이미 물인데. 이미 바다인데.
이미 바다라고 아무리 얘기해줘도 난 절대 바다가 아니야. 나는 중생이라 바다가 돼야 돼. 그래 생각하는 것이지요. 즉 이 바다가 진짜 여러분의 참나이지. 참 자아, 참 진정한 성품이지. 이 몸뚱이가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이 세상도 전부다 여러분이라는 참나 위에서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위에 여러분이 등장했다 퇴장하는 게 아니고. 여러분이라는 참나 위에 세상이 등장했다 퇴장하는 거예요.
이 우주가 여러분이라는 진정한 참나 위에 생겨났다 사라지는 겁니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이 세상 속에 어떤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하나의 개체 하나의 육체를 지닌 이 나약한 개체로 묶어놓습니까? 내가 마음으로 이게 나야,라고 묶어놓기 시작하면 그게 내가 돼버려요. 그렇게 제한돼버립니다. 축소돼버려요. 내가 그렇게 축소시켰기 때문에.
나라는 진정한, 진정한 본래면목은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부모에게서 몸을 받아온 이전에 본래면목이 무엇이냐? 죽고 나서 돌아갈 자리가 어디냐? 한 생각 일어난 자리가 어디냐? 그게 바로 여러분의 진정한, 진정한 본성의 자리이다. 본래 자리입니다. 거긴 아무 일이 없습니다. 사실은.
그 바다의 자리에서는 무수히 많은 일이 있지만 무수히 많은 파도가 치지만 사실은 바다로 보면 파도가 아무리 친들 그게 뭐가 친 거예요. 바다에선 아무 일이 없습니다. 파도 입장에서는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지요. 일어났지만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무수히 많은 일이 일어나도 사실은 일어난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지금 이 자리.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리. 소리가 생멸하는 자리. 보이는 모든 것들이 등장 퇴장하는 그 자리. 나라는 존재가 오고 가는 자리.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왔다 가는 그 바탕. 그게 있다,라는 게 확실하잖아요. 본래 아무 일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리고 한순간도 숨이라는 게 멈춰지지 않아요. 내가 애쓴 적이 없는데도.
내가 숨 쉬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제 혼자 알아서 들어오고 나가고 있단 말이에요. 모든 것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연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가 막 애써야지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저절로 이렇게 일어나고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여러분의 진정한 본래 모습이고 본성이지.
나라는 이 육신에 나를 한정시키면 필연적으로 나라는 존재는 잘나거나 못난 사람, 인물이 좋거나 나쁜 사람,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 아프거나 건강한 사람, 능력 있거나 능력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라는 의식에 제한되는 거예요. 내 스스로 만들어낸 그 의식에 스스로 제한되고 스스로 사로잡혀서. 그리구 세상이 만들어 놓은 공업에 또 사로잡히고. 그걸 진짜라고 믿고.
이 집단 무의식이라는 게 무섭습니다. 집단적으로 이게 옳아,라고 해놓으면 그냥 그게 옳은 게 돼버리는 거예요. 진짜 옳고 그른 건 없는데.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살이 찌면 찔수록 미인이라고 그러잖아요. 실제 그 아프리카 부족 남자들은 뚱뚱한 여자를 보면 너무나도 아름답다,라고 집단적으로 다들 그렇게 굳게 믿고 있다,라는 것이지요.
실제 그런 사람을 보면 사랑에 빠진다는 거지요. 우리나라처럼 홀쭉한 걸 그룹 같은 친구를 보면 어! 저렇게 못난 사람을 누가 좋아하냐고, 그럴 수도 있는, 그런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거지요. 그걸 굳게 믿고 사는 거지요, 그 사람들은. 진짜 옳고 그른 게 없으니까 그게 가능합니다. 정해진 뭔가가 없기 때문에.
그냥 우리가 분별로, 개인적인 분별이 있지요. 또 가족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가족 공업이 있어요. 공업. 가족끼리만 공유하는 어떤 가치가 있습니다. 다른 가족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 가족끼리만 공유하는 가치. 우리 지역에서 공유하는 가치. 우리나라가 공유하는 가치. 그게 하나의 공업이거든요. 그런데 그 공업도 텅 빈 거예요. 실체가 아닙니다.
내 개인적인 업만 실체가 아닌 게 아니라. 그래서 그 어떤 것도 실제 하는 뭔가가 없습니다. 아무 일이 없어요. 다 일어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내용물을 따라갈 게 아니고, 어떤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소리가 좋은지 싫은지, 나한테 도움이 되는지 나쁜 건지,
그 내용물을 따라가지 않고 분별해서 따라가지 않고 해석해서 따라가지 않고 그냥 아무 일 없는 자리에 있으면 그게 바로 진실의 자리이고. 실상의 자리, 아무 일 없는 자리입니다.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아무 일 없이 살 수가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광대무변한, 그 어디에도 걸릴 필요 없는 진실이 여러분의 실상입니다.
그리구 이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그 어떤 거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어요. 이 세상에 끌려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나를 화려한 걸로 유혹한다 할지라도 그 바탕에 무엇이 있는지를 안다면, 아무리 크고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오십 보 백 보. 물거품이, 화려한 물거품과 작은 물거품의 차이일 뿐이지 거기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문득 든 생각. 이렇게 한결같은 말씀을, 이렇게 오래동안 듣고 읽고 보고 했으면서도 아직도.. 저는,
'맞을까? 그럴까?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다른 의미? 뭐지?'
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처럼 법문을 듣는다면 크나큰 축복일거 같아요^^ 늘 감사드립니다♡